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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 님의 서재입니다.

전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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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
작품등록일 :
2011.11.10 19:59
최근연재일 :
2015.12.11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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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19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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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사냥이야기 78 - 여왕의 사랑 2

DUMMY

``샤미르왕국의 병력을 맡아주세요."


아침식사를 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제안을 받았다. 침묵으로 대답을 종용하고 있었지만 펠리시아의 눈빛이 가볍지 않다. 얼굴에 미소까지 지으며 새알심이 들어간 단팥죽을 입에 넣었다.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는 태도에도 펠리시아는 행동에 여유가 있었다. 간혹 뜨거운 팥죽으로 얼음이 둥둥 뜬 동치밋국으로 데워진 뱃속을 삭혔다. 속으로는 긴장했을지 몰라도 나름대로 냉정하게 미래를 예상한 후로 보였다.


``알았어."


확실하게 펠리시아를 보호하려면 병력의 지휘권이 필요했었다. 차후에 요구할 참이었다. 먼저 부탁해서 얼떨떨했다.


``왕국의 병력 지휘권은 당신에게 있다고 돌아가자마자 선포하겠어요. 결혼식은 이번 여름에 해요. 결혼식 날짜를 발표한다면 쉽게 백성들은 납득할 거에요. 찬성이죠?"


그녀는 당찼다. 그리고 여왕으로서 기품이 흘러넘쳤다. 몸에서 빛이 나는 거 같았다. 활달하면서 단정한 태도를 통해 묘한 섹시함이 흘렀다. 얼떨떨한 상태로 철장패는 사랑하는 그녀를 한동안 멍한 눈으로 보았다. 아마도 자신이 앞에 있기에 거침없이 드러내는 유혹처럼 보였다. 몇 번이나 눈꺼풀을 억지로 깜박였다. 강한 유혹을 이겨냈지만 매혹적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에서마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찬성해... 그런데, 섹시하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


욕망의 그림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눈동자에 살짝 비췄다. 순간, 심장이 뛰었다. 일부러 고개를 숙인 펠리시아에게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순간부터 남자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시선을 장악했다. 갑자기 몸이 뜨겁게 느껴졌다. 엉겁결에 탁자에 놓인 동치미 국물을 시원하게 마시며 펠리시아는 물었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지금 상황으로 간다면 4년 후에 우리나라의 피해는 어느 정도로 예상하세요?"


툭 던져진 한마디에 철장패는 움찔거렸다. 종종 가볍지 않은 내용이 나와서 탈이었다.


``나라의 절반이 날아갈 각오해야 할 거야. 설혹 방법을 찾았다고 해도 4년밖에 안 남았어... 피해를 줄일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야."


펠리시아는 그보다 더 비관적인 결과를 예측했었다. 굳이 4년 후가 아니더라도 마수 다섯 마리를 처리하지 못해 쩔쩔맸다.


``그나마 반은 지킬 수 있었군요. 다행이네요."


심각한 내용임에도 말을 나누는 둘 사이에 연인의 달콤함과 은밀한 밀애가 흘렀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눈동자를 보며 시선조차 떼지 못할 때 누군가 초를 쳤다. 문을 두드리며 들어오는 건 시종이었다. 그가 하는 말에 철장패는 눈을 크게 떴다.


``하울프 대영지에서 도움 요청이 왔습니다. 국경선을 넘어 몬스터 떼가 한꺼번에 나타났습니다. 쌍면갑조 두 마리까지 나타나 위험하다고 합니다. `쌍면갑조'만이라도 처리하여 달라고 소후작님께서 부탁하셨습니다."


새해는 지났지만 단팥죽으로 하루를 느긋하게 지낼 생각이었었다. 그런데 움직여야 했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막을 수 있겠지만 피해가 커질 게 우려되었다.


와이번을 타고 하울프로 날아가는 자리에 펠리시아마저 합류했다. 위험할 거 같아 몇 번이나 막았지만 강렬하게 도리질했다.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당찬 확언에 허락하고 말았다. 그것보다 함께 움직인다는 생각에 가슴 한가득 행복했다. 그래서 말리지 못했다는 게 옳았다.


워프마법진을 타지 않는 이상, 하울프까지 하루가 걸렸다. 햇빛이 솟았지만 추운 겨울이라 펠리시아가 걱정되었다. 그래서 오는 내내 꼭 껴안았다. 호위대가 와이번을 타고 뒤쫓으며 끈적끈적한 연인의 사랑에 연신 휘파람을 불렀다. 호위대의 시샘에도 불구하고 닭살스러운 태도를 버리지 않은 철장패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타샤공국과의 국경선은 두터웠다. 이미, 중경에서 워프마법진을 타고 온 여포의 `철방사령부'에 의해 정리된 상태였다. 남은 건 `쌍면갑조'뿐이었다. 국경에 세워진 성벽으로 스물여섯 마리의 와이번이 지나가자 병사들의 환호성이 울렸다. 그리고 일제히 한쪽 방향으로 손을 가리켰다. 크게 휘돌며 손을 흔든 철장패는 크게 외쳤다.


``병사들이여~~~ 수고 많았다!"


굉렬하게 터지는 목소리에 와이번에 탄 존재가 누구인지 깨달은 병사와 기사들의 환호성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와이번에게까지 들렸다. 크게 손을 흔들며 병사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와이번은 날아갔다.


``성벽이 엄청 두껍네요!"


앞좌석에 앉은 펠리시아의 감탄성이 터졌다.


``마족을 막아야 하니깐, 두 마리까지 가능할 거야."


행복하고 들떴던 감정도 한 시간이 지난 어느 순간부터 긴장감에 휩싸여 싸늘해졌다. 눈앞에 쌍면갑조가 나타났다. 그랜드블루협곡을 따라 날아가다가 중간에 튀어나온 마수에 당황했다. 마갑기를 소환하지 않은 상태였다. 와이번을 탄 상태에서 마갑기를 소환하지 못한다는 게 정확했다.


부리부리한 눈이 또렷이 보자 펠리시아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깊은 협곡에서 갑자기 나타나 와이번이 병아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대했다. 두려움에 휩싸인 와이번이 길게 비명을 지르며 급속히 방향을 선회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안장을 굳게 잡은 상태에서 뒤로 돌아보았다. 그곳에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키스하는 존재가 있었다. 저절로 두려움에 떨리던 가슴이 안정되었다.


황금날개를 지닌 말똥가리처럼 생겼다. 성수(聖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불쑥 호감이 생겼지만 진실한 정체는 마수(魔獸)였다.


철장패는 서프보드를 힘차게 하늘로 날렸다. 월령부터 소환했다. 서프보드 위에서 월령이 작동하려면 1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1분이라는 간격이 고비였다. 마갑기를 보자마자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공격부터 하는 쌍면갑조에게 맨몸으로 뛰어들었다.


서프보드로 향하는 걸 막기 위해 온몸으로 쌍면갑조의 진로를 방해했다. 거침없이 월아도(月牙刀)를 찔러 박았지만 마갑기를 타지 않은 인간의 몸으로는 바늘로 찌르는 모양새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계선을 넘을 정도로 월아도에 지옥겁화력을 넣으면 징징 떨리면서 깨지려고 했다. 그래서 약한 지옥겁화력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쌍면갑조는 순간적인 공격에 날카로운 발톱을 앞세워 막았다. 시원하게 공격을 막지 못하자 날개 깃털 열두 개를 곧장 길게 늘어뜨렸다. 허공에서 이형환위로 버티는 인간을 향해 한꺼번에 다리와 몸을 묶으려고 상당한 길이로 늘어났다. 지옥겁화력에 휩싸인 월아도에 잘라지지 않을 정도로 날개 깃털은 능수버들처럼 탄력이 넘쳤다.


철장패는 살기 위해 낙엽처럼 떨어졌다. 언뜻 마수의 날개에 맞아 추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를 두고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어쩔 줄 몰라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가 귓속으로 들렸다. 펠리시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팔을 흔드는 철장패의 시선은 마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쌍면갑조는 말똥가리처럼 허공에서 내리꽂혔다. 능수버들처럼 늘어뜨린 황금 깃털이 바람에 휘날렸다. 전설에 나오는 봉황(鳳凰)이 따로 없었다. `마수'치고 독특한 종류였다.


급격하게 다가온 마수를 냉랭하게 바라보며 철장패는 낙화추뢰보를 펼쳤다. 가벼운 바람에도 꽃잎처럼 흩날리는 낙화보와 벼락처럼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추뢰보가 어우러져 아슬아슬하게 마수의 발톱을 피했다. 묶으려고 다가오는 열두 개의 깃털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꿈틀거린 철장패의 신체는 급격하게 허공으로 치솟았다.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는 괴이한 동작이 공중에서 환상처럼 펼쳐졌다.


쌍면갑조가 방향을 틀었을 때는, 월령의 본체 안으로 인간의 몸이 들어간 후였다.


``황금 날개를 지닌 마수여... 내 부하가 되어라."


잔잔하면서도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음성을 발한 철장패는 봉황처럼 생긴 마수가 욕심이 났다. 6미터의 기체인 월령을 태우더라도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매력적인 마수였다. 늑대마수 이후에 두 번째로 솟구치는 욕심이었다.


``그르르르, 인간은 음식이다. 인간의 부하가 되기 싫다!"


``아쉽군... 죽기 전까지 말할 기회를 주겠다. 부하가 될 생각이 있으면 말해라. 언제라도 받아들이겠다."


서프보드에 탄 채 허공에 둥둥 뜬 월령과 황금 날개의 마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와이번을 타지 않으면 인간의 육체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믿겨지지 않아 펠리시아는 눈동자를 크게 떴다. 밑을 내려보자 개미처럼 보이는 오우거가 땅 위에서 어슬렁거리는 게 보였다. 고개를 들어서 다시 보아도 사랑하는 남자는 허공에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엉뚱한 문제로 동그랗게 변한지도 모르고 참마월아도를 조립한 철장패는 간단히 휘둘렀다. 그리고 천천히 등에 찼다. 맨손으로 변한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목마저 가볍게 돌리며 풀었다.


``지금 허공에 뜬 게 맞나요?"


믿어지지 않아 묻는 펠리시아에게 철장패는 고개를 돌렸다.


``취아, 이런 건 동방족이라면 간혹 펼치는 무공이야. 잠시 이놈하고 진득한 대화를 나누어야겠어. 잠깐 기다려줘."


월령에 탄 후로 지옥겁화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마갑기를 월령이 강화시킨 덕분이었다. 월령의 두 주먹은 지옥겁화력으로 활활 피어올랐다. 주먹에서 시작된 불길이 월령의 몸체로 번졌다. 지옥의 불길이 온통 월령의 몸을 감싸자마자 서프보드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억지로 부하로 만들고 싶지 않다. 회초리를 들기 전에 부하가 되겠다고 말해라."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심상치 않은 기색에 황금 날개의 마수는 주춤 물러섰다. 온몸에서 지옥의 불길이 피어오르는 존재는 처음으로 보았다. 낯선 광경에 당혹했다. 그나마 인간이라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 두려움을 떨쳤다. 일부러 거세게 날개를 활짝 펼쳤다.


마수와 인간은 허공에서 서로에게 빠르게 날아가 부딪혔다. 박투가 펼쳐졌다. 더도 덜도 아닌, 서로 몸을 붙잡고 치고 박았다. 몇 대 맞고 아프다며 악마의 얼굴이 불길부터 뿜었다. 지옥의 불길은 같은 힘으로만 막을 수 있었다. 서로의 불길에 휩싸여 그것마저도 무색해졌다. 인간의 불길에 마수가 내뿜는 불길이 막혔다. 인간이 마수보다 섬세하게 악마의 불길을 다루었다. 고의적이든 강압적이든 치고 박는 박투는 쉽게 멈출 줄 몰랐다.


매순간마다 온몸을 두드리는 둔중한 충격에 마수는 휘청거렸다. 깃털이 자라서 몸을 묶을 때마다 불길은 치솟았다. 아주 강렬한 불길이었다. 암청색의 불길이 솟구칠 때마다, 같은 마수의 불길에도 견디던 깃털이 한순간에 재로 변했다. 살과 피부마저 녹아내리자 마수는 황급히 악마의 불길을 내뿜었다. 불길에서 밀려 위태로운 순간이 닥칠 때마다 인간을 떨구려고 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암청색의 불길은 중간에 멈추었다. 마갑기에 올라탄 인간에게서 공포를 느꼈다. 참다 못해, 길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랜드블루협곡을 타고 비명소리는 유난히 길게 이어졌다. 거대한 블루드래곤이 울부짖는 것처럼 대지를 진동시켰다. 그리고 비명에 화답하는 울음소리가 그랜드블루협곡의 깊은 곳에서부터 공간을 울리며 퍼졌다. 또 다른 황금 날개 마수가 계곡 바닥에서부터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하늘로 솟구쳤다.


철장패와 싸우는 마수를 보자 구슬피 울었다. 인간이 등에 올라탄 채로 괴롭히고 있었다. 천천히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봤다. 이내 두 쌍면갑조는 철장패를 공격했다.


머리에 솟은 볏이 유난히 크고 굵은 게 수컷으로 보였다. 암컷은 방금 날아온 마수였다. 황금 날개에 여러 가지 색이 한 개씩 드문드문 섞였다.


펠리시아는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바람의 상급정령을 소환했다. 녹색의 솔개였다.


``가서 마수를 공격해!"


소환자의 지시에 따라 녹색의 솔개는 날개를 힘차게 휘저었다. 암컷 마수를 향해 거센 소용돌이 바람을 뿌렸다. 휘청이며 들썩이는 마수에게 바람을 타고 날아가 공격했다. 정령이기에 물어뜯고 할퀴는 건 약했지만 바람을 이용해 비슷한 효과를 창출했다.


암컷 마수는 방해하는 녹색 솔개를 부리로 물어뜯어 찢어발겼다. 그리고 정령을 소환한 펠리시아부터 없애려고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새하얀 빛이 까맣게 물든 불길을 머금고 솟구쳤다. 방향을 트는 암컷 마수의 목을 한순간에 갈랐다. 떨어진 목이 꿈틀거리며 붙으려고 하자 새하얀 빛이 다시 뿜어졌다. 몸통마저 반으로 가르자 암컷 마수는 힘없이 떨어졌다. 애닳게 떨어진 목이 수컷 마수를 향했다. 목에 달린 눈동자가 수컷 마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슬픔, 당혹감, 그리움, 안타까움이 암컷 마수의 눈동자에 한없이 물들었다. 죽기 싫은 욕망이 가득했다. 그것도 사랑하는 짝을 앞에 두고 죽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르르르, 인간이여...."


당혹감에 물들어 차마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수컷 마수는 사력을 다해 철장패를 내팽개쳤다. 그리고 쏜살같이 암컷 마수에게 날아갔다. 땅에 충돌하기 직전인 몸통부터 챙겼다. 멀리 떨어진 머리를 잡으려고 온 힘을 다했다.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충돌하면서 튀어오르자 길게 울부짖으며 깃털을 뻗어 가까스로 붙잡았다. 암컷 마수의 몸은 혈정(血晶)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정지된 상태였다. 그렇지만 수컷 마수의 행동은 떨어지는 와중에도 눈동자로 보고 있었다. 땅에 떨어지면서 충격을 받아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그르르르, 괜찮아 괜찮을 거야."


당혹스러워 수컷 마수의 날개가 부들부들 떨렸다. 깃털을 뻗어 조심스럽게 다시 맞추었다. 마수의 본능에 따라 몸이 붙기 시작했다.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수컷 마수 앞으로 인간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나의 여자를 죽이려고 하기에 목을 가르고 몸통을 갈랐다. 부하가 되겠다고 맹세한다면 여기서 멈추겠다."


싸늘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인간에게서 들렸다.


``그르르르, 인간이여 그대를 죽이겠다!"


짝이 당하자 분노한 수컷 마수의 눈동자가 시뻘게졌다. 흥분으로 광기마저 엿보였다.


``안타깝군... 죽이기 싫지만 죽어라."


사망선고를 내리듯 무뚝뚝하게 인간이 말했다. 반항하려고 몸을 돌리자마자 새하얀 빛이 지나가며 한쪽 날개가 떨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강한가?"


수컷 마수는 죽음을 예견했다. 서로 싸울 때는 몰랐는데 커다란 칼을 들자 무기력하게 날개가 잘라졌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의 짝을 반으로 가른 인간이었다. 악마의 얼굴에서 괴성이 토해지며 불길이 쏟아졌다.


불길을 뚫고 새하얀 빛이 공간을 갈랐다. 남은 날개마저 떨어졌다.


``처음 너희들을 대할 때 힘들었었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놀고 있었다면 과거처럼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너희를 상대할 때 힘든 건... 지옥의 불길과 체력이었었다. 이젠 마수의 불길과 체력은 두렵지 않다. 그런 이상, 나의 손에 죽는 건 당연하다. 아직도 마족이 껄끄럽기는 하다만 언젠가 잡을 수 있다."


몸이 붙은 암컷 마수는 서서히 정신을 차리다가 날개가 잘라지는 수컷 마수를 보자 울부짖었다. 혈정에 충격만 받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잘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다시 일어섰다. 인간이 발한 지옥의 불길 때문에 갈라진 부분에서 쓰리고 아팠지만 이대로 볼 수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자국을 억지로 움직여 인간에게 다가섰다. 다친 수컷 마수를 가로막고 섰다.


``부하가... 되겠다. 남편을 죽이지 말아다오."


``그르르르, 싫다. 죽어도 인간의 부하가 되기 싫다."


광기가 서서히 수컷 마수를 지배하고 있었다. 정상이었다면 인정할 법도 했는데 짝이 위태롭게 변한 순간부터 냉정을 잃었다. 안타깝지만 죽여야 했다. 수컷 마수를 죽이면 암컷 마수도 반항할 게 분명했다. 부하가 되겠다고 외쳤는 데 아까웠다.


서서히 인간이 칼을 들었다. 암컷 마수는 소리쳤다.


``마신에게 맹세하겠다. 남편을 죽이지 마라!"


잠시 틈을 타, 떨어진 날개를 붙인 수컷 마수가 광기에 휩싸여 인간을 덮쳤다. 그 순간 두려운 게 보였다. 새하얀 빛이 눈앞에서 수컷 마수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드래곤처럼 단단하고 튼튼한 가죽이 지옥겁화에 휩싸인 칼에 잘렸다. 몸뚱이는 지옥 불길에 휩싸였다. 떨어져서 붙지 않는 몸뚱이를 암컷 마수는 날개를 펴 감싸 안았다. 몸이 갈라지지 않게 온몸으로 막았다. 전보다 불길이 더욱 치솟고 있었다. 인간이 발한 지옥겁화는 좀 전과 달리 무척이나 뜨겁고 고통스러웠다. 수컷 마수는 아픔을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 인간이 독심을 품은 게 느껴졌다. 확실하게 죽이려고 작정한 게 느껴졌다.


``제발, 부탁하겠다. 남편을 죽이지 말아다오. 내 혈정은 가슴 한가운데에 있다. 남편은 네 개의 심장 중에 왼쪽 심장에 있다. 인간이여... 부디 자비를 베풀어다오."


암컷 마수의 간청에 철장패의 가슴이 흔들렸다. 일반 마수와 다른 행동이었다. 다른 말투를 토하는 황금날개 마수였다.


``나는 인간이다. 나의 부하가 되는 건 마신의 맹세만으로 부족하다. 내 방식에 따라야 한다. 남편의 혈정과 자신의 혈정을 뽑아서 나에게 넘겨라."


한참을 수컷 마수를 껴안고 놓지 않던 암컷 마수가 철장패만 또렷이 보았다. 말똥가리처럼 생긴 눈동자가 철장패의 가슴에 꽂혔다.


혈정이 뽑혀도 심장이 식지 않을 동안 다시 넣는다면 마수는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어떤 마수가 그런 짓을 하겠는가. 암컷 마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결정하자마자 몸부림치는 수컷 마수의 가슴을 부리로 쪼았다. 갈라진 심장에서 혈정을 뽑았다. 몸을 부르르 떨며 동작을 멈춘 수컷 마수를 애처롭게 쓰다듬었다. 작은 소리로 구르르르 떨었다. 눈에 독기를 품고 자신의 심장에서 혈정을 뽑아서 날개에 올려놓았다. 혈정을 뽑자마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인간의 눈동자만을 보며 정신을 놓았다.


참으로 특이한 마수였다. 철장패는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사랑한다는 건 무얼까.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얼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고개를 저어 지웠다.


와이번에서 내려 다가온 펠리시아가 속삭였다.


``아름다운 부부의 애정이네요."


``응... 가슴이 찡하네."


철장패는 두 개의 혈정을 월령의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본체 밖으로 나왔다. 펼쳐진 월령의 손바닥에서 인간의 머리만한 혈정을 딱 붙였다.


``이제부터 `종속의 인'을 맺을 거야. 나를 건드리면 안 돼."


``마법사가 아닌 데 가능한가요?"


단검으로 살짝 손가락을 베어 핏방울을 혈정에 떨어뜨렸다.


``모든 마법은 의지를 기본으로 하니깐. 드래곤조차 언령마법을 쓸 때 의지의 힘이 바탕이 돼. 가끔, 기사의 강한 정신력이 마법을 깨는 경우가 생겨... 잠시 집중할게."


바짝 붙은 두 혈정에 이상한 문양이 새겨졌다. 피로 새겨지는 마법진이었다. 야만족의 주술처럼 보이기도 했고, 마법사의 마법진과도 유사했다. 리치가 된 함공작의 `라이프베슬'에 새겼던 문양과도 조금 달랐다. 집중하는 탓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이마에 맺혔다.


어느 순간부터, 두 혈정이 빛을 발했다. 암컷 마수에게서 나온 빛은 맑았는데 수컷 마수에게서 나온 빛은 탁했다. 암컷 마수에게 `종속의 인'이 쉽게 박혔지만 광기에 사로잡힌 수컷 마수에게는 `종속의 인'이 박히지 않았다. 자꾸 튕기며 반항했다. 제정신이었다면 박혔을 인(印)이었다. 이건 핏방울을 한정없이 붓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취아... 단검으로 손가락을 베어 내 손바닥 위로 피를 떨구어. 아무래도 본능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모양이야."


상당한 량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손바닥에서 흐를 법한 데 떨어지지 않았다. 구슬처럼 모인 체 뭉쳤다.


``이제 됐어... 손바닥을 내밀면 피가 모자르니 더 줘. 적당한 선에서 복종해야 할 텐데... 수컷 마수랍시고 기세가 드세네."


사파이어처럼 생긴 혈정에 펠리시아의 핏방울이 떨어졌다. 한 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혈정의 색이 바뀌었다.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마력이 들어가면 밝아졌고 마력을 튕기면 어두운 색으로 변했다. 아까와 달리 서서히 `종속의 인'이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피가 모잘랐다. 손바닥을 내밀어 피를 채우자 빛으로 사라진 마법진 위에 핏방울을 떨구었다.


온전히 `종속의 인'이 맺혀지자 기이한 마법진이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사라졌다. 마법 동조가 이루어진 현상이었다. 일시에 마력이 움직이며 마법을 발하기에 형성되는 문양이었다.


`종속의 인'을 끝낸 혈정을 하나씩 심장에 박았다. 혈정이 위치를 찾자마자 심장이 꿈틀거렸다. 한 번 떨리기 시작하더니 갈라진 심장을 스스로 봉합했다. 공기 중으로 노출되었던 피부가 점점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살아 꿈틀거리지만 깨어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철장패는 황금 날개의 마수를 쓰다듬었다. 반항이 심했던 수컷 마수에게 애정이 갔다.


``진짜 부하가 된 거에요?"


들뜨고 황당한 경험에 펠리시아가 뒤에서 껴안으며 묻고 있었다.


``전에 늑대 마수를 본 적이 있어. 얼마나 갖고 싶었던지 저런 놈을 데리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때부터 마수를 가질 방법을 알아보았어. 웬만한 마족과 늑대마인도 장난하듯 부하로 삼는데 나도 가능하겠더라고... 결국은 방법을 찾았지. 단점은 세 마리밖에 못 가져. 그 점이 아쉽지만 불만은 없어."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듯 펠리시아가 손뼉을 쳤다.


``가르쳐 줘요. 빨리 가르쳐 줘요."


철장패는 난처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지만, 나밖에 쓸 수 없어. 그렇다고 실망은 하지 말고... 내 가신 중에 열여섯 나이에 마수를 데리고 다니는 4서클 마법사가 있어. 그 녀석이 올빼미 마수를 부하로 삼았어. 나이 어린 마법사도 가능한 일인데 어딘가 취아에게 맞는 방법이 있을 거야. 삐치지 말고, 지금부터 복종시킨 암컷 마수를 데리고 다녀. 나중에 성수(聖獸)가 나타나면 한 마리를 사로잡아서 부하로 삼아. 정령왕까지 소환했으니 가능할 거야. 마수보다는 성수쪽이 취아에게 어울려."


눈이 쌓인 평야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종종 오우거가 다가와 설쳤지만 호위대의 분풀이에 다진 고기처럼 쓰러졌다. 몬스터의 고기를 와이번이 둥글게 모여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식사하는 와이번을 보자 배가 고팠다. 호위대 몇몇이 와이번을 타고 주변을 돌았다. 사슴 몇 마리를 잡아서 돌아왔다. 근처의 숲에서 나뭇가지를 자르거나 주워 모닥불을 만들었다.


솜씨가 좋은 볼프강이 나서서 알맞게 사슴 고기를 저몄다. 나무에 꽂혀진 사슴 고기가 노릇노릇 익었다. 눈이 쌓인 곳이라 앉을 게 마땅하지 않아 모닥불에 들어갈 딱딱한 나뭇가지로 대신했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입 안에 사슴 꼬치를 넣고 오물거렸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 막막했지만 호위대와 와이번나이트들이 섞여 떠들썩했다.


``이런 분위기... 좋네요. 이렇게 살았어요?"


호위대의 행동이 능숙했다. 하루 아침에 다져진 솜씨가 아니었다. 뜨거운 사슴 고기를 오물거린 채 펠리시아가 웅얼거렸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살았지. 방학만 되었다 싶으면 사냥하러 다니고, 방학이 아니더라도 돈이 없으면 학교에서 뛰쳐나왔으니까."


자랄 때의 이야기까지 흘러나오자 펠리시아는 철장패를 보았다. 그리고 두 마수에게서 이상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철장패의 시선은 앉은 채로 두 마수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 펠리시아의 고개도 돌아갔다.


웅크린 자세만 해도 이층 건물의 높이였다. 그곳에 달린 눈동자가 떠지자 삽시간에 주변은 조용해졌다. 암컷 마수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였다. 인간밖에 보이지 않자 광포한 성질을 드러내려 했다.


``내가 주인이다! 앞으로 너의 이름은 취황이라고 부르겠다."


철장패의 목소리가 나직히 들리자 암컷 마수는 펼쳤던 날개를 접었다. 그 눈동자가 철장패를 살피며 깜박였다. 옆에서 수컷 마수가 고르게 숨을 쉬자 눈빛을 반짝였다.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다. 그대가 나의 주인이었구나! 이제부터 황금날개 종족의 취황이다."


조금 후에, 수컷 마수가 깨어났다. 날개를 흔들며 살았다는 걸 스스로 확인했다. 인간 사이에 철장패를 발견하자 죽일 듯 길게 부리를 뻗다 멈췄다. 죽이려고 작심한 순간부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느껴지는 게 있어 다급히 물었다.


``부하가 된 것이냐?"


``내가 주인이다. 너의 이름은 금봉이다."


눈을 부라리며 보던 수컷 마수는 고개를 떨구었다. 암컷 마수가 부리로 날개를 가다듬자 시선이 돌아갔다. 천천히 암컷 마수의 날개에 고개를 부볐다. 유난히 금실이 좋은 한 쌍이었다. 설원이 펼쳐진 평야에서 사슴 꼬치를 오물오물 씹으며 철장패와 펠리시아는 두 마수를 부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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