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쳐 죽이기 위해서요
서원비는 악몽을 꾸었다.
피바다가 된 산장.
처참하게 흩어진 가족들의 시신.
그리고 그 위에 나신으로 서 있는 핏빛처럼 붉은 눈의 사내.
사내의 적안(赤眼)과 마주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에도 서원비는 검을 뽑으며 달려들었다.
- 호오, 감탄스러운 의지로군. 내 혈안을 보고도 뛰어들려고 하다니, 이런 산중에 희귀한 재능이 있었어.
끔찍하게 찢긴 가족들의 시신을 보고도 누가 참는단 말인가.
하지만 사내의 손에서 나오는 무형의 경력에 서원비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복수심에 미쳐 날뛰는 살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강호는 재밌게 돌아가겠지.
사내의 오싹한 미소가 조금씩 시야에서 흐려졌다.
- 살의(殺意)에 미치면 미칠수록, 네 오성(悟性)이 열릴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잃는 서원비의 귀로 사내의 말이 들려왔다.
- 내가 주는 이 선물은 네게 더없는 축복이자, 지독한 저주가 될 것이다.
불과 다섯 달 전의 일.
잠이 들 때마다 이 악몽에 시달렸다.
언제쯤 이 악몽을 끝내고, 살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 이 적안의 사내를 찾아 죽이고 나서겠지.
* * *
서원비는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황당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길의 한 편에 뒹굴고 있는 세 구의 시체.
서원비는 그들의 피를 뒤집어쓴 채, 시체들 옆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시체들을 힐긋 살폈다.
“동량산채 척후들이로군.”
그리고 서원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동생, 악몽이라도 꾼 건가. 괴로워하는 것 같던데.”
서원비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꺼냈다.
“멸악회(滅惡會)에서 오셨군요.”
사내는 잠시 답하지 않고 서원비를 살폈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시체들을 단번에 알아보고, 저를 경계하지 않는 태도를 보고 짐작했습니다. 드디어 멸악회에서 찾아왔다고.”
“그렇게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데, 안 찾아올 수가 없지.”
풍문이 사실이었다.
- 악인들을 벌하고 다니다 보면, 멸악회는 알아서 다가올 걸세.
서원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원비라고 합니다.”
“장이표다. 멸악회에 들어오고 싶은 이유는.”
피를 흠뻑 뒤집어쓴 서원비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악을 쳐 죽이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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