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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늑대의 여울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3.02.02 11:53
최근연재일 :
2023.02.24 19:42
연재수 :
19 회
조회수 :
578
추천수 :
26
글자수 :
80,674

작성
23.02.17 23:45
조회
27
추천
1
글자
10쪽

놓여난 이후에는

DUMMY

그래도 형편없이 노를 저은 것에 비하면 꽤 먼 거리를 수월히 온 것도 사실이다.


목동이 노 젓기를 멈춰도 나룻배가 계속 움직여준 덕분이다. 바람 때문은 아니다. 야만인들의 화살을 늦춰주던 바람은 호수에서 뭍 방향으로 부는 것이었다.


그런데 배의 움직임은 풍향과 반대다. 배는 점차 호수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서, 즉 호수의 중심을 향해 흐르고 있다.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


바람은 반대로 불고 있고, 호수의 물이라는 것은 원래 흐름이 없게 마련 아니던가. 물리를 배워 아는 자영업자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호수가 배를 어딘가로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어쩌면 아까 화살 사거리를 벗어났던 것은 자력이 아닐지도? 창자루로 물밑을 찍어내던 힘과는 별개로...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말이 안 되잖아.


어찌됐건 고마운 일이기는 하다. 부여에서 도망치는 길, 앞을 가로막고 있던 강에서 자라와 고기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줬다던 주몽이 아마 비슷한 기분 아니었을까.


그래도 여전히 불길한 느낌. 뭔가 개운하지가 않아.


호수변이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난 뒤에도 아예 마음이 놓이지는 않는다.


수상하다. 꼭 세계 전체가 목동을 속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더 음습한 곳으로 나룻배를 끌어들이고 유인하는 듯한 느낌. 혹시 소녀와 목동은, 사람을 집어 삼키려는 거대한 괴물의 혀 위를 미끄러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뭔가 엄청난 일이 터질 것 같은, 폭발적 예감이 목 뒤의 신경을 간질이고 있다. 육감이 말하고 있다. 어떻게든 밤이 오기 전에 뭍으로 올라가 소녀를 성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안전해졌다는 확신을 할 수 있는 곳에 진입한 뒤에야 소녀를 보살필 생각을 한다. 좁은 배 안이다. 뱃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소녀는 몸을 다 펴지도 못한 채 웅크리고 있다. 몸이 차다. 저체온증 때문이겠지. 바들바들 떨고 있다.


어떻게든 살리고 싶은데.


도대체 얘는 정신력이 얼마나 강하길래? 아까는 절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여간 신세를 졌다. 고마운 마음이다.


그런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소녀는 간헐적으로 눈을 치켜뜨며 목동 쪽을 힐끔거린다. 목동처럼 안도하기는커녕 여전히 고슴도치처럼 잔뜩 곤두서 있는 거다.


어허? 얘가 왜 이러냐.


소녀와 소년 사이에 자리 잡은 새로운 긴장의 정체를, 목동은 뒤늦게 알아차린다. 어리석고 둔해서다. 소녀가 소년을 향해 내비치고 있는 경계심과 공포를 눈으로 보고서도, 그걸 모르고 혹시 쫓아오는 놈들이 더 있는가 싶어 애먼 뭍 쪽을 돌아봤을 뿐.


그러다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다시 소녀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설마. 나를 겁내고 있는 건가.


믿기지 않는 일이다. 탁월한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탈출한 뒤에도 소녀는 그저 소녀일 뿐이다. 다시 약자가 되고 만다. 헐벗고 아픈 몸으로, 이제는 목동의 손끝에 달린 불운과 불행을 겁내는 처지가 된 거다.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일이다. 그런데 목동은 어떻게 해야 이 가련한 요정을 위로하고 안심시킬 수 있을지 잘 모른다. 그런 건 배운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마음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다.


소녀는 모르고 있다. 자신의 몸이 드리우고 있는 곡선과 빛깔이, 욕망이 아닌 신비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소녀는 자궁 안에 잠든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양팔로 꼭 끌어안고 있다. 설령 소녀 본인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을지언정, 목동의 눈에 그 광경은 하나의 세계가 태어나려는 탄생의 장관쯤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소녀는 목동에게 있어 새로운 세상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바로 눈앞에서 처음 태어나는 세상.


살리고 싶다. 어떻게든. 그러려면 일단 안심부터 시켜야 해.


웅크린 소녀의 몸을 펄쩍 뛰어넘어 배꼬리 쪽으로 간다. 나룻배가 심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소녀의 심장만큼 쿵쾅대지는 않았을 터. 아무쪼록 이 움직임이, 지금 소녀가 겁내고 있는 일을 건너뛴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는데.


시체에서 벗겨낸 옷과, 소녀가 입으려다가 입지 못하고 던져둔 나들이옷에서 물을 짜낸 다음, 그것을 수건 삼아 문질러 소녀의 머리칼에서 물기를 빼낸다. 힘을 쓸 수 있는 손이 오른손뿐이어서 잘 안 되지만, 정성을 들여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세상의 금은보화를 다 가져다 머리맡에 놔주고 싶지만, 그것말고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무릎을 베개로 내주고 호수의 물을 떠 입에 흘려 넣어주는 것이 전부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소녀는 적잖이 마음을 놓은 것 같다.


화살을 맞지 않은 손으로 소녀의 이마를 짚어본다. 처음에는 놀란 듯 눈을 치켜뜨더니 조금 있자 안심이 된 듯 스르르 눈을 감는다.


앉은 채로 윗옷을 벗는다. 노를 젓느라 몸이 달아올라있던 차라 옷을 벗어도 춥다는 느낌은 없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옷이지만, 가죽으로 된 것만은 분명하다. 체온 저하를 막을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왼손에 꽂힌 화살을 건드리지 않고 옷을 벗으려니 영 쉽지가 않다. 화살 끝이 옷자락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통증에 이를 악물게 된다. 그래도 겨우겨우 윗옷을 벗어 헐벗은 몸에 덮어준다. 바지는 아까 놀라서 물 위에 주저앉는 바람에 다 젖어있다. 별 소용이 없을 것 같네.


그보다 소녀가 입을 옷을 말려야 하는데, 옷을 널어 말릴 곳이라고는 시신이 놓인 뱃머리뿐이다. 두 대의 화살을 맞고 죽은 뒤 일곱 대의 화살을 추가로 더 맞은, 가엾은 시신이 안식을 얻지 못하고 여전히 방패막이로 세워져 있다.


금방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소녀가 말한다.


"버려. 냄새나."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고 두리번거리다 소녀가 버리라고 한 것이 시신임을 깨달은 목동은 작은 충격에 빠진다. 소녀의 어조에 망설이거나 괴로워하는 기색 같은 것이 전연 없어서다.


남자친구 같은 건... 역시 아니었던 모양이지?


목동은 묘한 희망을 품는다.


일이야 어찌 됐든 전날 저녁 축제에서 만나 한 배를 탄(?) 사이 아니던가. 어쩌면 밤이 깊도록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긴. 시체 썩는 냄새가 배 바닥에 고여 빠져나가지 않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했다. 배의 바닥에 쓰러져있는 소녀에게 그 냄새는 더 지독했을 터.


목동은 다시 소녀의 몸을 훌쩍 뛰어넘어 뱃머리로 넘어간다.


하지만 이렇게 깨끗한 호수에 시체를 던져도 좋을까 싶어 망설여진다.


"던져도 돼. 소용없어 이제. 다 틀렸다고. 이미 호수는 피를 먹었어. 밤새도록."


꼭 소년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것 같아 신기하기는 한데,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겠다.


호수가 피를 먹어? 무슨 말이야 그게?


"야만인들... 야만인들 때문에... 호수... 호수가...! 으으으..."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렇지만 안 그래도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는 소녀에게 연유를 따져 묻고 싶지는 않다. 목동이 할 일은 따로 있으니까.


새삼 무서운 애라는 생각이 든다. 나들이옷을 차려입고 나가다가 목동에게 저녁을 내주게 했던 그때의 그 착한 애가 아닌 것 같다.


피곤하고 초췌해져서 사람이 달리보이는 게 아니라, 뭔가 인간 자체가 악독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시 용모는 똑같고 성격은 정반대인 일란성 쌍둥이가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에이, 저렇게 예쁜 애가 그럴 리 있나. 끔찍한 경험 때문이겠지. PTSD 같은 걸 거야.


그러고 보면 어제는 목동에게도 끔찍한 날이었다. 그렇게 밥 먹다 말고 엉망으로 두들겨 맞은 목동이, 이후로 사람을 전혀 믿지 않게 되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던가.


예전으로 돌릴 수 있을 거야. 누군가 저 애를 원래의 삶으로 돌려보내 주기만 한다면... 다시 자비롭고 영리한 영주 따님이 되어 또 가엾은 사람들을 도와주겠지.


목동은 이곳을 떠나 자유를 찾아가면 되는 일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끙차!


첨벙!


시신을 호수에 던져 넣은 뒤에도 비리고 역겨운 냄새가 금세 가시지는 않는다. 그래도 훨씬 나아진 것 같기는 하다. 정말 코를 잘라내는 듯한 냄새였지.


시신이 있던 자리에 널어둔 옷이 다 마르기도 전에 물은 완만히 깊어지고, 어느덧 뉘엿뉘엿해진 해도 하늘에 깊숙해진다. 아름다운 석양이다.


이대로 어두워진다면, 설령 야만인 놈들이 호수변에 진을 치고 있다 해도 목동과 소녀가 있는 곳을 알 길이 없다. 호수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버티고 있으면 누군가 나타나서 사태를 정리해주지 않을까. 영주든 군대든 뭐든 간에.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때까지 소녀를 살려놓을 수 있을까. 너무 고요해서 불안해지는 평화가, 물결이 없어 더 짙은 호수의 적요 위로 묵묵히 고여 든다.


체온이 돌아오지 않고 있어 걱정은 되지만, 목동의 옷을 덮고 물도 마셨으니 조금쯤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기대해보는 중.


소녀가 기를 쓰고 말한다.


"...나 배고파. 목동아."


아이고. 그 말만은 나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저기... 그... 이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까 식량자루를 놔두고 배에 탄 걸 못 본 건가? 아니면 그걸 알면서도 내가 다른 걸 더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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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놓여난 이후에는 +2 23.02.17 28 1 10쪽
12 욕먹음 +2 23.02.16 30 2 10쪽
11 야만인들 23.02.15 21 0 10쪽
10 발각됨 23.02.14 22 2 10쪽
9 물개와 미녀 23.02.13 18 1 10쪽
8 아룬달 호수에 23.02.12 23 2 10쪽
7 회색악마 +4 23.02.11 43 1 10쪽
6 은신처 23.02.10 27 3 10쪽
5 학대 받는 저녁 23.02.09 30 2 10쪽
4 늑대의 숲 23.02.08 31 1 10쪽
3 전생의 마지막 23.02.07 41 2 10쪽
2 불운한 새벽 23.02.06 53 2 10쪽
1 영웅전 +4 23.02.06 104 1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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