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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래 님의 서재입니다.

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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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래
작품등록일 :
2016.03.18 11:40
최근연재일 :
2016.06.24 11:57
연재수 :
60 회
조회수 :
9,406
추천수 :
51
글자수 :
332,342

작성
16.05.17 13:38
조회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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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1쪽

마님이 제 세상의 전부이니까요

DUMMY

진이 밤길을 달려 여진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중천이다. 익숙한 길이지만 그래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주위를 꼼꼼히 살피며 따르는 자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어딘가로 사라진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온다. 행색은 전혀 변하지가 않았다. 손에 들린 물건도 없고 들어갈 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진이 사라지자마자 진의원은 서둘러 약방의 문을 닫는다. 그리곤 며칠 사정이 생겨서 가게를 비운다는 종이쪼가리를 대문에 붙이고는 바로 뒷길로 최대인의 집으로 향한다.

다음날 늦은 오후 진이는 윤도에 내려 시장을 걷고 있다. 영락없는 장돌뱅이 차림의 진이는 한 장소에 이르자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 국밥을 시킨다. 국밥을 다 먹고 다시 집을 나선 진이는 얼마쯤 가다 잽싸게 사라진다. 그리고선 주변을 한번 휙 둘러보고 수상한 기운이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 다시 아까 국밥을 먹던 그 주막집 뒤로 가더니 훌쩍 담을 넘는다. 잠시 후 마안댁이 종종 걸음으로 채반을 들고 송씨네로 향한다. 그날 밤 깜깜한 바다에 조용히 노를 젓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잠시 후 선와의 구항구 망루에서 신호가 울려 퍼진다. 마을 쪽으로.

아직 잠들기 전이었던 수인은 마당에 나와 기다린다. 옆집의 무명형제와 재령 삼촌과 해령이모까지 수인의 마당으로 모인다. 얼마나 지났을까 송씨가 왠 젊은 남자 하나를 대동하고 여기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갑자기 심장이 심하게 뛴다.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그 젊은이는 수인 앞에 서자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품에서 서찰을 꺼내 수인에게 전해준다.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 한양의 자운옥에서 보내셨습니다. 꼭 도주님께 직접 전하라고...”

수인은 급히 그 자리에서 서찰을 펼쳐 읽는다. 심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 애기씨. 마지막이 될 거니까 이렇게 부르는 걸 용서하십시오.”

여기까지 읽은 수인의 무릎이 꺾인다. 거세게 뜀을 뛰던 심장은 한 겨울 살얼음을 밟아 빠져버린 저수지 물속에 있는 것처럼 순간 얼었다가 숨구멍 하나하나 까지 차갑게 찌릿찌릿 아파온다. 해령이모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서 마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으로 들어가 심호흡을 한번 한다. 그리고선 다시 읽어나간다.


“ 어느 날 부터인가 어르신이 환하게 웃기 시작했습니다.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꺼낸 이 후였지요.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너무 하십니다. 이리 대 놓고 제 앞에서.. 그리 농을 쳐도 그저 허허 웃기만 하셨지요. 어떻게 생긴 분인지 한번 뵙고 싶었는데 그리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저 환하게 웃기만 하던 어르신이 얼굴가득 안타까움을 담아 그 이름을 다시 되 뇌이셨지요. 옆에서 보는데 얼마나 애가 타던지. 애기씨는 눈치 채셨지요? 후후. 아마 그러셨을 거예요. 맞아요. 그저 어르신을 보는 낙으로 이 설매는 이생을 살았답니다. 그런 어르신의 부탁으로 애기씨를 돕게 되어 저도 얼마나 맘이 뿌듯했는지 모른답니다. 평생 은혜만 입고 도움도 못되는 천것이라 여겨져 늘 송구한 맘 뿐 이었는데 작게나마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쁘던지.

그런데 어르신이 그리 급하게 가시게 될 줄도 역시 몰랐습니다. 같이 따라갈까도 몇 번이나 생각 했었는데 그리 가면 어르신이 꾸짖을 것만 같았어요. 제가 큰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어르신도 없는 마당에 저마저 그리 가버리면 애기씨 혼자 그 큰 짐을 어찌 감당하실까 염려도 되었지요. 어르신도 제가 어르신을 따르는 것 보다는 애기씨를 조금이나마 도와주기를 바라실 것 같기도 했고요. 한편으론 어르신을 그리 돌아가게 만든 죽일 놈들을 내손으로 꼭 죽이고 싶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애기씨땜에 덤으로 몇 년을 더 산 셈이지요.

아 참. 저와 어르신의 인연은 아직 못 들으셨겠지요. 오늘은 이년이 많이 지껄이고 싶네요. 너그러이 그냥 받아주세요. 어르신이 평안도 절도사로 계실 적에 저는 가난한 부모가 쌀 몇 푼에 기생집에 팔아서 그 당시 이제 막 기적에 이름을 올린 상태였지요. 그런데 중국에서 온 사신단 중의 몹쓸 패거리한테 걸려서 곤욕을 치르다 어찌어찌 겨우 도망을 쳤는데 저를 숨겨주고 한양으로 데려다 준이가 바로 어르신입니다. 거기가 자운옥 이었습니다.

저는 어차피 어르신이 아니었음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르신은 이 천한 걸 한번 품지도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두고두고 한이 됩니다. 좀 더 어렸을 때 제가 먼저라도 달려들 것을 그러지 못한 것을 요. 하하하. 별말을 다하죠. 언젠가는 탁주라도 한 사발 기울이며 이런 얘기를 할 날이 올 줄 알고 아껴두었었는데 못하고 가려니 너무 아쉬워서요. 이 마음 누군가한테는 꼭 말하고 싶었거든요. 애기씨가 가꾼 그 섬에 언젠가 놀러가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농처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언제 다시 만날지... 만날 수나 있을지..

제 푸념은 여기까지이구요. 드디어 그 놈들이 저의 존재를 눈치 챈 것 같습니다. 자색비단이 원체 귀하다 보니 수소문 끝에 저의 존재가 드러난 거겠지요. 저는 살만큼 살았고 딱히 이 세상에 미련도 남아있지 않지만 아직은 애기씨가 그놈들과 대적할 만큼 힘을 키운 건지 몰라서 너무도 불안합니다. 그래도 믿겠습니다. 어르신이 믿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 설매 맘 편히 떠나렵니다. 우리 애기씨가 잘 헤쳐나가리라 믿고. 이년 먼저 가서 어르신한테 어리광도 피우고 술잔도 기울이며 그렇게 있을 랍니다. 애기씨는 훨씬 훨씬 더 뒤에 오셔서 그때 같이 술잔을 기울이지요.

조만간 저를 찾아 올 겁니다. 그 다음에는 그 곳일 겝니다. 어차피 저한테서야 아무것도 얻지 못하겠지만 이미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서 굳이 제 이야기는 필요치도 않을 겝니다. 그저 애기씨한테 가는 연락을 차단하려는 것 일겁니다. 그리고 제가 그놈들 실체에 다가간 걸 아는 이상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음도 알겠죠. 아니 이미 충분히 준비를 마쳐서 쳐들어갈 날만 세고 있겠지요. 애기씨도 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절대 만만한, 아니 오히려 아주 무서운 자들입니다. 우리나라 통째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동안 설마 설마 하면서 짐작은 했는데 확실치가 않아서,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애기씨께 말씀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자들의 우두머리는 분명히 애기씨가 잘 아는 자 일 것입니다. 저도 어제에야 간신히 나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애기씨께는 밝히지 못하고 떠납니다. 차마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말씀 드릴 수가 없는 지라. 분명한건 머지않아 거기로 갈 거라는 겁니다. 그것도 조만간. 그러기 위해 저를 먼저 제거하려 들 겁니다. 용재총각이 저를 통해 그곳과 연락이 닿은걸 알아냈을 테니까요. 대비하십시오.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주십시오.

그저 몇 자만 적으려고 했는데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길어졌네요. 그저 평생 짝사랑만하다 가는 불쌍한 천기년의 신세한탄이려니 하고 어여삐 봐주십시오. 끝내 그곳을 못보고 가네요. 이년 육신은 사라져도 넋이라도 그곳을 찾아가겠습니다.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그럼 부디 강건하십시오.

설매“


편지를 읽는 내내 수인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수인의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방밖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걱정 반 답답함 반으로 낯선 사내를 쳐다본다. 그런데 그 사내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발만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후 수인이 촉촉이 젖어있는 눈으로 방밖으로 나오자 일동 긴장한다.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하는 것이다.

“ 내일 아침 윤도로 나갈 것이다. 무명이는 지금 즉시 돌석아재네 집으로 가서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터이니 석범아재랑 문식아재도 준비하라 일러 두거라. 무진이는 내일 날이 밝기 전에 송포로 가서 성준을 데리고 윤도로 오거라. 밤이 늦었으니 송씨 아저씨는 옆집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 저희와 같이 출발하시지요”

그렇게 마당에 모인 사람들을 전부 돌려보내고는 남아있는 젊은이를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좀 더 자세히 물었다. 젊은 사내는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며칠 전에 생전 처음 보는 노승이 한 분 찾아왔었습니다. 마님은 아는 분 인 듯 스스럼없이 바로 방으로 모시더군요. 그때 부터였습니다. 마님의 행동이 이상해진 게. 지금까지 그런 일이 없었는데 장사도 청매에게 맡기고는 갑자기 어딘가를 혼자서 다녀오시는 겝니다. 제가 마님을 모신 이래로 저 없이 나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지요. 제가 따라나서겠다고 하였더니 극구 말렸습니다. 꼭 혼자 가봐야 한다면서요. 그 다음날은 끼니도 거르시면서 하루 종일 방안에서 꼼짝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곤 제가 떠나오기 전날 다시 그 노승이 오셨었지요. 그렇게 얼이 빠져 있는 모습은 처음 뵜습니다. 불러도 듣지를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듯 싶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밤에 저를 불러서는 서찰을 주시고선....지금쯤이면 이미.....”

그러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여기 머물겠단다.

“ 마님의 눈이 되어 주고 싶습니다. 죽더라도 이곳에서 죽어 이곳에 묻히고 싶습니다. 굶어 죽어가던 저를 살려주고 입혀주고 키워준 게 마님입니다. 저에게는 어머니이자 누이이자...... 지금까지 마님만 보고 살았습니다. 어차피 마님의 눈이 되지 않는 이상 이 세상 살아갈 의미도 없습니다. 마님이 제 세상의 전부니까요.”

수인은 그저 안타까운 얼굴로 쳐다볼 뿐이었다. 설매는 하찮은 천것이라 표현했지만 수인에게 설매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든든한 대들보였다. 할아버지가 그리 되고 나서는 더욱 더 많이 의지가 됐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사람이 또 자신으로 인해서.....수인은 자신의 저주스런 운명에 그저 치가 떨릴 뿐이다. 이 아이만이라도 멀리 피신시켜서 살게 해주고 싶다. 그런데 젊은이의 눈빛에는 꺾을 수 없는 결기가 어려 있었다.

‘미안해요.. 설매 언니... 이 아이 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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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그저 나에겐 수인이다.. 내 목숨.. 16.06.08 231 0 12쪽
52 이상했다. 확실히 16.06.08 227 1 9쪽
51 그래 죽자 16.05.31 241 0 10쪽
50 난 당신이랑 살래요 꼭 16.05.31 170 0 5쪽
49 같이 갈거야. 나도. 어디든 16.05.30 130 0 11쪽
48 마지막이다. 한번만... 16.05.25 657 1 12쪽
47 그래 찾았느냐? 16.05.24 178 1 12쪽
46 청현의 친애비요 내가. 16.05.24 176 1 5쪽
45 그저 운명인게다 16.05.20 302 0 15쪽
44 제가 죽였습니다. 16.05.19 214 0 14쪽
43 설마... 왜... 16.05.18 194 1 12쪽
» 마님이 제 세상의 전부이니까요 16.05.17 318 1 11쪽
41 독한년... 16.05.13 186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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