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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님의 서재입니다.

테르센트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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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더
작품등록일 :
2015.03.30 14:51
최근연재일 :
2016.02.0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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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03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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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7화. 친구들

DUMMY

1024년, 호운타에 여름이 찾아왔다. 그 해의 여름은 예년에 비해 훨씬 더웠는데다가 비도 내리지 않았다. 일부 주민들은 바로 작년에 지어진 티프소의 공장에서 피어나오는 회색 연기가 원인이라고 불평했다. 정작 그들이 쓰는 공산품은 하나같이 그 공장에서 구매해야 했기 때문에 불평은 투덜거림에서 그쳤지만.


티프소의 과학사업은 테르센트에 무섭도록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40여년에 이르는 지난 세월 동안 티프소의 대량 생산기술, 특히 제철과 제지는 증기기관과 더불어 테르센트의 일상생활로 자리잡혔다. 마법력이 거의 사라진 지금 테르센트의 전통 공업은 티프소의 공업력을 따라길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최근들어 각광받고 있는 티프소의 기술은 바로 "의학"이었다. 원래 테르센트에서는 의술은 쓸모없는 기술이었다. 마나가 충만했던 시절, 그들은 여신의 은총을 받은 프리스트들의 힘으로 상처를 치유했는데, 피부가 찢어지거나 뼈가 부러져도 하루가 되기 전에 씻은 듯이 낫게 할 수 있었다. 감염이나 질병도 그 자체를 마법으로 치유할 수는 없었지만, 신성력은 몸에 활기를 돋구어주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치료에 도움을 주었다. 의사라는 직업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주로 먹거나 붙이는 약을 제조하는 것이 전부였고, 사람의 몸에 칼을 대는 외과의는 전무(全無)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 신관들은 바늘에 찔린 상처조차도 치료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출혈을 막을 수 없었고, 여신에게 아무리 기도해도 부러진 뼈가 붙지 않았다. 그 동안 신경쓰지 않았던 병균이 날뛰니, 어떤 질병이 창궐하든 테르센트인들이 병마에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전쟁 직후라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시체는 새로운 감염을 유발시켰고, 감염으로 죽는 사람들은 다시 희생자를 늘렸다. 치료해보겠다고 환자의 곁에 남았는 신관이 가장 먼저 죽어버리자 시민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거리는 오염되고, 약한 사람들은 순서를 겨루는 것처럼 무덤에 들어갔다.


호운타의 루크 백작이 티프소의 의서(醫書)를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때였다.


"우린 분명 그들 때문에 죽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우리를 살릴 방법이 그들에게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루크 백작의 이 주장은 마법시대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자신들을 학살한 티프소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모독이라는 감성에 호소하는 외침이 그 비난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루크 백작의 손에 의해 살아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여론은 서서히 바뀌어갔다. 애초부터 티프소의 의학력은 테르센트의 그것과는 극단적인 차이가 있었다. 티프소에서는 화학약품을 만들어 병원균을 제거하고, 환부를 절개하여 종양을 잘라낼 수 있었다. 직접 바늘을 이용하여 근육과 피부를 꿰매는 것은 테르센트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기술이었다.


결국 그의 "병원 창립"에 대한 건의서는 리베리아 왕정에서 승인되었으며, 전국적으로 많은 병원이 생겨나게 되었다. 늘어난 병원만큼 의사를 충족시키기 위해 루크 백작은 학교, 특히 전문 분야별로 교육을 하는 대학을 건립했는데 그것이 바로 "리베리아 왕실 의학 대학교", 통칭 호운타 의학교였다.


아카드 블라드는 자신이 그 유명한 학교에 들어갔다는 것에 대해 감동하기 이전의 문제로, "학교"라는 평범한 곳에 들어간 것으로 이미 울 지경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꿈에도 그리던 생활이 시작될거라 믿고 있었던 그녀에게 현실은 너무나 냉혹했다. 그녀는 단 하루만에 세상이 그리 생각처럼 돌아가주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교실의 누구도 그녀와 말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 식사시간에도, 쉬는시간에도 그녀는 혼자였다. 틈틈히 수근거림을 들어야 했고, 소소한 괴롭힘이 뒤따랐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 들어가면 꼭 밖에 물건들이 놓여져 있어서 나올 수 없다던지(보통 사람이면 그냥 문을 밀고 나오면 됐지만, 아카드에게는 2톤짜리 바위로 눌려있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도서관 의자에 앉아있으면 누군가가 의자 다리를 걷어찬다던지. 바닥에 쓰러져서 그녀가 힘겹게 일어나는 것을 보며 도서관의 아이들은 킥킥거리면 아카드는 힘겹게 의자를 다시 원위치에 놓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자리에 앉는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후견인인 루크 백작은 한주에 한번씩 학교를 방문한 다음 그녀를 만나주었지만, 아카드는 자신이 괴롭힘당하고 있다는 것만은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한 주 동안 배웠던 것과 읽었던 책을 바탕으로 루크 백작과 심도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이 그녀의 후견인이 자신에게 바라고 있는 것이라는 걸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괴롭힘이 일상이 되어가며 그녀는 점점 지쳐갔다. 교사조차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고 견디기에는 가혹하게도 긴 시간이 흘러갔다. 그래도 그녀는 어떻게든 버티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 당시 그녀가 책에 고개를 파묻은 것은 어쩌면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이리라.


기록적인 무더위가 호운타를 뒤덮은 1024년의 여름, 티프소의 공장이 호운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바로 그 해에도 그녀는 루크백작이 오는 것을 기다리며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었다. 학교에 들어온지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는 친구는커녕 대화를 나누는 상대조차 없었다.


4년간 바뀐거라고는 도서관 가장 구석에서 책을 요새처럼 쌓아두고 바닥에 앉아 있는 것. 이렇게하면 아무도 의자다리를 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왜 바닥에서 책을 읽고 있니?"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바닥에서 책을 읽는 다른 사람이 또 있다니!' 정도를 생각할 정도로,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다는 것을 상상해본적이 없었다.


"혹시 자고 있니?"


소녀의 목소리가 쿡쿡 웃으며 물었다. 그제야 아카드는 자신이 대답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바로 앞에는 그림자가 닿지 않도록 배려하는 위치에 여자 아이가 서있었다.


"안녕. 난 아나스타시아라고 해. 오늘 전학왔어."


갈색빛의 긴 머리칼이 살랑, 그의 눈앞을 스쳤다. 아카드는 아무말도 없이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너 굉장히 하얗구나. 머리는 빨갛네. 아빠가 머리가 빨간 사람들은 용감하다고 말했어."


여전히 아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언어라는 존재를 송두리째 잊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아카드는 입만 헤 벌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많이 말랐네. 잘 먹는게 좋아. 편식은 몸에 안좋다고 아빠가 그랬어."


아카드는 얼마 없는 용기를 모조리 짜내서 대답했다.


"응."


아카드의 대답에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순진한 모습에 아카드는 또 다시 입이 벌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기 위해 두뇌를 가동시켜서 겨우 입을 여는데,


"아나! 거기서 뭐하고 있어!"


도서관을 울리는 목소리. 상급생 소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빠. 친구랑 대화하고 있었어."


"친구라고...?"


5학년 소년이 아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아카드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비단 아카드 뿐만이 아니라, 이 학교의 모든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훨씬 어른스러웠고, 훤칠하고 잘생겼다. 하지만 그런 외형적인 특성보다도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마법"이었다. 그는 현재의 테르센트에서 매우 드문 마나를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학교 선생들도 학생들도 그를 존경하고 배려하고 사랑했다. 아카드에게는 정말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친구는 가려서 사귀는 게 좋아. 아나."


아카드는 유지니오가 자신을 훑어보며 차가운 목소리를 낸 다음 동생-운이 좋다면 처음으로 친구가 될 뻔 했던 소녀-의 손을 잡고 도서관을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안녕."


아나스타시아는 끌려나가면서고 고개를 돌려 생긋 웃어보였다. 아카드는 천천히 다시 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그날 내내 아카드는 한권의 책도 읽지 못했다. 학교에 들어온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몇 주가 지났다.


아나스타시아는 여전히 그녀를 향해 인사해주었지만, 웃는 얼굴은 보여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카드는 슬픈 마음이 치솟았다. 유지니오에 대한 분노도 같이 타올랐다.


'유지니오는 아나스타시아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아마도 모든 것을 말했을 것이다. 출신 성분, 장애, 화장실에 갇혀있던 이야기. 가능하면 진흙에 미끄러져서 허리가 삐었던 이야기는 안했으면 좋겠다. 지금 생각해도 그땐 좀 창피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서관에서 한숨과 책을 겸하고 있는데, 비명이 울렸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후 그것이 아니었다. 여자아이의 비명과, 다른 아이의 비명과, 어른들이 내는 소란이 이어졌다. 그리고 울부짖음.


'이 소리는...'


맹수의 포효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늑대...?"


아카드는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였다. 그녀가 태어난 아레네 계곡에서는 늑대를 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계곡에서만 사는 그 늑대는 숲에서 사는 보통의 늑대와는 차원이 다르게 거대하고 영리했다. 그 맹수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이 학교에서 울리고 있는 것이다. 이 곳에 있는 어떤 사람도 당황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


전투경험이라고는 전무한 선생들은 제일 먼저 도망쳤고, 벌레하나 자기 손으로 못잡는 아이들은 숨지도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아카드는 이 늑대를 알고 있었고, 죽음의 공포에 익숙했으며, 어떻게 늑대를 막을 수 있을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싸울 수가 없잖아.'


그녀는 항상 품에 넣고 다니던 곡도를 꺼내들었다.


'무거워.'


겨우 30센티정도의 소형단도인 허블루아였지만 그녀에게는 들고있는 것만으로도 팔이 떨릴 지경. 선천적 장애는 근력운동 정도로는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어린아이만큼의 힘조차 낼 수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해야 고민하고 있을 때, 도서관 안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들어왔다.


"저.. 저건 뭐야?! 저건 뭐냐구!"


아카드는 큰 목소리로 외치는 뚱뚱한 아이의 이름이 젠데온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덩치가 큰 그 아이는 바로 얼마전에도 아카드의 다리를 걸고 낄낄댔었다. 젠데온의 뒤로 유지니오와 아나스타시아가 달려들어왔다. 아니, 거의 넘어지듯이 굴러들어왔다.


"문을 잠가."


아카드는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 경우에는 아예 안 들렸을지도 모른다. 아카드는 애초 성량이 큰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은 목소리에 조금 아쉬워하며 자박자박 걸어가서 문을 닫고 차분히 걸어 잠갔다.


"저건 뭐지!? 왜 저런게 학교에? 괴물이야! 괴물이라구! 누군가 소환한거야!"


아카드는 젠데온에게 천천히 걸어와서 조용히 말해주었다.


"저건 늑대야. 아래네 계곡에만 있는 특이종으로 머리가 아주 좋아. 그러니 조용히 해. 소리와 냄새로 추격하니까."


젠데온은 그녀의 조곤조곤한 설명에 벌벌 떨며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거야?"


"저 괴물이... 그... 늑대가 갑자기... 잘 모르겠는데 복도에서 나타나서... 그래서 우리가 교실에 있었는데... 교실 안으로..."


젠데온이 힘겹게 한마디씩을 내놓는 동안, 아카드는 유지니오가 의식을 잃어가는 아나스타시아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것을 알았다.


"늑대에게 물린 거야?"


아카드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나스타시아의 가슴과 복부의 옷이 찢어져 있고, 붉은 선혈이 옷에 배어나오고 있었다.


"늑대에게... 늑대에게 당했어..."


유지니오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카드는 그의 앞으로 가서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떻게 당했어? 자세히 설명해줘. 물린거야? 아니면 발톱이야?"


"물렸어..."


유지니오는 다신의 턱 밑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그동안 그들이 그렇게 괴롭혔던 아이라는 것도 잊고 질문에 대답했다.


"물렸다면 독에 중독되었을수도 있어. 지금은 아나스타시아를 구하는 것을 우선시하자. 늑대가 들어온 원인을 밝히는 것은 그 후야. 늑대는 지금쯤 1층으로 내려갔을거야."


"어.. 어떻게 알지?"


"사냥감을 몰때도 계곡바닥으로 몰아. 또 위험에 빠지면 계곡 바닥으로 내려가는 습성이 있어. 어느 이유로 여기에 들어온건지는 몰라도 최소한 위로 올라가진 않을거야. 일단은 해독을 해야해. 화학실로 가자."


젠데온은 이 침착하기 그지없는 아카드를 보다가 물었다.


"안 무서워?"


"무서워."


아카드는 단박에 대답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나스타시아를 구하는 게 우선이야. 그렇다면 무서워 할 여유가 없어. 유지니오. 저 늑대는 빛을 두려워 하지 않아. 하지만 차가운 액체를 꺼려해. 얼음계열의 마법을 쓸 수 있니?"


유지니오는 눈물을 닦고 끄덕였다. 아카드는 그를 위해 미소지었다.


"호위를 맡길게, 유지니오. 젠데온은 아나스타시아를 업어줘. 화학실로 옮기자. 피를 막지마. 지금은 피가 조금은 흘러나가는 편이 나아. 대신 서두르자. 너무 늦으면 손을 쓸 수 없을테니까."


아카드는 아나스타시아의 맥을 짚으며 말했다. 유지니오와 젠데온은 아주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두말없이 자신들이 항상 얕보던 키작은 꼬마의 말을 따랐다.


화학실로 가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핏자국이 없는 걸 보고 아카드는 안심했다.


"저 늑대는 자기 발로 여기에 들어온 것이 아니야."


"어.. 어떻게 알지?"


젠데온이 속삭이며 물었다.


"계곡늑대는 다른 늑대와 다르게 늙어도 무리를 떠나지 않아. 혹시 맘먹고 덤볐다면 늑대 무리가 학교를 휘젓고 있었을거야. 우연히 한마리만이 들어왔다해도 이렇게까지 날뛰었는데 사상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면, 사냥이 목적이 아닌거야. 그저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친것 같아."


담담히 말을 잇고, 아카드는 화학실 문앞에 섰다.


"잠겨있지만... 열수 있어."


그녀는 자신의 허블루아를 유지니오에게 건넸다.


"그걸로 세게 쳐줘. 매우 날이 잘드니까, 분명 열릴거야."


유지니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물쇠를 베어냈다. 두동강이 나버린 자물쇠는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들어가자. 늑대가 1층을 다 돌았는데도 나갈 길이 없다면 다시 올라올 수도 있어."


"... 나갈 길이 없어...?"


"여기에 늑대를 풀어놓은 사람이 있다면, 분명 모든 길을 막아서 퇴로를 차단했을 거야. 다른 학생들이 무사히 숨었다면 좋겠지만..."


아카드는 화학실로 앞장서서 들어가자마자 찬장을 열고 약품의 라벨을 확인하더니 하나씩 책상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으.. 아파..."


아나스타시아가 약한 숨을 토해냈다.


"힘내, 아나... 곧... 괜찮아질거야."


"나... 죽는거야?"


"그.. 그건..."


"안 죽어."


유지니오가 말문이 막히자, 아카드는 몇 가지 약품이 뒤섞인 비커를 들어올리며 말을 받아주었다.


"넌 죽지 않아, 아나스타시아. 약속할게."


아나스타시아는 그 말에 조금 안도한 것 같았다. 유지니오와 젠데온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 조금 멋있다."


젠데온이 말했지만 아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녀에게도 여유가 있을리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건지 깜빡깜빡 파악이 안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지식을 뒤져 아나스타시아의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서 은근히 싹트고 있었다.


"이 약을 천천히 상처부위에... 그 다음은 봉합이야."


"너... 봉합도 할 줄 알아? 상처 꿰메는 거잖아?"


젠데온이 움찔하며 물었다. 아카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다 배웠잖아."라고 대꾸했다.


"... 아니... 배운거랑 실전이랑은... 우린 가죽인형으로 연습했잖아."


"그거랑 같아."


딱잘라 말하고 그녀는 수술을 시작했다. 거의 1시간동안 화학실은 고요했다. 아카드는 가끔 바늘이 너무 무거운지 손을 내리고 숨을 내쉬었고, 그때마다 유지니오가 만들어진 약을 조금씩 뿌려주었다.


"독은 중화되었을거야. 상처 자체는 깊지 않으니까... 하지만 흉터가 남을지도 모르겠네."


바늘을 천천히 움직이면서도 계속 말을 걸어주는 아카드에게 아나스타시아는 웃어보였다. 아카드도 그 웃음에 같이 미소지었다.


"여기! 누가 도와줘요! 제발..!"


그때 복도에서 학생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곧이어 늑대의 울음소리가 뒤따랐다.


"... 누가 있어..!"


유지니오는 당황하여 몸을 일으켰다.


"... 어떻게 하지? 저.. 저 우리 학생이야.. 아체나의 목소리야..!"


젠데온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갔다.


"잠깐...!"


아카드가 그를 제지했으나 때늦은 외침이었다. 젠데온은 문을 열자 안경을 쓴 소녀가 달려들어왔고, 그 바로 뒤에 몸길이가 3미터가 되는 늑대가 따라 들어온 것이다.


"... 일부러 천천히 쫓았구나."


계곡에서부터 종종 있던 사냥법이었다. 무리를 짓는 사냥감을 발견하면 적당히 상처입히고 천천히 쫓아서 다른 개체를 찾아내는 늑대의 사냥법. 젠데온은 아체나를 데리고 구석으로 피했다. 유지니오는 아나스타시아의 앞을 가로 막았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그가 공포에 질려버렸다는 것을 아카드는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늑대는 말도 안되게 거대했고, 이빨이 특히나 날카로웠고, 입가에는 시뻘겋게 피가 묻어있었다.


"... 이걸로... 됐어."


실을 끊고 바늘을 치운 다음 아카드는 허블루아를 쥐고 일어났다. 늑대는 천천히 그 곳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오로지 분노. 자신을 여기에 가둔 누군가에 대한 압도적인 살의.


"... 유지니오. 주문... 빙계 주문으로 부탁해."


"어...?"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내가 시간을 벌게."


겨우겨우 정신을 되찾는 유지니오의 곁을 지나 아카드는 늑대의 앞으로 다가갔다. 둘 사이의 거리는 겨우 5보. 그 곳에서 아카드는 단도를 꺼내 높게 치켜들었다.


'눈을 바라본다. 눈을 본다. 늑대의 눈을 본다.'


마음 속으로 되뇌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말했었다. 늑대를 마주하면 눈을 보아야 한다고. 그녀와 거의 관계하려하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는 오직 부족인으로서의 필수요소만을 알려주었다. 정말로 자신에게 자식이 있었다면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들을 알려주는 것처럼.


'눈을 본다. 눈을 본다. 눈을 본다.'


아카드는 늑대의 금빛 눈을 노려보았다. 살기를 띄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늑대는 움찔, 걸음을 멈췄다.


계곡에서 지겹게 봐왔던 붉은 머리의 전사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한참동안이나 늑대는 움직이지 않고 분위기를 살폈고, 결국 이 앞의 어린 인간이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늑대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도.. 도망쳐..! 아카드..!"


아나스타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카드는 왠지 기뻤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정말 오랜만 이기에.


"... 약속했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 목숨을 걸었다. 만약 저 늑대가 자신을 죽인다면 그 사이에 모두가 도망칠 수 있을거라 믿었다. 그 정도면 자신의 삶은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 모두 살아야지!"


그런 아카드의 곁으로 유지니오가 달려나갔다. 그의 손에 맺힌 것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 그 창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푸른 에테르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 푸른 빛이야 말로 마나의 상징. 유지니오라는 사람이 아직까지 여신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받아라...!"


통칭 아이스 스피어라 부르는 얼음의 룬이 늑대를 향해 날아갔다. 늑대는 몸을 낮춰 정체를 알수 없는 공격을 피했다. 애초에 화살까지도 눈으로 보고 피하는 늑대였으니 저런 회피는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아카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지니오가 던진 것은 이건 물리력이 아닌 마법력. 몸을 비틀어 피해도 창은 결국 늑대를 향해 꺾여들어가 푹, 하고 목을 관통했다.


늑대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몇 번 울리고, 거대한 몸이 지면을 박차고 도망쳐 나갔다. 그리고 늑대가 빠져나간 화학실에 정적이 감돌자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거의 동시에 의식을 잃었다.


유지니오는 익숙하지 않은 마력소모에 대한 반작용으로 쓰러졌고, 아나스타시아는 아카드가 만든 약의 효과로 잠들었다. 젠데온은 이 상상도 못한 광경에 기절을 해버렸고, 아체나는 너무나 긴장을 한 탓에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아카드는 모두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겨우 붙잡고 있던 의식을 놓을 수 있었다.




루크 백작이 수비대와 함께 학교에 도착해서 늑대를 제압한 다음 아이들을 발견할 때까지 누구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모두는 같은 병동으로 옮겨졌으며, 젠데온과 아체나는 당일, 유지니오는 다음날, 아나스타시아는 사흘 후에 퇴원할 수 있었다.


의외로 가장 오래 입원해 있던것은 아카드였다. 평소에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거의 하지 못했던 그녀에게는 이 정도로 걸어다니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상상도 못할 중노동이었던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각자 퇴원한 직후부터 몸살이 난 그녀의 병실로 모여들었다.


"멋있었어! 너 정말 멋지구나!"


젠데온이 탄성을 질렀다.


"... 그 전에 우리, 해야할 말이 있는거 아냐?


아체나가 조심조심 이야기를 꺼냈다.


"아... 음. 있어."


유지니오는 약간 얼굴이 붉어져서는, "그 동안 미안했다. 아카드, 네 덕분에 살았어. 고맙다." 고개를 숙이며 사과와 감사를 함께 말했다.


"아... 아니... 너희들이 없었다면 나도 죽었을거야. 고마워해야하는 건 도리어 나야..."


아카드는 유지니오보다 더욱 새빨개져서 말했다.


"... 그리고 화장실 문을 잠근건 얘였어."


젠데온이 사과하는 김에 고자질도 했고, 유지니오는 작은 얼음조각을 만들어서 젠데온의 목뒤에 넣어주었다.


"차가워!"


젠데온이 유쾌하게 비명을 지르자 간호사가 달려와서 얼른 주의를 주었다.


"... 아무튼 미안해. 정말로..."


유지니오가 다시 사과하자 아카드는 미소지었다. 그녀에게 있어 이것은 평생 처음 겪는 동년배 사이의 따뜻한 공기였다. 그래서 아카드는 태어나서 가장 두려운 질문을 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 그럼... 우린... 이제... 친구...라고 불러도 될까?"



네 사람은 아카드를 보고, 서로를 보고, 다시 아카드를 봤다.


"당연하잖아! 얼굴 뜨겁게 무슨 말을 시키는거야!"


젠데온이 큰 소리로 외쳤고 다시 간호사가 달려와서 주의를 주었다.(병원에서는 조용히 해!)


아카드가 유지니오와 악수히고, 아체나와 서로 몇 번이고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멋쩍게 웃는 젠데온에게 사과의 말을 듣다가, 결국 간호사가 환자의 절대 안정을 주장하며 모두를 내보낸 다음에야 아나스타시아가 계속 궁금해왔던 것을 물을 수 있었다.


"피투성이였잖아, 나. 무섭지 않았니?"


아카드는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늑대가 그렇게 컸는데... 무섭지 않았어?"


아카드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넌 무서운 게 없구나."


아나스타시아는 존경스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카드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실수하면 너가 죽게되는 것이 무서웠어.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야."


아나스타시아는 아카드의 말에 읏... 하고 숨을 삼켰다. 그리고 굉장히 분한 얼굴로, "이.. 이제부터 날... 아나, 라고 불러."라고 말했다.


"... 아나스타시아?"


"아.나. 라고 불러. 친한 사람은 다 그렇게 부르니까."


"아나...?"


"... 나도 아카, 라고 부를게."


"... 아카?"


"애칭이야. 친하면 애칭으로 부르라고 아빠가 그랬어."


"... 그... 그래."


아카드는 대답할 말을 머릿속으로 검색해보았지만 그가 읽은 어떤 책에서도 이런 상황에서 해야할 말이 실려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책이란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다.


"... 그럼 학교에서 보자, 아카. 빨리 나아."


그녀는 환하게 웃고 병실을 달려나갔다.(간호사는 다시 주의를 주었다.) 아카드는 그녀가 머리칼을 팔랑거리며 달려나가는 것을 취한듯이 계속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녀에게도 친구가 생긴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카드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멍하니 시선을 돌리다가, 문뜩 창문에 언뜻 비친 자신이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다는 것을 알고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작가의말

테르센트는 4계절이 뚜렷한 편이 아니며, 적도의 온도가 티프소에 비해 낮고 극지방은 티프소보다 따뜻합니다. 북반구를 기준으로 여름은 7주부터 12주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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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8화. 홀로 남은 소녀 +2 15.04.05 183 9 20쪽
» 7화. 친구들 15.04.03 231 9 25쪽
7 6화. 축복받지 못한 아이 15.04.02 260 11 11쪽
6 5화. 게랄드와 예리엘 15.04.01 309 11 22쪽
5 4화. 병사없이 이기는 법 15.04.01 303 12 16쪽
4 3화. 순백의 장군 +1 15.03.31 394 13 14쪽
3 2화. 제국을 지키는 노인 15.03.30 487 13 14쪽
2 1화. 죄수 장군 +2 15.03.30 721 19 13쪽
1 언젠가의 이야기 +5 15.03.30 1,119 21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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