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단편집(2)
이야기할 땐 앞뒤 붙여주면 좋을 텐데.
얼굴만 예쁘면 다인 줄···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다.
“뭐를요?”
모네뜨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음, 내가 진짜 무르고 싶은 게 있긴 한데 그건 아빠가 싫어할 것 같고. 우선 지금은···네가 귀족인지 몰라보고 하대한 거. 어때? 원해?”
“어떻게 무르려고요?”
“뭘 어떻게 해. 친구가 아니라 사교계의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는 거야. 서로 격식 차려야 하니까 너도 내 이름 부르면 안 되는 거고. 이해되세요? 위드빌 공자님?”
‘우리···언제부터 친구였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모네뜨. 그 비싼 이름 돈 안 내고 불러도 되니까 지금이 좋은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향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고 지중해의 강렬한 햇볕에 미소 주름이 더욱 도드라졌다.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흘겼다.
“나도 거울 보면서 살아서 안다니까. 이제 그만.”
“입가에 지는 주름요.”
“주름이 왜?”
“···너무 아름다워서.”
친구라도 이런 말은 결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말은 뱉어버렸다.
“그래? 주름이 아름답다라···.”
그녀는 혼잣말하듯 그 문장을 되뇌었다.
“주름은 여자에게 서글픈 단어잖아? 그런데 아름답다는 말과도 나름 어울리네. 네가 한 말이라 그런지 기분도 안 나쁘고.”
어느새 저택 앞이다.
“로시네? 어떻게 할지는 모두 정한 거지?”
“5시에 데리러 온대요. 등대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그렇게 끝내준다나? 저녁은 제가 주방에 얘기해 놓을게요. 살바토레 아저씨 몫까지 넉넉히요.”
살바토레씨가 인상을 찌푸렸다.
패키지 여행에 묶여 있는 강매 쇼핑에 끌려 온 표정이다.
“마차는 저희가 준비하겠습니다. 등대까지 아가씨들 걸음으로 2시간은 넘게 걸릴 거예요. 게다가 밤길은 위험합니다. 특히나 항구 주변은요.”
살바토레씨의 말에 로시네의 입이 귀에 걸렸다.
“끼야 앗! 오늘 마차 타보는 거야? 아이 신나!”
좋아 어찌할 줄 모르는 로시네를 모네뜨가 타일렀다.
“이제 그만, 나머지는 각자 준비하기로 하고 우리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들 있다가 뵙지요.”
그녀는 내게 고개를 돌리고는 ‘잘 가, 있다 봐’라며 입술을 움직였다.
‘저게 뭐라고. 심장에 무리가···.’
살바토레씨는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아, 음식은 1인분 더 준비해 주세요. 한 분 더 오실지도···.”
‘펠릭스씨를 염두에 둔 건가? 그분이 함께한다면 든든하지.’
“알겠어요, 살바토레 아저씨. 주방에 얘기해서 푸짐하게 준비하라 할게요.”
그녀들이 저택으로 들어간 후 우리도 움직였다.
“그런데 마차요. 도리아씨에게 얘기 안 해도 될까요?”
살바토레씨는 어깨를 으쓱했다.
“공자님이 필요한 것은 모두 제공해 드리라 말씀하셨답니다.”
“다행이네요. 참, 크리스는 집이 어느 쪽이에요?”
“응? 나는 이 방향으로 계속 내려가면 되는데?”
“그럼 있다가 크리스 먼저 태워 올까요?”
크리스가 손사래를 쳤다.
“말은 고마운데 걸어 올 수 있는 거리야. 그럼 있다가 보자고!”
“네, 고마워요. 덕분에 제노아 야경을 다 보게 되네요.”
“있다가 기절하지나 마.”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두 가지 이유인데 말이지. 가보면 알아. 아하하. 살바토레씨도 있다가 봐요.”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든 크리스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
“제발요. 펠릭스씨!
펠릭스씨는 저녁에 나가자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난 잠시 자중하고 있어야 해. 뭐가 씌웠었는지 주제넘게 떠들다가 며칠 고생했잖아.”
“그랬었죠, 그땐 저도 깜짝 놀랐어요. 지금은 괜찮은 거예요?”
-끄덕끄덕
어떡하지?
저번과 같은 습격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머리가 차가워졌다.
내가 처한 상황과 처지를 생각하면 이게 맞는 행동인가 싶다.
그녀를 닮은 어떤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서는···.
「그게 어때서?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데?」
「릭? 아니 여태 뭐하다 지금 나타난 거예요? 아니? 잠깐! 지금 전 당신한테 한마디도 안 했는데요? 뭘 듣고 그런 얘기를 한 거예요?」
「전부는 아니고, 어느 순간부터 너의 생각들이 조금씩 들린다. 그래서 굳이 말을 걸지 않았던 거야.」
그러고 보니 내 몸도 릭의 의지대로 움직였잖아?
내 머릿속에 이미 수많은 내가 있는데···.
「모, 중요한 건 아니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야. '지금 이 순간 너와 함께한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라.' 그게 인생을 사는 방법이라고 배웠다.」
「어라? 그거 톨스토이 단편집 ‘세 가지 질문’에 나온 말인데. 원래 있던 말이었어요?」
「응? 너 머릿속에 있는 책에서 봤는데? 톨스토이···맞는 것 같아.」
「읔, 릭! 아무리 제 안에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함부로 남의 개인정보 열람하는 거 아니에요. 다음부터는 저한테 물어보고 보세요.」
「내가 거짓말하면 넌 알 수가 없잖아? 큭. 농담이야. 앞으로 조심할게. 아! 그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제일 감명 깊었다.」
「저도 그랬어요. 릭. 덕분에 마음이 좀 가벼워진 것 같네요. 고마워요.」
그래, 여기 처박혀서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
저택에 꽁꽁 숨어있는다고 문제가 풀리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실라부인도 말했었다.
눈에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소중히 하라고.
「아! 놔! 이 삐리리. 또 다른 임무가 있다고 했잖아! 왜 같이 들어 놓고 다 까먹어?」
「맞다! 릭도 이해해 주세요. 대충 둘러봐서 알겠지만 지금 머릿속이 정상이 아니에요. 이러다 갑자기 죽을 수도 있데요.」
「야야. 말은 바로 해야지. 지금 너 머릿속에 몇 개의 기억들이 존재하고 그 기억들이 서로 섞여가고 있다며? 기한은 대략 6개월이다. 갑자기 죽는 게 아니라.」
졌다.
머릿속을 꿰뚫고 있는 사람과는 논쟁이 안된다.
「잘되었네요. 안 그래도 저 기억력 깜빡깜빡하니까 옆에서 잘 봐주세요.」
“펠릭스씨. 슬슬 준비하세요. 5시까지 가야 하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너 여태껏 내가 한 얘기 뭐로 들은 거야? 나 안 간다고!”
“제가 오늘 밤도 습격받을지 모르거든요. 게다가 그들은 그 날밤 저뿐만 아니라 델라볼타씨도 노리고 왔었어요. 혹시 알아요?”
“뭘 알아?”
펠릭스씨는 왠지 내 말에 호기심이 동하는 눈치다.
'아! 전에 그가 관심 있어 했던 거.'
“피렌체요!”
“응? 피렌체가 왜?”
내게 몸을 숙인 그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암살자들이 피렌체에서 왔을 수도 있잖아요. 중세 격동의 이탈리아에서 균형의 추가 어떻게 움직이게 될지···그중 한 놈 잡아서 고문해 보면···. 혹시 또 알아요? 기가 막힌 고급 정보를 마구 털어놓을지요.”
저번 식사때 펠릭스씨는 이곳의 정세에 관심이 많았었다.
“네 생각에는 오늘 밤도 그들의 습격이 있을 것 같다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확신하는데?”
“아까 로렌초 성당 앞에서 일행들과 제법 큰 소리로 떠들었거든요. 저녁에 등대 구경하러 간다고요. 저의 동선을 궁금해하는 누군가는 듣지 않았을까요?”
펠릭스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손가락을 올려 미간을 문질렀다.
“그럴 수도 있겠네. 사실 난 그게 궁금했거든.”
“네? 어떤 거요?”
이번엔 펠릭스씨가 던진 미끼에 내가 물린 것 같다.
그는 좀처럼 말을 잇지 않았지만 너무 궁금해 하는 내 모습에 입을 열었다.
“너와 델라볼타씨가 밖으로 나올지 그들이 어떻게 알았을까···하는 거. 아니, 왜 나갔을가 하는거 말이야.”
“그렇긴 하네요. 델라볼타씨가 바람이나 씌자면서 테이블로 왔었죠.”
“그랬다고 들었어. 게다가 그의 제안이었으니 자기 목숨걸고 너를 넘기는 짓은 안 했을 것이고.”
“네, 괴한들은 델라볼타씨를 죽여서라도 데려가려 했거든요.”
“그럼 너와 그를 제외한 누군가가 있다는 건데···. 거기서 막히더라고.”
그러게. 생각해보니 맞는 말인데?
「나중에 델라볼타씨에 슬쩍 돌려서 물어봐. 너를 데리고 나가게끔 만든 사람을 알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그런 분위기를 만든 사람이 있었을 거야.」
「그러게요. 연회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을 텐데 말이에요. 나중에 티 안 나게 물어봐야겠어요.」
어느새 펠릭스씨는 내 주위에서 일어난 일에 빠져드는 눈빛이 되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요!”
“응, 여태 얘기했잖아. 또 뭐가 남았나?”
“오늘 밤이 절호의 기회라는 거예요! 게다가 저희 둘이 있으면 웬만큼은···안 밀릴 자신도 있고요. 안 그래요?”
말은 이렇게 했다만,
제발 별일 없이 끝내고 오면 좋겠다.
“그래, 스트로치씨 여관에서 너···. 나쁘지 않은 능력이었지. 큭. 그러고 보니 포코 무리는 잘하고 있을지 궁금하네. 걔네 파티 솔직히 좀 걱정되는데.”
그러고 보니 펠릭스씨도 혼자네.
“펠릭스씨도 동료들이 없는 거예요?”
“아마 피렌체로 올 거야. 거기서 만난다고 했으니까.”
“그럼 펠릭스씨는 왜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왜 난 출발점이 여기지? 모, 나를 필요로 하는 뭔가가 있나 보네.”
나 스스로도 민망하고 하기 싫었지만,
최대한 10대 소년이 할만한 귀여운 짓을 해봤다.
'불쌍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마구 깜빡거리기'···같은거.
펠릭스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 그만 됐으니까 좀 떨어지라고. 그리고 방금 그 유도신문 괜찮았어. 그 이유가 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아마도···”
펠릭스씨는 뒷머리를 긁적이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말을 조심하는 것 같다.
“그 아가씨댁에 5시까지 도착해야 한다는 거잖아? 맞나?”
-끄덕끄덕
“그럼 있다 보자. 나도 이것저것 준비를 해야겠네.”
*
-타닥 타닥
살바토레씨, 펠릭스씨를 포함한 우리 일행은 마차를 타고 도리아씨 저택을 출발했다.
나름 도리아씨도 귀족이니까 영국 왕실의 마차 종류를 생각했는데···.
살바토레씨가 몰고 온 것은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포장마차 형태다.
마차는 두 마리 말이 끌고 있는데 그중 한 마리에 살바토레씨가 올라탔다.
마부석으로 보이는 곳엔 펠릭스씨가 앉았다. 실내에 앉을 것을 권했는데, 밖에 있는 게 외부의 공격에 방어하기 좋다며 거절했다.
어느덧 모네뜨의 저택에 도착했다.
문 앞의 크리스가 우릴 발견하고 마차에 올랐다.
하인에게 얘기하자 잠시 후 모네뜨와 로시네가 나왔고, 뒤따라온 하인들이 마차 짐칸에 커다란 음식 바구니를 잔뜩 실었다.
마차에 올라탄 후,
한동안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는 갈색 눈에 어울리는 은은한 금빛 드레스와 화려한 코트를 걸쳤다. 코트 아래 요철 모양으로 파인 가슴 위로는 이슬람 풍 은빛 목걸이가 반짝인다.
“흠흠, 준비되셨나요? 여러분이 기다리시던 제노아 야경투어! 지금 출발합니다. 아 하하하!”
크리스의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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