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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령 님의 서재입니다.

얼음의 아리시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을령
작품등록일 :
2015.03.16 00:00
최근연재일 :
2019.04.08 22:19
연재수 :
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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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76
추천수 :
775
글자수 :
553,977

작성
15.03.2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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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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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
12쪽

제4장 - 사람들은 우리를 <배신자 카니>라고 부르지.(1)

DUMMY

시레스의 토성은 약 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오래된 유물과도 같았다. 근래에 새로 만들어진 도시들의 성벽들과 비교해보면 그 크기도 방어력도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왕국의 변방에 그것도 몬스터가 빈번하게 출몰하는 도시 주변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토성은 천년동안 도시를 지켜 준, 도시민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토성은 도시 전체를 휘감아 감싸고 있고, 세 개의 성문이 북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시레스의 옛 주인이었던 벨로프 남작령의 <토프렌스>와 양분한 <붉은 바다>분지가 있고, 북쪽으로는 아렌마을로 향하는 <버려진 땅>이라고 불리는 벌판이 끝을 알 수 없게 펼쳐져 있었다.

성벽 맨 꼭대기에는, 사람 두 명이 마주 지나칠 만큼의 공간이 있고, 높이는 대략 오 미터쯤으로 천 년 전, <마법의 시대> 이전에 지어진 성으로는 최고라 칭해도 손색이 없었다. 주위에 해자나 별다른 방어책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지만 간혹 발생하는 내란이나 몬스터들의 공격에서 도시를 지킬 만큼의 여력은 되었다.




해가 달의 뒤편너머로 사라질 무렵.

시레스의 북쪽 성문 앞을, 두 명의 경비병이 초초한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두 명 모두 가죽으로 된 갑주를 착용하고 등에는 일미터가 넘는 길이의 검을 메고 있다.

작은 키에, 가죽 갑옷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를 어정쩡하게 가리고 있는 갈색 머리의 경비병이 끝도 없이 펼쳐진 <버려진 땅>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째 토벌대가 많이 늦는데”


맞은편에 선 경비병 역시 인상을 구기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뭐, 레이드님께서 함께 가셨으니 뮬르켄 다섯 마리 정도야 문제없겠지.”


그 때 성벽 위 망루에서 누군가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아켄 앞을 봐봐. 저거 뭐지?”


망루 위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남자의 외침에 아켄이라고 불린 마른 사내의 눈이 벌판 너머의 아득히 먼 곳으로 향했다. 마른 먼지가 날려 그들 눈에는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레이드님 일행이 돌아오시는 건가?”


옆에 선 배불뚝이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지만, 아켄은 대답대신 몇 발 앞으로 나가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본다. 곧 지평선 부근에 검은 무언가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로브로 온 몸을 감싼 사람 한 명이 커다란 짐을 등에 짊어지고서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여행잔가?”


여행자?

뚱뚱한 몸을 어렵게 움직여 아켄 옆으로 다가온 체드도 아켄과 같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다가오는 물체를 응시했다.

잔득 모래먼지가 덮인,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로브를 뒤집어 쓴 인영 하나가 성문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렌 마을 사람인가?”


체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옆에 선 아켄을 바라보았다.


“설마 혼자서 저길 넘어왔단 말이야?”


체드의 말에 아켄 역시도 얼굴가득 의문에 찬 기운만을 피운 채로 눈만 깜빡 거렸다.

며칠 전, 돌연이 나타난 뮬르켄들의 습격으로 인해, 열 명 이상이 조를 짜지 않고는 북쪽 성문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상태였다.


“혹시……!”


아켄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뮬르켄을 토벌하러 갔던 일행들에게 변고가 생긴 것은 아닌가? 모두 죽고 겨우 한 사람만 살아서 돌아 온 것은 아닌가?

샘솟듯 쏟아지는 불길한 생각에 앞으로 달려 나가려던 아켄은 거의 백 여 미터 앞으로 다가온 인영의 행색을 보고는 가던 걸음을 멈췄다. 온몸에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고 등에는 커다란 짐을 지고서 다가오고 있는 인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토벌대의 누구와도 일치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키는, 백팔십 센티미터가 넘는 자신과 비슷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너무나 마른 체형이어서 아켄이 알고 있는 토벌대원 중의 누구와도 들어맞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행여 어둠의 사제들 쪽의 일원인가도 생각해 보았지만 로브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였지만, 붉은 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깐!”


이윽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여행자를 아켄이 불러 세우자 붉은 로브의 인물이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너무나 남루한 모습이어서 굳이 말을 높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 사이 다가 온 체드가 조금은 조심스럽게 후드로 가려진 안을 살피며 물었다.


“로브 좀 걷어보게, 혹 암은 있는가?”


암은 일종의 신분증명패 같은 것이었다. 모양은 모두 둥근 형태를 취하면 황족은 금으로 만든 패를, 귀족은 은으로 만든 패를, 그 외에 평민은 나무로, 노예는 손등에 낙인을 찍어 신분을 나타내는데 쓰였다. 하지만 평민의 암은 위조가 쉬워서 그 실효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이런 경우 어느 정도의 도움은 되었으므로 으레 암은 신원을 파악해야하는 자신들과 같은 문지기에게는 첫 번째로 확인 해 봐야 할 물건이었다.

체드의 말에 인영의 두 손이 머리를 감싸고 있는 후드로 다가갔다. 그때 다시 망루 위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


“토벌대가 돌아온다.”


“응?”


체드와 아켄은 누구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조금 전 낡은 로브의 인영이 다가왔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모래먼지가, 마치 회오리처럼 퍼지며 그 사이로 한 무리의 인마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자네 잠시만 여기 서있게.”


아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행자에게 건성으로 말을 건네고는 다가오는 무리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말을 타고 거세게 벌판을 가로질러 오는 무리는 대략 십여 명. 빠른 속도로 성문 앞으로 다가온 무리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도열해 섰다.

맨 처음으로 도착한 삼십대 후반의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말에서 뛰어 내려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다가왔다. 뒤이어 다가온 서너 명의 인원 중 몇 명이 그들보다 커다란 뮬르켄의 시체 세 구가 쌓여있는 수레를 앞으로 옮겨가지고 나왔다.

아켄은 수레 위에 겹겹이 쌓여 있는 커다란 붉은 원숭이 형체를 바라보며 앞선 남자에게 알은 체를 건넸다.


“일이 잘 되었군요. 레이드님.”


“아! 이것들? 유감스럽게도 이건 우리가 잡은 게 아니야.”


뜻밖의 대답에 아켄은 두 눈이 동그래져서는 레이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자 성문을 향해 수레를 밀고 들어서던 청년 하나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대신 대답했다.


“우리가 <버려진 땅> 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 녀석들 다 이렇게 죽어 있었어요.”


청년의 말에 아켄과 체드의 호기심 가득한 눈이 다시 레이드에게로 향했다.


“정말입니까?”


“응, 흔적으로 봐서는 검상에 창상에, 다양해. 아마 우리보다 먼저 그곳을 지나던 어떤 검사들에게 당했지 싶어. 누군지는 모르지만 꽤 강한 무리들이 벌판을 지나쳤던 모양이야. 다른 상처는 없이 단 일격에 모두 죽었으니까 말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 뱉는 레이드의 말에 잠시 멍하게 서 있던 아켄이 레이드의 등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 어쨌든 골칫거리가 사라진 샘이네요. 수고 하셨습니다.”


뜻을 알 수 없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레이드의 눈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남루한 모습의 인물이 들어왔다. 물끄러미 로브의 인영을 바라보고 있는 레이드의 곁으로 체드가 다가서며 말했다.


“아. 조금 전, 이곳에 도착한 사람인데 아직 신원이 파악되지 않아서 잠시 세워 두었습니다.”


“이곳?”


놀라 되묻는 레이드의 말에 아켄이 대답했다.


“예. <버려진 땅>을 혼자서 걸어 왔습니다.”


자신들은 아침부터 뮬르켄을 잡기 위해 이곳 성문에서부터 아프산 입구까지의 버려진 땅 전부를 샅샅이 훑으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은커녕 사람의 발자국 하나 보지 못했었다.


“로브를 걷어보시오.”


레이드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온갖 마물들이 들끓는 벌판을 혼자 건널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다섯 명 정도의 인원이 파티를 이루지 않고서는 절대 버려진 땅을 넘기 쉽지 않은데 혼자서 넘어왔다니, 거기다 뮬르켄들의 죽음.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서야 다른 사람들도 혹시나 하는 눈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붉은 로브의 인물에게 시선을 보냈다. 붉은 로브의 인물은 레이드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거침없이 후드를 걷어 내렸다. 순간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이 후드 안에서 나타난 인영의 모습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해진 표정을 지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휘몰아치던 모래바람 마저도 멎은 사위는 고요 속에 잠겼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자신의 손으로 빗어 넘긴 소녀가 밤하늘처럼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레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행색은 남루하기가 그지없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무언지 모를 기품, 아니 기품이라고 하기보다는 기도 같은 것이 가득 담겨있었다.


“저…….”


레이드는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다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분명 평민의 그것과는 다른 기도가 흐르지만 귀족이라면 절대 이런 모습으로 홀로 나다니지 않는다. 그것도 여리기만 한 여인의 몸으로는, 귀족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존대를 해야 하는지 그것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혹, 혹시 암을 가지고 계십니까?”


레이드의 질문에 잠시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던 흑발의 여인이 로브의 안에서 둥근 모양의 은색패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리비안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린 것뿐입니다.”


다시 후드를 깊게 눌러 쓴 흑발의 소녀가 시레스에 온 목적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었지만 레이드를 비롯한 십여 명의 인원들은 은색 패에 새겨진 두 개의 지팡이 문양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서 있을 뿐이었다.


“므, 므로도스 후작가.”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레이드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소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귀족이신 걸 몰라 뵙고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전 귀족이 아닙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소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에 레이드는 잠시 아, 하고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서 있다가 다시 그녀의 암을 살폈다. 은색 패라고는 하지만 ‘아리시아’라는 이름만이 새겨져 있을 뿐, 풀 네임은 적혀 있지 않았다. 성이 없는 이름과 그저 가문의 문장만이 있는 패. 그것은 그 가문에 속한 하인이나 평민의 가신들에게 지급되는 신분 패였다. 물론 므로도스 가의 가신이라면 하찮은 여종이라도 일반 평민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평민은 평민. 레이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처음 소녀를 보았을 때부터 풍겨오던 기도에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귀족이라고 단정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당황하는 레이드의 모습에 그를 둘러싼 대원들 속에서 의문의 곁눈질이 빠르게 오갔다. 레이드는 붉어지는 얼굴빛을 급히 감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갑시다. 물어볼게 있소. 아켄, 난 이 아가씨와 집무실로 먼저 가보겠네.”


무언가 입을 열려고 하던 아켄은 급히 자리를 뜨는 레이드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남은 일행들은 사라져가는 레이드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서로 어깨를 들썩 거리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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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제3장 - 이제 제가 싸우는 방식을 보여 드리겠습니다.(2) 15.03.20 655 1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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