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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비 님의 서재입니다.

이세계 문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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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비
작품등록일 :
2023.04.07 18:25
최근연재일 :
2023.04.26 06:36
연재수 :
16 회
조회수 :
949
추천수 :
11
글자수 :
85,635

작성
23.04.07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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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추천
1
글자
12쪽

1화

DUMMY

‘그런데 왜.’


그 뒤에 의식이 있다.


주마등은 진작 끝난 것 같은데 의식이라니 이상했다.


풀내음이 풍긴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숲 한복판이었다.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햇빛을 거의 가릴 정도로 짙은 숲이었다. 방금 전의 기억과 도저히 이어지지 않았다.


‘지옥?’

고개를 저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 너머에서 따스한 햇살이 비췄다. 기분 좋게 산뜻한 곳이었다.


지옥이 이런 분위기일리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천국에 왔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환각? 잡혀서 세뇌라도 당하는 중인 건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내면을 관조한다. 이상한 걸 깨달았다. 느껴지는 내기가 없었다.


지나치게 소모 했다는 게 아니라 아예 하루치 분도 없었다. 운기를 하려해도 단전의 존재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생물을 비범하게 만들어주는 초월의 힘. 그걸 잃어버렸으니 그래서야...


‘이래서야 그냥 평범한 여자애랑 다를 게 없는데.’


어딘지도 모를 상황에서 힘을 전부 잃어버렸으니 나쁜 상황이었다. 근데 그런 것치곤 너무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평범한 여자아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근본부터 틀렸을지도 모르지.’


살기가 느껴졌다. 분명 무인의 것은 아니었다. 정제되지 않았고 난폭했다. 광인이나 짐승의 것이었다.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노골적으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일어나서 주변을 살폈다.


부러진 잔가지 몇 개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손에 쥐고 휘두르기엔 너무 가늘었다.


주먹보다 약간 큰 돌을 주워들었다. 별로 믿음직스럽진 않았지만 어쨌든 맨손보단 나을 것이었다.


풀숲을 거칠게 해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꽤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빨랐다. 최소한 인간만큼은 컸다. 숫자도 하나가 아니었다.


자세를 잡았다.


거뭇거뭇한 형상이 풀숲을 해치며 튀어나왔다.


다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녀석의 머리쯤을 돌로 내려쳤다.


깨깽-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개? 아니 늑대인가?’


대형견 정도 덩치가 있는, 온 몸이 검고 짧은 털로 뒤덮인 늑대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것의 머리 위에.


-검은 털 늑대 LV19-


‘무슨.’


당황스러웠지만 깊이 생각하기엔 지금 당장이 너무 급했다.


머리뼈 완전히 으스러뜨릴 생각으로 내려쳤건만 위력이 턱도 없이 모자랐다. 내공의 부재 때문이었다.


다행히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일어나지 못했지만 하나가 아닌 게 문제였다.


-검은 털 늑대 LV15-

-검은 털 늑대 LV17-


‘그래도 더 있는 건 둘로 끝인가.’


동료가 당한 걸 보고도 망설이지 않고 뛰어 들어온다.


양쪽을 동시에 대처하는 건 불가능하다.

‘목이랑 다리.’


어느 쪽을 내줘야 될지는 분명했다. 목을 노리는 녀석의 머리를 찍어내자 허벅지에 아찔한 감각이 파고든다.


하지만 아직까지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주둥이를 꽉 문채로 머리를 비틀려고 하는 녀석을 사정없이 내려찍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다섯 번째로 내려찍으려는 찰나에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다리에 매달려 있던 늑대가 검은 연기로 변해 바스러져 버렸다.


덕분에 스스로 무릎을 찍을 뻔했다.


연기가 완전히 흩어진 땅 위에는 웬 고깃덩이가 놓여 있었다. 마블링은 거의 없었고 선명한 분홍색이 꽤나 신선해보였다.


황당해하며 쓰러진 늑대도 마저 마무리했다. 역시나 검은 연기로 변해 흩어졌지만 더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가상현실?’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납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거칠게 뛰고 있는 심장과 코를 메운 혈향은 가짜가 아니었다.


가상현실이라고 해봤자 특수부대 훈련용으로 풀린 수준 낮은 물건 소수일 뿐이다.


직감이 여기가 현실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내 영감(靈鑑)은 어지간한 고위 능력자들보다 뛰어나다. 한줌의 내공조차 없어 상단전을 자극할 수 없는 상태에서조차 이건 변하지 않는다.


물론 나를 속일 수 있는 가짜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설비와 다수의 고위 주문으로 쌓아올려진 시설이 있다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건 연구 하청이나 받는 흑마법사 나부랭이들이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그게 가능한 단체, 혹은 개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가 직접 개입했다면.’


지구의 지배자, 잔인한 독재자. 그리고...

위대하디, 위대한 대마법사께서.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야.’


그의 눈에 띄었다면 폐기 당했을 게 분명하다. 그는 나를 의료폐기물 정도로 생각할 터이다.

내가 살아 있는 건 단지 ‘그’의 관심사에서 멀어진 덕분이다.


그러니 그가 개입했을 리도 없었다.


‘모르겠네.’


추측이 가능한 범주를 한참이나 벗어난 상황이었다. 생각을 멈추고 바닥에 떨어진 고기를 봤다.


몸을 움직이는 덴 열량이 필요하다. 고기를 줍기 위해 몸을 밑으로 숙였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무거웠다. 원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물렸던 허벅지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왜 상처가... 아. 나 되게 멍청하네.’


내 비정상적인 재생력은 어디까지나 불사공의 공능이다. 내공을 운용하지 못하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잊고 있었다. 하기야 내공을 운용하는 건 숨을 쉬는 것만큼 당연한 행동이었으니 잊을 만도 했다.


붕대로 쓸 천 조각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알몸이었다.


가쁜 호흡을 가다듬어 심박수를 최대한 낮춘다. 그리고 다리의 근육을 움직여 출혈 부위를 압박한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그러나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하려면 몇 시간은 누워있어야 될 것 같았다. 그나마 늦봄인지 초가을인진 모르겠지만 온도는 적당히 따뜻했다.


하지만 곧 다른 문제가 생겼다.


‘피냄새를 너무 많이 풍겼구나.’


뭔가 다가오고 있었다. 움직임이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토끼 같은 건가?’


토끼 비슷한 작은 설치류가 굳이 피 냄새가 나는 곳으로 다가올 이유가 없지만, 청소부 역할을 하는 작은 동물일지도 몰랐다.


그나마 적의는 느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최소한 산채로 뜯어 먹히진 않을 것 같았다. 다가오던 기척은 등 뒤 쪽 풀숲에서 멈췄다.


조용한 대치는 한참동안이나 이어졌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상대편이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라...’

어린 여자애 목소리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재밌네.”

“네?”


누가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 일단은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래 안녕?”

“저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봐도 연기는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아니 못 움직이겠어.”


기척이 이쪽으로 완전히 다가왔다.


“출혈이 심해요. 일단 지혈할게요.”


차갑고 축축한 뭔가가 상처 위에 끼얹어졌다.


“저기 뭘 바른 거야?”

“상처에 도움이 되는 약초를 씹어서 빻은 거에요.”


‘원시인도 아니고 무슨...’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스마트 젤 같은 물건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하다못해 항생 연고도 아니고 약초라니.


꽤 쓴 것인지 끙끙거리며 씹은 정성이 아니었다면 장난하지 말라고 화를 냈을 지도 몰랐다.


아이는 소독제 냄새가 나지 않는 천으로 상처를 동여 메어 마무리했다. 내 편견에 비해 다행히 솜씨는 적당히 있었다. 덧날 걱정은 안 해도 될 듯 싶었다.


“급한 데로 처치는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다리를 못 쓰게 될 수도 있어요.”

“괜찮아, 자가 치유 능력이 있으니까 급한 출혈만 막으면 충분해. 고마워.”


혈관과 근육이 어긋나지 않게 형성되는 정도라면 내공이 없어도 할 수 있다.


“네? 치유 능력이요? 혹시 사제님신가요? 사제님이 어쩌다 이런 곳에...”

“아니 사제는 아니야.”


사제라...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그런데 혹시 어떤 신의 사제를 말하는 거야?”


여러모로 이 행성이 지구는 아닌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비를 베풀어 주는 신은 이 큰 우주에서도 손에 꼽는다.


그러니 웬만하면 아는 신의 이름을 들을 거다. 바뀌는 건 없겠지만 혼란스러운 생각이 조금은 가라앉을지도 몰랐다.


“사제라면 모두 자애로운 녹색 용님을 모시는 분들이라고 어른들께 들었어요.”


생각이 정리되긴 커녕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드래곤을 숭배해? 인간을 하나의 개체로 대할 리가 없는 그 오만한 이들을?’


정말 극소수, 용조차도 신으로 숭배하는 고귀한 존재들이 있다. 그들이라면 인간의 숭배도 받을 테다. 하지만 그 중에 녹색은 없다.


혼란스러운 중에 확실한 것이 있다면 가상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재화를 들여서 이렇게 현실적인 환경을 조성해놓고 배경설정을 엉망으로 해서 현실성을 떨어뜨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주의 변방 중에서도 변방인건가...’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모든 제약과 의무는 사라지고 이전의 기억과 상관없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눈을 뜨기 전의 마지막 기억이 가슴 한편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후련했다.


일단 살아남아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구나. 혹시 먹을 것 좀 가지고 있어?”

“페미컨이 조금 있는데 잠시만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기... 제가 먹여드려야 될까요?”

“금방 움직일 수 있을 거니까 옆에 두고 가. 대신 저 고기는 가져.”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설마 혼자서 검은 털 늑대를 잡으신 건가요? 거기에 고기는 다섯 마리를 잡아야 겨우 한번 나올 정도로 귀한데...”

“운이 좋았네.”


세 마리를 한 번에 잡았다곤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런 분이 대체 왜 이런 곳에 알몸으로... 하여튼 저는 마을에 가서 옷이랑 물을 좀 가져올게요. 기다려주세요.”


내 등 살갗에 차가운 가죽 같은 무언가가 덮어졌다.


“혹시 모르니까... 급하면 써주세요.”


눈앞의 땅에 끝이 뾰족하게 갈린 뼈 말뚝이 꽂혔다.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체감상 30분정도가 지났을 쯤에 드디어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청거리면서 일어나자 발밑에 몸에 덮여있던 옷이 떨어졌다.


검은색 가죽 자투리를 이어 만든 후드 달린 망토였다. 목쯤에 동여 멜 수 있는 끈까지 달린 꽤 제대로 된 물건이었다.


주머니에 딱딱하고 네모난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꺼내보니 건포도 비슷한 말린 과일이 박혀있는 갈색의 직육면체 블록이었다.


페미컨이다.


냄새는 좋지 않았다. 누린내가 굉장히 심했다.

이런 산속에 있는 마을이니 향신료는 커녕 곡식 가루조차 조금 밖에 사용하지 않은 듯싶었다. 아마 고기도 방금 봤던 늑대고기를 썼을 테다.


한입 베어물어봤다. 코로 맡았던 누린내가 입을 가득 채웠다.


주먹으로 간신히 쥘 수 있는 크기의 덩어리였다. 이것만 먹어도 재생에 필요한 열량은 충분히 수급된다.


당장 뱉고 싶었지만 억지로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다 먹고 나니 입안이 완전히 유전이 되었다. 누린내가 밸 것 같았다.


‘기다리라고 했지.’


자세를 잡고 앉았다. 의식을 내면으로 옮기고 천천히 스스로를 관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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