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그렇게 그녀는..
00.
화창한 오후.
창밖으로 비치는 나른한 햇살을 맞으며 시리듯 푸른색의 머리와 은은한 빛의 눈을 가진 청순한 분위기의 황녀, 엘리시아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씨발. 지랄하고 있네.”
바람 불면 날아갈 듯 툭치면 쓰러질 듯 가냘픈 몸매에 빛을 제대로 보지 못한 듯 눈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엘리시아의 입에선 믿을 수 없는 단어들이 나열됐다. 그러나 그런 부조화에도 엘리시아 앞에 서있던 카얀은 담담한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 악독한 주군의 짜증을 자신이 모두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짜증만 얼핏 보일 뿐이었다.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담담한 카얀의 대꾸에 엘리시아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카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미소에서 진한 살기를 느낀 카얀이 움찔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신이란 작자는 자신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이런 사람을 주군으로 내려보낸 건지.
“그래서?”
그걸 저에게 물으시면 저라고 딱히 드릴 말이 있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여기서 뭐라 대답을 하든 깨지는 건 본인일 게 분명했기에 카얀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안그래도 어제 두들겨 맞은 옆구리가 아파서 멀쩡히 서있기도 힘들건만.
“씹냐?”
댁 같으면 대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분위기에서? 입 잘못 열면 맞아죽을 분위기인데?
“후우, 죄송합니다. 다만 황제 폐하의 명인지라 3일 후에 바로 출발을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카얀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그 옆으로 단검이 아슬아슬하게 지나쳐가 벽에 꽂혔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비록 보이진 않지만 선명히 느껴지는 엘리시아의 살벌한 기운에 카얀은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뭐랄까. 고개를 돌린 순간 악마를 볼 것 같은 느낌이랄까.
“씨발. 나보고 그런 개 같은 소리를 들으라고? 미쳤어? 그 인간, 드디어 노망났어? 지 멋대로 태어나지도 않은 애 같다가 약조해놓고 나보고 가라고? 가고 싶으면 지가 가던가. 멀쩡한 날 팔아먹고 지랄인데. 난 안가, 그렇게 전해.”
“안그래도 이미 말했습니다만 무를 수가 없답니다.”
“빌어먹을.”
크게 욕설을 읊조린 엘리시아가 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근처에 있던 서랍장을 발로 찼다. 그 덕에 서랍장에 의도치 않게 엘리시아의 발자국이 남겨졌다.
“절대 안가. 갈 거면 아버지, 네가 가.”
직접 황제의 집무실로 찾아간 엘리시아가 싸늘히 말했다. 그에 차분하게 서류를 결재하던 황제가 고개를 들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엘."
왜, 또 뭐!
저렇게 부를 때마다 좋지 않은 일을 겪었던 엘리시아가 대꾸 없이 황제를 노려보았다.
“이 애비의 마음을 모르는 거냐. 애비도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엘을 그런 살벌한 녀석에게 보내고 싶지 않은 걸 어찌 모르는 거냐. 하지만.. 우리 엘도 엘만 바라보고,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그런 사람을 만나야 되니까.. 이 못난 애비가 언제까지 우리 엘을 보호해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 악물고 보내는 것이거늘. 그래, 정 가기 싫다면.. 어쩌겠느냐. 이 애비와 몰래 도망치자구나. 그래서 둘이 알콩달콩...”
“갈게, 가. 간다고.”
옆 나라 황제와 결혼하는 것도 싫지만 매일 볼 때마다 잔소리 연설에, 오글거리게 예쁘다, 사랑스럽다 등등 온갖 찬사를 헤대는 황제와 단 둘이 사는 것은 더욱 끔찍한 소리였기에 엘리시아가 황제의 말을 끊으며 황급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런 엘리시아의 말에 상처를 받은 황제가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덕분에 엘리시아는 진심으로 사람을 창밖으로 내던지면 죽을까 하는 고민을 잠깐 했다. 하지만 본인이 아무리 막 나가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아버지를 창밖으로 내던질 만큼 패륜아는 아니었지만 애써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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