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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현의 세계입니다.

춤추는 진흙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암현
작품등록일 :
2017.07.29 23:25
최근연재일 :
2017.08.03 18:15
연재수 :
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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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25

작성
17.08.0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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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3

DUMMY

이라베이가 그를 배웅했고 우파나히는 찻주전자를 열어 냄새를 맡아보고 빈 꿀 병을 확인한 뒤 조용히 소녀를 내려다 봤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안 노려봤다.”


소녀의 핀잔에 자리에 앉긴 했지만 눈은 꿀이 들어간 찻주전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한번 쳐다본 소녀가 “한잔 마실래요?” 라며 우스갯소리를 했고 이라베이가 그의 앞에 있던 잔에 남은 차를 모두 따랐다. 아래에 가라 앉아 있던 꿀까지 천천히 흘러내려 모두 담겼다.

우파나히는 그걸 소녀 앞으로 밀어 넣었고 그녀는 그걸 작게 접은 편지와 함께 다시 우파나히 앞으로 밀어 넣었다.


“몸에 좋은 거예요.”


하지만 우파나히는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작게 접혀 있던 편지만 펼쳐 잠시 읽은 뒤 다시 접어 주머니 속에 밀어 넣었다.


“걷는다. 건조식을 사야한다.”

“가끔은 바퀴 달린 걸 타고 다녀도 좋을 거 같은데요?”

“닷새만 걸으면 된다.”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는 우파나히에 비해 소녀는 굉장히 싫다는 표정으로 응대하며 “무리에요.” 라고 딱 잘라 말했지만 우파나히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꽤 걸었었다.”

“요즘 그런 거 귀찮다고요. 언제적 이야길 하는 거예요? 게다가 건조식은 맛도 없고···과자도 없고······”


그 이후에도 뚱한 표정으로 턱을 탁자에 괸 채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우파나히에겐 그다지 통하지 않는 것이었던 것인지 그는 이미 벗어뒀던 코트를 입고 나갈 준비를 마친 채였다.


“타고가면 하루면 되잖아요! 진짜 꽉 막혔다니깐!”

“걷는 게 좋다.”

“업어줘요 그럼! 닷새 동안 계속! 난 한발자국도 안 걸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삐친 표정을 한 채 식어버린 차를 단박에 마신 그녀는 삐죽 내민 입술에 덕지덕지 묻은 꿀을 자랑하며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우파나히가 그런 그녀의 입가를 닦아줬지만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지금의 그녀가 품어버린 화를 더 크게 키울 뿐이었다. 그 때문일까. 그녀의 표정을 읽은 우파나히는 잠시 동안 신중을 기한 뒤 자기가 할 말이 그녀를 만족시키리라 믿고서 입을 열었다.


“알았다. 업고 간다.”


긴 침묵과 대치, 그녀의 곱지 않은 시선과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우파나히의 고민 속에서 이라베이 만이 움직이며 빈 찻잔들을 정리했다.

이라베이의 설거지가 끝나고 그녀가 위층을 정리하기 위해 올라가고 나서야 타협을 볼 때라고 생각한 것일까. 우파나히는 소녀와 마주 앉아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주 긴 침묵과 대치만이 흐르는 둘 사이에는 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행동이나 대화 없이 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이 답답한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표정이었고 우파나히는 언제나 같은 표정을 고수한 채 그저 그렇게 기다리며 바라볼 뿐이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상반신에 비해 소녀의 다리는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표정이나 몸짓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불만과 짜증을 그대로 드러내는 화려하고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이라베이가 위층을 다 정리하고 내려오는 동안 해는 조금 기울어져 있었고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그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때 쯤 꼼지락 거리던 소녀의 발이 우파나히의 다리에 닿았다. 괜히 심술이 나서 한 대 걷어 찬 것도 그 때였다. 우파나히는 그런 그녀의 손끝을 잡았고 뿌리치려하는 것도 억센 힘으로 막고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그리고 아주 작고 어색하게 입 꼬리를 올려보곤 다시 원래대로 만들었다. 의외의 웃음에 피식하고 웃어버린 소녀는 자신의 손을 감싼 커다란 손의 온기를 느끼며 화를 풀었다.

하지만 화가 풀린 것을 들키기 싫었던 것인지 손을 뿌리치고 잠시 동안 노려보기만 했다. 결국 조금 누그러진 기분으로 잠긴 목소리를 내었다.


“진짜 업어 줄 거예요······?”


메마른 목에서 나온 약간 잠긴 목소리는 조금의 의심과 조금의 믿음이 섞여 있었지만 우파나히를 움직이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래.”


라며 진심을 담았다. 짧지만 거짓이 없는 단어와 진중한 목소리에 소녀도 움직였다.


“과자도 많이 사줘요.”

“알았다.”

“나 추우면 못 자는 거 알죠?”

“알고 있다.”

“준비 잘해요.”

“알겠다.”


마지막으로 소녀가 내민 손을 우파나히가 살짝 잡고 아래위로 흔드는 것으로 협상은 끝이 났다.

협상 후는 평범한 일상과 같았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듣고, 바라보던. 세 사람은 저녁거리를 사러간 참에 필요한 물품을 사고, 계약했다. 산나물을 파는 몇몇의 노인들이 소녀에게 사탕을 쥐어주며 같이 살고 있는 키 큰 아가씨의 맞선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라베이는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 동안 우파나히는 건조식을 비롯해 여러 물품들을 샀고 마지막으로 며칠 동안 변하지 않는다는 과자를 한 아름 사서 소녀에게 안겨주었다. 소녀가 기뻐하며 공원에 앉아 과자를 먹는 동안 그녀의 조용한 부탁을 받은 이라베이가 수레와 그걸 몰 짐승 한 마리를 계약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바퀴달린 것을 극도로 거부하는 우파나히였지만 과자를 싣고 가야한다는 소녀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고 곧 수긍해버리더니 이라베이의 손에 쥐어져 있던 고삐를 낚아채 자기가 직접 그 짐승을 몰기 시작했다.

무-하고 우는 짐승이 우파나히를 잘 따르는 것 같아보였지만 우파나히는 여전히 탐탁지 않아 했다.

소녀가 자기 짐을 먼저 수레에 실은 다음 우파나히의 손에 들린 짐을 받아 똑같이 실었다. 그리곤 “봐요, 편하죠?” 라며 놀려댔다. 우파나히는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러는 사이 이라베이가 같이 받아온 계약서를 펼쳐 내용을 가볍게 읊조렸지만 우파나히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소녀가 그를 대신해 진지하게 들어줬고 꼼꼼하게 기억한 뒤 계약서를 넘겨받았다.


“걷는 게 빠르다.”


느릿하게 걷는 둔탁해 보이는 짐승의 고삐를 쥐고 있는 우파나히의 보기 드문 불평이었다.

짧고 굵은 두 쌍의 다리와 배고 자고 싶은 몸통, 넉살좋은 턱과 커다란 입, 입안엔 넓적한 이빨이 듬성듬성 나 있었다. 몇 사람을 합친 것만큼 크고 살짝 스치는 것만으로도 넘어질 것 같은 단단한 근육질이었지만 소녀는 무섭지도 않은 듯 그 짐승의 꼬리털을 조심스레 쓰다듬자 짐승은 귀찮다는 듯 꼬리를 가볍게 흔들어 손길을 뿌리칠 뿐 큰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괜히 그걸 보기라도 한 듯 괜히 고삐를 세게 당긴 우파나히의 짜증에도 짐승은 무- 라고 짧게 우는 것 빼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무무는 속도보단 힘이 좋은 애라고요. 그렇죠? 이라베이?”

“조건만 맞으면 집이라도 옮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님.”

“그렇죠? 그러니까 좀 참아요.”


소녀의 이상한 논리에 우파나히는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살짝 때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누가 봐도 이 여자와는 말싸움을 해서 이길 자신이 없다. 라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었다.

이라베이는 참기 힘들었던 비웃음을 그대로 내비쳤고 그걸 본 우파나히는 무무라 불린 짐승의 고삐만 더 세게 당겼다.


집에 도착한 뒤 무무를 집 밖에 있는 큰 나무에 묶어두었다. 사육시설이 있긴 했지만 몇 년 째 손도 대지 않아 창고의 용도로 밖엔 쓸 수 없었다. 수레도 마당 한쪽에 잘 놔두었다. 넉살이 좋은 것인지 종의 특성인지 무무는 주변 분위기에 금세 적응했고 발치에 있는 풀을 으적거리며 뜯어 먹기 시작했다.

이라베이는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갔고 소녀는 목이 마를 거라 하면서 큰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그 언저리에 놓아두자 물 냄새를 맡은 무무가 물을 마시려다 물통에 주둥이가 끼였다.

끼인 채로 머리를 움직이니 물이 다 쏟아져 소녀의 신발과 옷자락을 조금 적시는 것과 동시에 작은 진흙탕을 만들었다. 소녀는 환호성이 섞인 놀란 목소리를 내며 옷이 젖거나 말거나 즐거워했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우파나히는 소녀가 즐거워하는 사이 무무의 주둥이에 낀 물통을 빼냈고 괜히 무무의 머리를 한 대 때리고서 집으로 들어가더니 좀 더 넓적한 금속제 대야를 가져 나와 마당에 있는 호스로 물을 담아 줬다.

무무는 쇠 냄새가 나는 대야의 언저리에서 코를 몇 번 킁킁 거리더니 이내 물을 마셨다. 소녀는 그걸 신기하게 바라보다 호스를 건드렸다.

툭, 하고 떨어진 호스는 작은 진흙탕을 더 크게 만들었고 동시에 소녀가 신고 있던 신발은 진흙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우파나히가 물을 잠그긴 했지만 이미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소녀는 신발을 벗어던졌다. 휙휙 날아간 신발이 진흙탕이 된 마당에 떨어져 겉이고 안이고 모두 진흙으로 더러워져 버렸다. 신발은 우파나히가 주워 이라베이에게 넘겨줬다.

집안에서 창문을 통해 마당을 보고 있다가 진흙투성이인 신발을 받아든 이라베이의 표정은 좋다고 말할 것이 못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녀는 무무의 등에 올라타려 했고 한 쪽 다리를 등 위에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그녀를 잠시 보고 있던 우파나히가 그걸 도와 등에 올려준 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고삐를 쥐어줬다.


“으······! 움직이진 않네요.”


그녀가 고삐를 움직이는 데로 머리를 조금씩 움직이긴 했지만 애초에 묶여 있는데다가 무무는 기본적으로 풀이 많은 곳을 향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통제에 따르진 않았다.


“으으으······! 요령 같은 게 있는 걸까요?”


헤헤 거리며 웃긴 했지만 서운한 듯한 모습에 우파나히는 묶어뒀던 무무의 고삐를 풀어 이리저리 당기며 마당을 서성이게 했다.

소녀는 그것을 즐기는 듯 이상한 목소리를 내며 환호했고 우파나히는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걸 보고 있었다.

마당을 얼마 정도 서성이자 지루해진 것일까. 소녀는 밖으로 나가자는 얼굴로 우파나히를 바라봤지만 가볍게 무시당했고 그 사이 이라베이가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을 꺼냈다.

그에 다른 것을 모두 잊어버린 소녀가 진흙발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발자국을 찍어댔고 이라베이는 조용히 묵과했다. 우파나히 역시 그런 그녀를 다그칠 생각은 없는 것인지 그저 조용히 기다린 후 마른 흙을 치우고 남은 진흙을 닦아냈다.


당연히 식사를 가장 먼저 마친 소녀가 먼저 이층으로 올라갔고 잠시 뒤 우파나히가 그 뒤를 따랐다. 이층으로 올라가며 바닥에 흙이 묻었는지를 확인했지만 별다르게 치울 것은 없었다.

그들이 아침식사를 하기 전까지 같이 있었던 방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고리를 살짝 돌렸지만 안에서 잠근 것인지 찰칵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열리진 않았다. 가벼운 느낌으로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기름이 끓을 시간동안 가만히 서 있었지만 별 반응이 없자 우파나히의 오른손은 문고리가 아닌 허리띠로 갔지만 허리띠 언저리를 만지는 그의 손동작은 있어야 할 것이 없어 허전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때 문이 살짝 열리며 문틈으로 그녀의 작은 눈이 살짝 보였고 곧 닫혔다. 문은 다시 잠긴 채였다.


“장난치지 마라.”


당장이라도 문을 부술 듯 그의 주먹은 단단히 쥐어져 있었지만 문 안 쪽에선 “지금 옷 안 입고 있어요.” 라는 짧은 대답만 들려왔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다.”


“부끄러워요.” 라는 대답에 문고리가 비틀리며 부서졌다. 손잡이 채로 잠금장치를 으스러트린 우파나히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고 그 안에선 거울 앞에 서서 여러 옷을 입고 벗으며 주변을 벗어던진 옷들의 색으로 물들인 그녀가 한껏 멋 부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라베이가 보면 화낼 거예요.”


소리만으로도 그가 무엇을 했는지 상상이 간다는 듯 눈을 거울에 고정한 채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했다. 지금의 그녀에겐 그 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우파나히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입고 있던 코트를 옷걸이에 대충 걸어 놓은 뒤 그녀의 뒤에 서서 양 손으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상관없다.”

“그럼 내가 잠자는 모습을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건가요? 악취미네요!”


자줏빛 상의와 색이 조금 바란 붉은 색 치마를 입은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치고서 따지듯 물었다. 가슴을 향해 내지른 검지는 자연스럽게 그의 심장 쪽에 닿았다.


“그럴 일은 없다.”


그 무심한 한 마디에 안심한 것인지 소녀는 그의 품에 안겼다.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품는 모양새. 그는 배까지 밖에 오지 않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렇게 변할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변하는 건 없다.”

“이젠 우리 둘만 사는 집도 아니라고요. 조심해야죠.”


얼굴을 푹 파묻고 말하는 것이라 웅얼거리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쉬움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샤크티가 보고 싶나.”

“가끔은요.”


푸푸푸. 라며 그의 품에 묻은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눈엔 그들이 샤크티라 부르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 있었다.


“편지라도 써라.”

“오라고 해야겠어요.”


품에 대고 있던 입을 떼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우파나히는 여전히 알기 힘든 여자. 라고 생각했다.


“마차리도 같이 오면 좋겠네요.”


“죽인다.” 라는 말을 밖으로 내기 힘들었던 것 같지만 속으로 삼키진 않았다. 그리 말하는 그를 올려다보며 그녀는 배시시 웃었고 “샤크티가 슬퍼 할 거예요.” 라고 받아쳤다. 우파나히도 신중하지 못했던 것을 인정했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다 에란의 향신료는 최고인거 알잖아요. 편지 쓸 때 많이 가져오라고 적어야겠네요.”


우파나히는 “그깟 가루 따위.” 라며 투덜거렸지만 소녀의 빈정거림은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기서 구하려면 열 배는 더 비쌀 텐데요?”

“상관없다.”

“돈은 꽤 중요하다고요. 예전이랑 달라서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돈이 드는 때이니까요.”


그의 품에서 벗어난 소녀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우파나히는 소파에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내일 출발할 거죠?”

“그래.”

“자장가 불러줘요.”

“그래.”


이라베이가 차와 다과가 든 쟁반을 들고 들어오려다 조용히 나갔다. 부서진 문고리를 보고 일어난 짜증은 내일을 위해 쓰기로 하며 삼켰다.

이라베이는 아래로 내려와 아무도 먹지 않은 차와 다과가 든 쟁반을 들고 내려왔다. 차는 개수대에 부었고 과자들은 죄다 음식물 쓰레기통에 밀어 넣었다.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혐오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끔 그런 표정을 보곤 하는 소녀가 물어봐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게 반복되다보니 소녀도 포기해버렸다.


찻주전자와 쟁반은 깨끗이 씻어 건조대에 놓았다.

주방을 서성이던 이름 모를 벌레는 이라베이의 손바닥 안에서 찌부러져 사라졌다. 수도를 틀어 벌레를 씻어낸 다음 창밖을 보며 해의 위치를 확인했다.


해가 빨리 떨어질 계절은 아니었지만 이미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기울어짐이 커질수록 이라베이의 움직임도 분주해져갔다.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는 위에서 아래로, 라는 격언이 있듯 이라베이는 그것을 그대로 행했다. 찬장 위부터 시작해 여러 가구들의 먼지를 털고 가느다란 나무 꼬챙이와 얇은 행주로 가구 모서리 틈새에 낀 먼지까지 제거했다.

그런 다음 설거지를 마친 개수대를 씻어냈다. 매일 하는 일이기에 물때는 없었지만 그래도 유심히 살폈다. 양철로 만든 큰 냄비 같은 개수대는 쇠 수세미로 가볍게 문질러 혹시 모를 때를 제거하고 부드러운 수세미와 직접 만든 세제로 기름기를 닦아냈다. 마지막으론 행주로 남은 물기를 없앴다.


식탁 모서리에 가볍게 앉은 먼지 역시 그녀의 눈을 피해가진 못했다. 의자는 등받이 안 쪽 까지 닦고 다리 아래에 붙은 먼지는 밖에서 쇠 솔로 가볍게 긁어낸 뒤 뒤뚱 거리는 부분이 없는 지 확인했다. 문제가 없는 것은 식탁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바닥은 억센 머리칼 같은 빗자루로 가볍게 쓸어낸 뒤 전날 깨끗이 빨아 말린 걸레를 다시금 물에 적셔 막대에 달린 집게에 집어 닦았다. 그리 넓은 집은 아니었지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구와 부수 자재들은 청소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긴 걸레로 큰 부분을 닦은 뒤 모서리의 먼지는 손 걸레질을 하며 마무리를 했다.

아래층을 마친 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한번 본 뒤 돌아섰다. 오늘 만큼은 위층으로 올라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난간도 닦지 않았다.


무무가 잘 매여 있는지 확인한 그녀는 문단속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주방으로 돌아왔다.

해가 반쯤 져 있었다. 빛의 양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창문을 닫고 초를 서너 개 켠 뒤 그걸 사방에 두어 빛이 퍼지게 만들었다.

근육이 뭉치기라도 하듯 목을 좌우로 돌린 다음 찬장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낸 뒤 식탁 위에 풀어 놓았다. 안에는 우파나히가 담배를 만들어 필 때 사용했던 작고 까만 열매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걸 두 개 꺼낸 뒤 주머니는 입을 묶여 찬장 안에 넣었다.

꺼낸 것 중 하나는 입안에 넣고 씹었다. 딱딱한 것이 깨지는 소리가 나며 그녀의 입 안에서 바스러졌다. 이가 아프다는 표정은 짓지 않았다. 맛을 느낀다는 느낌도 없었다. 입안에서 바스락 거리던 것을 목 아래로 넘긴 그녀의 얼굴엔 살기 위해 먹는 다는 무감각한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남은 하나는 소녀가 덤으로 받아온 파르첸투르간 잎과 비슷한 것. 을 가루 낸 것과 함께 담배 파이프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한 쪽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가져온 그것은 우파나히가 쓴 것보다 대가 길었고 붉은 칠이 되어 있었다.

양초들을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을 자리로 옮긴 뒤 창문을 열고 불을 붙였다. 빛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담배 피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길게 빨아들인 만큼 길게 내뱉었다. 해는 거의 다 져가고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감상하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비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고 희미한 자국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자국은 그녀가 내뿜은 연기와 함께 어우러지고, 함께 사라졌다.

그녀는 그 풍경이 좋았다.


창밖으로 남은 불씨를 털어낸 뒤 물을 부었다.

낮에는 잘 앉으려 하지 않던 의자에 앉아 자기 방에서 가져온 책을 펼쳤다.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읽어 표지가 다 헤져버린 책은 당장이라도 책장이 떨어져 나갈 듯 위태로웠고 몇 장은 펼치고 넘기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뜯어졌다. 이미 몇 대 전부터 물려온 것이라도 되는 것인지 아무리 조심한들 그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 했다.


책을 읽는 동안 초가 손가락 한마디 쯤 닳았다. 책갈피를 끼우고 덮었다.

초는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껐다. 초를 든 그녀의 주변만 밝았다. 어스름하게 일렁이는 촛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약간 음산해보이기도 했지만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나 남은 초를 들고 문과 창문이 잠긴지 확인했다. 별 문제는 없었다.

그리곤 자기 방으로 들어가 사방에 있는 기름등에 불을 붙여 주변을 밝게 했다. 촛불은 꺼 침대 맡에 있는 서랍 위에 올려놓았다.

보통의 여자들이 관심가질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방은 살풍경하기만 했다. 있는 것이라곤 침대와 서랍. 별것 없는 옷장. 그리고 옷걸이 정도뿐이었다. 방 한 쪽에 있는 옷걸이의 빈자리에 앞치마를 벗어 건 그녀는 자신의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한숨이나 기지개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목을 좌우로 흔들었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게 싫었다.


불만에 찬 표정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잠시 지은 뒤 침대 옆에 있는 서랍에서 작은 책과 연필을 꺼내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기록했다.

일어난 시각, 식사 시각과 그 내용, 행동반경, 산 물건과 시간, 그 외의 것들까지. 생각나는 대로 적은 뒤 다시 서랍에 밀어 넣고 옷장에서 잠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소녀가 사준 잠옷은 동물무늬가 그려진 것으로 소매와 바지 끝단이 조금 짧아 손목과 발목이 완전히 드러나 보였다.

잠 잘 때 입는 옷. 이라 들었지만 왜 그런 옷이 따로 필요한 가에 대해 의문이 들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물어보진 않았다. 의문은 가지되 적게 질문하고 주는 대로 먹고 주는 대로 입으면 되는 일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일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등은 하나만 남기고 모조리 끈 뒤 하나 남은 등을 서랍 위에 두고 자리에 누웠다.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리고 나서야 등을 껐고 이불을 좀 더 올린 다음에야 눈을 감았다.


코를 골거나 옆으로 눕는 버릇은 없었다. 그저 관에 누운 시체처럼 아주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뿐이었다. 불은 켜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좌우로 흔들었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게 싫었다.


서랍에서 꺼낸 것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불은 켜지 않았다.

거실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도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빈 오른손을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손가락 끝에 닿은 솜털 같은 무언가는 그녀의 기억에 없는 것이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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