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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함] 〈휘페리온Hyper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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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교양이란 무엇인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정의와 내용이 다를 것이다. 도시문명의 허례허식이나 가면 쓴 사교술 같은 가짜 교양에 대한 경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외적인 거짓 교양에 대한 비판은 사실상 진정한 교양, 내적으로 성숙한 교양에 대한 강력한 시대적 요청이다. 동서고금을 통털어 교양의 척도가 되는 보편적 기준이 있다. 바로 진真선善미美이다. 동서고금의 차이는 이 세가지 절대적 기준의 우선순위와 상호관계에 관한 견해차에 근거한다.

교양의 이상적 목표는 천인합일, 정신과 육체의 조화, 숭고한 윤리의식의 배양 등으로 제시된다. 예를 들어 신중, 정의, 용기, 절제 같은 그리스인의 4대 미덕은 영웅적 가치관의 바탕을 형성했다. 도덕적 긍지와 영적인 환희, 그리고 금욕적 수행과 정의의 실천은 교양 교육의 기본코드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교육이란 시인, 철학자,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처럼 고결한 영혼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키우는 행위였으며, 무엇보다도 자기 내면의 성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일이었다. 당시 교육의 지향점은 자율적인 주체의 자유로운 삶에 있었다.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1770-1847)은 신성과 역사, 예술과 정치, 신비와 혁명, 교육과 실천, 전체성과 분열의 와중에서 재평가 받고 있는 상징주의 시인이다. 내가 횔덜린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철학자 하이데거 덕분이다. 그는 횔덜린을 「참시의 시인」, 「참사상의 사상」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또한 1934년과 1935년 횔덜린에 관한 수업을 통해서 시학과 사상과 정치의 삼각관계를 숙고하기도 했다. 물론 아쉽게도 횔덜린도 니체와 더불어 하이데거에 의해 국가사회주의의 사상적 선구자로 왜곡되었지만 말이다.

이 책《휘페리온》은 그의 문학세계의 원천으로 평가된다. 신의 죽음 이후에 인간이 신을 대신하고 이제 신적 인간이 신의 내용과 아우라를 계승한다. 이탈된 삶의 궤적을 다시 바로잡으려는 일련의 노력과 작업은 자아와 사회적 소명을 숙고하게 한다. 《휘페리온》은 서간체소설이란 점에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고뇌》에, 서정소설이란 점에서 루소의《누벨 엘로이즈》에 비교된다. 횔덜린에게 예술이란 자신을 파악하고자 애쓰는 근원 정신의 창조이다. 교육, 우정과 사랑을 논한 철학소설이란 점에서 루소의《고독한 산책자의 몽상》과 《에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비교된다. 횔덜린은 신과 자연의 일치를 주장한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세계관을 재현하고, 천재적 인간 또는 반신의 본질적 특성으로 고독을 거론하며, 학문, 예술, 교육에 대한 루소의 사상과 강한 친화력을 보인다. 횔덜린은 교육적인 혁명이 정치적인 혁명보다 앞서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고 자율적인 삶을 추구하는 해방의 정치학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비교된다.

소설의 무대는 18세기 후반의 그리스이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고대 그리스의 것이다. 여기서 고대 그리스는 영웅, 마법, 신화, 경이, 감동, 미덕, 조화, 철학, 운명의 세계를 대변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진선미의 일치, 범신론, 다신교, 다양성 등을 추구한다. 그리스의 은둔자란 부제가 붙은 주인공 휘페리온은 자유주의자, 탐미주의자, 선량하고 고결한 지식인, 온유한 몽상가이다. 그는 진선미 중에서 미적 가치를 최고로 평가한다. 신적 아름다움과 신적 인간은 그가 자주 거론하는 이상적인 삶의 구현양태이다. 자신의 스승인 아다마스와 더불어, 휘페리온도 이상적인 교사이자 범신론적 영지주의자이다. 그러나 윤리보다는 미학을, 다양성 보다는 전체성을 강조하는 휘페리온의 사상은 자칫하면 오독과 오해의 나락으로 추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오로지 하나의 아름다움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인간성과 자연은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하나의 신성 안에 결합될 것이다.」(147쪽)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교육, 우정 그리고 사랑을 대변한다. 가령 알라반다는 그리스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가 전사로 영웅적 우정의 화신이다. 그는 터키의 압제에 대항하여 해방을 쟁취하려는 근본적 신념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 우정의 측면에서 벨라르민 또한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휘페리온이 보내는 편지의 수신자로써 일반독자의 소설 속 대리인 역할을 맡고 있다. 비록 자신의 담론과 목소리는 은폐되어 있지만 벨라르민은 여전히 우정의 한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디오티마는 휘페리온의 연인이자 제자로 사랑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휘페리온이 민중의 교사, 위대한 인간이 되기를 희망하며, 가장 위대한 것과 가장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하라고 조언한다. 디오티마는 평화를 사랑하는 반전주의자,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영지주의자이다.

휘페리온이 바라보는 세계는 이중적이다. 현실적으로 세상의 모순을 바라보고, 이상적으로 세상의 조화를 추구한다. 어찌보면 평론가 마빈 머드릭의 다음과 같은 말이 휘페리온의 사상을 잘 대변하는 것 같다.

「운명을 함께 하느니 서로 간섭하지 않고 공존하는 게 낫고, 풀이 죽어 있느니 활기찬 게 낫다……동정할 바엔 사랑하고, 대체 가능한 것보다는 독보적인 게 낫고, 똑같은 생각보다는 다른 의견이 낫다. 이해관계보다는 원칙이 먼저이고, 원칙보다는 인간이 먼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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