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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Seo 님의 서재입니다.

세기말 소년

웹소설 > 자유연재 > 현대판타지

EdwardSeo
작품등록일 :
2022.05.11 16:31
최근연재일 :
2023.03.23 00:42
연재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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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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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184

작성
22.06.10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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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022. 2장 12화

DUMMY

2장




12화





[ 과거 회상 : 라울과 크리스틴의 첫 만남 ]





그날,

재즈클럽에서 구스타프는 필리베르의 제안을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필리베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필리베르는 여러 차례 재즈클럽을 찾아와 구스타프를 설득했다. 그리고 결국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구스타프는 옛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따사로운 남풍(南風)에 벚꽃이 흩날리던 1975년 4월의 어느 날. 구스타프 부녀(父女)는 샤니 가(家)의 저택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열일곱 살 소년 라울의 가슴속에도 벚꽃이 흩날렸다.

라울은 백국(白菊)처럼 청초한 크리스틴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소년은 소녀를 보고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다고 생각했다.



깨끗하고 새하얀 얼굴에 토끼처럼 동그란 눈.

오똑하고 반듯한 콧날과 윤기가 도는 싱그러운 입술.

올해 열여섯 살이 된 크리스틴은 어느새 숙녀 티가 나기 시작했다.




필리베르는 부녀(父女)에게 저택 1층의 방 두 칸을 내어 주었다. 오랜 시간 창고처럼 사용하던 방이었지만, 여타의 싸구려 여관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채광은 물론이고 평수도 넉넉했다. 실내는 고급 내장재와 수입 가구로 꾸며 놓아 격조와 기품이 넘쳤다.



그리고 구스타프의 방 한편에는 최고급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를 마련해 놓았는데, 이름만 들어도 알 만큼 유명한 브랜드에서 출시한 상품이었다.




구스타프 부녀(父女)가 이사를 온 후 샤니 가(家)의 분위기는 한층 더 밝아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크리스틴이 한몫을 톡톡히 했다. 그녀는 예의 바르고 싹싹하여 필리베르와 라울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금세 환심을 샀다. 구스타프 역시 천성이 점잖고 위품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금세 인망(人望)을 얻었다.



샤니 가(家)의 사람들 모두가 구스타프 부녀를 한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 샤니부인,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샤니부인은 처음부터 객식구를 집에 들이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필리베르의 교우(校友)였다고는 하나,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 사람인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땡전 한 푼 없는 애 딸린 홀아비라니. 그녀는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70년대까지도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던 유교적 관습과 통념 때문에, 샤니부인은 남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구스타프 부녀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였다.





* * *





1975년 6월의 어느 날.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샤니 가(家)의 저택.



초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샤니 가(家)의 드넓은 정원에는 싱그러운 녹음(綠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정원 가득 소나무, 말채나무 같은 교목들과 모란, 앵두나무 같은 관목들이 우거지고, 제철을 맞은 백합, 마거리트 같은 초화류(草花類)가 만개하였다.



유월의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자, 서울의 한낮 기온은 30도를 웃돌았다. 구스타프는 방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라울과 함께 피아노 레슨을 진행했다. 활짝 열린 방문과 창문을 통해 똥땅똥땅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크리스틴은 단정한 묶음 머리에 하늘대는 원피스 차림으로 주방을 나섰다. 그녀는 과일주스 두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구스타프의 방으로 향했다.


크리스틴 : 과일주스 한 잔씩 드시고 하세요.


구스타프 : 그럴까?


라울 : 네, 좋아요.



크리스틴은 방 안으로 들어와 구스타프와 라울에게 각각 음료 잔을 건넸다. 음료 잔을 받아든 라울은 수줍은 표정으로 크리스틴에게 말했다.


라울 : 고마워, 크리스틴. 잘 마실게.


크리스틴 : 네, 오라버니.



구스타프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정원을 내다보았다. 라울은 음료 잔에 담긴 과일주스를 한 모금씩 천천히 마시다가 구스타프에게 물었다.


라울 : 저기, 선생님.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쭈어봐도 될까요?


구스타프 : 그래, 말해보려무나.


라울 : 사실 저는 기악(器樂)보다 성악에 더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성악을 잘하기 위해서는 피아노 학습이 필수라고 말씀하셔서요. 정말로 그런가요?


구스타프 : 글쎄, 성악가가 되기 위해서 피아노가 필수 조건은 아니란다. 그렇지만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성악가의 대다수는 어린 시절부터 건반악기를 학습한단다. 그 이유를 알겠니?


라울 :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구스타프 : 지금부터 내 이야기를 잘 들어 보거라.



성악에 입문하여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다 보면 악기의 도움 없이 악보대로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대다수 성악도는 기본적으로 음감 교육을 받는다.



음(音)이란 무엇인가.

음악에서 말하는 음(音)이란 음악을 구체화하는 하나의 단위이다. 여러 종류의 음들이 모여 악곡이 되고, 악장(樂章)을 이루게 된다.



음(音)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높은음과 낮은음.

센 음과 여린 음.

긴 음과 짧은 음.

듣기 좋은 음과 듣기 싫은 음.

이 외에도 수많은 음이 존재하는데, 이런 각각의 음을 우리는 단음(單音)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높이가 다른 둘 이상의 단음이 함께 울릴 때 어울리는 소리를 화음(和音)이라고 부른다.



피아노는 이런 음감(音感)을 학습하기 위한 최적의 도구로 손꼽힌다. 올바르게 조율된 피아노를 사용하면 누구나 쉽고 간단하게 원하는 음을 낼 수 있다. 또한 피아노는 동시에 여러 음을 낼 수도 있고, 비교적 음역이 넓다는 장점이 있어서 학습 가치가 높은 악기로 평가받고 있다.



구스타프는 라울에게 피아노 학습이 필요한 이유를 원론적인 측면에서 설명해 나갔다.


구스타프 : 그래서 피아노 학습은 모든 음악의 기초가 된단다.


라울 : 네, 그렇군요.




그때 마침 샤니 그룹의 회장 필리베르가 귀가를 했다. 필리베르 회장은 환복(換服)도 하지 않고 곧장 구스타프의 방으로 향했다.


필리베르 : 이보게, 구스타프. 레슨은 할 만한가?



필리베르의 목소리를 듣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라울과 크리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구스타프 : 물론일세.


필리베르 : 내 아들 녀석이 자네 속을 썩이지는 않나?


구스타프 : 아닐세. 무척 잘하고 있네.


필리베르 : 그래? 그거 다행이군. 라울, 아저씨 말씀 잘 들어야 한다.


라울 : 네, 아버지. 그런데 어머니는 같이 안 들어오셨어요?


필리베르 : 참! 오늘 저녁에 정찬 모임이 있다는구나. 나는 그런 모임 자리는 딱 질색이라서 말이야. 다행히 네 엄마가 그런 모임 자리를 좋아하니 망정이지.


라울 : 그럼 오랜만에 다 같이 외식할까요?


필리베르 : 외식?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여사님! 여사님!



거실 한편에서 옷가지들을 개어 정리하던 중년의 가정부는 필리베르의 호출 소리에 황급히 구스타프의 방으로 향했다.


가정부 : 네, 회장님. 부르셨어요?


필리베르 : 여사님, 오늘 저녁 준비는 하지 마세요. 다 같이 외식할까 합니다.


가정부 : 네, 회장님.


필리베르 : 지금 시간이 세 시가 조금 넘었군. 다섯 시에 출발할 예정이니까 여사님께서도 시간에 맞춰 준비하세요.


가정부 : 네? 저도요?


필리베르 : 그럼요. 여사님도 우리 식구 아닙니까.


가정부 : 감사합니다, 회장님.



중년의 가정부는 필리베르 회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그녀는 모처럼 외출에 들떴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필리베르 : 이보게, 구스타프. 시간도 남았는데 오랜만에 합주 한번 어떤가?


구스타프 : 합주?


필리베르 : 그 왜 있잖아. 이십오 년 전에 우리 함께 연주했던 그 곡!


구스타프 : 라흐마니노프.


필리베르 : 잠시만 기다리게. 내 금방 가서 첼로를 가지고 오겠네.



필리베르는 마치 신이 난 아이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단걸음에 첼로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가죽 소재의 가방을 열어 첼로를 꺼내 놓았다.



필리베르 : 구스타프, 조율하는 것 좀 도와주게.



구스타프의 피아노 건반 소리에 맞춰서 필리베르는 줄감개(Peg)를 연신 감아 넣었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A현부터 C현까지 조율을 해 나갔다. 그리고 조율을 마치자 그는 구스타프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방 안은 잠시 정적과 함께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라울과 크리스틴은 아무 말 없이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을 숨죽이며 기다렸다.



라흐마니노프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사단조 작품 번호 19-3 안단테 >.



드디어 구스타프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필리베르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순식간에 공기의 흐름이 바뀌어 버렸다. 라울과 크리스틴은 방 안 공기가 자신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필리베르는 감은 눈을 뜨고 호흡을 가다듬어 활을 당겼다.


혹자는 첼로를 일컬어 ‘사람 목소리와 가장 닮은 악기’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첼로 연주가 시작되자,

라울과 크리스틴은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마치 두 연주자가 각기 다른 악기를 가지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첼로 : 이보게, 친구. 이십오 년 만에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갑네.


피아노 : 나도 반갑네. 그동안 잘 지냈나.


첼로 : 말도 말게. 어찌나 정신없이 살았는지, 그렇게 좋아하던 연주 한 번 못하고 살았다네.


피아노 : 고생 많았네.


첼로 : 다음 생에는 나도 자네처럼 음악에 일평생을 바치며 살아봤으면.


피아노 : 돌이켜 보면 후회만 남는 것이 인생이라지.


첼로 : 자네 말이 맞네. 우리 지금부터라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세.


피아노 : 고맙네, 친구. 자네를 다시 만난 것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길운이야.


첼로 : 별말을 다 하는군.


피아노 : 만약에 말이야. 내가 자네보다 먼저 떠나게 되면,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내 딸을 끝까지 보살펴 줄 수 있겠나.


첼로 : 거참,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닐세. 갑자기 약한 소리를 하고 그러나.


피아노 : 미안하네. 그래도 만약에 말이야. 혹시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 부탁 좀 들어줄 수 있겠나.


첼로 : 알았네, 알았어. 그래도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게.


피아노 : 고맙네. 정말 고마워.




구스타프와 필리베르의 연주가 끝이 났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필리베르의 눈가에 한 방울 이슬이 맺혔다. 구스타프는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라울과 크리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중년의 가정부는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어느새 라울과 크리스틴 뒤에서 함께 박수를 보냈다.




창밖에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녹음(綠陰)이 점점 더 짙어 갔다.




그날을 기점으로 구스타프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다.


필리베르는 그를 치료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구스타프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1975년 12월의 어느 날.

반평생 결핵을 앓았던 구스타프는 4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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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021. 2장 11화 22.06.09 28 1 15쪽
21 020. 2장 10화 22.06.08 25 0 9쪽
20 019. 2장 9화 22.06.07 23 0 10쪽
19 018. 2장 8화 22.06.06 26 0 9쪽
18 017. 2장 7화 22.06.05 27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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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015. 2장 5화 22.06.03 24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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