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정증영대근

늑대의 여울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3.02.02 11:53
최근연재일 :
2023.02.24 19:42
연재수 :
19 회
조회수 :
579
추천수 :
26
글자수 :
80,674

작성
23.02.07 23:55
조회
41
추천
2
글자
10쪽

전생의 마지막

DUMMY

손끝으로 겨우 아이를 더듬을 수 있게는 됐지만, 갓난아이는 뒤집힌 유아용좌석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좌석의 벨트는,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는 그가 한 번도 풀어본 적 없는 종류의 잠금장치로 잠겨 있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곳을 더듬고 만지고 잡아당겼지만, 철로 만들어진 괴물은 좀처럼 아이를 물고 있는 턱을 열지 않았다. 그때 차 안으로 불이 확 번지면서 그에게 불꽃이 쏟아졌다.


불길은 꼭 액체처럼 끼얹어졌고, 합성섬유 패딩에는 놀랍도록 쉽게 불이 붙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에 옷을 다 씹어 먹은 불꽃이 그의 팔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화상은 가장 끔찍한 통증을 안긴다. 자영업자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마치 방금 그가 구해낸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거기서 팔을 물릴 수는 없었다. 뭘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면서, 그는 결사적으로 벨트를 당기고 흔들었다.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밀가루처럼 보드랍고 강아지처럼 자그마한 것이 풀썩 쏟아지며 그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급하기는 해도 혹시 다치기라도 할까봐 그는 최대한 천천히 아이를 밖으로 끌어냈다. 눈물과 콧물과 침으로 엉망이 된 아이 얼굴이 차에서 빠져나왔다.


다행이야.


존재의 뿌리에서부터 올라온 안도가 긴 숨과 하얀 입김으로 승화해 하늘로 올라갔다.


아이 옷에 붙은 불은 손으로 문질러 껐다. 그 불을 다 끈 뒤 아스팔트 바닥에 굴러 자기 몸의 불을 끌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놈의 불이 도무지 꺼져주지를 않았다. 아무리 문질러도 아이의 불은 다시 자라나 연기를 피워냈고, 그러는 동안 자영업자의 몸에서 불쑥 자라난 불은 그림자 없이도 주변을 밝히며 환히 이글거렸다.


불꽃에는 그림자가 없다. 그래서 반응이 늦어졌다. 얼어붙은 아스팔트 위에 그의 그림자만이 그려졌기에, 아직은 괜찮을 거라고 상황을 오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불꽃이 자영업자의 온몸을 집어삼킨 뒤였다. 살과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로 알았다. 요리를 할 때 나는 냄새와 비슷했다. 그것은 그의 생애 가장 비극적인 깨달음이었다.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의식이 멀어져가던 그때 푸확, 하는 소리와 함께 소화기 분말이 쏟아졌다. 등 뒤에서였다.


*


감았던 눈을 뜨니 바로 숲속이다. 자영업자는 숲에 와 있다.


콜록! 콜록!


갑자기 터진 기침이 몸과 어깨를 쥐어짜고 뒤튼다. 전생의 마지막을 후각으로 예감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현생의 처음은 청각과 통각으로 다가온다.


숲이다. 새의 울음소리가 새로 열어낸 아침 한가운데다. 나무가 뿜어내는 신선하고 신령한 기운이 자영업자의 얼굴과 정신을 문질러 맑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맑은 정신을 가지고도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교통사고현장에서 거기까지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온 것인지 아는 바가 없어서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정말 숲이다. 아니. 숲의 초입이다. 깨끗한 공기와 풀 냄새가 폐에 차올랐다. 불타는 차가 뿜어내던 연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누구라도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컹컹, 개 짖는 소리에 놀라 홱 등을 돌려 뒤를 돌아본다.


뒤로 돌자마자 거칠 것 없이 너른 들판이 시야 안으로 뛰어든다. 사방팔방 둘러봐도 산으로 막혀 있던 전생의 들과는 다르다. 멀리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탁 트여 있다.


지평선이라니? 매우 이국적이지만 어느 나라의 들인지는 알 길 없는 공간에 던져진 자영업자의 속에서 여러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나는 죽은 건가?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 소화기가 터졌잖아. 설마... 그러고도 불을 끄지 못했던 건가? 여기는 어디지? 사후세계?


푸른 들에 하얀 양떼가 모여 있다. 적어도 백 마리는 될 것 같다. 잠깐.


그러면 여기는 천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어린 양새끼들이라는 게 혹시 저놈들인 걸까? 그런데 나는 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거지?


분명 사람의 모습이다. 억세 보이는 팔과 손이 그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인다. 비록 옷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악한 것을 몸에 걸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더 건강하고 힘이 넘친다.


사십대를 목전에 두고 있던 자영업자는 다시 소년이 되어 있다. 거울이 없어 얼굴까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다시 젊어진 것이 아니고서야 지금처럼 온몸에 활력이 차오를 리가 없다.


젊음이라는 것이 이 정도의 에너지일 것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어째서일까. 내게도 한때는 머물렀을 젊음일 텐데.


나는 천국의 목동이 된 것인가. 뭐지? 이건 나인가? 내가 목동이 된 건가? 지금 이 몸이 내 거 맞아?


온몸을 통해 느껴지는 오감은 선명하지만 무엇도 쉽게 확신할 수 없다. 전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몸과 삶이어서다.


컹컹!


다시 개가 짖는다. 양몰이 개 네 마리와 양떼가 모두 동요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뭐지. 오늘 처음 만난 것들인데.


목동을 부르듯 짖어대고 있는 개는 털이 긴 검은 개다. 이쪽으로는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숲 쪽을 보고 험하게 짖어대는 중이다.


아마 검은 개가 개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다. 검은 개를 제외한 다른 양몰이 개들은 검은 개의 뒤에서 낑낑거리며 헐떡이기만 하고 있었다.


겁을 먹은 개들이 저런 소리를 내던데. 이건 뭘까? 숲에 뭐가 있길래?


등 뒤 수풀 너머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멀지 않은 곳. 자영업자가, 아니 목동이 다시 숲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목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간다.


검은 개가 또 짖는다. 하지만 목동을 따라오지는 않는다.


그럴 거면 차라리 가만히 있어주는 게 낫지. 짖어봐야 내 정신을 흐트러뜨릴 뿐이잖아.


수풀을 걷어내자마자 짐승이 나타난다. 목동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그러나 다시 보니 덫에 걸린 짐승이다. 움직이지 못한다.


덫은 숲의 경계에 놓여있다. 숲도 들도 아닌, 악랄한 지점이다. 숲을 한 발짝 벗어나자마자 그 강철이빨로 늑대의 발목을 물어뜯은 거겠지.


변명조차 듣지 않겠다는 듯한 잔인성이 돋보이는, 인간적인 설계. 마치 스스로가 신이라도 된 양 내린 월경의 처벌이었다.


그러나 숲의 주인은 원래 늑대였을 터인데.


하얀 겨울눈과, 그보다 더 차가운 겨울밤의 한기를 교묘히 뒤섞어놓은 듯한 회색털이 분노에 떨고 있다. 어쩌면 수치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짐승들에게도 체면과 부끄러움이 있다. 늑대는, 강제로 발가벗겨진 여자처럼 웅크린 채 털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결한 여인일수록 더 강한 수치심을 느끼는 것처럼, 맹수들 역시 그러하다. 자부심이 강할수록 덫의 상처는 더 커지게 마련이니까.


크르르르르르르!


늑대는 초승달처럼 흰 송곳니를 다 드러내고 으르렁댄다. 무슨 뜻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주 단순한 기호학이다. 늑대의 경고에는 죽이겠다는 단 한 가지 의미만이 담겨있으니까.


늑대는 개와 다르다. 늑대와 개가 같은 뿌리를 둔 짐승이라는 말을 그는 한 번도 믿어본 적이 없다. 으르렁대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개가 짖는 소리와는 달리, 늑대가 내는 소리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영혼의 뿌리까지도 쉽게 뒤흔들어놓는다.


주머니에는 뭔가가 들어있다. 말린 고기다. 달래볼 셈으로 바짝 마른 고기조각을 내밀어보지만 늑대는 털끝만큼도 진정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먹이를 내미는 것은 개들을 위한 대화니까.


자영업자는, 아니 목동은 넋을 잃고 늑대를 바라본다.


늑대는 아름다운 동물이다. 사자 곰 호랑이나 표범은 다른 짐승의 살점을 주고 길들일 수 있지만 늑대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어릴 때 거둬도 결국에는 맹수로 자라난다. 죽이거나 놔주는 수밖에 없다.


목숨을 내걸어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치고 있는 것일까. 늑대는 자유롭다.


반면 그는 거의 사십 년 동안을 노예로 살았다. 자본의 노예였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강철이빨에 발목을 물려 무릎 꿇려진 뒤에도 굴복하지 않는 야성은 그에게 신비롭기까지 하다. 굶주림보다도 강한 분노와 수치심을 그때까지 한 번도 목격한 적이 없어서다.


그러나 어린 소년의 다리는 후들거린다. 그렇지만 목동은 그러면서도 벽 같이 둘러쳐진 암담한 두려움을 뚫고 늑대에게 다가간다. 늑대의 몸이 점점 더 커진다. 개들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크기다.


무기가 있을 리 없다. 목동에게 쓸 만한 무기를 줄 사람은 없다. 그저 긴 나무를 꺾어 대강 잔가지를 쳐낸 장대 하나가 있을 뿐.


그러나 의지할 것이라곤 그것뿐이다. 양치는 개들은 감히 다가오지도 못한다. 멀거니 목동의 등 뒤에 서서 짖어댈 뿐이다.


그러니 목동으로서는 그 키보다 더 긴 장대를 놓을 수가 없다. 손가락이 늑대의 이빨처럼 하얗게 될 정도로 꽉 붙들고 서 있을 수밖에. 그 뾰족한 끝을 늑대에게 겨누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절망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늑대와, 그런 늑대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두려워 다가가지 못하는 소년이 그대로 돌이 된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늑대의 여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9 용암 속에 새 +1 23.02.24 18 1 10쪽
18 마지막 시험 +2 23.02.22 18 1 10쪽
17 나의 이름 +2 23.02.21 22 1 10쪽
16 이교의 신 +2 23.02.20 17 1 10쪽
15 피로 맺은 인연 +2 23.02.19 18 1 10쪽
14 역발상 23.02.18 15 1 10쪽
13 놓여난 이후에는 +2 23.02.17 28 1 10쪽
12 욕먹음 +2 23.02.16 30 2 10쪽
11 야만인들 23.02.15 21 0 10쪽
10 발각됨 23.02.14 22 2 10쪽
9 물개와 미녀 23.02.13 18 1 10쪽
8 아룬달 호수에 23.02.12 23 2 10쪽
7 회색악마 +4 23.02.11 43 1 10쪽
6 은신처 23.02.10 27 3 10쪽
5 학대 받는 저녁 23.02.09 30 2 10쪽
4 늑대의 숲 23.02.08 31 1 10쪽
» 전생의 마지막 23.02.07 42 2 10쪽
2 불운한 새벽 23.02.06 53 2 10쪽
1 영웅전 +4 23.02.06 104 1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