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농사짓는로 님의 서재입니다.

마지막 봄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SF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최근연재일 :
2021.02.13 09:16
연재수 :
116 회
조회수 :
14,599
추천수 :
182
글자수 :
530,484

작성
17.08.22 00:16
조회
362
추천
7
글자
10쪽

4화

DUMMY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주저앉아 있었는지 소녀의 후드 재킷 등판에 눈이 쌓여 있을 정도였다. 점차 절망감은 소녀를 짓누르는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소녀는 사실 여태까지 외부인과 마찰을 종종 빚었던 적이 많았고, 다툼이 벌어졌던 적도 많았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홧김에 저질러 버린 ‘살인’의 트라우마가 다시 한 번 소녀의 머릿속을 옥죄었다.


주저앉은 다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설사 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더라도 살인은 엄연히 범죄였다. 지금까지 활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정부의 공권력에 반역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만약 목격자가 있어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 어디에서도 소녀는 환영받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소녀는 허술하고 붕괴된 치안에 대해서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지만 막상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소녀는 처음으로 기댈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매일 받으며 숨어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감옥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생활 자체는 질 나쁠지언정 적어도 얼어죽지는 않을 테고, 배를 곪을 일도 없을 테니까.


소녀는 정신을 잃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일어서야만 했다. 아까의 그 가엾은 남자처럼 그대로 눈밭에 파묻혀 죽기는 싫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소녀는 허기진 배와 무거운 다리를 끌고 한 걸음 한 걸음 목적지 없이 걸어 나갔다.


우선은 동사하지 않으려면 묵을 곳이 필요했다. 돈이 있다면 근처 여관이나 숙박집에 묵을 수는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소녀는 가방을 잃어버려 땡전 한 푼도 없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아까 그 재수 없는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그저 살기 위해서 도망친 소녀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이 춥고 배고픈 소녀가 힘겹게 다리를 끌고 도착한 곳은 형형색색의 천막을 쳐놓고 생필품들이 진열된 작은 시장이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몇 안 되는 가게(엄밀히 따지면 가게랑은 거리가 멀었지만-)들은 슬슬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시장 방문객의 수는 눈에 띄게 적었다. 이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문 닫는 시간을 노려 물건을 싸게 구하러 온 사람들 같았다.


소녀는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지만 바로 옆에서 배고픈 소녀를 미칠 듯이 유혹하는 향기에 이끌려 그만 걸음을 멈추어 섰다. 옆에는 점원이 오늘 아침에 구웠지만 시간이 지나 신선도가 떨어진 것 같은 빵들을 하나 둘씩 재고 상자에 주워 담고 있었다. 소녀는 그 빵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았지만 빵집 주인은 소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할 일을 계속할 뿐이었다.


소녀는 가만히 서서 기회를 보다가 빵집 주인이 가득 찬 상자를 가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려고 몸을 돌렸을 때, 재빨리 진열대로 달려가 가장 가까이 있는 빵 두 개를 양손으로 집어든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잽싸게 뛰어 도망쳤다. 지금 소녀에게는 양심의 가책 따위보다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게 더 우선이었다. 구운 지 오래되어 굳어버린 빵을 양손에 꽉 움켜쥐고 소녀는 또 다시 달렸다. 조그만 시장을 지나치고 나서도 한참을 달려 멈추어 서서 소녀가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다행히도 쫓아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도둑질 정도는 이제 능숙했다. 도둑질뿐만 아니라 손을 더럽히는 짓은 이미 많이 했었다. 애초에 지금 소녀가 있는 곳은 수도권 지역보다 치안이 나쁜 빈민가이고,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소녀가 이곳에 살기로 마음먹었던 것도 어쩌면 이러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어린아이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면 도둑질 정도는 권장이 아니라 필수였으니까.


이제 먹을 것을 구했으니 얼어죽지 않을 잠자리가 필요했다. 소녀는 어디가 좋을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예전에 친구가 부모님과 다투고 집을 나와서 주차장이나 지하철역에서 노숙을 자주 했었다는 말을 떠올렸다. 소녀는 눈 덮인 아파트 단지를 살펴보다가 ‘한 시간 이후부터 주차요금 50원’ 이라고 써 붙여진 종이와 그 옆에 노란색의 점멸등이 꺼져버린 안전바와 텅 빈 경비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소녀는 그대로 지하 차도를 따라 내려갔다.


해가 거의 져서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소녀의 머리에는 눈이 쌓이지 않았다. 재킷에 쌓인 눈을 탈탈 털어내고는 빵을 주머니에 숨겼다. 밀폐된 공간에서 운동화 발소리를 울리며 지하 2층 주차장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2층을 내려가 주차장 플랫폼에 처음 발을 내딛자 넓고 넓은 지하 주차장의 실태가 고스란히 소녀의 눈앞에 비춰졌다. 질서가 붕괴하기 전 주차장에는 주차된 차량 수십 대가 병렬로 빼곡이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차량 대신 머리가 헝클어지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채로 패딩 점퍼를 수 겹이나 껴입은 노숙자들이 수십 명씩 벽에 줄지어 앉아 기대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혼자 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고, 서로 모여 잡담을 하며 떠드는 무리도 있었다. 따로 떨어져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술에 취한 듯 얼굴이 벌개진 채로 고함을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소녀는 이러한 실태를 보자마자 신물이 났지만 딱히 뾰족하게 묵을 곳이 없었다. 소녀는 재킷에 달려 있던 후드를 푹 눌러 써서 얼굴을 가렸다.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천천히 노숙자들이 없는 곳을 찾아 걸어 들어갔다. 소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서로 모여서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며 낄낄거리던 노숙자 무리들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멍하니 땅바닥을 보던 사람들도 소녀를 쳐다보았다.


떠들썩하던 장내에 순간적으로 차가운 정적만이 공기를 갈랐다. 이들은 소녀를 몇 초 동안 응시하더니 이내 자기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다. 소녀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녀는 이러한 시선들을 모두 의식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노숙자들은 한동안 소녀를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걸어가는 소녀를 보고 한 노숙자가,


“어이, 꼬맹이. 네 꽁무니에 찬 거 진짜냐?”


하고 말을 걸어 온 게 다였다. 소녀는 권총을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으로 아차했지만 겉으로는 별다른 감흥 없다는 듯이 한 귀로 흘렸다.


신뢰할 만한 사람이 없는 주차장에서 잔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지만 계속 걸어 들어가 주차장의 모퉁이 가장자리로 향했다. 소녀는 몇 안 되는 주차된 검은 색 중형차 트렁크에 반쯤 누워 기댄 채 곯아떨어져 있던 노숙자 옆에 놓여 있던 생수병을 빼앗아 뚜껑을 열고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주차장의 가장 모퉁이 가장자리에서 벽에 등을 기댄 후 엉덩이를 깔고 털썩 주저앉았다.


난방이 되지 않는 바닥은 차가웠다. 하지만 살인적인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바깥보다는 아무래도 사정이 나았다. 소녀는 주저앉은 채로 재킷 주머니에 넣어 온 차갑게 굳어버린 빵 두 개를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미 굳어 버려서 맛은 별로였지만 급한 대로 이 배고픈 소녀의 허기를 달래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다.


소녀는 빵들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는 최대한 아직까지도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노숙자들의 시선을 경계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인 소녀의 눈꺼풀은 자꾸만 무거워졌다. 소녀는 이윽고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로 긴장이 풀리자마자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지하 주차장에는 햇빛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소녀가 눈을 떴을 때에도 아침 따뜻한 햇살을 소녀가 직접 느낄 수는 없었다. 잠에서 깬 소녀는 새우잠을 잔 탓인지 목이 뻐근해 움직이기 힘들었고 팔다리가 저리고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찢어지게 하품을 하고 난 후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몸이라도 풀려는 순간 소녀는 무엇인가 허전한 감각을 눈치챘다.


‘젠장!’


소녀는 이를 빠득 갈며 재빨리 노숙자들 무리로 달려갔다. 이런 저런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이상한 게 없는지 초조한 얼굴로 한 명씩 서둘러서 확인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남자가 주차장 한가운데에서 주위 군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물건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소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소녀를 완전히 배제한 채 바글거리며 모여 있는 군중들을 향해 소녀가 먼저 한 발 내딛으며 낮게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려줘.”


그때서야 군중의 우두머리가 고개를 돌려 소녀를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삐죽 솟고 아무렇게나 뻗은 장발을 가진 털보였다. 그가 입고 있는 이물질로 얼룩진 가죽 재킷에서는 의문의 역한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건 꼬맹이가 다룰 물건은 아니지. 안 그래?”


털보가 말하고는 서투른 솜씨로 권총을 손가락으로 돌렸다.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건 진짜 총이야.”


관중들이 술렁였다. 털보는 여유를 과시하려는 듯이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걸고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리며 소녀를 약 올렸다. 소녀는 그런 털보를 후드에 반쯤 가려져서 그늘진 얼굴 속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매섭게 쏘아보았다.


“미안하지만 이건 받아가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 글 설정에 의해 댓글을 쓸 수 없습니다.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마지막 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6 26화 17.10.16 143 1 10쪽
25 유령 도시 +1 17.10.10 153 2 11쪽
24 24화 17.10.04 154 2 9쪽
23 23화 17.10.01 148 1 6쪽
22 21화 +1 17.09.28 145 4 10쪽
21 21화 +2 17.09.26 175 3 9쪽
20 20화 17.09.25 169 2 8쪽
19 19화 17.09.23 155 3 8쪽
18 18화 +1 17.09.20 157 2 8쪽
17 17화 +1 17.09.17 205 3 8쪽
16 16화 +1 17.09.13 188 2 9쪽
15 15화 +2 17.09.12 170 2 8쪽
14 14화 +2 17.09.08 190 2 7쪽
13 13화 17.09.01 185 2 10쪽
12 인연 +1 17.08.28 229 2 6쪽
11 11화 +1 17.08.28 225 2 9쪽
10 10화 17.08.27 216 3 8쪽
9 9화 17.08.26 247 3 10쪽
8 8화 17.08.25 265 3 7쪽
7 7화 17.08.24 273 3 9쪽
6 6화 17.08.24 326 5 9쪽
5 5화 +1 17.08.22 357 7 9쪽
» 4화 17.08.22 363 7 10쪽
3 3화 17.08.21 450 8 9쪽
2 2화 +2 17.08.21 541 9 9쪽
1 세상 끝에서 +3 17.08.21 1,006 14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