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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늑대의 여울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3.02.02 11:53
최근연재일 :
2023.02.24 19:42
연재수 :
19 회
조회수 :
577
추천수 :
26
글자수 :
80,674

작성
23.02.15 18:52
조회
20
추천
0
글자
10쪽

야만인들

DUMMY

소년이 두고 온 것들을 향해 폴짝 뛰어오르려는 순간, 야만인들의 형체가 목동의 시야 끄트머리를 훅 치고 들어온다. 놈들은 흙먼지를 몰고 달려오고 있다. 어린 시절 체력장을 할 때 100미터 달리기를 해본 적이 있어 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100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 있다.


벌써 저기라고?


가까워진 거리에 놀란 목동이 미끄러진다. 또 그 썩은 물을 먹는다.


어푸! 퉤퉤 이런 시발!


초읽기 같던 시간이, 이제는 아예 덜컥 멈춰 선다.


얼음처럼 단단해져버린 시간이 모든 움직임을 잡아 세우면서, 목동은 도리어 자유로워진다. 물론 이것은 목동 안에서의 자유다. 움직일 수 없는 건 목동도 놈들과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생각할 틈이 생겼으니까.


앞에는 나룻배와 썩은 시신과 여자아이가, 뒤에는 떨어뜨리고 온 물건들과 야만인 기병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소년은 이미 호수 속이다.


어떻게 해도 풀기 어려운 난제다.


물론 문제 자체는 익숙한 기출이다. 목동이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겪은 문제와 유사하다.


다른 세계로 오기 전에 겪어봤던 문제. 앞에는 가족과 노동과 괴로움이 버티고 서 있고, 등 뒤에서는 세월과 죽음이 맹추격해오고 있다.


모두 쫓기듯 살다가 어딘가로 사라진다. 어쩌면 일생은 한 줌밖에 안 되는 시간의 꿈일 수도 있지. 그러나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눈앞에 드리워진 희고 예쁜 팔에 눈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실없이 웃음이 터진다.


예쁘네. 진짜.


“야! 빨리 타!”


소녀가 귀를 찢을 듯 소리를 지른다.


그래. 급박한 상황이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해.


창? 또는 첩지가 들어있는 식량자루.


어서,

손을 뻗어.

저걸.

가져와야.

하는데!

움직여줘! 제발!


멈춘 시간 속에 못 박혀 몸이 다행히 퍼뜩 움직여준다. 뭍을 밟고 올라선다.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 기어이 창을 부여잡는다. 목동은 창을 선택한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서일까? 적들이 일으킨 흙먼지는 아직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소녀가 비명을 지른다.


“야아! 너 뭐해?!”


고막 찢어지겠네 진짜.


생명을 살릴 동아줄인 양 창 자루를 단단히 움켜쥔다.


그러나 그 창으로 야만인기병들을 대적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건 어리석은 만용이지. 이미 그 결과를 마을에서 목도한 바 있다. 목동은 바로 등을 돌리고 호수를 향해 내달린다.


도주하는 것이 아니다. 도움닫기다. 그러고 보니 ‘도주’와 ‘도움닫기’는 두운이 맞는다?


목동은 창 자루 끝으로 물가의 땅을 찍고, 있는 힘을 다해 창대를 아래로 밀어내면서 점프한다.


장대높이뛰기를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다행히도 삐끗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공중에 붕 떠오른다. 머릿속으로 그린 동작이 제대로 나와 준다.


목동의 물에 젖은 다리를 스치는 바람이 길다. 한 순간이기는 하지만 마치 새가 되어 날고 있는 것 같다.


소년은 호수 가운데를 향해 느릿느릿 흘러가는 나룻배 안으로 한달음에 쏟아져 들어간다.


덜컥!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배가 흔들리지만 곧 안정된다.


꽤 먼 거리를 단번에 좁힌 모양이다. 놀랐냐? 멋있지?


소녀는 젖가슴을 가리고 있던 옷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입을 헤 벌리고 소년을 보는 중이다. 물론 목동의 입도 떡 벌어진다. 소녀의 나신에는 안 예쁜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


아아... 나도 이런 내가 싫다. 다시 어려져서 이러는 건가?


말발굽 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바로 뒤로 돌아 창대를 물속에 찔러 넣고, 있는 힘껏 물밑 땅을 밀어낸다. 그런데 배를 물 위로 나아가게 하는 데는 그리 큰 힘이 필요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룻배는 예상보다 빠르게 미끄러져나간다. 배가 갑자기 훅 나아가는 바람에 창을 놓칠 뻔하고, 다시 간신히 부여잡은 소년이 연거푸 물밑 땅을 찍고 밀어낸다.


무장을 해보겠다고 애써 만들어 어렵사리 들고 온 창은 허무하게도 배 젓는 노가 된다. 하지만 그때 그 갑사 놈 말대로 창을 두고 왔거나 처음의 반토막짜리 창을 그대로 들고 왔더라면 이제 와서 어쩔 뻔했나. 너무 짧아서 호수 밑바닥을 찍어낼 수 없었을 터다.


나룻배가 5미터 남짓 거리를 만들고 난 뒤에야 말들은 호숫가에 도착한다.


호수 가장자리의 젖은 흙에서는 먼지가 나지 않는다. 놈들이 몰고 온 흙먼지를, 호숫가의 흙이 잡아먹는 듯한 광경이다. 갈대수풀에 가려져있던 수면이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지.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놈들은 진로를 확 꺾으며 급제동한다.


대혼란.


놈들이 뒤흔들고 있던 땅이, 이번에는 반대로 놈들을 잡아 흔들고 있다. 급정거하다가 그만 손에 들고 달려오던 밧줄 올가미를 땅에 떨어뜨린 놈까지 있다. 당황한 놈들이 내지른 소리가 깨끗한 호수 언저리를 탁하게 물들인다.


이 틈이다. 최대한 거리를 벌여놔야 해! 죽을힘을 다해 창질, 아니 노질을 한다.


놈들은 목동처럼 배로 뛰어오르지 못한다. 정말 소녀의 말대로 물을 기피하는 모양이다.


간신히 배에 타고 나니 궁금한 점들이 생긴다. 장창을 든 한 놈을 제외한 두 놈이 다 활과 화살을 들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활을 쏘지 않았던 것일까.


고작 100미터 정도의 거리였잖아. 분명히 활의 사거리 안에 들어갈 건데. 말을 타고 있어서 정조준이 불가능했던 걸까? 아니면 궁술이 그렇게까지 정교하지 않아서? 호숫가 모래 위에는 큰 나무가 자라지 않는 법이니 나뭇잎이 시야를 가렸던 건 아닐 텐데.


아예 활을 쏴보려고 하지도 않았어. 혹시 성을 공격할 때 화살을 다 쓴 건가? 뭐지?


놈들이 몰고 온 흙먼지가 커튼처럼 걷히면서, 놈들이 왜 활을 쏘지 않았는지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정말 놀라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죽을힘을 다해 배를 밀어내던 목동은 엇,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며 또 창을 놓칠 뻔한다.


말의 머리가 보이지 않아서다. 말들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반신은 영락없는 말인데, 상반신은 사람이다.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절대로.


켄타우로스인 거다. 믿기 어려운 광경이다. 사람들이 야만인 이라고 말을 하길래 그래도 사람의 몰골은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놈들은 발정이 나 있다. 잔뜩 성이 난 양물이 켄타우로스의 뒷다리 사이에서 불거져 달릴 때마다 끄덕거린다. 죽은 여자들의 몸이 완전히 망가져있던 이유가 거기서 드러난다.


우와 저거 진짜 길이가 최소한... 와 나 이런 미친 새끼들.


반드시 야만인 놈들을 죽여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죄 없이 참살당한 여자들의 원수를 갚아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시기심(?)을 삭이기 위함인지는 목동 자신도 모른다.


그러니까 놈들은 활을 쏘지 않고 소녀를 산 채로 잡아 능욕하려던 거다. 치가 떨린다.


소녀는 간밤에 그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지인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밤새 물밑에서 몸서리쳤겠지.


목동과 소녀는 서로에게 은인이 되는 셈이다. 만일 소녀 없이 목동 혼자서만 호숫가에 서 있었더라면 놈들은 바로 화살을 쏴댔을 터다. 대적하기는커녕 도망치는 일만도 어려웠을 것이다.


천만다행. 세 놈 뿐인 것 같다. 그런데 대체 편제가 어떻게 되는 놈들이길래 이렇게들 단독행동을 하고 있는 거지?


호수 물을 보고 급정거를 했던 놈들이 다시 균형을 되찾는다. 그제야 활을 들어 시위를 매긴다.


목동은 열심히 배를 밀어내지만 여전히 활의 사거리 안이다.


하지만 괜찮아. 자세와 호흡이 안정이 안 돼 있잖아. 정조준은 불가능할 거야.


퉁! 슈릭!


새끼들. 거 보라고.


역시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다. 빗나가기는 했지만 화살이 공기를 찢는 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양궁경기 중계를 볼 때는 그게 그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는데 과녁 입장이 되고 보니 얘기가 다르다.


퉁! 쉬릭!


그아아아악! 빨리 토껴야 돼! 이러다 맞겠어!


슈윗!


아오 이런 시발!


세 대 째부터 제대로 된 유효슈팅이 배 안으로 날아든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렇지. 총알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화살은 눈에 비치기는 하니까...!


쉬릭!


어허? 그래도 개 빠르잖아? 장난 없네 이거?


두 놈이 교대로 쏴대기 시작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야!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아니 내가 정신이 없는 걸 어떻게 알았... 으악!


따악! 퍼드드드!


목동의 손에 쥐여진 창 자루에 화살이 날아와 박힌다. 눈앞에서 부르르, 떨리는 화살과 깃이 섬뜩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거의 주저앉을 뻔하다가 호랑나비 스텝으로 겨우 몸을 일으킨다.


이익! 까딱 잘못하면 화살로 묘비를 삼게 될 거야!


피, 피하면 되지 뭐! 눈에 슬쩍 비치는 것 같으면 눈으로 보고 피하는 거다!


이래 뵈도 나는!

코인 야구연습장에서!

무려 시속 120km로 날아오는 강속구를!


퍽!


“아옭?!”


분명히 피한 것 같았는데! 눈 깜짝하고 나니 왼손에 화살이 박혀있다? 손등에 박힌 화살이 손을 뚫고 손바닥으로 나와 있는 거다.


겨우 문콕 정도의 충격 같았는데 화살 꽂힌 모양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끔찍한 통증이 시작된다. 미친 치와와 새끼 한 마리가 살 속으로 파고 들어와서 왼손 근육과 핏줄을 콱 물고 안 놔주는 느낌?


“끄으아아아갸각! 끄아오그아악! 느아아아악!”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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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피로 맺은 인연 +2 23.02.19 18 1 10쪽
14 역발상 23.02.18 15 1 10쪽
13 놓여난 이후에는 +2 23.02.17 27 1 10쪽
12 욕먹음 +2 23.02.16 30 2 10쪽
» 야만인들 23.02.15 21 0 10쪽
10 발각됨 23.02.14 22 2 10쪽
9 물개와 미녀 23.02.13 18 1 10쪽
8 아룬달 호수에 23.02.12 23 2 10쪽
7 회색악마 +4 23.02.11 43 1 10쪽
6 은신처 23.02.10 27 3 10쪽
5 학대 받는 저녁 23.02.09 30 2 10쪽
4 늑대의 숲 23.02.08 31 1 10쪽
3 전생의 마지막 23.02.07 41 2 10쪽
2 불운한 새벽 23.02.06 53 2 10쪽
1 영웅전 +4 23.02.06 104 1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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