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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싶다.

분노조절장애 광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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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
작품등록일 :
2024.01.26 14:44
최근연재일 :
2024.01.31 09: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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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8,508

작성
24.01.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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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현대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3)

DUMMY

마을이다.

나무 울타리 안으로 집들이 서 있다. 노예 농장과 다르다. 진짜 농촌이다. 주변에 밭과 축사를 만들었고 마을 중앙에 광장도 마련했다.

문명의 증거.

일상생활의 흔적.


한우석이 농촌으로 들어섰다.

그가 금방 실망했다.


‘멀리서 본 것과 다른데.’


마을은 황량했다. 집의 외벽이 잿빛이고, 지붕은 주저앉았으며, 창문이 깨지고 현관문이 부서졌다.

사실상 폐허.

빈 집.

멀리서 볼 때는 희망이었고 가까이서 보니 절망이다.


한우석이 집의 외벽을 만져보았다. 손가락에 검댕이 묻었다. 집이 잿빛인 이유는 목재의 색깔 때문이 아니라 집이 불에 탔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천을 따라왔지만 죽음의 잔해에 도달했다.


‘주민은 모두 떠났나?’


인기척이 없었다. 부서진 현관문 안으로 집 내부가 보였다. 가구가 엎어져 있고 바닥은 썩었으며 버섯과 잡초가 집안으로 침범했다. 마당은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텃밭에는 자갈과 정체모를 풀이 뒤섞였다. 가축의 뼈가 축사에 굴러다녔다.


한우석이 부서진 집으로 들어갔다.

주방을 뒤져보니 식기와 냄비 등 가벼운 집기는 모두 사라지고 무거운 물건만 남았다. 오래된 식재료가 곰팡이를 뒤집어쓰고 있다.

집주인은 급하게 떠난 듯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자연재해? 맹수의 습격? 영주의 폭정?


한우석이 밖으로 나왔다.

부서진 집들 사이로 그나마 멀쩡한 집이 보였다. 외벽이 덜 탔고, 창문은 나무판자로 덧댔으며, 구멍 난 지붕을 밀짚으로 기웠다.

생존자.

그곳으로 다가갔다.


백발의 노인이 자갈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노인이 작업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누구신가?”


한우석이 잠깐 고민했다.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얼마 전에 노예 감독관을 죽이고 노동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이 농부가 농장주와 가까운 사이일지도 모른다.

그가 적절하게 대답했다.


“보따리 장수입니다. 도적에게 짐을 빼앗기고 시내를 따라 도망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늙은 농부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저런··· 어디까지 가는데?”

“근처에 큰 도시가 있습니까?”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이 지역은 워낙 외져서 큰 도시는 없어. 기껏해야 마을이지. 길을 따라 남쪽으로 이틀 정도 가면 도시가 나오기는 해. 내가 보기에는 그 곳도 조금 커다란 마을 정도지만 그 동네 사람들은 자기들 땅을 캄스크 시라고 부르더군.”


한우석이 정보에 만족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도시에서 뭘 하려고?”

“돈을 벌려고 합니다.”


한우석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식량을 전부 소모했다. 분노가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만들었다. 그는 배가 고팠다. 생존을 이어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농사는 어렵다.

이 지역은 척박하다.

당장 이 노인도 자갈밭을 갈고 있다. 날씨는 춥고 대기는 건조하며 잡초는 억세다.


백발 노인이 한우석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동네에서 장사는 힘들 텐데. 당국에서 허락하지 않을 거야. 우리 영주는 외지인을 싫어하지.”


한우석이 고개를 저었다.


“물건을 잃어버려 장사는 못 합니다. 맨몸으로 시작할 생각입니다.”

“힘은 좀 쓰나?”

“때때로 씁니다.”


노인이 턱을 만졌다.


“그러면 막노동 정도는 할 수 있겠군. 다만 벌이가 좋지는 않을 거야. 요새 힘 쓴다는 놈들이 워낙 많아서.”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닙니다.”


늙은 농부가 정곡을 찔렀다.


“배가 고픈 모양이구만?”


한우석이 이번에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예.”

“캄스크까지 가려면 이틀을 꼬박 걸어야 해. 말을 타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지만 자네 꼴을 보니 그건 어려울 것 같고. 말을 가지고 있었으면 진작에 타고 다녔을 테니까.”

“저는 말이 없습니다.”


백발 농부가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마차를 얻어 타는 수밖에. 나도 말은 없어. 오늘은 해가 벌써 반이나 기울었으니 우리집에서 하룻밤 묵고 내일 아침에 마을 옆길로 상단이 지나가면 그들에게 태워달라고 사정을 해 보게. 동업자끼리 도와주겠지.”

“괜찮으시겠습니까?”

“대신 지금부터 나랑 같이 밭을 갈아야 해. 내가 요새 허리가 아파서 말이야.”


그가 텃밭 옆에 놓인 쟁기를 가리켰다.


-


한우석은 밭을 열심히 갈았다.

이번 밭일은 부당하지 않다. 숙박비다. 정당한 거래다. 노동 욕구가 솟는다.


해가 졌다.


집주인이 한우석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저녁식사가 나왔다. 순무와 귀리, 멀건 고기 국물이다.

풍성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가난의 증명.

한우석이 감사를 표했다.


“잘 먹겠습니다.”


고된 노동이 식욕을 일으켰다. 허리가 쑤시고 어깨가 저렸다. 밭일은 한우석에게 분노를 제공하지 않았다. 분노하지 않은 한우석은 평범하다.


“맛있네요.”

“많이 먹어. 먹을 것도 별로 없지만.”


식사를 마쳤다.

한우석은 이 세계에서 첫 끼니를 해결했다. 다음 끼니도 해결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그는 이방인이다. 앞으로도 생존을 위해 꾸준히 투쟁해야 할 것이다.


노인이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그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한우석입니다.”

“하누서크?”

“성이 한, 이름은 우석입니다.”


노인이 이름을 되뇌었다.


“한의 우서크. 반갑네. 나는 벨리츠의 아크침이야.


늙은 농부는 우석을 우서크로 발음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한국식 이름을 말하기 어려워하는 듯했다. 특히 마지막 글자의 밭침을 강하게 발음했다.

우석.

우서크.

나쁘지 않다. 야만전사 느낌이다. 한우석은 우서크라는 이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반갑습니다, 아크침 어르신.”

“고향이 어디인가?”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한우석은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노인이 팔짱을 끼었다.


“산맥 너머에서 왔나?”

“산맥이요?”


농부가 아는 체를 했다.


“동쪽 산맥 너머에 자네처럼 생긴 사람들이 산다는 소문을 들었어. 그들은 눈이 작고, 코가 뭉툭하고, 광대뼈는 튀어나왔다고 하지.”

“그렇군요.”

“성격이 끈질기고 고집이 세고 열심히 일하고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노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나 비밀을 가진 법이지. 더 이상 묻지 않겠네. 내일 아침이면 떠날 사람이니.”

“저만 떠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마을 주민들도 급하게 떠난 것 같습니다. 낮에 보니 빈 집이 많더군요.”


노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네 짐작이 맞아. 모두 떠났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영주가 땅을 비우라고 협박했네.”

“어째서 그렇습니까?”

“세금을 못 내니까.”


척박한 땅의 농민은 가난하다. 자연은 이들에게 살아남을 만큼만 돌려준다. 영주에게 정해진 세금을 바치면 농민은 굶어 죽는다.

돈이 안 되는 사람들.

영주는 이들을 치우기로 결정했다.


백발 농부가 탄식했다.


“영주가 폭력배를 고용해서 우리를 협박했어.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놈들이 집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였어. 이웃들은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네. 빈 땅은 영주의 차지가 되었지.”


한우석은 영주의 행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을을 부수고 주민을 몰아낸다고 없던 세금이 생기지는 않는다. 빈 땅은 수익을 창출하지 못한다.

그가 물었다.


“영주가 왜 그런 짓을 벌입니까? 아무도 없는 땅에서 세금을 거둘 수는 없을 텐데요.”


늙은 농부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몰라. 높으신 분의 속셈을 나처럼 무식한 농사꾼이 어찌 알겠나? 우리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를 뿐이야.”

“그런데 어르신께서는 영주의 명령을 듣지 않으셨군요.”

“마누라와 아들이 여기에 있어.”


그가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뒷마당에 무덤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작고 다른 하나는 크다.

노인이 무덤을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했다.


“큰 무덤이 아들, 작은 무덤이 마누라야. 마누라는 원래 허약했어. 체구도 작았지. 그래서 아들을 하나밖에 못 낳았네. 그런데 그 아들놈이 군대에 끌려갔다가 죽어서 돌아오더군. 마누라도 충격을 받고 시름시름 앓다 저세상으로 떠났지. 나도 따라 죽을까 하다가 내가 죽으면 가족들 무덤은 누가 돌보나 싶어서 나는 아직까지 목숨을 붙들고 있네.”


노인이 슬픈 과거를 털어놓았다.

한우석이 씁쓸하게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가족의 무덤을 돌보느라 마을에 남으신 거군요.”


노인이 창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네는 가족이 있나?”


한우석이 끄덕였다.


“있습니다. 하지만 사이가 썩 좋지는 않습니다.”

“왜?”

“제가 사고를 많이 쳤거든요.”

“부모를 때렸나?”


한우석이 손을 저었다.


“제가 그 정도 쓰레기는 아닙니다.”

“집안 땅을 팔아먹었나?”

“저희 집에는 팔아먹을 땅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노인이 집요하게 물었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니 호기심이 솟아났다.

한우석이 한숨을 쉬었다.


“저는 화를 못 참습니다.”


노인이 황당해했다.


“화를 못 참는다고 자식을 내쫓아? 흠··· 내가 남의 집안에 참견할 바는 아니지만 자네 부모는 대단히 엄격한 분들이군.”

“뭐··· 사회도 엄격하니까요.”


이세계 농부가 헛웃음을 지었다.


“자네 고향은 참으로 신기한 동네로군. 남자가 주먹 좀 쓰는 게 뭐 대수라고. 어쨌든 잘 왔네. 우리 동네는 그렇게 팍팍하지 않아. 오히려 힘을 잘 쓰면 남자답다고 좋아하지.”

“다행이네요.”


노인이 한우석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방바닥에 이불이 깔려 있고 벽면에는 나무로 만든 방패가 걸려 있다. 방패는 조잡하고 상처가 많았다.

그가 말했다.


“아들이 쓰던 방이야. 자네가 우리 아들이랑 덩치가 엇비슷해서 다행이군. 이불이 작지는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어르신.”

“잘 자게.”


노인이 방문을 닫았다.


-


거친 소음이 한우석을 깨웠다.


- 쾅


무언가 터지는 소리였다. 이윽고 매캐한 연기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눈이 따갑고 코가 아리다.

한우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주방과 거실에도 연기가 자욱했다.


“어르신, 무슨 일입니까?”


늙은 농부가 소리쳤다.


“불이야.”


한우석이 집주인을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 헛간이 불타고 있었다. 헛간 안에 보관한 식량과 농기구도 모조리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이 거세다.

화약 냄새도 난다.

노인이 망연자실했다.


“이럴 수가···”


한우석이 냇가에서 물을 길어와 헛간에 뿌렸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불길은 지붕을 삼키고 기둥을 무너뜨리고 헛간을 잿더미로 만들고 나서야 꺼졌다.

전소.


집주인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절망스러웠다. 재산과 식량과 봄에 뿌릴 씨앗이 모조리 사라졌다.


“영주의 짓이야. 불량배가 우리 헛간에 불을 질렀어. 아마도 다음 차례는 내가 되겠지.”


협박이다.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신호.

한우석이 집 현관에 붙은 메모지를 떼어냈다.


[내일까지 집을 비워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을 산 채로 불태우겠다.]


그가 협박문을 집주인에게 건넸다.


“어르신, 이제는 정말로 떠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저랑 같이 도시로 가시죠.”


노인이 고집을 부렸다.


“나는 안 가. 마누라랑 자식이 여기에 있어. 내가 이 나이 먹고 다른 곳에서 무슨 평화를 찾겠나?”


한우석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사람은 각자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한우석의 목표는 삶이고 집주인의 목표는 죽음이다.


집주인이 헛간 잔해 속으로 들어가 잿더미를 뒤져 멀쩡한 물건을 일부 찾아냈다. 호미, 삽, 도끼. 그가 검게 그을린 작업용 도끼를 한우석에게 건넸다.


“받아. 맨주먹보다는 나을 거야.”


도끼는 무기보다 도구에 가까웠다. 자루가 길고 날이 두꺼우며 이음매는 못과 끈으로 투박하게 고정했다. 불길에 들어갔다 나온 탓인지 재를 털어도 색깔은 여전히 거무튀튀했다.

한우석이 도끼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늙은 농부가 방향을 가리켰다.


“큰 길로 나가면 표지판이 보여. 거기서 상단을 기다리게. 상단은 마차에 짐을 잔뜩 싣고 다니니 눈에 쉽게 뜨일 거야.”

“알겠습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 신이 있다면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지는 않겠지.”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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