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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혼 님의 서재입니다.

패왕을 보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마혼
작품등록일 :
2011.04.24 01:17
최근연재일 :
2014.08.2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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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회
조회수 :
36,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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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
글자수 :
16,488

작성
14.08.2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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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패왕을 보았다 2. 후회 (3)

DUMMY

라울은 밤새도록 정신없이 달렸다. 잡히면 무조건 죽는다. 다리가 무거워질 때마다 라울은 성난 알톤의 얼굴을 떠올렸다.

달아나! 겁쟁이! 어디 더 도망가보라고!

숨이 찼지만 머릿속의 알톤이 질러대는 소리에 도저히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뛰고 또 뛰다 보니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헉, 헉 더는 못 해먹겠다.”

라울이 쓰러진 곳은 꽤 높은 산의 정상이었다.

라울은 대자로 누워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험한 산길을 쉬지 않고 달리느라 옷이 엉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낡은 싸구려 옷이 나뭇가지에 걸려 찢기고 흙먼지가 묻어 걸레처럼 변했다. 다리도 끊어질 것 같았다.

라울은 호흡을 고르며 멍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을 차지하고 있던 어둠은 태양빛에 밀려 서서히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내 어둠은 완벽하게 자취를 감출 것처럼 보였다.

라울은 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는 떠오르건만 자신의 앞날은 여전히 캄캄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라울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후회막심이다.

알톤은 물렁한 상대가 아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벌려놨으니 부하들을 동원하든 개를 풀든 무슨 수를 써서든 라울을 찾아낼 것이다. 운 좋게 먼 곳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마법사에게 의뢰하면 어렵지 않게 거처를 알아낼 수 있다.

알톤은 세상 그 무엇보다 돈을 사랑하지만 자기를 화나게 한 놈을 처리하는 데는 그 돈마저 아끼지 않을 정도로 독한 놈이었다.

그런 남자가 지금 눈을 시뻘겋게 뜨고 뒤를 쫓아온다는 생각에 라울은 머리가 아파왔다.

“내가 어쩌자고….”

어쩌자고 그랬을까.

손목을 아끼려고 목숨을 걸다니.

천하의 바보가 따로 없다.

알톤의 말대로 손 하나로 빚을 청산했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빚에 쪼들릴 일도 없다. 오른손은 없지만 왼손이 남아있고 두 다리 또한 멀쩡하니 간단한 일 정도는 찾아서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데도 손을 잃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었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손이 잘리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이유는 알고 있다.

이유를 아니까 더 화가 나는 거다.

“빌어먹을!”

손이 없으면 더 이상 검을 잡을 수가 없으니까!

입으로는 꿈을 접었다, 검은 포기했다 말하면서도 마음속에선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었다. 어쩌면 다시 한 번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고 있었다. 부질없는 미련과 기대 때문에 이렇게 앞뒤 생각하지 않고 일을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라울은 멍청한 자기 자신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허리춤에 있는 검을 풀었다.

“다 이놈 때문이다.”

검의 손잡이에는 라울이 기사 수업을 받았던 발라리온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발라리온 가에는 본가에서 기사 수업을 마치고 정식으로 작위를 하사 받은 기사에게 가문의 문장이 박혀있는 검을 선물하는 전통이 있었다. 검 자체도 매우 고가이지만 이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발라리온 가와 연이 닿지 않은 이가 발라리온 가문의 검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다.

라울은 기사 수업을 수료하지도 기사 작위를 하사받지도 못했지만, 성적이 우수했던 라울을 눈 여겨 보고 있던 발라리온 가의 가주가 라울의 딱한 사정을 듣고서 라울이 가문을 떠나기 전날 직접 검을 선물해주었다.

그래서 이 검은 라울의 보물이었다.

돈이 없어 빚을 져야만 할 때도, 빚을 갚지 못해 독촉에 시달릴 때도 검은 손대지 않았다.

집을 처분할지언정 검만은 남겨두었다.

발라리온 가의 검이라면 그럭저럭 돈이 될 텐데도 라울은 단 한 번도 고민조차 한 적이 없었다.

“으아아아-!”

라울은 그런 소중한 검을 힘껏 던져버렸다.

검은 벼랑 끝을 지나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족쇄가 벗겨진 듯 했다.

이제 정말로 삶에 미련이 없었다.

죽자.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전 재산으로 도박을 결심했을 때, 돈을 다 잃으면 스스로 끊겠다고 각오했던 목숨이다.

가졌던 것도, 가진 것도, 가질 것도 없었다.

꿈도 희망도 없이 언제 잡힐까 불안해하며 사느니 차라리 지금 여기서 당당하게 죽어버리자.

라울은 결심했다.

산의 높이는 꽤 높았다.

떨어지면 무조건 죽는다.

하지만 벼랑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라울의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으아아아-!”

그저 힘겹게 살아온 지난날들의 고초와 보고 싶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서 살짝 눈물이 났을 뿐이다.

“으허어엉-.”

라울은 울었다.

울면서 달렸다.

평소 라울은 새가 되고 싶었다.

새가 되어 저 하늘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고 싶었다.

인제는 상관없는 얘기다.

몇 발짝만 더 가면 이 세상과는 완전히 작별이니.

모든 게 끝이다.

모든 게 끝일 테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달리다 발끝에 무언가가 걸려버린 라울은 그만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중심을 잃고 말았다.

“으헉!”

볼썽사납게 엎어진 라울은 데굴데굴 구르다 벼랑 끝에서 간신히 멈췄다.

넘어져있는 라울의 눈에 산 아래가 훤히 들어왔다.

절벽 끝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산 아래는 그야말로 까마득했다. 라울과 같이 구르던 돌덩이 몇 개가 아래로 굴러 떨어졌는데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한참 후에야 들려왔다.

이, 이런 곳을 뛰어 내리려했다니!

라울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네다섯 걸음 후다닥 물러서던 라울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벼랑 끝에 한 번 서보고 나니 다시 뛸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그렇다고 살아갈 용기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고 작금의 처지가 서러워 라울은 목놓아 엉엉 울었다.

“어찌 죽는 것도 내 마음 같지가 않구나.”

차라리 첫 시도에 깔끔하게 뛰어내렸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

모든 건 그 돌부리!

발목을 잡은 그놈 잘못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라울은 괜스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돌덩이라도 저 아래로 내던져야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라울은 씩씩거리며 발이 걸려 넘어졌던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라?”

그러나 라울이 발견한 것은 돌덩이가 아니라 손바닥만 한 석판이었다.

주변에 마땅히 발에 걸릴 만한 돌덩이가 없는 걸 보아 아까 발끝에 걸린 것이 이 석판인 듯 했다.

라울은 석판을 주워들고는 흙을 털어냈다.

“후- 후-.”

뽀얗게 묻어있던 흙먼지를 불어내고 나자 석판에 적혀 있는 글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기 싫어졌다면 이 밑을 파보게-

처음엔 이게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가 됐지 않았던 라울은 그 다음 문장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라울 레이스터에게-

“누구냐! 누가 이런 장난을!”

라울은 소리를 지르며 사방을 노려봤지만 이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이곳에 도착한 지 불과 한 시간도 안 됐다는 걸 떠올렸다. 게다가 여기는 라울이 평소에 자주 찾는 곳도 아니었다. 등산은 라울의 취미도 아니거니와 등산을 즐길만한 형편도 못 되었다.

그러니 누가 어떻게 라울이 죽을 생각으로 이 산꼭대기를 찾을 줄 알고 석판에 이름을 파서 미리 심어둔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였다.

라울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석판을 이리저리 살피다 뒤편에도 글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혹시나 앞면에 적힌 글귀를 이해시켜줄 만한 어떤 단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라울은 조심스럽게 석편 뒷면을 닦아냈다.

그러나 석편 뒷면에 적힌 내용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

라울은 기가 막혀 눈을 비볐고, 그 과정에서 손에 묻어있던 흙먼지가 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잠깐 눈물을 쏟았다가, 다시 석판을 읽어보았지만 당연히 석판의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뒷면에는 정확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준비해 놓은 두 가지 선물이 마음에 들었기를 바라며… 라울 레이스터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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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Lv.89 웹소감별사
    작성일
    14.09.09 00:06
    No. 1

    허? 미래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에게 선물을 보낸 건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6 여리쉼터
    작성일
    14.09.09 12:21
    No. 2

    잘 읽었습니다. 작은 의문점 하나... 목숨의 위협을 받아 도망치려고 전력질주하던 사람이 왜 산 정상엔 올라간걸까요.. 그것도 꽤 높은.. 태클은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8 마혼
    작성일
    14.09.09 12:31
    No. 3

    정신없이 달리다보니 거기 있더라 같은 느낌입니다. 원래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하면 위쪽으로 잘 가잖아요. 아닌가? 하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조카
    작성일
    14.09.10 22:38
    No. 4

    즐감하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5 흰코요테
    작성일
    14.09.23 04:21
    No. 5

    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타임 리프 좀 하지 말았으면" 하고 있었는데 전혀 새로운 개념의 장면이.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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