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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님의 서재입니다.

변신한 짐승이 당신 옆사람이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공포·미스테리

완결

신성치
작품등록일 :
2023.12.26 13:10
최근연재일 :
2024.06.13 11:35
연재수 :
10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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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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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글자수 :
597,391

작성
24.01.29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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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뜻밖의 침몰

DUMMY

산은 높기만 한 게 아니었다. 넓고 깊었다.

지도를 보며 세웠던 계획과 실제 수색에는 차이가 있었다. 예상보다 시간과 체력의 소비가 훨씬 많았다.


아홉 시에 입산해서 두 시간은 번개를 데리고 미랑과 함께 움직였다.

흔적이나 단서로 볼 만한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번개도 그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내 손에 이끌려 걸을 뿐이었다.

이대로면 예정한 범위의 반도 수색하지 못할 것 같아서 열한 시부터 한 시까지는 미랑과 흩어져서 수색하기로 했다. 내가 번개를 데리고 다니고 산속에서 나보다 훨씬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미랑은 혼자 다니기로 했다.


종아리에 알이 백이고 점점 피로가 쌓여갈 무렵, 열두 시 반에 번개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드세게 짖어대더니 목줄을 쥔 나를 이끌고 급하게 움직였다. 땅을 힘껏 딛지 못하는 다친 앞발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뭔가 육감이 통했는지 때맞춰 미랑도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내가 있는 지점을 말해주고 번개가 뭔가 찾은 것 같다고 알렸다.

그리고 열두 시 사십 분에 번개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계곡 옆 수풀에서 사체를 발견했다.


“뭐예요? 찾았어요?”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사람이 아니었다.

번개가 찾아낸 건 들개의 사체였다. 힘들여 달려온 미랑과 나는 잠깐 눈살을 찌푸리고 자리를 떴다. 이미 시간은 오후 한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앉기 편한 장소를 찾아서 점심을 먹었다.

미랑과 나는 싸 온 김밥을 먹고 번개한테는 사료와 닭고기포를 줬다. 보온병의 커피를 마실 때까지 약 삼십 분을 식사와 휴식에 썼다.

그리고 다시 번개에게 고박사의 츄리닝 냄새를 맡게 했다. 나와 미랑에 비해서 번개는 지쳐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작전에 참여한 노병이라고 할까? 진지하고 의욕이 있어 보였다. 번개 마음에 들어가 볼 수 없는 나의 뇌피셜이지만.


오후 세 시까지 다시 미랑과 헤어져서 각자 산속을 뒤졌다.

혼자서 (개는 같이 있지만) 소득 없는 수색을 하다 보니 더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바위에 걸터앉아서 미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심전심이랄까. 미랑도 혼자 다니기 싫다고 했다.

우리는 중간지점에서 만났다. 그리고 템포를 늦춰서 산보하듯이 산 속을 걸었다. 셰퍼드를 끌면서 손을 잡고 산길을 걷는 남녀. 조금 이상한 등산객 부부로 보였을 거다.


오후 세 시가 넘으니 비도 부슬부슬 내렸다. 우비를 입고 비를 맞으니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추위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고박사가 이런 날씨에 산에 버려졌다면 어땠을까 걱정은 됐다.


“괜찮을 거예요. 단순한 조난이었다면···”

미랑의 판단에 나도 동의했다. 낼모레면 5월이었다. 고박사가 기온이 더 낮은 산꼭대기에 있을 가능성도 적었다. 눈에 안 띄는 수풀 속에 처박혔더라도 소리만 지를 수 있으면 별일 없었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불길한 상상을 버릴 수는 없었다. 어딘가 매장됐을 가능성. 땅 속에 묻혀 있다면 번개도 찾기 어려울 거다.

비는 그치지 않고 수색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산길은 미끄러워졌고 번개가 냄새를 쫓는 데도 빗물이 방해가 되는 것 같았다.

미랑은 배낭에 있던 비닐로 번개의 몸을 덮어 줬다. 간이 우비를 쓴 셈이지만 꼬리와 머리쪽은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었다.


다섯 시가 넘자 비 내리는 숲속은 온통 어두컴컴해졌다. 원체 일찍 어두워지는 산속이니까. 미랑과 나는 마주 보고 한숨을 쉬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심정인지 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번개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번개는 차분해 보였다. 하지만 수색의 의욕이 불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 마음대로 판단했다.



예정보다 30분쯤 일찍 하산을 시작했다.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미랑이 얘기했다.

“산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물론 가능성은 여러 가지다. 고박사는 사망해서 도시에 있을 수도 있고, 산골짜기에 생존해 있을 수도 있다.


“그럼 어디라고 생각해요?”

“나도 모르죠···. 그런데 누군가 승합차에 태우는 게 찍혔다고 했죠?”

끄덕끄덕.

“승합차에 실려간 사람이 산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그렇다면 타살이라는 게 너무 뻔해지지 않나요?”


그럴 거다. 가짜 번호판을 붙인 정체 불명의 차를 타고 간 사람이 갑자기 산 속에서 시체로 나타난다. 그걸 타살로 의심하지 않을 경찰이 있을까? 그냥 갑자기 남의 차를 얻어 타고 싶었고 별 준비 없이 평상복 그대로 산에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다가 실족해서 죽었다. 그걸 믿으라고?


아니다. 그런 그림은 설득력이 너무 떨어진다.

기철이 형도 주정뱅이 고박사는 등산 같은 건 관심 없던 사람이라고 했었다.


“그런 작전을 짜지는 않을 것 같아요.”

나는 미랑에게 동의했다.

고박사가 산속에 있을 거라고 확신해서 온 건 아니었다. 일단 산을 수색한 건 사라진 승합차가 산 쪽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간자들과 관련된 사건에 꽂히다 보니 산이나 숲에서 일이 이루어졌을 거라는 예측을 했던 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승합차의 행방을 계속 쫓아야 하는 건가? 그쪽 수사는 당장 내 몫이 아니다. 기철이 형이 지금도 집중하고 있을 거다.



산 아랫길로 우리만 일찍 온 건 아니었다. 아까 만났던 산 입구 도로에 훈련사의 SUV가 서 있었다.

훈련사는 번개를 태우려고 차 뒷문을 열었다. 트렁크엔 과일 박스와 함께 소주와 맥주가 짝으로 실려 있었다.


“오늘 집안 잔치가 있는데 어른들이 다 주당이셔서요.”

번개가 동의하는 듯 컹컹 짖었다. 그 소리 때문이었나, 번개 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죄송하지만 거기 소주 한 병만 얻을 수 있을까요?”

“네? 뭐 괜찮아요. 한 병쯤 빠져도 지장 없겠죠.”


나는 백팩에 넣어 뒀던 고박사의 츄리닝을 꺼냈다.

미랑과 훈련사는 왜 저러나? 하면서 나를 지켜봤다. 훈련사의 차 트렁크에서 꺼낸 소주를 고박사의 츄리닝에 부었다.


확신이 있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데 왠지 꼭 시도해보고 싶었다.

주정뱅이 고박사한테서는 술냄새가 났었다.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고박사가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술냄새를 풍기고 있을 것 같았다. 소주와 섞인 체취를 맡게 하는 건 번개한테 좀 더 정확한 감각 정보를 제공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번개는 알코올 기운에도 외면하지 않고 술에 적신 옷냄새를 다시 맡았다.

웍웍!

나를 보면서 짖는 번개의 눈빛에서 자신감 같은 게 느껴졌다. 물론 나의 기대감이 만든 착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오케이, 다시 가 봅시다’라고 번개가 나에게 동의해 주는 것 같았다.


“훈련사님. 저희가 조금만 더 번개 빌리면 안 될까요?”

“아, 예···”

훈련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름 간절하게 보였나 보다.


“여보세요··· 어어··· 난데 한두 시간 늦게 가도 먹을 거 안 떨어지겠지?”

훈련사는 집에 전화를 걸더니 아예 우리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가 도와준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올 것 같진 않았지만 고맙고 든든했다.


번개는 산길로 올라가지 않았다. 둘레길을 도는 것처럼 산을 끼고 그 아래 마을을 통과해 걸었다. 밭과 공터를 지나면서 지그재그로 이동했지만 무작정 움직이는 것 같진 않았다.

목표지점을 향해 직선 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번개가 냄새에 집중해서 추적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소주를 묻힌 냄새를 맡게 한 덕일까? 아니면 애초에 번개를 산속으로 데리고 들어간 게 잘못이었나?’

인과 관계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번개를 따라가면서 조금씩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


열대여섯 가구의 집들이 있는 마을을 빠져나와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은 낡은 집 앞까지 오자 번개는 정지했다.

제 자리에 선 채 컹컹컹 우리한테 자신있게 보고하는 것처럼 짖었다.



“실례합니다.”

낡은 집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밭에서 돌아오던 할머니 한 분이 사람 안 사는 집이라고 알려주고 지나갔다. 최종 판단은 인간의 몫이겠지만 결정적 역할은 결국 번개가 해야 했다.

우리는 번개의 눈치를 봤다. 요지부동. 번개는 사람 안 산다는 집 대문 앞에서 꼼짝 하지 않았다.


“여기라고 하는 거죠?”

나는 훈련사에게 번개의 태도를 해석해 달라고 요청했다.

“네. 확실하다고 어필하는 건데요.”

“들어가죠.”


훈련사는 번개의 목줄을 대문 고리에 묶어 놓고 닭고기포를 상으로 줬다. 그리고 우리 인간 셋은 사람이 안 산다는 낡은 집으로 진입했다.


대문은 열려 있었고, 마루 앞 댓돌에는 낡은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남자 신발. 고박사 신발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났다. 농기구가 팽개쳐진 마당엔 풀이 한참 자라 있었고 동네 할머니 얘기처럼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는 티가 났다.


그런데 미랑이 얼굴을 찌푸렸다. 냄새 때문이었다. 댓돌 앞까지 갔을 때 나도 역한 냄새를 맡았다. 훈련사는 셋 중 제일 나중이지만 마루에 올라서면서 역시 얼굴을 찌푸렸다.

우리는 번개의 판단이 맞았다는 걸 확인하는 중이었다.


내가 방문 고리를 잡았다. 대문이 잠기지 않았던 것처럼 방문도 잠기지 않은 채였다.

문을 밀자 뒤에서 컹컹컹 번개가 세차게 짖었다. 강렬한 냄새가 외부로 확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방에는 눈을 뜬 채 바닥에 누운 사내가 있었다. 번개가 맞았다. 고박사였다.

“아···”

결국 이렇게 됐구나. 나는 탄식을 했고 미랑은 손으로 입과 코를 가린 채 눈을 감았다.

번개가 쫓아온 역한 냄새가 시신이 부패하는 냄새는 아니었다. 고박사의 입가에 허옇게 묻고 바닥에 말라붙은 토사물, 넘어진 병에서 새 나온 알코올, 그리고 고박사가 흘려낸 대소변의 악취가 섞인 거였다.


훈련사가 고박사에게 접근하는 것을 내가 막았다. 그는 심폐소생술로 고박사를 살려보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박사에게 다가가서 호흡과 맥박을 확인했다. 아직 썩고 있지는 않지만 시신이었다. 이곳은 구조 현장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범죄현장이었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세요. 천천히 돌아나가셔야 돼요.”

미랑과 훈련사는 내 말을 따랐다.

두 사람이 방을 나가서 112와 119에 신고하는 동안 나는 방 안을 내려다봤다.


고박사 옆에는 주로 과일주 담글 때 쓰는 1.8리터짜리 25도 소주 페트병 하나, 500미리짜리 페트병 하나, 그리고 위스키 같은 걸 담아서 뒷주머니에 찔러넣는 금속 술병 힙플라스크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혼자서 다 먹었다면 아무리 주정뱅이라도 엄청난 양이었다. 안주로 보이는 건 반쯤 남은 과자 한 봉지. 그래서인지 고박사 얼굴 옆의 토사물 찌꺼기에도 별 건더기는 보이지 않았다.


취해서··· 술 때문에 죽은 걸까?


천장을 보듯이 고박사는 눈을 뜨고 있었다.

살아 있을 때도 그의 눈은 뿌옇고 흐릿했었다. 지금은 좀 더 흐려졌고, 불안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북한산 계곡에서, 들것에 실려가던 신호진의 눈은 공포에 질려 보였었다. 고박사의 눈에선 그 정도로 확실한 감정은 읽히지 않았다. 고박사도 신호진처럼 겁에 질린 건가? 둘은 비슷한 걸 본 걸까?

판단이 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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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혈투 24.02.28 25 2 12쪽
42 어둡고 큰 숲속의 집 +2 24.02.27 24 2 14쪽
41 추격 +2 24.02.26 21 3 12쪽
40 추적과 압박 24.02.22 21 3 13쪽
39 2세의 취조 24.02.21 23 3 12쪽
38 잘못된 출혈 +2 24.02.20 28 3 12쪽
37 야밤의 협상 24.02.19 22 3 12쪽
36 싸울 거야! 그런데 누구랑? +2 24.02.15 24 3 13쪽
35 불어라 대규야 +2 24.02.13 31 4 14쪽
34 빡대, 위기일발! 24.02.08 26 4 14쪽
33 한(恨)이 꼭 예술이 되진 않아 +4 24.02.07 31 4 12쪽
32 종이의 한 +2 24.02.06 29 4 14쪽
31 빡대꾸 24.02.05 25 4 14쪽
30 추적 시작 +4 24.02.01 30 4 13쪽
29 새 출발의 신호 24.01.31 29 4 14쪽
28 대책 회의 24.01.30 27 3 14쪽
» 뜻밖의 침몰 +2 24.01.29 27 4 12쪽
26 합동 수색 +2 24.01.25 29 4 14쪽
25 마주칠 결심 24.01.24 26 4 13쪽
24 불길한 화염 24.01.23 30 4 13쪽
23 시정마 Teaser Horse +4 24.01.22 35 4 15쪽
22 은밀한 빵꾸 24.01.18 41 4 14쪽
21 여우 (같은) 마누라 +2 24.01.17 43 4 15쪽
20 두 갠디유 +4 24.01.16 44 4 14쪽
19 일단 주성과 함께 세계관 정리해요 +4 24.01.15 42 4 13쪽
18 아내의 참모습 +2 24.01.13 45 4 14쪽
17 여우 vs 고양이 +4 24.01.12 46 5 14쪽
16 이런, 이런, 큰일이다 +2 24.01.11 53 5 14쪽
15 상식의 출구 진실의 입구 +6 24.01.10 61 4 14쪽
14 그건 인간이 아니었다 24.01.09 54 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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