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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아아 님의 서재입니다.

몸속에서 벌레 군대를 키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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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아아
작품등록일 :
2022.05.11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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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6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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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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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17화

DUMMY



냉장고를 열어 맥주 네 캔을 꺼내 식탁에 놓으면서 황윤건이 말을 이어갔다.


"그놈의 도파민 수용체 좀 쉬게 해줘요. 아직 재활 중인데 술이 웬 말입니까. 의존과 중독 가능한 모든 기호품은 금지. 담배도 안 돼요. 안 피는 것 같긴 하지만."


"일주일에 딱 한 번 치팅데이 정해놓고 마셔도 안 되나요...?"


난처한 얼굴로 윤시현이 입맛을 다셨다.


"한 달 후부터는 가능하고 그 전까지는 안 됩니다. 코카인 흡입하면서 생긴 비염 때문에라도 조심하는 게 맞아요. 그래도 내가 지난 번에 사온 것들은 다 먹었죠?"


"일주일도 안 걸렸어요. 그래서 다음 식단은 이건가요?"


황윤건이 양 손 가득히 들고 온 비닐백 안을 살피며 윤시현이 말했다.


"네. 충분한 채소와 함께 하루 최소 200g 이상의 육류. 종류 큰 상관 없는데, 닭고기만으로 제한하면 안 됩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 중 하나는 꼭 들어가야 해요."


"한 끼가 아니라 하루 200g이요? a piece of cake! 근데 꼭 무슨 진료받는 느낌이에요. 와, 한우네."


스티로폼 케이스에 포장된 한 근짜리 한우 갈비살을 꺼내며 윤시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활센터에 왔다고 생각해요. 입원기간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VIP 코스인데 심지어 재택에서 치료진이 왕진까지 옵니다. 훌륭한 조건이죠."


"황윤건씨는 왜 의대 안 갔어요? 그 성적이었으면 충분히 갔을 텐데."


"의사가 생각보다 활동범위가 좁고 자유도도 떨어져요. 게다가 나는 사람을 살리는 쪽보다는 다른 데에 관심이 더 많거든요."


비닐백에 있던 채소를 냉장고 안에 넣으면서 황윤건이 대답했다.


"...곱씹어볼만한 이야기네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지금 내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상황에 놓여있는지도 새삼스레 깨닫게 되고요. 저도 눈치 없는 편 아니니까, 이제 중간중간에 무서운 말은 좀 안 섞으면 안 될까요?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윤시현은 그다지 무서운 기색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나를 도와줄 해커가 꼭 필요한, 아주 절실한 상황이라서 자기를 애지중지 돌보고 있다고 착각한 게 아닐까 싶다.


하긴 면식도 없는 사람 중독도 풀어주고 이렇게 계속 자주 찾아와서 음식도 사다주고 하니 충분히 착각할만한 상황이긴 하다.


물론 이 여자가 제대로 도와준다면 상당히 편해질 것 같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꺼려지는 건 이 여자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밖에다가 풀어버리는 상황이 될 것이다.


아직 수퍼히어로 놀이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는데 CIA에게 잡혀가 해부당하고 싶지는 않다.


은연중에 자꾸 이 여자를 위협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그런 불안함 때문이겠지.


그래도, 뜻하는대로 흘러가지 않아 그냥 죽여버리는 쪽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다.


그거야말로 최악의 수가 아닐까. 더 나은 방향이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 경험이 좀 두터우면 좋겠는데. 아무리 나대봐야 난 아직 물정 모르는 애송이일 뿐이다.


그래서 이럴 때마다 현명한 답이 딱 떠오르지는 않는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이라는 게, 꼭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닌데도 상대방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게 되니까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에서 드린 말씀이고. 제가 하는 일이 보통 사람들의 눈치만으로 가늠할만한 게 아니기도 하고요."


꺼낸 맥주 네 캔을 빈 비닐백에 담은 후 황윤건이 말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요구하시니 고려해보겠습니다. 알아서 잘 하자- 라고 해서 정말 잘 하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겠죠."


싱긋 웃으며 황윤건이 비닐백을 들고 나가려 할 때, 윤시현이 입을 열었다.


"저..."


"네?"


"저 초밥도 좋아해요."


와, 이 여자 못 당하겠네.


그래도 장난스럽게 배시시 웃는 게, 몇 주 전 처음 만났을 때 봤던 산 송장같은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 한편으로는 뿌듯한 마음도 든다.


가끔 있는 이런 느낌 때문에 의사들이 그 힘든 와중에도 의사 일을 계속 하는 것이겠지.


*******


가까스로 기말고사를 통과한 후, 여름방학에 해볼만한 일들로 짜고 있던 모든 계획은 학회에서 전달된 소식 하나로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미국 애리조나에서 네글러리아 파울러리Naegleria Fowleri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소위, 뇌를 먹는 아메바.


증상이 나타난 이후에는 급히 치료에 들어간다고 해도 치사율이 워낙 높기 때문에, 인간에게 감염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진핵생물 중 하나이다.


1960년대 호주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처음으로 보고된 이 아메바와 비슷한 벌레는, 그 위명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황윤건이 샘플을 접할 수 없었던 종류였다.


소식을 듣고 학회 동향과 뉴스 등을 검색한 후 황윤건은 곧바로 미국행 항공편을 예매했다.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이놈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어차피 취수원으로 쓰는 하천과 지하수 전부를 소독할 수는 없기 때문에, 애리조나 주 당국은 상수도원 이하에서만 염소 소독 조치를 취할 것이다.


높은 온도에서 번식하기 쉬운 놈들이라, 7월 초의 무더운 애리조나라면 무작위로 수원을 쓸다 보면 몇 군데에서는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바로 미국행을 결심했다.


작년에 연구실 나갈 때 혹시 국제 학회로 따라가 보조 노릇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미 미국의 5년짜리 학생 비자는 받아놓은 상태였다.


국제면허증을 발급받고 짐을 싼 후 바로 출국 준비를 했다. 부모님에게는 미국 쪽 학회에 따라가게 되었다고 둘러대고.


항공료, 숙박비, 차량 렌트비 등 제반 여행 경비는 약쟁이 잡놈이 남겨둔 현금으로 해결했다.


그놈의 금고 안에 미국 달러도 몇 다발씩 쏠쏠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굳이 환전은 필요 없었다.


돈도 없는 학생이 비지니스석에 좋은 호텔에서 머무는 건 아무래도 좀 수상할 것이다.


돈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이코노미석으로 이동했고, 싸구려 SUV를 렌트하여 허름한 모텔 중심으로 숙박했다.


침대 매트리스와 침구 사이에 진드기뿐만 아니라 벼룩과 이를 발견한 후에 실소를 흘리기도 했다.


이런 비위생적인 곳에서 대체 어떻게 자라는 건지.


벼룩과 이를 충란 형태로 흡수하고 보관한 후, 모텔 전체의 벌레들을 싹 다 소거시키는 연습을 했다.


투숙한 방에서 감지할 수 있었던 진드기, 벼룩, 이, 파상풍균, 녹농균, 여기저기 피어있는 곰팡이들까지 전부.


인지 가능한 공간 전체에서 벌레들을 전멸시키는 일 자체는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 몸 안의 벌레는 그냥 두고, 그 주변의 벌레들만 없애는 게 어려울 뿐.


사람의 장내세균총 안의 벌레까지 다 죽여버리면 그 다음날 그 사람은 뭘 먹어도 폭풍설사와 소화불량에 시달릴 것이다.


꼭 유익균뿐만은 아니더라도, 장내세균총이 사라지면 사람은 음식을 제대로 소화해낼 수가 없다.


하루종일 운전하느라 피곤한 날에는 모텔 전체의 벌레들을 죽이다가 간혹 몇몇 빼먹은 숙박객 몸 속의 벌레까지 다 죽여버리는 바람에 뜨끔하기도 했다.


아마 그 다음 며칠 동안 원인불명의 설사에 시달릴텐데 그저 미안한 마음이 들 따름이다.


아침마다 햄버거와 샌드위치를 사들고 지도를 보면서 차를 몰아 애리조나의 하천 지역을 계속 뺑뺑이 돌았다.


혹시나 길을 잃고 조난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월마트에서 비상용 크래커, 생수, 싸구려 침낭도 사서 차에 실어놓았다.


네글러리아 파울러리가 발견된 하천들은 이미 조심하라는 노티스 간판이 세워져있기 때문에 식별이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더워도 이곳에서 물놀이하거나 식용으로 쓰지 말라는 경고였다.


민물에는 이놈 말고도 오만가지 벌레들이 있기 때문에 사실 분간해내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원래 세균을 먹이로 삼는 놈들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간 뇌신경계의 성상세포astrocyte를 먹기도 한다고.


결국 놈들의 이러한 특이한 식성 때문에 '뇌를 먹는 아메바'라는 별칭이 붙은 셈이다.


일단 내 몸 안에 키우고 있지 않았던 놈들을 전부 흡수한 후, 딱 백 가지 종류씩으로 나눠서 시험해보았다.


성상세포를 게걸스레 먹는지 안 먹는지. 아세틸콜린으로 유도하면 잘 따라오는지.


그 얼토당토 않은 테스트를 무려 삼 일 내내 반복했다. 엄청 피곤한 작업이었지만 이 번거로운 미국행의 유일한 목적이었으니 도중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맛대가리도 없이 짜기만 한 크래커를 씹어먹으며, 거의 체력도 의지도 떨어져가던 와중에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 벌레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어떻게 보면 HIV보다 훨씬 무서운 벌레를 손에 넣은 셈이다.


일주일 넘게 땡볕과 무더위 속에서 땀을 질질 흘리며 돌아다닌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차 뒷자리에 누워 심신을 짜릿하게 관통하는 희열의 여운을 느끼는 와중에, 문득 막연한 걱정도 한 조각 떠올랐다.


여자 사귀고 만나는 것보다 이런 게 더 좋으면 젊은 남자로서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남다른 능력이 있다고는 해도 변태나 오타쿠의 길에 빠져 정상 범주의 사회성을 잃을 수는 없는 법이다.


여전히 입에서는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황윤건은 머리를 탈탈 털고 일어나 허름한 숙소로 애써 차를 몰고 돌아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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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속에서 벌레 군대를 키우기로 했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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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9화 +1 22.05.27 2,272 70 9쪽
19 18화 +7 22.05.26 2,373 7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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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화 +4 22.05.12 3,605 117 10쪽
4 3화 +13 22.05.11 3,889 149 10쪽
3 2화 +5 22.05.11 4,131 142 9쪽
2 1화 +10 22.05.11 5,149 147 9쪽
1 < 프롤로그 > +4 22.05.11 5,857 144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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