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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의 아리시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을령
작품등록일 :
2015.03.16 00:00
최근연재일 :
2019.04.08 22:19
연재수 :
72 회
조회수 :
37,678
추천수 :
775
글자수 :
553,977

작성
15.03.28 16:18
조회
642
추천
15
글자
22쪽

제4장 - 사람들은 우리를 <배신자 카니>라고 부르지.(7)

DUMMY

한 시간의 지루한 추격전 끝에, 어느새 온통 붉은 빛의 대지 위로 푸릇푸릇한 풀들이 돋아난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 말은 곧, <붉은바다의 분지>의 끝이 보인다는 것. 짙은 황토 빛은 서서히 옅어지고, 녹색의 잎들이 자라난 나무들과 색색의 들꽃까지 곳곳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 또 다른 토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벨로프 남작의 영지 토프렌스의 성벽이었다.

걸음을 멈춘 검은 인영은 작은 언덕 위에 솟아난 듯, 홀로 튀어나와 있는 바위 뒤에 기대어 서서 멀리보이는 토프렌스의 붉은 성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아진 달 사이로 어슴푸레 태양 빛이 비춰오고 있었다.

빠르게 달려오던 아리시아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더니 급기야 보통의 걸음으로 검은 인영의 뒤로 다가갔다.

분명 아리시아가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검은 인영은 앞에 보이는 성벽의 정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인영의 손에는 수많은 오색의 보석들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푸른색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그녀가 뒤돌아선 인영의 뒤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르마스님?"


인영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 아리시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느린 손놀림으로 얼굴을 덮고 있던 로브를 걷었다. 백금발의 청년이 가늘게 뜬 눈을 초승달처럼 구부리며 웃고 있었다.


"아, 들켜버렸네?"


검은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다는 것 말고는 전혀 변한 것이 없는데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아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철봉을 꼭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 정체가 뭐죠?"


하지만 르마스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르마스의 앞으로 다가온 이리시아의 철봉이 르마스의 허리를 베어갔다. 곧 거대한 유성이라도 떨어진 듯, 커다란 소리가 붉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발생된 두 번째 기파는 더욱 커서 흩날리던 모래먼지마저 저 멀리로 씻겨냈다. 보통사람이 서있었다면 그 기파에만 맞아도 몇 미터쯤은 날아갔을 법한 파괴력이었다. 붉은 모래먼지가 사라진 곳에, 봉의 중간쯤을 잡고서 의혹이 담긴 얼굴로 르마스를 노려보고 있는 아리시아와,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손을 호호, 불어가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엄살을 떠는 르마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난 집사라구. 이런 싸움은 기사들이랑 해.”


무슨 소리, 적어도 지금까지 만났던 어느 기사도 아리시아의 공격을 저렇게 간단하게 막아내지 못했다. 아리시아는 천천히 방금 있었던 그의 몸놀림을 떠올렸다.

두 번의 일격,

처음 르마스의 허리를 향해 휘둘러진 일격을 그는 푸른색 지팡이를 이용해 간단하게 막아버렸다. 죽일 의도는 없었으므로 힘만을 이용해 이루어진 공격이었다고는 하지만 보통의 인간이라면 어림도 없는 힘이 실린 공격이었는데 그것을 막아내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태연해 보여 약이 오를 정도였다.

조금 놀란 아리시아가 철봉에 냉기를 주입한 후 지체 없이 그의 어깨를 내려쳤다. 얼마 전, 아프산의 동공 안에서 검은 기사의 다리를 잘랐던 그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새 들어 올린 그의 지팡이에 막혀 튕겨지고 르마스는 그 힘을 이용해 유유히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다.

아리시아는 잠시동안 자신의 철봉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봉에는 아주 얕지만, 얼음의 막이 생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간의 한 부분, 르마스가 들고 있는 지팡이와 닿았던 곳은, 얼음이 깨어져 철봉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쩌면 철봉이 상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여겨야할 정도였다.

고개를 든 아리시아의 시선이 푸른색 지팡이로 향했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얼음은 보통의 얼음과는 그 강도가 달랐다. 원자배열의 집적도를 높여 만들어지는 얼음은 보통, 다이아몬드의 이십 배에서 많게는 오십 배가 넘는 경도를 가지게 된다. 지금 만들어져 있는 얼음의 막은, 이십 배 정도의 경도로 그것도 보통의 물건으로는 깨부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그것을 막아낸 것은 그보다는 훨씬 강하다는 증거였다. 그의 지팡이도, 그 힘을 이겨낸 르마스의 힘도.

일단은……, 아슈타로도 측정불가.

르마스는 르마스 대로 갑작스럽게 날아온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찰나의 방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분명 크게 한방을 맞았을 만큼 그의 예상을 초월한 공격이었다. 거기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생소한 무기와 싸움방식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소중한 지팡이가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의 힘이어서 그 역시 아리시아 모르게 지팡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측정할 수 없다면 확인을 해봐야겠지요."


어쩌면 전력을 다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아리시아는 생각하며 철봉을 들어올렸다.


“아, 정말! 나 집사, 아니 나 신관이야? 신관은 이렇게 안 싸워.”


아리시아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르마스를 였지만, 아리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파앗, 하는 기합과 함께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그녀가 만들어 낸 그녀의 몸채만 한 얼음의 대검이 들려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르마스가 외쳤다.


"지팡이 부서지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 훌쩍, 다시 뒤로 몸을 날리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베데드어, 그러나 아리시아가 알고 있는 베데드어가 아니었다. 곧이어 그의 푸른색 지팡이에 햐안 불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 불빛은 그녀가 다가가는 순간에도 더욱 크고 또 밝아져가고 있었다. 달려들던 아리시아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서 한 발 뒤로 다시 물러섰다. 그녀의 시력으로도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 그녀의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르마스의 푸른색 지팡이에 환하게 맺혀진 빛이 아리시아를 향해 폭사되어 날아오기 시작했다. 수를 셀 수 없는 눈부신 빛줄기들은 아슈타로도 정체를 파악해 낼 수 없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경계를 늦출 수 없었던 아리시아가 재빨리 철봉의 얼음을 털어내고서 봉을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다시 파앗, 하고 소리쳤다. 그와 함께 순식간에 생성된 얼음의 방패에 곧이어 수십 개의 빛줄기들이 날아와 박혔다. 방패를 들고 있는 아리시아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러나 곧, 피시시식…….

마치 조그마한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아무런 충격도 전해지지 않는 방패와 방패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빛 무리들을 바라보며 잠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아리시아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게 뭐하는 짓이죠?"


"난 아리시아와 싸우고 싶지 않아. 그 무식한 검을 막으면 내 소중한 지팡이가 부러질 것 같고, 도망을 치기는 늦었고, 내 모습 봐봐 나 신관이야. 평화를 사랑하는 신관, 그런 내가 더군다나 예쁜 여자……, 는 아니지만 여자와 싸운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


아리시아가 철봉을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얼음들과 다시 모습을 나타낸 철봉을 르마스가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신기하다. 정령력을 이렇게 사용하는 사람은 처음보네.”


아리시아가 다시 철봉을 감아쥔 손을 들어 올리며 노려본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죠?”


아리시아를 향해 걸어오던 르마스가 자신의 얼굴 쪽으로 향해 있는 철봉을 피해 다급하게 두 손을 저으며 진정해, 진정해, 하고 말한 뒤에, 괜히 딴청을 피우며 토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토프렌스 토성의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르마스님!”


재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리시아의 손목을 움켜쥐고서 르마스는 조금 전 자신이 앉아있던 바위 뒤쪽으로 급히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이 서 있는 아리시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 르마스가 잠시 아리시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목을 두 손으로 잡고서 끌어보지만 역시나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르마스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놓아둔 채로 바위 뒤로 달려가 웅크리고 앉았다.


"들키면 아리시아 때문이야."


그런 르마스를 바라보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 아리시아가, 어쩔 수 없이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토프렌스의 성문에서 쏟아져 나온 병사들이 순식간에 수 천 명의 인원으로 불어나 성문 앞에 도열해 섰다. 어찌나 많은지 사람들에 가려진 토프렌스의 성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끝도 없구만. 많이도 쏟아져 나오네."


아리시아는 상관도 하지 않은 채 르마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령력,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나 참!"


르마스는 귀찮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주문을 외우지 않았으니 마법은 아니고, 철봉은 마법 물품이 아닌, 말 그대로 그냥 철봉, 그러니 남은 건 정령력 뿐이잖아."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지만, 87.43퍼센트의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르마스는 다시 고개를 돌려 도열해 있는 병사들에게로 시선을 가져갔다.


"저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거죠?"


"또 그 소리야?"


잠시 가만히 르마스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리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물었다.


"정말 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없으세요?"


고개를 가로저은 르마스가, 저 멀리 토성을 바라본 채로 건성건성 입을 열었다.


"이름은 아리시아. 므로도스 덴 센틀러라는 대마법사의 제자인, 뛰어난 마법사이면서 또한 뛰어난 검사인 여인."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아리시아를 바라본다.


“그게 다야.”


"아니요. 더 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저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계세요. 그리고 말을 끝마친 후에 돌아 본 눈동자는 아홉 번 흔들렸구요. 이런 경우 거짓말일 확률이 89.33퍼센트예요."


"오!"


"대충 얼버무릴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오."


르마스가 흠칫, 놀란 척 물었다.


"자꾸 남의 속마음 읽을 꺼야?"


"제가 이랬을 때 오! 하고 반응을 한 사람의 79.43퍼센트는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점쟁이, 아니 그쪽이야말로 신관 아냐?"


"전 아주 정확하게 계산된 확률에 의한 추론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아리시아를 빤히 바라보던 르마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 그렇게, 몇 퍼센트, 몇 퍼센트 하며 정확하게 따지고 살아?"


순간 말문이 막힌 아리시아가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다 말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실수를 피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아리시아는 실수 따위는 하지 안겠구만?"


또 다시 말문이 막힌 아리시아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목소리 톤이 자신도 모르게 올라갔다.


"저도 실수는 해요. 하지만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하는 거지요.“


하지만 르마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을 확률, 87.34퍼센트. 아리시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그 사이, 밖으로 나온 토프렌스의 군대가 열을 맞춰 대열을 정비했다. 더 이상 성문을 나오는 자들은 없었다.


"삼천 명은 넘겠지?"


“기사 40명, 기병 412명, 용병과 보병 1875명, 창병 964명, 궁수 372명. 총 3663명입니다.”


잠깐 토성 쪽으로 눈을 돌린 아리시아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런 아리시아를 르마스가 멀뚱멀뚱 바라본다.


“눈이 좋은 거야? 거짓말을 잘하는 거야? 하고 생각하셨죠?”


“어떻게 알았어?”


“보통 제가 100이 넘는 단위의 숫자를 순식간에 계산해서 말해주면 79.94펴센트의 사람들은 믿지 않으니까요.”


르마스는 잘났다 잘났어, 하며 또 다시 고개를 가로 젓고는 턱을 괴고서 생각에 잠겼다.

시레스의 총 인구가 칠천 명 남짓이다. 그런데 저들이 끌고 온 병사의 수만 사천 여명에 가까웠다. 대항을 할 의지도 없는 시레스의 처지였다.


"상대가 안 되겠지?“


"말러자작이 패할 확률이 94.82퍼센트입니다."


르마스의 한쪽 눈이 또 다시 구겨졌다.


"믿지 않으시는 건가요?“


르마스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토성으로 옮겨갔다.


"안 믿는 게 아니라 아리시아의 그 소수점 말버릇, 자꾸 신경 쓰여서.“


“듣기 싫으세요?”


르마스는 아무런 말없이 아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저의 말을 들는 사람들 중 75.32퍼센트의 사람들은, 제 말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르마스는 어이가 없어서 큭큭, 하는 소리로 웃고 말았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하자, 그나저나 얼마나 걸릴까? 저것들 다 죽이는데."


태연하게 묻는 그의 옆얼굴을 아리시아가 바라본다.


"저들, 모두를 말입니까?"


"왜? 아렌마을에서는 삼십 명 후딱 해치웠잖아?"


"알고 계셨습니까?"


"소문 못 들었어? 시레스에서 설원의 마검사를 모르면 간세로 몰려"


하긴 그녀에 대한 소문은, 적어도 시레스에서 만큼은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자신도 모르게 <설원의 마검사>라는 별칭까지 붙어있었다. 하지만 역시 르마스가 내비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그런 일반적인 것하고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당신은 누구죠?"


"나? 르마스 몰랐어?"


"가명일 확률이 79.22퍼센트입니다."


르마스는 잠시 그런 아리시아를 바라보다가 예의 그 경박한 웃음을 흘리고서 말했다.


"그 확률이란 거 당해낼 수가 없네. 맞아."


"이름을 알려주세요."


"비밀, 내 이름도 좀 유명해서. 아마 아리시아 만큼 유명할 거야."


르마스는 능글맞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밝게 웃었다. 그 모습이 죽은 리차드의 모습과 닮아있어 아리시아는 잠시 그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따랐던 남자. 그리고 대원들 중에서 가장 멋진 힘을 가졌던 남자.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영주를 도와줘."


병사들을 향한 고개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서 르마스가 말했다.


"당신은 왜 그를 돕는 거죠?"


"그의 아버지에게 빚을 졌어."


역시나, 조금의 미동도 없는 르마스에게서 제법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연유로 보모역할을 하게 됐는데 그 아들놈이, 왜 그리 바보 같은지, 검 쓰는 것외에는 도통 아무것도 할 줄을 몰라."


"그의 딸도……, 아!"


무의식적으로 작게 흘러나온 말에 본인이 놀라, 아리시아는 입을 닫고서 괜히 르마스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이런 농담을 하게 될 줄이야. 분명 리차드를 떠올린 탓이리라. 괜히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르마스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배를 잡고서 웃고 있었다.


"맞아! 그 아이는 너무 제 아비와 닮았어."


한참을 그렇게 웃고 나서 그는 코에 침을 바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하시는 거죠?"


"다리가 저려서, 이러면 좀 나아져, 이제 돌아가지. 말러도 이쯤에선 결론을 내렸을 거야."


아리시아는 르마스와 그의 등 뒤로 그와 겹쳐 보이는 커다란 달의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어둠의 사제신가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는 아직도 코에 침을 바르고 있었다. 저 미신 같은 행동이 이곳에도 존재하고 있다면, 효과가 있는 것인가? 하고 잠시 생각해 보지만, 그럴 확률은 12.23퍼센트였다.

아리시아의 의심으로 가득 찬 눈빛을 바라보던 르마스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반짝거리고 있는 다섯 개의 붉은 달 문양의 엠블렘을 가리켰다.

신관은 가슴에 달고 있는 엠블렘으로 그 신분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책에서 본 신관들의 설명은 그러했다. 어둠의 사제들은 붉은 색의 달모양의 엠블렘을, 빛의 사제는 황금빛 태양모양의 엠블렘을 오른쪽 가슴에 달고 있다. 그리고 엠블렘의 개수는 그들의 지위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르마스는 어둠의 제5사제란 뜻이다.

보통 대주교가 제일 위에 있고 일곱 명에서 열 명 남짓 대사제가 존재한다. 그리고 대사제의 엠블렘 개수는 일곱 개. 다섯 개의 엠블렘을 달고 있다면, 그 밑에, 밑에 단계이다.

어둠의 제5사제이면, 상당히 높은 지위에 해당될 듯, 싶었다.


"그런데……."


그녀는 르마스의 손에서 반짝이고 있는 푸른색 지팡이로 시선을 가져갔다. 르마스의 키보다 조금 짧은 길이의 지팡이 끝에는 X자 모양이 정교하게 조각된 마법석이 달려있고, 지팡이 전체에 수많은 오색의 보석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어, 마치 사치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척이나 오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났다. 본적은 없었지만, 책을 통해 얻는 지식에 의하면, 저 지팡이는 빛의 사제들의 물건이 분명했다.


"사이빈가? 라고 생각했지?"


"어떻게 알았죠?"


"내가 어둠의 사제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 중에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빛의 지팡이를 보고서, 그런데, 라고 말을 한 사람의 89.23퍼센트의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거든."


아리시아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거짓말일 확률 97.99퍼센트 입니다."


"왜?"


"보통사람은 소주점까지 정확하게 확률을 계산 할 수 없으니까요."


"자기는 되고 나는 안 돼?"


아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복잡하게 살지 마, 아리시아."


뜬금없는 대답에 아리시아는 멍한 얼굴로 르마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귀족인가요?"


"아니?"


아리시아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런데 왜 계속 반말이죠?"


"내가 아리시아보다 나이가 많을 확률이 99.99퍼센트니까."


아리시아가 피식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웃을 줄도 아네. 기분 나쁜 웃음이지만."


"그럴 리가."


"오! 말이 갑자기 짧은데? 같이 반말 인가?"


아리시아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르마스보다 나이가 더 많을 확률이 99.99퍼센트니까."


르마스는 잠시 그런 아리시아를 바라보다 정말 기분 좋은 소리로 웃었다. 옆에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좋아. 우리 친구하자."


말을 마친 르마스가 앞으로 달려가고 아리시아도 그의 뒤를 따랐다.


"친구가 됐으니까 이름을 알려 줘."


"센."


"거짓말일 확률 75.32퍼센트."


아리시아의 말에 앞서 달려가던 르마스가 앞으로 나자빠졌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야? 이번엔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며 실없이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말려들어가는 이 신비한 사내 때문에 이상스럽게 복잡해지는 <아슈타>의 행동패턴을 느끼고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사이보그가 된 이후로 지금까지 그녀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편하게 반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곳 바르아에서는 물론이고 지구에서 조차도. 아리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나 로브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있는 르마스를 바라보았다.


"뭐 그렇게 심각해? 세상사는 거 별거 없어. 가자구, 친구."


멍한 얼굴로 서있던 아리시아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르마스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달릴 수가 있는 거지?"


"너랑 나랑 별로 차이도 안나."


"하지만……."


아리시아가 머뭇거렸다.


“저 봐, 자기는 안 가르쳐 줄 거면서.”


입을 삐쭉 내민 르마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신력이 나 정도 되면 이렇게 빨라지게 돼 있어.”


“사이비면서.”


“어? 아리시아도 신을 알잖아.”


아리시아의 걸음이 또 다시 멈추었다. 분명 정령왕들이 말했다. 신에게 들었다고. 하지만 그녀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이 있다면 지구가 그렇게 허무하게 소멸 됐을 리 없다.

아리시아가 걸음을 멈추고서 다시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자 르마스가 다시 되돌아 와 아리시아 앞에 섰다. 그리고는 아리시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 밀었다. 깜짝 놀란 아리시아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너 조울증 있지?”


깜짝 놀란 아리시아가 눈을 몇 번 깜빡이고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조울증이라니, 지금까지 표정이 없어,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조울증이 있어 보인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르마스 말해줘. 당신이 누구인지.”


허리를 펴고서 잠시 진지해진 표정으로 돌아온 르마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서 먼 하늘 어딘가를 바라본다.


"난, 절대자. 이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의 힘을 지닌 존재.“


그의 시선을 따라 먼 하늘로 시선을 옮기며 아리시아가 조용히 말했다.


"거짓말일 확률 97.86퍼센트."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 버린 르마스를 바라보며 그의 뒤를 쫓으려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또한 이상해서 멈칫거리는데 그 사이,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장서 가던 르마스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아참! 오늘 있었던 일은 일단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


혼자서 말을 끝내고서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앞서 달려간다. 그런 르마스를 바라보던 아리시아가 그의 뒤를 따라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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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제4장 - 사람들은 우리를 <배신자 카니>라고 부르지.(2) +1 15.03.24 739 11 19쪽
14 제4장 - 사람들은 우리를 <배신자 카니>라고 부르지.(1) 15.03.23 763 12 12쪽
13 제3장 - 이제 제가 싸우는 방식을 보여 드리겠습니다.(7) 15.03.23 769 17 11쪽
12 제3장 - 이제 제가 싸우는 방식을 보여 드리겠습니다.(6) +1 15.03.22 770 26 17쪽
11 제3장 - 이제 제가 싸우는 방식을 보여 드리겠습니다.(5) 15.03.22 468 11 14쪽
10 제3장 - 이제 제가 싸우는 방식을 보여 드리겠습니다.(4) 15.03.21 701 14 14쪽
9 제3장 - 이제 제가 싸우는 방식을 보여 드리겠습니다.(3) +1 15.03.20 610 13 10쪽
8 제3장 - 이제 제가 싸우는 방식을 보여 드리겠습니다.(2) 15.03.20 655 12 16쪽
7 제3장 - 이제 제가 싸우는 방식을 보여 드리겠습니다.(1) 15.03.19 836 12 14쪽
6 제2장 - 은아. 너, 마법 배워볼 생각 없니?(3) 15.03.19 718 14 13쪽
5 제2장 - 은아. 너, 마법 배워볼 생각 없니?(2) 15.03.18 737 17 14쪽
4 제2장 - 은아. 너, 마법 배워볼 생각 없니?(1) 15.03.18 740 16 10쪽
3 제1장 - 주은, 너만은 꼭 살아남아 줘(2) 15.03.17 978 16 10쪽
2 제1장 - 주은, 너만은 꼭 살아남아 줘(1) +1 15.03.16 1,266 17 17쪽
1 프롤로그 +1 15.03.16 1,554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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