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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몬스터 먹고 영웅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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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3.08.01 11:58
최근연재일 :
2023.08.12 21:37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327
추천수 :
9
글자수 :
105,701

작성
23.08.02 19:59
조회
11
추천
1
글자
10쪽

살인마

DUMMY

신분제 사회에서 살아오는 동안 쌓여온 분노가, 스르르 바람에 날린 실오라기처럼 그림자 밖으로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실들은 허공에서 서로 엉키고 설키면서 얇은 비단 같은 천이 되더니, 아르달하의 어깨에 살며시 얹히는 듯하다가 느닷없이 뱀처럼 온몸을 칭칭 휘감고 조이고 쥐어짰다.


왜 저놈들만 계속 무사하냐고? 네 친구들은 다 죽어나갔는데!


아르달하는 대답 없이, 땅에 떨어져 있던 밀림도를 집어 들었다.


몸값 협상이 결렬되자 불륜남의 얼굴에서 비로소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신 두려움이 떠올랐다. 수풀 속에서 옷을 벗어던질 때만 해도 반 정도는 발기돼 있었던 살덩이가, 딱해 보일 지경까지 쪼그라들어 있는 것이 그제야 아르달하의 눈에 들어왔다.


새끼. 쫄기는.


어쩐지 웃음이 나는 광경이었다. 차라리 처음에 옷을 주워 입고 덤볐더라면 그렇게 비참한 몰골이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자신이 패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울분이 다시 아르달하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넘어갈 거야? 저게 말이 돼? 아니 애초에 남을 죽일 생각을 했으면 자기도 죽을 각오를 했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자신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각오 없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사냥꾼의 직업윤리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니야. 상관없지. 저놈은 사냥꾼이 아니니까. 그냥 발정 난 꼬맹이들에 불과해.


잘 보니 스무 살이나 넘었을까 싶은 애들이었다. 비웃는 소리가 귓전에 얹혔다.


꼬맹이‘들’이라고?


아르달하는 또 무심결에 물 위에 선 여자 쪽을 흘깃거리고 말았다. 이상하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목소리는 계속 아르달하를 부추기고 재촉했다.


저 정신 나간 살인마 새끼를 그냥 살려보내겠다고? 저게 나중에 또다시 무고한 사람한테 칼질 안 할 거라는 보장이 있어? 죄 없이 다치고 죽는 사람이 더 생겨나면 그건 누구 책임이냐고?


그러나 아르달하는 망설였다.


그렇다고 멋대로 사람을 죽이는 건 너무 오만한 것 같은데.


아르달하는, 오랜 전쟁경험을 통해 재수가 없는 놈은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무기에도 찍혀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운명에 달린 것이지 인간의 힘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 것은 그런 경험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실력이 좋은 놈이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불륜남의 검술실력은 아르달하와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수준이 높았다. 참전경험은 없는 듯싶었지만, 애초에 실력대로 결과가 나왔더라면 지금 무장해제된 것은 아르달하였을 터였다.


열심히 쌓은 실력이라는 거, 별 의미가 없는 거 아닐까.


싸울 때 평정을 잃으면 셈을 할 수 없다. 짐승처럼 본능적인 반응만 거듭하다가 결국 진흙바닥에 처박히게 되는 것이다. 불륜녀 앞에서 빨리, 멋지게, 해치우려던 허영심이 놈의 발목을 잡아줬다.


불륜행각이 다 끝난 뒤였더라면 도리어 아르달하가 제압됐을 가능성이 컸다. 일 볼 거 다 보고 난 뒤, 남자가 현자가 되는 시간에 붙게 되었다면 그렇게 멍청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불륜남이 아르달하를 꼴사납게 밀림도를 든 얼치기 정도로 얕보고 있었다면, 아르달하는 아르달하대로 불륜남을 그저 여자 앞에서 허세나 부리려는 애송이 정도로 깔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서로의 기량을 보려고 하지 않는 장님과 또 다른 장님이 서로를 더듬어가며 싸움을 벌인 꼴이었다. 그것도 어찌 보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울분이 물었다.


그것뿐이야? 정말로?


아르달하의 정신이 등 뒤의 여자에게 가 있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터였다. 물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을 여자가 어떻게 됐을지만이 아르달하의 관심사였다.


저 철없는 것들이... 멍청한 욕망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됐을까?


아르달하는 밀림도를 칼집에 집어넣고 손사래를 쳐보였다.


“야 됐다. 얼른 여자애 데리고 집에 가 인마. 앞으로는 조심하고.”


그 정도면 모든 것이 원만히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륜남은 미친 사람처럼 아르달하에게 달려들었다. 부러진 칼을 거꾸로 들고 목을 겨누고 있었다.


뭐야 이 시발?


손 흔들고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나려던 아르달하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야이 새끼야! 미쳤냐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맥락이었다. 아르달하는 허둥지둥 두 팔을 내밀어 놈을 제지하는 동시에, 황급히 허리를 옆으로 기울여 목과 머리를 위험반경에서 빼냈다.


푹!


목에 칼이 꽂히는 것은 면했지만, 부러진 칼끝이 오른팔에 박히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끄으악!”


아르달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방심하다 맞은 칼이라 그런지 끔찍하게 아팠다.


돌이켜보면 참전경험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칼을 맞아도 소리를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다쳐도 꾹 참고 넘기는 것이 남자답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전술적인 기도비닉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적에게 이쪽이 손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리지 않으려고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전장에서는 그렇게들 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아르달하는 칼을 맞았다고 비명을 지른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이... 이 개새끼가...!”


그건 어쩐지 쪼그라든 남근을 보고 웃음을 지었던 데 대한 보복행위 같았다. 어쩌면 물 위에 남겨두고 온 여자에 대한 아르달하의 복잡한 감정을 알아차리고 질투를 느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른 것일 수도 있었다.


고통이 아르달하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응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싸움이 다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 적을 경솔하게 자극했던 것을 뉘우쳤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 아르달하는 바로 밀림도를 뽑아들었다.


거기서 불륜남이, 마침 검상을 입어 힘이 빠지고 칼을 뽑느라 동작까지 지체된 상대를 붙들고 늘어져 드잡이를 벌였다면 아르달하는 바로 위험에 처했을 터였다. 그러나 불륜남은 어처구니없게도 알아서 거리를 벌려주고 뒤로 물러서 버렸다.


스스로도 놀라는 얼굴. 아마도 검술을 오래 연습해온 동안 몸에 밴 습관 때문인 것 같았다.


쇄액!


아르달하는 사냥꾼이었고, 전쟁터에 끌려갔을 때에도 창잡이나 궁수였다. 평생 한 번도 검술을 배워본 적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아르달하의 칼은 뭔가에 빨려 들어가듯 깨끗하게 들어갔다.


어린 시절 글을 배울 때, 삐뚤빼뚤 글씨를 쓰는 손을 누나가 잡고 이끌어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팔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여주는 듯한 기분.


부러진 칼을 아무리 내저어봐야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스걱!


아르달하의 칼끝이 놈의 목울대를 비집고 지나갔다.


댕그랑!


놈은 부러진 칼을 떨어뜨린 채 자기 목을 양 손으로 감쌌다. 그 모습은 자신의 목을 자기가 스스로 조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피가 소나기처럼 터져 나왔다. 목이 깨끗이 잘려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목의 큰 핏줄이 잘린 모양이었다.


프슛! 프슈슉!


놀랄 만큼 많은 양의 핏줄기가 아르달하에게까지 내뿜어졌다.


사람의 피에서는 철과 똑같은 냄새가 난다. 피와 철은 서로를 부르고 탐하다가 결국에는 하나가 된다. 철을 벼려 만든 칼이 인간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순간이 그렇다.


피를 다 뿜어낸 불륜남은 앞으로 퍽 엎어지더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칼질을 한 아르달하도 그 피를 밟고 미끄러져 중심을 잃었다. 꼴사납게도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나자빠져 버렸다.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사람을 죽인 것이 처음이 아니었는데도.


전쟁터에서의 살상경험은 나름 풍부한 편이었지만,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칼질을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죽어가는 놈에게서 피가 그렇게까지 많이 뿜어져 나왔던 적도 없었고, 그 피를 그렇게까지 많이 뒤집어써본 적도 없었다.


갑옷을 안 입어서 이런 건가?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죽는다고? 풀 베는 칼에?


하지만 놈의 칼이 부러져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죽어 넘어진 것은 아르달하였을 것이었다. 오싹했다.


이건 뭐지? 칼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왼팔 뿐인 건가?


참담하고 아찔했다. 아르달하는 생전 처음 만나 말 한 마디 나눠보지 않은 사람을 죽였다. 주저앉은 그대로 숨을 고르던 아르달하는 그것이 자신의 첫 살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인과 전쟁은 달랐다. 전쟁은 죄책을 분산시켜줄 아군들과 명분이 있었지만, 살인은 아니었다.


꼭 세상천지에 혼자 남겨진 느낌. 그러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대로 도망을 쳐야 할지 아니면 목격자를 잡아 없애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죽여 없애야겠지?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고 반항하면? 도망치면 어쩌지? 그러다 감시인들이라도 불러들이게 되면 어떻게 하냐고? 그놈들 전부와 싸워서 이길 수 있어?


어질어질해졌다. 머릿속이 안개로 가득한 것처럼 무엇도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르달하는 몸을 씻어야 한다는 생각은 해냈다. 그렇게 피칠갑을 한 채로 돌아다니게 되면 어딜 가든지 당장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이 분명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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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숲과 야만 23.08.13 11 0 -
23 꼬일게요 23.08.12 17 0 10쪽
22 검은 매의 순간 23.08.11 8 0 10쪽
21 전역자의 재무장 23.08.08 10 0 10쪽
20 뒷거래 23.08.06 14 0 10쪽
19 또 만났네 23.08.05 14 0 9쪽
18 사소한 시비 23.08.04 14 0 10쪽
17 시그나스 23.08.03 13 0 10쪽
16 약기운 23.08.03 12 0 10쪽
15 먹으라고 23.08.03 9 0 10쪽
14 두 번째 약 23.08.03 9 0 10쪽
13 약값 23.08.02 10 0 10쪽
12 이상하게 서운하네 23.08.02 10 0 10쪽
11 식빵과 약솥 23.08.02 10 0 10쪽
» 살인마 23.08.02 12 1 10쪽
9 베테랑 23.08.02 11 1 11쪽
8 내 눈 23.08.02 9 1 11쪽
7 만남 23.08.02 9 1 11쪽
6 추격자 23.08.02 9 1 10쪽
5 날개 23.08.02 11 1 11쪽
4 호기심이 사냥꾼을 23.08.02 11 1 11쪽
3 뿔과 흙의 시간 23.08.02 19 1 12쪽
2 하늘의 별을 따오라 그래 23.08.02 24 0 11쪽
1 피가 멈춰 23.08.02 63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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