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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현의 세계입니다.

춤추는 진흙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F

암현
작품등록일 :
2017.07.29 23:25
최근연재일 :
2017.08.0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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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30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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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DUMMY

먼저 준비를 마친 우파나히가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뒤이어 내려온 이라베이가 찻잔을 씻었다.

개수대에 달린 태엽 식 펌프는 태엽이 다 돌아가는 동안 물을 뿜어낸다. 작은 불편이라면 수압조절이 힘들다는 것일까. 이미 익숙해진 이라베이는 능숙하게 쓰고 있었지만 익숙지 않은 사람이 쓴다면 바닥을 다 적실 것이었다.


“짜잔~! 이거 예쁘죠?”


태엽이 다 돌아가고 우파나히가 책을 덮을 무렵 내려온 소녀는 원피스 위에 걸친 반투명한 빨간 블라우스를 자랑했다. 하지만 곧 별 반응이 없는 우파나히의 표정을 향해 머리 위에 놓아뒀던 작은 밀짚모자를 집어던졌다.

집을 나가기 전 얼른 다시 씌워줬지만 다시 날아오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느릿느릿 나온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새벽부터 깨어나 활기를 띠기 시작한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성벽 밖의 적을 막기 위해 건조된 높은 성벽은 단단하고 든든했지만 햇빛을 막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물론 전시에는 그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겠지만 스무 해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재설계되어 네 개 이던 성문은 여덟 개로 늘어나고 몇몇 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조작을 통해 비밀리에 침투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기도 했다.


누군가에겐 동경의 대상이나 시의 재료가 되곤 했던 두터운 성벽은 주기적인 시난들의 토벌과 그 개체수의 감소, 인구의 증가와 성벽 위를 거니는 병사들의 하품하는 모습, 담배를 피우는 모습 등을 더해가며 예전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직까진 필요하지 않다는 판단에 의해 외곽 성벽을 쌓고 안쪽에 남은 성벽을 없애 도시의 크기를 키우는 작업은 하지 않았다. 당연히 상인들이나 시민들의 반발이 있긴 했지만 성벽 밖에 주거공간을 마련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동시에 병력을 배치함으로써 반발하는 목소리를 최소화 시킬 수 있었다.


성벽 밖에 살고 있는 세 사람은 성문 바로 위에 도시의 이름을 새겨 넣은 문 중 하나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가 작은 웃음을 띠며 경비병들에게 인사 했지만 투구 안의 꽉 다문 입은 답하거나 웃을 줄 몰랐고 곧은 목과 허리는 굽힐 줄 몰랐다. 소녀는 아쉬워했지만 곧 시답잖은 이야기와 함께 즐겁게 웃으며 길을 거니는 것을 계속했다.

성벽 안 쪽은 과거와는 다르게 상가의 기능이 강화된 형태로 성장하고 있었다.

해가 지고 나면 특별한 수단이 없는 이상 외부에서 침입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재산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은행 같은 것들이 모여들었고 은행을 자주 이용하는 상인들이 그 근처로 모였다.

그중 도시 안에서 장사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가게를 열었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시장을 만들었다. 시장은 주민들의 주거지역 안에 생겨나며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했지만 몇몇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을 내놓아야했다.

그들은 그런 곳을 거닐고 있었다.


“과자 사줘요.”


우파나히의 옷깃을 잡아당긴 소녀의 시선이 멈춘 곳엔 구운 과자 사이에 꿀이나 잼 따위를 넣어 파는 가게가 있었다. 아이들 몇 명이 부모와 함께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 가게는 도시에서도 꽤 유명한 곳이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그들의 차례가 되었고 소녀는 과자를 양손에 쥔 채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이라베이는 안 먹나요?”

“괜찮습니다. 마님”

“그런가요······? 우파나히는요?”

“안 먹는다.


혼자 먹는 것이 거북한 것인지, 혹은 자기가 알고 있는 맛있는 맛을 다른 사람도 알아주길 원하는 것인지, 소녀는 한동안 과자를 쥐고만 있었다. 조용히 쥐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우파나히가 과자를 뺏어 반으로 나눈 뒤 한 조각을 소녀에게, 자신이 가진 반쪽짜리는 다시 반으로 나눠 이라베이에게 내밀었다. 이라베이는 마지못해 받아들고 씹는 흉내만 낸 채 한입에 삼켰다.

남은 것은 바구니에 넣으려 했지만 소녀가 올려다보는 시선이 ‘맛있죠?’ 라고 물어보는데다가 등을 찌르는 우파나히의 엄지가 작은 협박을 하고 있어 남은 것을 입속에 밀어 넣고 똑같이 삼켰다.

넘기는 것이 힘들어 보였지만 잘 하지도 못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곤 “괜찮은 맛입니다.” 라는 짧은 평으로 소녀를 안심시켰다.

소녀 역시 조금 안심한 듯 반쪽짜리 과자를 한입 베어 물었고 천천히 맛을 즐기며 이번엔 우파나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소녀의 그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 “맛없다.” 라는 평으로 소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제가 좋아하는 맛인데······.”

“맛없다.”


우파나히는 소녀의 비위를 맞춰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입안에 넣은 것을 뱉진 않았지만 연신 맛없다,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입안이 껄끄럽다. 라는 말을 내뱉었고 그 한마디 한마디는 소녀의 귀와 가슴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식사, 준비 하겠다.”

“정말요? 헤헤······뭐 만들어 줄 거예요?”


시무룩하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뭘 만들어 줄 건지에 대해서 귀찮게 굴었지만 우파나히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재료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우파나히가 식사를 준비하기로 한 것이 이라베이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소녀에겐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필요한 재료가 있는 가게에만 가고, 필요한 재료만 사고, 한 명 분의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샀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신속한 조치를 보고 있던 이라베이는 소녀에게서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을 전해들은 뒤 우파나히에게 돈을 받아 그가 사지 않은 것을 사러 갔다.

남은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 재료를 사고 있는 우파나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가 읊는 외우기도 힘든 음식 재료들을 중얼거리며 눈에 그 모양새를 담았다.


“완푸 뿌리.”

“저흰 약재 같은 건 취급 안 합니다.”

“파라첸투르간 잎.”

“손님, 여긴 약재상이 아니라니깐요!”

“베뇽 줄기.”

“저쪽에 파니까. 저쪽으로 가······아, 젠장! 툴, 안내해드려라!”


간혹 화를 내거나 지쳐버리는 상인들이 있긴 했지만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었다. 툴 이라 불린 아이의 안내에 따라 간 곳엔 나이 지극한 노인이 큼직한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소녀는 아이에게 수고비로 동전 한 닢을 줬고 아이는 꾸뻑 인사를 한 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완푸 뿌리.”

“한 상자에 이백 유렌.”

“파라첸투르간 잎”

“한 묶음에 삼백 유렌.”

“베뇽 줄기”

“그건 없어.”


양 볼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연기를 빨아대는 노인은 퀭한 눈으로 우파나히가 내민 돈을 받고 작은 나무 상자 하나와 말린 잎 한 묶음을 내밀었다.


“줄기의 납입 일자.”

“요즘 비 때문에 물건이 풀리지가 않아. 남아 있는 건 전부 예약된 거고.”

“알았다.”


툭 던지고 돌아서는 그의 행동이 맘에 안 들었던 것일까. 물고 있던 파이프 주둥이를 뺀 노인이 이가 숭숭 빠진 입을 크게 열었다.


“근데 너 말이 짧다? 아무리 손님이지만 예의는 지···쳇!”


하지만 이미 멀찌감치 떨어져 가고 있는 우파나히에겐 별 소용이 없는 것이었고 짜증스런 연기만 뿜어져 흩날렸다. 연기 사이에 남아 있던 소녀가 고개를 꾸뻑 숙이며 사과했고 노인은 이미 잊었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하, 꼬마아가씨, 저런 돼먹지 못한 놈 따라 다니다간 봉변당할 거야.”

“이젠 익숙해서 괜찮아요.”


노인은 무엇이 생각난 것인지 아니면 방실방실 웃는 소녀의 얼굴이 그의 마음을 돌린 것인지 노인은 그녀의 손에 작은 묶음 하나를 쥐어줬다. 베뇽 줄기라는 것은 아니다. 라고 소녀의 기억이 말해줬다.


“베뇽 줄기 대신 가져가. 비슷할 거야.”

“저기······돈이 없는데요?”

“파라첸투르간 잎이 상태가 별로 안 좋았으니까. 상관없어. 가져가.”


연기를 듬뿍 빨아들인 노인의 폐가 소녀를 배려하여 연기를 내뿜었다.


“중부 장마가 꽤 심각한 거 같더군. 죄다 젖어서 내려오거나 썩어버리니.”

“수해 수준인가요?”

“꽤 심각한 모양이더군. 이 시기에 비가 이렇게 올 리가 없는데 이상하단 말이지.”


빨아들인 연기가 포포포포 소리를 내며 하늘 위로 올라갔고 곧 사라졌다. 소녀는 그것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노인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작은 입을 열었다.


“진흙이라도 춤추고 있나보죠.”

“하! 어린 아가씨가 옛날이야기를 꽤 많이 알고 있군!”

“어릴 적에 들은 이야기일 뿐이에요. 그래도 지금은 없다면서요?”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종종 있었어. 뭐, 샬엔 전하께서 살아계실 때 대대적으로 처리하셨지만.”

“몇 십 년 전이네요?”

“뭐, 어린 아가씨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지만. 그땐 명확한 처치법이 없어서 고생했었거든. 칼 같은 걸로 잘라봤자 수가 늘어날 뿐이었고.”

“아, 백일 장마 때 영원의 여행자가 샬엔 전하께 도움을 줬다고 들었어요.”


물고 있던 파이프 주둥이를 입에서 땐 노인은 이가 없는 입을 살짝 벌리며 웃어보였다. 눈가에 맺힌 주름 사이에선 즐거움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하! 똑똑한 아가씨구만! 요즘엔 그런 것도 가르치는 모양이지? 내 손자랑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말이야!”


정말로 즐거운 듯 호탕한 웃음에선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는 색깔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조용히 다가와 소녀의 어깨에 손을 올린 우파나히의 “가자.” 라는 한 마디에 끝나고 말았다.

소녀는 자신을 버리고 간 그에 대한 화풀이라도 하는 듯 어깨에 올린 손을 꼬집었고 우파나히는 이내 손을 내렸다.


“자꾸 놔두고 갈 거예요?”

“아니.”


소녀는 노인에게 허리를 숙였고 노인은 짧은 웃음과 가벼운 손인사로 답했지만 우파나히에겐 꽤 날카롭게 굴었다.


“칠칠맞게 흘리고 다니지 마. 자기 것이라면 자기가 챙겨야지.”

“태어날 때부터 칠칠맞은 사람이라서 안 될 걸요?”

“가자.”


반문하거나 투덜거리는 일 없이 짧은 말 한 마디로 소녀를 이끌었다.

곧장 다른 가게로 가 필요한 것만 샀다. 감자, 호박, 당근 등의 식재를 포함해 소금에 절인 생선과 신 과즙의 일종, 이족보행을 하는 큰 새의 다리가 하나, 다른 가축의 고기가 두 종류, 신선한 채소, 작은 병에 담긴 향신료 등이 그것이었다.


“힘들어요. 배도 고프고.”


소녀가 투덜댄 것은 점심시간이 다 된 때였다. 우파나히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며 해의 위치를 확인한 후 소녀가 좋아하는 과자를 샀다. 당장 달라는 소녀의 징징거림이 듣기 싫을 정도였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공원에 가고 나서야 소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의자에 짐을 내려놓고 소녀가 앉을 자리를 가볍게 손으로 쓸어냈다.

소녀는 우파나히의 작은 배려에 쀼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아 과자를 한 입 크게 물었다. 겉은 적당히 식어 있었고 속은 입이 데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따뜻했다. 소녀는 나름 만족한 듯 웃음 지으며 과자 하나를 다 먹었고 우파나히는 그런 그녀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떼 줬다.


과자를 다 먹은 소녀의 시선은 멍 한 듯 했지만 공원 한 가운데에 있는 동상들에 확실히 고정되어 있었다.

가는 글자가 나열된 책을 읽기라도 하듯 눈동자가 조금씩 움직이며 그 동상들을 구경하는 모습 때문이었을 까. 우파나히는 그녀의 시선을 빼앗겼단 생각이 들었는지 불평하듯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강한 돌로 만들어진 일곱 명의 사람이었다.

용병이나 모험가라도 되는 듯 한 차림의 그들은 색을 입혀 놓으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정교했는데 특히 주름살 하나하나까지 나타날 정도로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 얼굴과 근육의 형태가 자랑이었다.


검을 뽑아든 젊은 남자가 중앙에 있고 그 좌우로 대검을 등에 짊어진 키 큰 여자와 손에서 물을 내뿜은 웃는 얼굴의 남자가, 남자의 옆으론 망치를 든 주름진 얼굴의 남자의 옆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이 있는 위치에선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둥근 진형을 취하며 갈고리를 든 멋쟁이 여자와 자신감 없어 보이는 얼굴의 소년, 등에 멘 커다란 양날도끼에 손을 올린 모습의 큰 체구의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있었다.


소녀는 곁눈질로 자신을 보고 있는 우파나히의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지으며 신을 벗어 날리곤 그의 무릎 위에 양 다리를 올렸다.


“오래 걸었더니 발 아파요.”


우파나히는 큰 손으로 소녀의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세심히 주물렀다. 작은 점토를 가지고 노는 다 큰 어른 같았다. 소녀는 재미없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다시 돌아오며 과자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문 뒤 우파나히를 바라봤다.


“칼리브와 이사벨라도 이런 느낌이었을 까요?”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시선은 이미 우파나히가 아닌 동상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손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남자의 동상과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대검을 짊어진 여자의 동상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우파나히는 잠시 손을 멈추고 “이사벨라는 강한 자라고 들었다.” 하고 답한 뒤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의 대답에 소녀는 잠시 생각한 뒤 다시 말을 꺼냈다. 이번에 그녀의 시선은 그의 옆얼굴로 향해 있었다.


“그래도 서로 사랑한 거잖아요?”

“그래.”

“이럴 땐 좀 상냥해져 봐요!”


모자를 받아 다시 씌워주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토라진 척 했지만 싫어하는 기색이 없는 소녀는 과자를 한 입 베어 문 뒤 남은 것을 우파나히의 얼굴 쪽으로 찔러 넣었다.

맛없다. 라고 평했던 과자가 입언저리에 닿았지만 우파나히는 역시 싫어하는 기색 없이 크게 한 입 베어 물었고 소녀는 남은 조각을 입에 물고 이상한 발음으로 “맛있어요?” 라고 물어왔다. 우파나히는 궁금해 하는 소녀의 표정을 충분히 바라본 뒤 씹던 과자를 다 삼킨 다음에야 입을 열어 “이상한 맛이다.” 라고 답했고 소녀는 그가 주무르고 있던 손을 빼내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빈말이라도 맛있다고 해주면 안 되나요?”

“거짓말하기 싫다.”

“지나치게 솔직한 것도 문제에요.”


우파나히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녀의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손을 빼내며 양손으로 꼭 부여잡았다.


“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할 거다. 적어도 너의 앞에선.”

소녀는 아직 남은 과자를 곁에 놓고 우파나히의 얼굴에 새겨진 상처를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내렸다. 우파나히는 좋지 않은 듯 그 손을 잡아 끌어내렸고 소녀는 가볍게 웃었다.


“난 좋아하나요?”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우파나히는 잠시 생각 한 뒤 “아니.” 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에 소녀는 “안 속네요.” 라며 배시시 웃었다.

그리곤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코끝을 가볍게 대고 냄새를 맡는 듯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여기서 굶어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이라베이가 기다리다 할머니가 되어 버리겠어요.”

“가자.”


짐을 챙긴 뒤 흘린 것이 없나 확인한 다음 집으로 돌아갔다.

소녀는 옆길로 새는 것을 좋아했고 우파나히는 그런 그녀를 주시했다. 옆길로 새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오길 기다렸다. 말리진 않았지만 한 번씩 하늘을 보며 해의 위치를 확인하곤 했다.

옆길로 새는 소녀와 말릴 생각이 없는 우파나히, 두 사람은 해가 중앙에서 한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을 때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밥 해줘요~”

“알았다.”


신발 정리하는 것을 잊은 소녀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며 장본 것을 이라베이에게 넘겼다. 장보기를 마치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라베이는 이미 간단한 식사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그가 사온 재료의 양을 보고서 버려야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들어간 상태였다.


주방에 들어가기 전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아무데나 던져놓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꿀벌이 수놓아진 꽃무늬 앞치마를 둘렀다. 코트는 이라베이가 정리했다.

소매를 걷은 굵은 팔엔 전쟁이라도 겪은 것 마냥 크고 작은 칼자국이나 화상자국과 함께 짐승의 이빨자국 같은 묘한 상처자국들이 많이 나 있었다.

그런 팔과 손으로 요리를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섬뜩할 법도 했지만 소녀는 음식의 맛만 좋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수도를 틀어 손을 깨끗이 씻은 뒤 큰 냄비와 작은 냄비, 석쇠 따위를 꺼내 늘어놓았다. 큰 냄비는 화덕에 걸었고. 작은 냄비에는 기름을 반쯤 채웠다. 사온 것 중 감자, 당근, 호박, 고기를 꺼냈다. 감자는 껍질을 벗긴 뒤 크게 썰어 큰 냄비에 넣었지만 서너 개는 따로 빼 길게 써린 뒤 달걀과 카레가루를 섞은 밀가루를 묻혀 기름을 담은 냄비에 넣고 집게로 가볍게 저어 튀겨냈다.

그 사이 이라베이가 해놓은 오믈렛과 거위다리 구이는 소녀 몰래 그녀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감자가 튀겨지는 남는 시간 동안 꿀과 겨자, 식초를 섞은 소스를 만들었고 다 튀겨지는 때에 맞춰 식탁 위에 같이 올려놓았다.

식전에 간단하게 먹는 것 치고는 양이 많았지만 소녀는 호평했고 이라베이는 아직 몰래 먹고 있었다.


화덕에 건 큰 냄비에는 당근과 호박, 고기 따위를 더 넣어 스튜를 만들 준비를 마쳤고 찬장에서 꺼낸 향신료와 함께 완푸 뿌리, 가루우유를 넣었다. 작은 모래시계를 뒤집은 뒤 다 내려가는 동안 국자로 가볍게 저어줬다. 모래가 다 내려가자 국물을 한번 맛보곤 부지깽이로 불을 조절했다.


“다 먹었어요.”


소녀가 감자튀김이 담겨 있던 그릇을 개수대 안에 넣었다. 이라베이는 주방 안쪽으로 돌아서서 소리 나지 않게 먹었고 우파나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릇은 3인분의 오믈렛을 먹어치운 이라베이가 씻어 식기 건조대에 놓았다.


“이라베이 이것 좀 도와줘요.”

“알겠습니다. 마님.”


무엇을 하려 하는 지 바늘귀에 실을 꿰는 것에 쩔쩔매던 소녀가 이라베이를 불렀다. 주방에서 나가는 그녀를 우파나히가 붙잡았고 그녀의 입가에 묻은 달걀 기름을 닦아주었다.


“제대로 해라.”

“알겠습니다.”


턱을 잡고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닦아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 잔뜩 일그러지는 입이 우스워 보였지만 둘 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라베이~”

“알겠습니다. 마님.”


약간 얼얼해진 입가를 만져 기름기를 확인한 뒤 소녀를 도와주었다. 소녀는 실과 바늘을 가지고 입고 있던 옷의 끝자락을 꿰매기 시작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마님.”

“아니에요. 가끔 손가락을 쓰지 않으면 무뎌지니까요.”

“골무를 가져 오겠습니다. 마님.”


여자들이 바느질에 시선을 고정하는 동안 우파나히는 양파와 당근을 채 썬 뒤 다진 고기와 함께 뭉쳤다. 뭉친 것은 손바닥 위에서 둥글게 만 다음 기름 솥 안으로 밀어 넣고 감자튀김을 하듯 집게로 조금씩 저어가며 튀겼다. 다 된 것은 채에 올려 기름을 빼냈다.

식탁 위에 올려놓진 않았다.

소금에 절인 생선은 석쇠에 걸어 구웠다. 조용히 끓고 있던 스튜에는 파르첸투르간 잎을 가루 낸 것을 넣은 뒤 가루가 풀어질 정도로 저었다. 맛을 보곤 만족한 것인지 그 이상은 손대지 않고 뚜껑을 덮어 계속 끓였다.

다 구운 생선은 과일즙을 뿌려 완성했다.


바느질을 끝낸 소녀가 냄새에 이끌려 고기 튀김을 하나를 집어 먹으려 했지만 손을 뻗는 순간 그녀의 두 배나 되는 우파나히의 손이 가볍게 잡아 말렸다. 그 손으로 잎채소를 썰어 드레싱을 뿌리고 과일로 장식까지 하는 것은 종이접기 쇼와 맞먹을 정도로 재미난 볼거리였다.


스튜가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한 뒤 불을 재에 묻었다.

냄비는 화덕 밖으로 꺼냈다. 생선은 접시에 담았고 스튜는 작은 냄비에 담고 뚜껑을 닫은 채로 식탁 위에 내놓았다. 이라베이의 거위다리 고기는 식탁 위에 올랐지만 가장자리에 놓였다. 고기완자 튀김은 식탁 한가운데에 올랐지만 손수건 같은 보자기가 위를 덮고 있었다.

식기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식탁 위에 올린 우파나히는 식기만 깔아놓지 않은 상태에서 지하로 내려가 작은 병을 들고 왔다. 이라베이가 잔과 식기를 놓았고 우파나히는 소녀의 앞에 놓아둔 잔에 병에 담긴 것을 조금 붓고 거기에 물을 섞었다.


“에란 꿀인가요?”

“조금 남아 있었다.”

“마차리가 가져온 건가 보네요.”


자신의 잔에 꿀을 넣지 않는 우파나히를 보여 누군가의 이름을 언급한 소녀는 배시시 웃으며 우파나히의 반응을 살폈지만 자신의 잔에 꿀을 넣지 않은 것으로 끝났다.


“에란에서 가져온 꿀은 특히 맛있는데요.”

“그 녀석한테서 받을 것은 없다.”


“그런가요?” 라며 툴툴거리는 것을 감추지 않은 소녀는 꿀물을 조금 맛본 뒤 행복하단 표정을 지어보이며 이라베이에게 자리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할 것을 부탁했다. 이라베이는 정중히 거절했지만 결국 그녀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라베이 앞에 놓은 잔에도 꿀물이 한가득 담겼다.

처음에는 먹으려 하지 않았지만 소녀가 계속 권하는 통에 마지못해 한 모금 마시고는 “괜찮은 맛입니다. 마님.” 이라 한 뒤 다시는 마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남은 파라첸투르간 잎 가루를 쓸어 모은 우파나히가 찬장에서 꺼낸 까만 구슬 같은 열매와 잎 가루를 작은 종이에 쌌다. 주둥이를 돌돌 말아 작은 쌈지를 만들곤 그걸 거실 서랍 안에 들어 있던 담배 파이프에 넣은 뒤 불을 붙였다.


“아! 잠깐! 잠깐! 창문! 창문!”


소녀는 질색하며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었고 우파나히는 그 중 하나의 창가로 가 연기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주의 하며 연기를 빨아들이고 내뱉는 것을 즐겼다.


“담배 좀 안 피면 안 돼요?”

“왜.”

“냄새 엄청 심하다고요. 옷 같은데 배이면 엄청 오래가고.”

“심심하다.”

“참나······심심함이라는 건 느끼는 거네요. 어디서 쓸데없는 건 배워가지고······”


그리곤 언제 가져온 것인지 몰래 숨기고 있던 고기완자 하나를 입에 넣었다. 우파나히가 그걸 보긴 했지만 담배만 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소녀도 고기완자 맛이 좋았던 것인지 더 이상 툴툴거리는 일 없이 자리에 앉아 식사가 나오길 기다렸다.

우파나히는 곧 파이프를 뒤집어 안의 불씨와 재를 창밖에 털어냈고 이라베이는 털어낸 자리에 물을 부었다.

손은 씻었지만 식기를 가져오는 우파나히의 손에서 냄새가 난 것인지 아니면 놀리고 싶었던 것인지 소녀는 코를 막으며 그를 놀려대었다.

물론 별 반응은 없었다.


“재미없네요.”

“맛은 있다.”

“뭐에요 그게. 진짜 재미없게······뭐,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식사가 시작되었다.

소녀는 한번 든 식기를 멈추는 일이 없었고 이라베이는 아주 조금씩 맛만 보듯 천천히 먹었다. 우파나히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은 채 소녀의 잔이 비워지면 다시 꿀과 물을 채워 넣었다. 그 덕분에 “안 먹나요?”라는 핀잔을 들었지만 우파나히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혼자 먹기에 많아보였던 음식들이 거의 없어져 갈 쯤 자리에서 일어난 우파나히는 작은 찻주전자에 물을 넣고 불 위에 올린 뒤 찻잎과 과일 말린 것을 조금 넣었다. 물이 끓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기다린 그는 식사를 마친 소녀의 앞에 찻잔을 놓고 차를 따른 뒤 꿀을 조금 섞었다.

자기 앞에도 찻잔을 놓고 차를 따라 넣었지만 꿀을 섞진 않았다. 우파나히가 이라베이에게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자 소녀는 자기 찻잔을 이라베이에게 밀어 넣는 것으로 응했다.

우파나히는 자기 찻잔에 꿀을 섞은 뒤 소녀 앞에 놓았고 새 찻잔을 꺼내 차를 따라 넣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소녀가 나직이 이르듯 입을 열었다.


“내일은 내가 요리 할게요.”

“맛없다.”

“빈말이라도 맛있다고 해주면 안 되나요?”

“맛없다.”

“진짜 못됐어······.”


맛없다. 라는 말만 반복하는 우파나히를 향해 소녀는 무어라 계속 말을 걸었고 우파나히는 거의 듣지 않은 채 찻잔을 포함한 빈 그릇들을 치웠다.

이라베이는 거의 마시지 않은 차를 몰래 버렸고 우파나히가 가져온 그릇을 씻었다. 소녀는 둘 몰래 남은 꿀을 전부 찻주전자에 부은 다음 한 잔 더 따른 뒤 우파나히 앞에 놓았다.


“안 마신다.”

“제가 주는 건 데도요?”


양팔을 식탁 위에 올린 채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하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권유를 뿌리 칠 수 없었던 것일까. 우파나히는 마지못해 찻잔을 입에 대었다.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편지 왔습니다. 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한 모금이라도 마셨을 터였다.

설거지 하고 있는 이라베이를 대신해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난 우파나히는 원치 않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는데 “안녕하세요?” 라는 말부터 하는 예의바른 불청객이었다.


“우파나히 씨네요. 오랜만입니다. 음······그러니까······”


문 밖에선 땅딸막한 체구의 집배원이 정복을 내세우며 문 앞에 서 있었다. 한쪽 어깨엔 큰 우편가방을 매고 있었고 그 반대 쪽 손에는 우편가방에서 꺼낸 편지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우파나히의 험상궂은 얼굴을 마주하고도 지지 않은 그는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눈으로 그와 대면한 뒤 정복 주머니에 넣어뒀던 수첩을 한번 훑어보곤 다시 그의 얼굴로 시선을 가져가며 말했다.


“안주인님 계시나요? 편지가 와서요.”


“그분 앞으로 직접 배달하라고 해서요.” 라는 말은 우파나히가 아무런 대꾸 없이 편지를 달라는 손짓을 한 뒤에야 덧붙였다.


“안에 있다.”

“불러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들어가도 되나요?”

“기다려라.”

“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마지막이라 서요.”


우파나히의 말에서 집안에 들이기 싫다. 라는 감정이 조용히 스며 나왔다. 항상 그렇다는 듯 집배원은 잠시 기다리기로 했고 우파나히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소녀에게 딱딱한 설명으로 뜻하지 않은 손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래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항상 고생하시는데 차라도 한잔 드려야죠.”

우파나히는 소녀의 결정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문을 열어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실례하겠습니다.” 라는 말로 집안에 발을 들인 집배원은 모자를 벗어 매고 다니던 우편 가방에 쑤셔 넣은 뒤 신발을 벗기 전 옷을 살짝 털어냈다.

소녀가 반기며 그를 자리로 안내했고 설거지를 마친 이라베이가 잔을 가져와 차를 따라주었다.


“어이쿠······뭘 이렇게 까지야······잘 마시겠습니다.”


후후 불어가며 마신 따뜻한 차가 뱃속으로 들어가자 긴장이 풀린 것일까. 집배원은 편지 꾸러미와 수신인 서명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허리를 세운 채 늘어져버렸다.


“매번 감사드려요."

“아뇨. 일인데요 뭘.”


자기가 한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늘어져 있던 집배원은 곧 편지 꾸러미를 풀어 그녀의 앞에 쭉 나열했다. 우표가 덕지덕지 붙은 두꺼운 것이 몇 장 있었고 그 사이에 세금 고지서와 그림이 그려진 엽서가 몇 장, 집배원이 그 중 하나를 집어 그녀의 앞으로 조금 더 내밀었다.


“이것 하나만 직접 배송이라 하더군요. 사인 좀 해주시겠습니까?”


집배원이 내민 수신인 서명장에 조금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사인을 한 그녀는 단단히 봉해진 편지를 뜯어 읽어 내려갔다. 그 사이 집배원은 남아 있던 차를 다 마셔버리곤 “달달해서 좋네요. 꿀이라도 넣은 건가요?” 라고 한 뒤 모두에게 가벼운 인사를 한 뒤 자기 짐을 챙겨 사라졌다.


작가의말

읽어주시는 분들께는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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