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06.
씨발.
오늘도 역시나 한바탕 드레스 더미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게 된 엘리시아는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 도대체 매일 이게 어쩌자는 짓인지.
결혼 하는 것도 달갑지 않았지만 이럴 바엔 차라리 빨리 결혼을 해서 드레스 더미의 하루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야, 어디 뭐 좀 재미있는 일 없냐?”
답지 않게 얌전히 방구석에 구겨져 있을려니 영 좀이 쑤시는 그녀였다. 특히나 몰래 밤마다 기초 체력을 위한 훈련과 검술 훈련을 할려니 그건 그것대로 괜히 아니꼬웠다. 도대체 어쩌다 자신이 이 모양 이 꼬라지가 된 것인지.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아니, 자신이 무슨 만능 엔터테이먼트도 아니면 뭐만 하면 자신한테 물어보는 엘리시아의 행동에 카얀이 다소 띠껍게 응답했다.
“너 무뇌아냐? 아니면 몸이 미치도록 간지럽냐? 그래서 그래?”
좀 사람이, 짜증도 낼 수 있는 거지.
지는 틈만 나면 짜증내면서 왜 나는 못 내게 하는데?
정말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은 매우, 매우 많이 불공평했다.
“황성 안에 꽤 예쁜 정원이 있던데, 구경이나 하시렵니까? 중간에 보니까 호수도 있는 것이 정 심심하시면 물놀이나 하십시오.”
“아, 그러게. 그러면 호수나 가자.”
평소엔 뚱한 것이, 호수란 단어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당황한 것은 그였다. 왠지 지금 저 모습 상 호수에 가서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물놀이를 할 것 같아보였다. 자신은 그저 빈말로 한 것이었건만.
하긴, 워낙 물을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그녀가 물을 보고 그냥 지나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도 했다.
하아. 결국 또 그로인한 뒤처리는 자신의 몫인가.
제발 호수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길 바라며 카얀은 엘리시아의 여벌옷을 챙겨들고 호수가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황성 안에 있는 것이라 열심히 관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호수의 물은 깨끗했다. 얼굴을 비추니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보고만 있어도 기분 좋아지게 하는 물이었다.
그 모습에 카얀은 저건 뭐 나르시스인가 생각하며 속으로 꿍얼거렸다.
대충 물 구경도 어느 정도 했겠다 이젠 본격적으로 물에 들어가 볼까 란 생각에 엘리시아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벗었고, 또한 치렁치렁 거리던 겉옷 또한 벗어버렸다. 물론 속에 바지와 상의를 입고 있었기에 드레스를 벗는다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그렇게 드레스를 벗은 엘리시아는 바지도 짜증이 나는지 바지를 무릎께 까지 접어 올렸다. 맘 같아선 그냥 칼로 싹둑 자르고 싶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엘리시아는 호수 속에 들어갔다. 가운데에 차가운 냉기를 담은 보석이 있어서 그런지 호수는 순간 오싹할 만큼 차가웠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온도조차 좋은지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그녀는 그런 느낌이 좋았다. 차가운 물의 느낌은 꼭 그녀를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모든 고민을 가져가고, 또한 그녀에게 평안을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유난히 그녀는 차가운 물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목욕은 뜨거운 물을 좋아했다. 원래 목욕은 뜨거운 물로 하는 것이 정석이니까.
가볍게 호수에 들어간 엘리시아는 몇 번 손으로 물장구를 치더니 몸을 뒤로 누웠다. 몸에서 힘을 빼니 몸이 호수 위에 떠오르는 것이 느꼈다. 그러고 있으니 꼭 물과 하나가 된 것 같은게 기분이 좋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얀은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와 새삼 다시 느끼는 거지만 그녀는 보는 것만으로도 숨 막힐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카얀의 경우 워낙 오랫동안 그녀를 보아왔기에, 특히나 그녀의 성격에 직접적으로 많은 노출을 당했기에 그녀의 외모를 크게 의식하지는 못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라도 가끔씩 이렇게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그로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두근거림을 가져왔다.
솔직히 그 성격만 죽이면 어디 가서 여신으로 군림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미모니까. 정말 그 성격만 죽이면.
그렇게 물 위에 떠있던 엘리시아는 몸을 숙이며 호수 밑으로 내려갔다. 온 몸이 물에 둘러쌓여 있는 그 느낌에 엘리시아의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눈을 뜨고 호수 안에서 호수의 물을 바라보니, 꼭 자신이 물의 주인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이 움직이는 대로 일그러지는 그 물결과,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음에도 갑갑하지 않은 그 느낌이 정말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숨이 막힐 때까지 계속 호수 안에서 있는 그녀였다.
한편 결국 잠수까지 하는 그녀의 모습을 카얀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좀 하고 나오지. 점점 길어지는 물놀이 시간에 괜스레 불안해지는 그였다. 혹시 이렇다 그 망할 황제 만나면 또 어떻게 하냐고. 진짜 어찌나 말을 재수없게 하는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걸어왔고, 그 기척에 카얀은 혹시나 아르한일까 긴장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아닌지 그는 아르한이 아니었고, 시엔이었다.
“흐음, 누군가 했더니 카얀님이었군요. 여기에는 무슨 일로?”
시엔의 질문에 자연스레 카얀의 시선이 호수로 향했고, 시엔도 그 시선을 따라가다 아무것도 없음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호수에 누군가 있는 건가요?”
그렇다고 보기엔 호수의 표면에 너무도 잔잔했지만, 뭔가 호수를 바라보는 카얀의 시선이 미묘해 시엔이 물었다. 그에 카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거 그렇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러나 그의 고민을 들어준 건지, 호수 속에서 엘리시아가 모습을 드러내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정말 어찌나 타이밍도 안 좋은지. 왜 하필 지금이야.
좀 이따가, 이녀석 가고 나서 또는 이 전에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그런 그의 고민에도 엘리시아는 당당히 머리를 털며 호수에서 빠져나왔고, 뒤늦게 시엔을 발견하곤 움찔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카얀이 고민하며 시엔을 바라보았고, 시엔의 신경은 온통 엘리시아에게 빼앗겨 있었다. 하긴 그로서는 처음 보는 엘리시아의 모습이니.
새삼 카얀도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원래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였건만 그것이 물과 만나자 한층 더 매혹적이고 청초했다. 물에 젖어 물기를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은 너무도 유혹적이었다. 또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옷은 운동을 통해 단련 된 균형 잡힌 엘리시아의 모습과 볼륨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걷어 올려진 바지와 민소매로 된 상의는 그녀의 티없이 맑은 하얀 피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피부 위에 얹어진 물기는 그녀의 피부를 더욱 빛나게 했다.
한참을 그녀에게 시선을 뺏겨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시엔은 뒤이어 그의 뒤에서 나타난 아르한에 의해 정신을 차렸다. 그저 호숫가 근처에서 잠시 휴식을 보내러 온 아르한은 예상치 못한 존재들의 모습에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 역시 엘리시아를 발견하곤 그로서는 꽤 큰 동요를 보였다.
여자에 관심없던 그조차도 시선을 뺏길 수 없을 만큼 엘리시아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순간 그가 뻐근함을 느낄 만큼. 생전 처음 느껴보는 심장의 떨림과 흥분이었다.
그런 그들의 부담스런 시선을 받으며 엘리시아가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어서 옷과 수건을 달라는 의미로 카얀을 아주 강렬하게 노려보았다. 쿡쿡 쑤셔오는 시선의 느낌에 황급히 카얀이 엘리시아의 시선을 알아채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수건을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다. 큰 수건으로는 자신의 어깨를 덮어 몸을 가리곤 작은 수건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몸을 닦았다. 그녀로서는 별 의미 없는, 몸이 젖은 채로 옷을 입을 수 없어 한 행동이었지만 그녀의 현 상태와 더불어 그 행동은 묘한 성적 흥분감을 불러 일으켰다.
“확실히 면사를 쓰고 다닐 만 하군.”그조차 이런 반응이니, 다른 이들이라면 안 봐도 뻔하리라.
어쩌면 그녀가 면사를 쓰고 다닌 건 단지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 아니라 저 외모일지도 모르지.
한참 몸을 닦고 옷을 껴입던 엘리시아는 아르한의 말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묘하게 욕으로 들리는 것이, 어디 감히 네가 얼굴을 드러내고 다녀 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안타깝게도 그녀는 본인의 외모에 대한 자각을 크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좀 예쁜 면상이구나, 미인이구나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맘 같아선 지금 비꼬는 거냐 하고 따지고 싶건만. 엘리시아는 애써 참았다.
“그보다 이 날씨에 호수에서 물놀이라니. 감기 걸리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군.”
확실히 지금 춥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 차가운 호수에서 물놀이를 할 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뭐, 그녀라면 한겨울에 물놀이를 해도 감기 따윈 절대 걸리지 않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론 이 날씨에 물놀이하면 감기에 걸릴 테니까.
“엘리시아 님께서 물을 워낙 좋아하셔서, 긴장이 되거나 기분이 우울하실 때면 물놀이를 하시곤 합니다.”
뭐, 긴장과 우울만 빼면 맞는 말이긴 했다. 실제로는 화가 나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 그러지만. 아, 물론 가끔 심심할 때도 저런다.
“애군.”
대놓고 무시하는 시선이 엘리시아를 향했다. 그에 수건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꽉 쥐어졌다. 겨우 물놀이로 풀어졌던 그녀의 기분은 다시 가라앉았고, 그로 인해 그들의 분위기는 다소 차가워졌다.
“그보다 어서 들어 가시는게 좋을 것 같군요. 어서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상황의 어긋남을 인지한 시엔이 서둘러 분위기를 끊으며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고, 엘리시아는 카얀의 에스코트를 받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아르한은 아직도 진정되지 못한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처음으로 겪는 감정의 변화였다.
“씨발. 개새끼.”
방에 들어온 엘리시아는 들어오자 마자 수건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거울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에 와장창하며 거울이 깨졌다.
하아. 저건 또 어찌 처리해야 하나. 카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옷 갈아입을 테니까, 이거 정리해.”
지가 벌인 일 주제에 당당히 명령을 내리는 그녀였다. 하지만 어쩌랴. 카얀은 조심스럽게 거울 조각을 치웠고, 시녀를 불러 조용히 새로운 거울을 가져올 것을 명했다. 솔직히 그녀에게 거울이 그닥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원래 있던 물건이었으니까.
그렇게 새로 거울이 배치하고, 방안에 널부러진 옷가지와 혹시나 남아있을 조그만 조각들도 처리한 카얀은 노크소리와 함께 들어온 아르한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엘리시아는 어디 갔나?”“잠시 옷 갈아입으러 가셨습니다.”
“그렇군.”
카얀의 대답에 아르한은 테이블 근처의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카얀이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막 옷을 갈아입고 온 엘리시아 역시 그를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씨발.”
아. 조그맣긴 했지만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그대로 입을 통해 밖에서 나왔다. 들었을려나, 작게 말하긴 했는데. 다소 찔린다는 표정으로 엘리시아가 아르한을 바라보았고, 엘리시아의 기척을 느낀 아르한이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같이 먹도록 하지. 그럼 찬 물에서 노느라 고생 많았을 텐데 쉬도록.”
생각보다 순순히 사라지는 그의 모습에 카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한 다행히도 엘리시아의 욕설을 듣지 못한 것 같아 그 역시 안심이었다. 그에 대해선 엘리시아 역시 신경이 쓰였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는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착각인 것 마냥, 방을 나와 복도를 걷던 그는 엘리시아의 방과 거리가 제법 있음을 느끼곤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한번도 볼 수 없었던 그의 폭소에 지나가던 시녀들과 시종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그가 아르한 임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아르한은 여전히 갈무리 되지 않은 미소를 머금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재밌는 성격이야, 엘리시아.’
정말 모처럼 마음에 드는 여자였다. 처음엔 황후로 맞아들이긴 하지만 그 사실이 달갑지 않은 그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를 황후로 맞아들이는 것이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그녀와 함께 하는 날들도 꽤 재밌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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