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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하얀기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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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2.11.10 21:49
최근연재일 :
2016.12.3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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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341,677

작성
11.01.1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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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하얀 기사의 이야기 Ep.1 - 문이 열리는 날 (3)

DUMMY

" 난리가 났네. "


인터넷은 연일 xx 그룹의 정체는 외계인? 같은 기사로 떠들썩했다. TV 뉴스에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싸구려 언론을 중심으로 회장 일가의 뿌리에 대한 각종 추측이 난무했다. 정말로 외계인 가문이라는 둥, 아들내미가 시민들을 상대로 공들인 장난을 치는거라는 둥... xx 그룹에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진환도 받아온 책은 인터넷에서 판타지 매니아들 사이에서 레어 탬으로 인정받았으며 제법 고가로 팔려나갔다.


" 3권 세트로 90만원이라, 장난 아니네. "


두께에 질려 진환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설령 장난이라고 해도 스리아 어는 세계 어디에 갔다 놔도 꿀리지 않는 상당한 퀼리티의 언어였다. 판타지 소설의 하드 매니아 사이에서는 스리아 어는 리얼 판타지 언어의 지휘를 확고히 굳히고 있었고 점차 그들만의 은어로 정착할 기미가 보였다. 실제로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몇몇 간단한 단어를 인터넷에 공개했고 어감이 좋은 단어들은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유행어 비슷하게 사용되는 중이다.


" 그냥 팔고 치울까? "


솔직히 학교 공부도 제대로 안하는 진환이다. 정말인지 아닐지도 알 수 없는 언어를 공부한다고 이 두꺼운 책을 읽어보는 건 솔직히 엄두가 안 났다.


" 하아... 말이라는 건 그냥 한국어 통용되거나 통역 마법으로 때우는 거 아니었어? 좀 더 생활에서 쓸 만한 마법을 만들어두라고... "


답답한 마음에 말도 안 되는 불평을 늘어놓았던 그는 곧 머리를 싸매고 한숨을 쉬었다. 진환도 머리로는 알았다. 말을 모르면 배워야 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소리다. 아니면 가봤자 귀머거리에 벙어리 신세 확정이다.


달력을 펼쳐본다. 청년이 제시한 2월 1일은 이제 20일 남짓. 책상 위를 점거하고 있는 세 권의 양장본 책과 세권 중 한권의 반도 안 되는 영어 수험서를 보며 진환은 갈등했다. 영어 책을 잡는다면 아직 열 달도 넘는 시간이 있었다. 솔직히 권당 2천 페이지에 달하는 스리아 어 교본 세권을 이해할 노력이면 수능 만점도 꿈은 아닐 것 같았다.


" 하지만 마법이라고 마법! "


그는 우편으로 후송 받은 스리아 어 마법서들을 보며 갈등했다. 번역이나 해뒀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심술인지 기초 이론서를 비롯한 열두권의 마법서는 죄다 원문이었다. 진짜 마법서가 (그는 이미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코앞에 있는데 글을 몰라서 익히지 못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교과서 더미와 마법서 더미를 번갈아보니 새삼 난이도의 차이가 눈에 띄었다. 마법서 쪽이 전 과목을 모아둔 교과서 더미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차이가 났다. 여백과 글자 사이즈를 생각하면 실제 내용은 최대 여섯 배까지 차이 날지 모른다.


' 이계에 못가면 고작해야 라이터 수준이라지만... '


유용성, 난이도, 시간, 모든 것을 따져봐도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책들은 그냥 팔아버리고 수험공부나 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매일 밤 판타지적인 상상에 사로잡혔던 풋내기 고3 은 어렵게 찾아온 비일상의 실마리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순간 진환은 절대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엘프나 절세미녀 히로인을 떠올렸다. 삼처사첩 하렘 같은 시커먼 욕심도 살짝 일었다. 누가 그랬던가.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나 상식이 아닌 리비도라고. 그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교과서 더미를 책상 아래로 밀어버렸다.


" 에라! 한번 해보자! 까짓 것 20일만 투자해서 공부해보자. 2월 1일에 판타지 세상에 못 가면 그때 팔아버리면 되겠지. "


청년의 장담대로 2월 1일 판타지 세상에 갈 수 있다면 지구의 지식은 필요없다. 적어도 고등학교 레벨의 지식 따윈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별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지금 가진 책들 중 그나마 도움이 될만하다고 생각되는 책만 따로 꾸려서 챙겼다. 당장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넘어가서 필요할 때 보면 그만이라는 계산이다.


' 말도 빨리 배울 필요는 없어. 어차피 내가 아무리 끙끙거려본들 20일 동안 배우는건 한계가 있으니까. 나보다 머리 좋은 놈이 훨씬 앞서서 배워올거야. 일단 넘어가서 일상 회화를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놈을 따라다니면서 통역 받으면 돼! '


진환은 그때부터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부모님 모르게 나름대로 식량도 챙겼고 이계에서 도움이 될법한 책들과 몸을 보호할 무기, 전기에 의존하지 않는 태엽식 회중시계도 하나 장만했다. 판타지 세상에 간다면 어차피 전력을 공급받기는 글렀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쩌면 이 시계를 해체해 판타지 세상에서 최초의 시계를 만든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구할 수 있는 약과 소독용 알코올, 비누도 최대한 챙겼다. 진환은 실제로 이계로 간다면 가장 무서운 것은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한 질병일 것이라 생각했다.


필수품을 챙기고 선별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스리아 어 공부에 투자했다. 남에게 의존할 때 하더라도 결국 자신도 유창하게 말을 할 수 있어야했으니까. 하지만 새로운 외국어(?)를 처음부터 배우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남은 시간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1월 31일까지 그가 습득한 스리아 어는 기껏해야 알파벳처럼 문자를 이루는 기본 단어들을 익히고 나는 누구입니다, 하는 식의 극히 간단한 문장을 일부 구사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그나마 순수 책에 의존해 익혔기 때문에 발음과 억양이 이게 맞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일단 발음기호에 따르긴 했지만...


'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했구나... '


진환은 2월 1일 새벽 3시를 넘어서는 회중시계를 보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자기 몸뚱어리만한 등산용 배낭은 최대한 정리했음에도 허리가 터질듯이 빵빵했으며 그 뒤로 배낭 위로 짊어질 침낭까지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책을 가득 담은 손가방이 두개나 더 있었다. 한쪽에는 마법서와 스리아 어 교본이, 다른 한쪽에는 도움이 될법한 교과서나 서적들이 들어있었다.


챙겨놓고 보니 이게 여행 짐인지 전투에 나서는 군인들이 짊어지는 군장인지 구분이 안갈 지경이다. 이걸 지고 다닐 생각을 하니 진환은 앞길이 캄캄했지만 이것도 줄인다고 줄인 것이었다. 여기서 짐을 더 줄이려면 책 내용을 머릿속에 쑤셔 넣을 수밖에 없는데 지금 와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이다. 진환은 워드 프로그램을 띄우고 가족에게 남길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판타지 세상에 가지 못한다면 돌아와서 지우면 그만이지만 정말로 가게 된다면 돌아올 것이라는 보장은 청년의 말마따나 어디에도 없었다.


" 쓰읍... 왜 자꾸 눈물이 나고 그래. "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을 적다보니 절로 눈물이 나는지 진환은 연신 주먹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일견 황당하지만 진심이 가득한 글을 적다보니 새삼 실감이 난 것이다. 해프닝이라면 웃고 넘어갈 추억이지만 정말이라면, 부모님과 십중팔구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편지를 완성하고 가족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바탕화면에 저장했다. 그가 사라지면 가족들은 늦든 빠르든 컴퓨터를 키게 될 것이었으니까. 편지까지 남기고 나니 역설적으로 떠나기가 더 싫어졌다. 돌이켜보면 다른 세상으로 갈 만큼 나쁜 환경은 아니었다. 대입에는 좀 극성이었지만 좋은 부모님들, 모아둔 게 많지는 않아도 빚 한 푼 없는 건실한 가정재정, 그럭저럭 괜찮은 교우관계... 진환은 따져보면 따져볼수록 이걸 버리고 미래가 불확실한 판타지 세상에 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골똘히 생각하던 진환은 방에서 쿨쿨 자고 있는 부모님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고는 짐을 지고 집을 나섰다.


거리에 나선 진환은 한산한 거리를 둘러보았다. 편지를 보내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지만 집합시간은 오늘 새벽 6시까지니 거리를 생각하면 제법 여유 있는 시간이다. 장소는 예의 호텔 앞. 이걸 아는 사람은 하나둘이 아닌 만큼 도착하면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있는 게 아닐까 싶은 불안감이 약간 들었다.


그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5시 27분. 걸음을 조금 늦추면서 친구들에게 한통한통 이별의 문자를 보냈다. 청년의 말이 낚시였다면 나중에 장난이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말을 알면서 이 세계에 남아있을 윤성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훈이 삼년 째 바꾸지 않은 탓에 진환에게도 익숙한 멜로디가 오늘따라 낮설게 느껴진다.


" 여보세요. "


성훈은 뜻밖에 깨어있었는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진환은 뭐라 말해야할지 잠시 망설였다.


" 전화 했으면 말을 해 임마. "


성훈의 재촉에 그제야 진환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 나, 가기로 했다. 낚시면 놀림감이겠지만 진짜면 너랑도 이젠 안녕이다. 나 없다고 질질짜지말고 잘 지내. 나중에 9서클 찍으면 놀려주러 올테니까 그때까지 엉뚱한 사고같은거 당하지 말고 건강히 있으라고. 그리고, 나 올때까지 우리 부모님 잘 부탁한다. "


진환은 진지하게 말하면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일부러 농담기 가득한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남겼다. 돌아오는 성훈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 미친 새끼, 너 지금 어디야!? 진심으로 하는 소리 아니지? 응? "


" 진짜야. 벌써 호텔에 거의 다 왔어. 그럼 끊는다. "


" 야, 야! 잠깐... "


탁. 성훈의 외침을 무시하고 진환은 슬라이드를 닫았다. 이제 남은 미련은 없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선 호텔의 실루엣이 진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새벽이라 그럴까. 저번에 보았던 때와 달리 오늘의 호텔은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세계와 세계를 가르는 경계 같은.


" 간다. "


그런 느낌을 받은 진환이 호텔로 한걸음 옮기는 순간, 어둠에 잡아먹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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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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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알데뮬러
    작성일
    11.03.26 03:03
    No. 1

    현실이 시궁창이니 판타지 찾는다는 말에 동감이네요 ㅎㅎ
    똑똑하고 집안빵빵하면 현실에 도전이라도하지 이도 저도 아니니 저런결정을 했겠네요 ㅎㄷㄷ;;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6 연지연지
    작성일
    11.07.31 16:37
    No. 2

    건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8 총려
    작성일
    12.08.25 19:49
    No. 3

    작가님의 이런 글 재주는 정말 감탄할 수 밖에 없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 벨콧
    작성일
    13.01.01 13:21
    No. 4

    어느 양산형 판타지들과는 다른 것 같네요. 건필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7 태란
    작성일
    13.01.24 09:58
    No. 5

    현실에서 실제로 이렇게 된다면 그냥 책 연구 해서 우리세계에 맞는 마법 만들어볼텐데 말이죠.
    실제 존재 한다면 연구도 꿈은 아니란 얘기니까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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