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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현의 세계입니다.

춤추는 진흙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암현
작품등록일 :
2017.07.29 23:25
최근연재일 :
2017.08.03 18:15
연재수 :
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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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29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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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1

DUMMY

가볍게 부는 아침바람은 건조해지기 시작한 거리를 담고서 창문을 넘어, 커튼을 헤치고, 집안에 있던 두 사람에게 닿았다. 한 사람은 소파 위에 앉아 있는 까만색으로 칠한 듯 한 남자였고 또 한 사람은 흰 시트가 깔린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녀였다. 침대의 소녀는 소파의 남자를 나긋이 바라보고 있었고 소파의 남자또한 나직이 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녀가 반쯤 감긴 눈을 베개에 비비는 사이 그 사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헝클어진 소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큰 손은 소녀의 머리를 묶기에 좋진 않았지만 ‘묶어야 한다.’ 라는 의지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 갈래로 묶은 머리가 소녀의 등에 닿자 겨우 눈만 내민 그녀가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귀를 아무리 가까이 대도 알아들을 수 없을 것 같은 잠결의 언어였다.

남자는 다시 소파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소녀도 그런 그가 좋은 것인지 몸을 옆으로 기울인 뒤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조금 전과 다른 점이라면 한 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점이랄까. 자기 허락 없이 머리카락에 손댄 것이었지만 싫지 않은 눈치였다.


차 한 잔 할 정도의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지루하지도 않은 것인지 느긋하게 누워 보기만 하는 소녀를 참지 못한 남자가 안아 올렸다. 이불채로 들어 올린 뒤 침대 위에 앉히고 머리카락을 다시 한 번 만져줬다. 전날 물병에 받아둔 물을 손수건에 묻혀 고양이가 세수하듯 소녀의 얼굴을 닦는데 쓰였다.

소녀는 싫어했지만 남자는 집요했다. 눈물샘에 붙은 눈곱을 떼고 뺨을 닦았다. 눈 아래와 콧잔등 위로 난 주근깨를 눈곱과 착각하는 일은 없었다. 눈 옆으로 눈물자국이 보였다. 잠들고 난 뒤의 이상한 버릇, 이라 생각하며 남자는 눈물자국을 지웠다.

이번에는 옷이었다. 양팔을 위로 올린 뒤 잠옷을 벗겼다. 채 마르지 못한 눅눅한 잠옷은 옷걸이에 걸어 창가에 건 뒤 하늘색 원피스를 꺼내 입혔다.

다시 침대 위로 쓰러지려는 것을 잡아 어깨로 들어올렸다. 소녀가 그날의 첫 마디를 내뱉은 것도 그때였다.


“나 배고파요.”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는 듯 배에서 나는 소리로 다시 한 번 표현하고 있었다.

꼬르륵 꾸르륵 거리는 소녀의 뱃소리에 우두커니 설 수 밖에 없었던 우파나히에게 자신을 내려달라 했다.

우파나히는 그녀를 다시 침대 위에 앉힌 뒤 자신도 소파에 앉았다. 변함없는 무표정,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이 잠에서 깼다는 것을 제외하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상황을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뺨에 입을 맞추는 척하며 그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그의 상처가 닿았다. 왼쪽 눈썹 위에서부터 시작된 상처는 오른쪽 광대뼈를 조금 넘어 멈춰 있었다. 오래된 듯 했지만 손가락으로 만져질 정도로 도드라진 깊은 상처, 그리고 그 깊은 상처를 만지는 소녀는 우파나히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


우파나히는 그게 싫었다. 상처를 만지면서 반응을 살피는 이상한 여자와는 한시라도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당장 바닥에 내팽개쳐도 모자랄 일이었지만 그녀 자체는 싫지 않았기에 참았다.


“그만.”


하지만 그게 몇 번이고 계속되는 것은 참지 못했다. 예민해진 신경 위로 거미가 올라가듯 조심스럽고 느릿한 감촉이 남는 쓰다듬기는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로 물러날 소녀가 아니었다. 그의 다리 위에 올라탄 뒤 우파나히의 이마를 밀어 목을 뒤로 젖혔다. 남은 팔로는 목을 감고 끌어 앉듯 잡았다.

젖혀지며 도드라진 목젖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녀는 곧장 상처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밤새 고여 있던 침 냄새가 그의 코끝에 닿았다. 이어 축축한 혀와 함께 따뜻하고 진득한 입김이 상처에 닿았다. 도발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잡아먹힌다는 느낌에 가까워 보였다.


“그만.”

“알았어요.”


우파나히의 한 마디에 상처를 핥고 있던 혀를 거두었다. 주근깨 가득한 얼굴엔 미소가 꽃피었다. 누가 봐도 귀여워 옅은 웃음을 지을 미소였지만 우파나히는 무표정한 얼굴을 이어갔고 “별로였어요?” 라는 말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아주 많이 지루해하고 있었다. 미소 지으며 우파나히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그의 머리칼을 한번 쓰다듬어 넘기곤 먼저 움직여 그의 입에 입을 맞췄다.

눈을 질끈 감은 우파나히에 비해 소녀는 눈을 지그시 뜬 채 우파나히의 표정을 즐기고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 누군가가 보기엔 그렇게 보였다.

긴 입맞춤 뒤의 소녀는 막 잠에서 깬 듯 살며시 눈을 뜨는 우파나히를 보며 “잘 잤어요?” 라는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파나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눈을 주시할 뿐이었다.


“닳겠어요.”


장난스레 상처에 입을 맞춘 뒤 그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며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마님.” 이란 낮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그렇게 있다간 식사시간에 늦을 거 같은데요?”


킥킥 거리는 소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문을 여는 것은 우파나이였다.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소파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그와 비슷한 입 모양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입 모양은 비슷했지만 그녀의 키는 우파나히보다 컸다.

보통 남자들보다도 두 뼘 이상 크고 우파나히보다는 한 뼘 이상 크다. 그러니 그녀와 눈을 마주치려면 머리를 뒤로 젖히고 시선을 올려야했다.

거기다 머리카락을 기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인지 의심될 정도로 긴 머리카락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고 풍성하기까지 해 덩치가 크게 보이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식사 전에 세안을 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나마 소박하다고 하는 것이 있다면 그녀가 입은 통이 좁은 치마와 그 위에 덧댄 흰 앞치마 정도일 것일까.

앞치마엔 방금 묻은 것으로 보이는 얼룩이 촉촉하게 묻어 있었다. “서투르다.”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한 우파나히가 얼룩을 보고 한 짧은 감상이었다.

이에 여자는 입을 살짝 열어 낮은 목소리로 “늦었습니다.” 라는 불평을 했다. 눈매가 무서웠고 입은 불만으로 가득했다.

우파나히보다는 조금 더 풍부한 감정 표현이었다.


“알았다.”


그 한 마디에 여자는 가벼운 목례를 한 뒤 아래로 내려갔다. 소녀는 우파나히의 등 뒤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다가 한 마디 던졌다.


“더 늦으면 이라베이가 화내겠어요~”


그녀를 이라베이라 부른 소녀는 콧소리를 높이며 그를 놀렸다.

웃음소리와 함께 우파나히와 문 사이의 작은 틈으로 빠져나간 소녀는 향수와는 다른 체취로 그가 지나올 길을 만들었다. 짝을 유혹하는 듯 한 진한 향이었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과 똑같은 표정을 한 채 내려가기 전 열린 창문부터 닫았다.

창문을 닫자 공기가 그 자리에 멈췄다. 정지된 공기와 햇살의 열기 때문인지 방은 조금씩 뜨거워졌다.

그와는 별개로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이불을 개어 배게 아래에 두었다. 구겨진 침대 커버는 가장자리를 당겨 팽팽하게 만들었다.


여유로운 생활이라 할 정도의 가재도구는 있었다. 그와 그녀를 위한 옷장 두 개와 침대 하나. 그가 좋아하는 소파가 하나. 무언가 그려보려다가 만 그녀의 캔버스가 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옷이나 모자를 걸 옷걸이도 하나 있었다. 둥근 식탁같이 만들어 간단한 다과 같은 것을 즐기는 용도인 탁자는 아래에 수납공간을 만드는 재주를 부렸지만 차를 흘리면 안에 든 것까지 젖어버린다는 것과 침대 맡에 놓기엔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과를 놓는 데는 쓰이진 않았다.

애초에 침대 맡에 서랍이 하나 더 있기도 했고 화장대로 쓰는 거울이 달린 서랍장도 있었으니 단순한 애물단지에 불과한 물건이 된지 오래였다.

우파나히가 방을 나가기 전 잠깐 바라본 양철난로는 먼지가 꽤 쌓여 있었다. 난로 안의 재는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울의 끝에 다 정리한 덕분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장작은 난로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쓰지도 않는 장작을 그냥 놓아둔 것은 불편하지 않으니까. 라는 이유였지만 장작 사이로 거미가 들어가 집을 짓는 것은 가만히 보기 힘들었다.


정리를 어느 정도 했다고 판단한 것일까. 우파나히의 발걸음이 아래층으로 향했다. 시원찮은 대패질과 제대로 되지 않은 방수처리 덕분인지 습기가 차는 계절이면 바닥에 댄 나무판자는 조금씩 뒤틀리며 거칠어졌다. 가끔 발바닥에 튀어나온 가시가 박히는 일도 있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로 바닥을 한번 문지른다. 거칠었지만 아직 발에 박힐 만한 가시는 없었다.

액자 하나 없는 살풍경한 복도를 지나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 몸을 기대었다. 한발 한발 내려갈 때마다 나무판자와 못 사이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 유달리 삐걱거리는 소리가 심했던 판자 위에서 우파나히는 조심스레 발을 올렸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언제 고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몇 번 발을 굴러봤다. 여전히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내려가기 위해 체중을 실었을 땐 큰 소리를 내질렀다.

부서졌다. 움푹 파인 나무판자는 그의 발을 잡아먹고 있었고 그 소리를 듣고 온 이라베이는 우파나히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초리는 그의 약한 부분을 찾고 있는 것 같았고 꽉 쥔 주먹은 당장에라도 찾아낸 약점에 날아들 것 같았다. 하지만 짜증으로 얼룩진 얼굴은 그 모든 것을 참고 있었다.


“서너 시간 걸립니다. 내려가지 않으실 겁니까. 올라가지 않으실 겁니까.”


뜻이 잘 연결되지 않는 불평이었지만 우파나히는 미안하다.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고친다.” 라며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책을 내놓았다. 이라베이의 표정이 비꼬는 듯하게 변한 것도 그때였다.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하는 사람에겐 못 맡깁니다.”


부서진 판자 사이에서 발을 뽑은 우파나히는 계단을 다 내려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알았다.”

“집을 다 부수게 놔둘 순 없는 노릇입니다. 힘든 일입니다. 보수를 더 올려 주십시오.”

“싫다.”


둘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비단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만큼은 서로 물러서려는 기색이 없었다. 중재인이 필요한 때였다.


“아침이 식어요~!”


뚱한 표정의 소녀가 가까이 있던 이라베이의 허리에 달라붙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우파나히에게는 혀를 내어 놀렸다. 소녀는 이라베이의 허리를 잡고 주방 쪽으로 끌어가려 낑낑댔고 이라베이는 그런 소녀에게 못 이기는 척 이끌려갔다.


“오늘 아침은 특히 더 맛있을 거 같아요. 오늘은 무슨 재료인가요?”

“썩은 고기를 설익힌 것과 독버섯을 잡초와 섞은 스프, 흰 곰팡이가 섞인 빵, 쓴 풀입니다.”


식사가 담긴 그릇을 내며 말한 것은 죄다 먹을 수 없을 것 재료들이 섞인 답변이었지만 소녀는 살짝 핥으며 기대에 찬 눈으로 식탁 위의 그릇들에 집중했다.

질그릇으로 만든 냄비에는 버섯과 야채를 주 재료로 한 스프가 가득 담겨 있었고 큰 접시에는 핏물이 살짝 나오게 익힌 고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거기에 흰 콩이 박힌 빵이 담긴 바구니와 식초 드레싱으로 마무리한 샐러드까지 올리니 한 끼 식사 준비가 모두 끝났다. 남은 것은 식기를 앞에 두는 일 뿐이었다.


“오늘도 맛있는 것들뿐이네요.”


소녀는 식기가 나오는 시간도 아까운 것인지 오목한 접시에 향초와 버섯을 주재료로 만든 스프를 한가득 담아 입을 대었다. 한 모금이었지만 만족한다는 표정이 보였다. 그 뒤 식기가 앞에 놓였다.


우파나히는 식기가 놓이길 기다린 뒤 스프를 한 숟갈 떠먹곤 곧장 고기에 손을 대었다. 고기는 부드럽게 씹히고 육즙이 풍부한 것으로 잘 숙성된 좋은 부위를 적당히 구운 것이었다. 그는 이라베이의 솜씨로 핏물을 적당히 보전하고 있는 그것을 썰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입에 밀어 넣었다. 손바닥만 하던 고기는 한순간에 입안에 들어가 맛을 본다. 라는 감정이 들기도 전에 뱃속으로 내려갔다.


소녀의 다음 음식 역시 빵과 고기였다. 빵을 아래위로 뜯은 뒤 그 사이에 고기와 샐러드를 넣고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여러 가질 섞어 한 번에 씹긴 했지만 우파나히보다는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니가 빵 껍질과 콩, 빵 속을 천천히 짓눌렀고 곧이어 고기를 자를 땐 작은 송곳니가 앞니를 도왔다. 곧 어금니가 입안에 들어온 빵과 고기를 고정시켰고 연약한 샐러드부터 분쇄되기 시작했다. 드레싱이 혀 양 옆으로 퍼지며 시큼한 맛을 냈다. 그건 곧 고기에 섞여들어 특유의 섞인 맛을 만들어 냈다.


“정말 맛있네요. 최고에요.”

“고기”


어느새 누군가의 뱃속으로 밀어 넣어진 고기 접시가 허전한 모습을 보이며 이라베이의 앞에 내밀어졌다. 그녀는 별 말 없이 받아들곤 예상했다는 듯 남겨두었던 고기를 모두 담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사이 우파나히는 두 그릇 째인 스프 접시를 비우고 세 그릇 째를 준비했다.


“이라베이. 오늘도 안 먹나요?”


소녀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다 먹고 난 뒤 이라베이를 향해 질문했다.

식사시간인데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리에 앉지 조차 않은 그녀에 대한 작은 불만과 요청이었다.


“괜찮습니다. 마님.”

“뭐든 같이 먹는 게 좋잖아요? 그리고 마님이라곤 하지 마요.”


소녀는 살짝 쀼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먹던 것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마음에 드는 호칭이 아니라는 듯 표정과 행동으로 그걸 표현했지만 이라베이는 눈을 감은 채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답만 내놓을 뿐이었다.


“샤크티 주인님의 분부셨습니다.”

“말해둘 테니까 내말 들어요.”

“거절하겠습니다.”

“정말······”


가볍게 실망한 듯 한 태도로 말을 흐린 소녀는 곧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자리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살짝 뺀 뒤 이라베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럼 자리에 앉는 것도 안 되나요? 오늘도?”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잠시 비춘 후 아무 말 없이 소녀가 빼낸 의자에 앉았다. 그때부터 소녀의 몸놀림이 분주해지더니 그녀 몫의 식기를 그녀의 앞에 놓기 시작했다. 아차, 했던 것일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우파나히의 발이 그녀의 발을 꾹 짓누르며 막았다.


“이 무슨······.”


짜증을 내려던 차, 소녀의 생글생글한 얼굴을 보고서 속으로 삼켰다. 우파나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기를 뱃속에 밀어 넣는 것에만 열중 하고 있었다.

소녀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그녀의 곁에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원피스 자락을 살짝 잡고 올리며 가벼운 목례를 하며 장난스런 말투로 그녀를 웃기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손님~? 오늘의 아침식사는 큼직하게 썰어 가볍게 익힌 고기와 흰 콩을 넣고 구운 빵, 그리고 향초와 버섯으로 맛을 낸 스프랍니다. 맛있게 드셔주세요~”


소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 앞에 있는 접시에 우파나히가 던진 고깃덩이가 날아왔다. 튄 육즙이 이라베이의 옷깃에 묻었다. 샐러드는 고기를 덮는 이불이 되었고 아무렇게나 떠 붓다시피 담은 스프는 넘쳐 그녀의 앞치마를 더럽혔다. 마찬가지인 빵은 튕겨져 나가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아! 이 맛있는 걸 떨어트리면 어떻게 해요!”


소녀가 목소리를 살짝 높이며 떨어진 빵을 집어 입에 문채 자리에 앉았다. 우파나히가 그걸 뺏어 자기 입속에 넣었고 불평할 새도 없이 삼켰다.


“저기 많잖아요!”


소녀의 작은 짜증에 우파나히는 “맛없다.” 라는 대꾸를 한 뒤 바구니에 있던 빵을 하나 집어 그녀의 앞의 접시에 조심스레 놓아두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하려 했다.

하지만 소녀는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그것으론 끝낼 수 없었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마침 우파나히가 먹으려 준비하던 고기를 잡아 뒤로 넘어지듯 당겼다. 곧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가 뒤로 젖혀지며 넘어갔다. 잡을 새도 없이 넘어졌지만 그 전에 뛰어내린 소녀는 손에 들린 고기와 함께 달려 나갔다.

주방과 복도를 잇는 문에 선 소녀가 혀를 살짝 내밀며 우파나히를 놀려댔고 그는 아주 간단히 포기하고 마지막 남은 고기에 손을 대려 했지만 그가 손을 뻗기 전 이미 이라베이의 접시 안에 담겨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발을 누른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듯, 식기를 사용해 천천히 고기를 썰어먹는 이라베이를 잠시 보고 있던 우파나히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를 향해 다가갔다.


“아! 아! 의자 똑바로 해줘요!”


한발자국만 더 가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서 소녀가 내뱉은 말에 우파나히는 뒤돌아섰다.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운 뒤 다시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소녀는 계단 올라가는 소리만 남긴 채 사라지고 없었다.

우파나히는 소녀의 뒤를 쫓아 계단을 올라갔다.

그가 복도로 나설 때 이라베이가 여러 물품을 구입하는 것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이라베이 역시 한 번 더 이야기 하는 것엔 마음이 없다는 듯, 조용히 식사를 계속했다.


“늦어요.”


계단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소녀는 이미 다 먹어 버린 듯 고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파나히의 목적이 바뀌는 때였다.


“잡아봐요. 히히.”


소녀의 웃음을 따라 부서진 계단을 넘어 위로 올라간다. 소녀 역시 그를 놀리듯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올라갔다. 방으로 가 문을 걸어 잠근다면 열쇠를 가져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지만 재미가 없을 게 뻔했다.

복도 끝에 있는 목욕탕이 있는 곳으로 가는 가 싶더니 곧장 그 맞은 편 방으로 들어갔다. 목욕탕에서 나오는 습기에 대한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물건들과 그 물건들이 수납된 장소가 거기에 있었다.

우파나히가 반쯤 열린 문을 열었을 때 안에서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났다.


“조심해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의 환영인사와 함께 오래된 종이냄새와는 다른 사치스러움이 보였다.

오래된 책장이 여러 개, 거기에 꽂힌 오래되고 새로운 책들이 수십 질, 수백 권, 수천 장 있었다.

하지만 시간만 있다면 모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물론 희귀하다. 라고 일컬어지는 책들은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 정도 인건 사실이다. 그래도 그것 자체로 사치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그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것들을 아무리 찬찬히 살펴본다 한들 그곳에 그 정도 가치를 가진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녀를 잡기위해 천천히 앞으로 가던 우파나히의 눈에 언제 마신 것인지 알 수 없는 찻잔과 남은 과자가 보였다. 그것들을 놓을 공간조차 없는 책상 위 책의 숲 사이에서 그걸 집어 들었다.


“먹었으면 치워라.”

“아, 깜빡했네요. 미안해요.”


그것 역시 사치스럽진 않았다. 거리의 가게에서 얼마 안 되는 돈을 주면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남은 과자도 이라베이가 구운 것이었다.

서재라는 공간 자체가 사치스럽다면 사치스러울 수 있었지만 있는 집에 비해서라면 별다를 것 없었다. 책상으로 쓰는 탁자와 가죽의 색이 조금 바란 소파가 서재 중앙쯤에 있고 채광이 잘되는 자리에 흔들의자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소녀가 흔들의자에 서서 풍랑에 휩싸인 배의 선장을 연기하는 동안 우파나히는 찻잔과 남은 과자를 아래로 가져가 이라베이에게 넘겼다.

올라 왔을 쯤엔 소녀의 모습은 서재 어디에도 없었다. 목욕탕 쪽에서 물을 끌어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 씻는 중인 듯 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까. 우파나히는 서재에 남아 널브러진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채광이 좋았다. 이 시기, 이 시간 때에 햇볕이 잘 들어오게 방향을 잡은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사치스러운 창문을 달아놓은 덕이기도 했다.

별 볼일 없는 서재가 유일하게 사치스럽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창문 때문이었다.

환기를 위해 아래쪽에 작게 열 수 있는 곳을 만들고 그 위로 식탁만한 크기의 유리를 달아 햇빛이 서재를 감싸 안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만들기도 어렵고 가져와 달아 놓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면 자신을 시기하는 누군가가 돌이라도 던져 깨트리는 것이 아닐까 전전긍긍할 노릇이었다.

우파나히는 그게 싫었다.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공간이었고 지나치게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물 떨어진다.”


아무 말 없이 책상 위의 책들을 정리하던 우파나히가 입을 연 걸은 젖은 머리카락으로 다가와 그의 등을 수건으로 쓴 소녀의 포옹이 차갑게 느껴진 때였다.


“물이 차가웠어요.”


그녀가 지나온 곳과 선 자리에 물방울이 방울져 떨어져 거뭇거뭇 길을 만들었다.

젖어가는 등의 감촉을 느끼며 이라베이가 수건을 챙기는 것을 잊은 것일까. 라고 생각이 우파나히의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이미 긴 수건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소녀의 행동은 그저 장난일 뿐이었다.


“빨리하고 방으로 와요.”


일부로인 듯 발소리를 내가며 달려가는 소녀가 남긴 물 자국까지 닦아내는 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아래에서 걸레를 가져와 닦는 김에 바닥에 있는 먼지까지 모두 닦아냈다. 책상을 닦는 일은 그 위에 있던 책들을 모두 정리한 다음의 일이었지만 그 자체는 오래 걸리진 않았다. 창틈에 쌓인 먼지는 손가락을 세워 닦아냈다. 책에 걸레가 닿지 않게 하면서 책장의 먼지를 닦는 것은 섬세함이 필요한 일이었다. 책과 책장 사이의 미묘한 공간에 먼지가 남았지만 깨끗이 닦으려면 책을 다 꺼내야 하는 일이었기에 책을 꺼내진 않았다.

청소를 하는 동안 작은 솔과 양철물통이 그의 곁에 놓여졌다. 청소가 끝날 쯤에는 솔은 검게 물들었고 물통의 물엔 부유물 같은 것들이 떠돌았다.


먼지가 쌓일 정도로 쓰지도 않았고 관리도 되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한숨을 쉬었을 때였지만 그는 어떤 불필요한 행동도 하지 않고 청소도구를 챙겨 아래로 내려갔다.

사실 서재는 이라베이가 청소하지 않는 두 곳 중 하나였다. 아무도 손대지 마. 라는 절대적 명령에 의한 것으로 그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우파나히가 청소한 것을 그가 본다면 화를 낼 일일 수도 있었다.

이라베이는 그가 내려와 내민 물통과 걸레, 솔을 받아들고 장을 보러 가야하니 소녀와 이야기 해 살 것을 일러 달라 했다.

답을 하진 않았다.

우파나히가 청소를 하는 동안 이라베이가 부서진 계단을 고친 것인지 계단은 말끔히 수리되어 있었다. 몇 번 발을 굴러봤지만 부서지는 기색은 없었다. 그 즉시 그 바로 윗 계단을 부수고 올라가는 우파나히의 감상은 잘 고쳤다. 정도였다.


계단을 부수고 방에 들어간다. 딱히 이유라 한다면 방으로 오라는 소녀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라베이가 화내는 것을 들어주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방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는 정리해뒀던 그대로였고 창문 밖으로 나갔다면 이미 신발부터 챙겼을 것이었다.

침대 아래를 한번 살폈지만 소녀는 물론 괴물 같은 것도 없었다. 양철 난로는 들어가기에는 좁은 공간이었다. 옷장을 열어봤다. 그가 쓰는 옷장에는 어두운 색의 옷만 가득할 뿐 아무도 없었다.

소녀가 쓰는 옷장을 열었다. 옷걸이에서 내려와 잔뜩 뭉쳐져 있는 각양각색의 옷 사이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잡아당겼다.

실타래를 풀 듯 천천히 딸려 나온 머리카락 끝엔 더 이상 잡아당기지 말라고 말하는 소녀의 손이 있었다.


“들켰네요~”


옷가지를 헤치고 나온 소녀는 헤헤. 라며 가볍게 웃곤 우파나히의 배에 이마를 대고 몇 번 비볐다. 그리고 그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우파나히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등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은 그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다.

이마를 배에 대고 있어 빗질을 하듯 만질 순 없는 일이었지만 나름 만족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우파나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소녀는 그걸 즐기기라도 하는 듯 그의 배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뒷정리를 모두 끝낸 이라베이가 찻주전자와 찻잔, 과자가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소녀는 그의 배에 얼굴을 반쯤 파묻은 채 눈만 내밀며 그녀를 반겼다.


“식사는 어땠어요?”

“좋았습니다. 마님.”


좋았습니다. 라는 부분까지 가볍게 웃고 있던 소녀의 입가는 마님이라는 부분에서 쀼루퉁한 것으로 모양을 바꾸었고 눈은 심통이 난 모양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이라베이는 그런 사소한 표정변화에는 무심할 뿐이었다.


“이번에 구입할 물품과 예상 비용입니다.”


쟁반을 탁자 위에 올리고 의자에 앉은 소녀에게 내민 쪽지에는 식료를 포함한 몇 가지 물품의 내역과 그 예상비용이라는 것이 적혀 있었다. 소녀는 음······이라 하며 그 내역서를 다 읽곤 끝이 살짝 날카롭게 올라가며 다음 글자로 넘어가는 이라베이의 서체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몇 번을 보아도 날카롭고 자유분방하며 멋지다고 생각되는 서체였다. 첫 부분은 힘을 줘 살짝 번진 잉크가 진하게 나타났고 끝부분의 날카롭게 올라가는 부분은 가느다랗게 그어 있는 듯 없는 듯한 느낌을 만들었다.

소녀는 그런 서체를 연습하지 않은 자신의 노력부족을 탓하며 서체 감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찍 가지 않으면 다음 식사 준비에 차질이 생깁니다.”


하지만 소녀는 음······이라는 소리를 되풀이 해 낼 뿐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아직도 그 서체를 감상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눈은 조금 다른 곳을 향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소녀는 결론을 내 놓았다.


“우파나히, 우리 장보러 갈래요?”

“알았다.”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소녀가 내민 찻잔을 받아든 그의 짧은 대답이었다. 차는 향을 한번 맡아볼 뿐 마시지 않고 내려놓았다.


“지갑 챙기는 거 잊지 말아요~”


우파나히가 “알았다.” 라고 답하는 동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과자를 한 조각 집어 입속에 넣었다. 그리곤 행복하단 표정을 한번 보인 뒤 남은 차를 홀짝였다.

우파나히는 서랍에서 지갑을 챙긴 뒤 허리띠에 단단히 고정시켰고 그 위로 검은 색 코트를 덮어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가렸다.


“오늘 꽤 더울 건데요. 괜찮아요?”

“괜찮다.”


걱정스런 소녀의 말대로 창문 안으로 들어온 햇살은 따갑기만 했다. 밖을 내다본다면 반팔차림인 사람들을 더러 볼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소녀는 곧 그 이유를 눈치 챘고 넌저시 이 살기 좋은 나라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돌아온 것은 “그래.” 라는 딱딱한 말 한마디뿐이었다.

덥거나 춥거나, 살기 좋은 나라이던, 살기 어려운 나라이던 혹은 그 두 가지가 섞여 있거나. 어찌되었거나 지갑이나 지갑의 내용물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라는 우파나히의 생각은 그의 코트를 더 여미게 만들뿐이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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