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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고 구르면 어느새 옷자락이 걸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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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말이
작품등록일 :
2015.05.07 15:43
최근연재일 :
2015.05.0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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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0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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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빨간 마스크(7)

DUMMY

살짝 걷어 놓았던 커튼 사이로 유리창 너머에 흐르는 물방울이 보였다. 아침이 되었지만 비는 그치지 않고 오히려 거세졌다. 축축한 공기를 호흡으로 체감하며 재준은 자신의 침대에서 가지런히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잤던 것일까. 겨우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사이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어느 날보다도 상쾌한 기분을 느끼는 재준이었다.

어둠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온몸을 짓누르던 무게가 없었다. 입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걸렸다. 날개를 얻어 하늘을 난다 해도 이만큼의 해방감은 줄 수 없을 듯했다. 그 추악하고 더러웠던 환상을 드디어 분리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마치 새로 태어난 것만 같았다.

이제 안심하고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리면 되었다.

우산을 쓰고 사방으로 물을 튀기는 경쾌한 발걸음, 오랜만에 혼자 걷는 등굣길이었지만 기분만은 최상이었다. 얇은 천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소리가 듣기 좋았다. 평소에는 잘 부르지도 않던 노래가 콧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아아, 이 도시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었구나. 지금까지 알지 못했다는 게 억울해.

알고 있던 모든 미사여구가 내면과 외면에서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둠이 없는 애굼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더 이상 실망스럽지 않은 풍경과 일상이었다.

최근 재준의 인지도는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어제까지만 해도 재준은 그 사실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이 사라지고 난 오늘은 달랐다. 기쁘다고 느꼈다. 단지 이유가 사라져 남아버린 결과일 뿐이라고 일부러 단정 지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것이 유별나게 밝은 표정으로 얼굴에 덧칠되었다. 댄비는 재준의 갑작스런 변화에 잠시 혼란스러워했지만 곧 걱정을 덜었다는 듯 마주 웃어왔다.

어제 그렇게 가버리니까 괜히 신경 쓰였잖아. 요즘 너 계속 기분 안 좋아보였던 건 알지?

미안, 좀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 근데 지금은 괜찮아.

안 그래도 괜찮은 것처럼 보여. 아주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 광채가. 봐라, 웃으니까 이렇게 잘 생겼잖아.

거울 치워. 아침에 실컷 보고 감탄했으니까.

어쭈? 이젠 익살까지 늘었네?

댄비는 따로 깊은 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진정으로 안심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느껴진다고 재준은 생각했다. 앤샤와는 화해를 했냐는 댄비의 물음에 재준은 누군가와 닮은 환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댄비의 거울을 흘끔 쳐다보며 자신의 표정이 부자연스럽지는 않은지 잠깐 확인했을 뿐이었다.

너, 진짜 걔한테 잘해줘야 해. 내가 보기엔 그런 여자애가 없다. 어저께 너 가고 나서 진짜 걱정 많이 하더라.

응, 알고 있어.

오늘 아침에 혼자 왔지?

그렇지.

학교 끝나고 앤샤네 집에 한 번 가봐. 오늘 결석했다더라. 너 때문에 맘 고생해서 분명 병났을 거다.

같이 갈래?

됐어! 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놈으로 보이냐! 두고 봐! 나도 여자 친구 만들 테니까!

하하하!

오후가 되면서 비가 조금씩 그치는 광경을 재준은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그는 앤샤의 집에 찾아가지 않을 것이었다.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리고 앤샤도 마찬가지로 재준과 함께 걸을 일이 없을 것이다. 지난밤 앤샤의 집에 식칼을 들고 찾아간 재준이 모두 그렇게 만들었다.

잊으면 모두 끝이다. 친근한 웃음으로 마주쳐오던 시선도, 나란히 걸으면 스치곤 했던 서로의 옷자락도, 뜨거운 이마를 적시던 서늘한 물수건도, 거리가 멀어도 알아듣기 쉬웠던 인사도, 한 번 먹어보라며 얹어주던 도시락 반찬도, 자신의 집이라며 열심히 손으로 가리키던 아담한 단독주택도, 좁지만 걷는 감촉이 좋았던 정원도, 빗물이 흘러 미끈거렸던 창문의 감촉도, 창틀을 짚고 넘어 방으로 들어갔을 때 훅 풍겨오던 향기도, 당혹과 기대감으로 예쁘게 기울인 고개, 다가가면 물러서는 서로의 걸음, 침대 위로 무너뜨린 가녀린 무게중심, 감은 눈과 약간 벌어진 입술, 등 뒤에서 서서히 드러내어 보여준 날붙이, 경련, 빨간 마스크.

모두 기분 좋게 잊기로 했다. 내일 부모님이 오실 것이다.

기다림이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지는 않았다. 몸도 마음도 상쾌해진 지금엔 그다지 절실한 기분이 아닌지도 몰랐다. 방과 후는 다소 빠르게 찾아왔을 수도 있다. 그만큼 즐거운 하루였으니 말이다. 정말로 재미있었다고, 평생 잊지 못할 날이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비는 소강상태였지만 구름은 걷히지 않았다. 다소 강한 바람은 어쩐지 조용히 불고 있었다. 하교시간이 되고 재준은 친구들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마치 성격이 바뀌어 버린 것처럼 느껴질 만큼 재준의 분위기는 갑자기 밝아졌다. 놀랍게도 그것을 주위에서는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자연스러운 위화감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걸음은 아침과 마찬가지로 경쾌했다. 그리고 조금 느긋했다. 그것은 예감에서 비롯된 회피와 맥을 같이 한다 해도 좋았다. 재준은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날씨가 맑았으면 좋았을 걸.

흐린 풍경이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그만큼 눈에 담고 기억에 새길만한 가치가 있었다. 평소처럼 홀로 식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커튼을 치고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렸다. 천장에 붙여둔 야광스티커가 그날따라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잠이 부족했던 참이었다. 재준의 호흡이 가늘고 편해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재준은 어릴 적 천장에 야광스티커를 붙이던 때의 꿈을 꾸었다. 아마도 어떤 동화책에 들어있는 사은품이었던 것 같다. 작고 통통한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아이의 어두운 세상에는 별자리가 태어나고 있었다. 아름답고 평화롭던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준 기억이 있었다.

위풍당당 걷는 왕자, 그 옆에 함께 있는 곰돌이 종복, 장미넝쿨로 둘러싸인 커다란 성, 그 안에 조용히 잠들어있는 공주, 엄지만한 요정들이 날아다니고 바구니를 든 여신은 그녀와 닮은 꽃잎을 사뿐사뿐 뿌려주었다. 왕자의 입맞춤으로 공주는 깨어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다. 행복한 결말이었다.

넌 행복해?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범한 목소리가 물어왔다. 어린 재준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언가 돌이킬 수 없을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맞아, 행복한 이야기는 행복한 사람이 읽어야 행복한 결말로 이어질 수 있어. 너를 둘러싼 세상의 중심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니까 말이야.

비웃음을 참고 있는 것만 같은 투였다. 재준은 불안한 기분이 되어 천장을 만지던 손을 내렸다.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본 별자리가 이상했다. 조금씩 빛을 잃더니 이내 어둠에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다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아마도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 못할 것 같아.

어째서?

네 부모님이 조금 전에 죽었거든.

순식간에 세상을 이루던 모든 빛이 죽었다. 별처럼 반짝이던 배경이 황량한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시체가 되어 뒹구는 왕자, 그 옆에서 왕자의 다리를 뜯어 먹는 곰돌이, 성은 무너져 내렸고 잔해에 깔린 공주는 짓이겨졌다. 요정은 사라지고 짓밟혀 더러워진 꽃잎 위로 작은 날개만 남아 하늘하늘 떨어졌다. 여신은 마녀가 불러들인 추악한 악신에게 순결했던 몸을 유린당했다. 재준은 동화책을 던져버렸다.

그럴 리 없어!

애굼으로 돌아오던 기차가 선로를 이탈해 다리 밑으로 떨어졌지. 요란스럽게 폭발해버리는데 죽지 않고 배기겠어? 아마 시체도 찾지 못할 거야.

네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야!

글쎄, 얼마 전까지는 그랬는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런 나를 분명한 형태로 만들어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너야.

거짓말, 거짓말······. 어떻게 네가 여길 다시 온 거야.

널 다시 만나러 왔어. 이제 눈을 떠 바라봐.

재준은 진저리를 치며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온통 땀에 젖어 축축했다. 어느새 다시 비가 내리는 모양이었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어느 때보다 요란스러웠다. 강한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탓인지 마치 누군가 커다란 채찍을 휘두르는 것만 같았다.

잠시 몸을 움츠리고 조용히 꿈에 대해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일, 단순히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다음 날을 기다리는 조바심이 이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시간이 늘어지는지도 몰랐다.

날씨는 굉장히 사나웠다. 폭우와 강풍을 동반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번개가 떨어졌다. 한 번 번쩍이는 불빛에 숨이 막혔고, 두 번 번쩍이는 불빛에 입술을 깨물었다. 세 번째로 떨어진 번개는 상당히 가까웠던 모양이었다. 1초도 지나지 않아 고막이 터져나갈 듯 커다란 천둥이 쏟아져 들어왔다. 재준은 정막에 가까운 틈새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사방이 환해질 때마다 커튼에 비치는 그림자가 있었다. 창밖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다시 한 번 희생.

왜?

어둠을 박제.

어떻게?

현실이라는 약품.

무엇을?

한 명을 골라.

누구를?

도대체 누구를 희생시켜야 하나.

너라면······. 앤샤, 너라면.

같이 가자.

이불을 완전히 걷어버리고 재준은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기다렸다. 이미 재준의 마음속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이었다. 거부감을 넘어 생겨난 애정인 것이다. 재준이 그렇게나 간단히 해오던 일이었다. 익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서로의 위치가 달라졌을 뿐.

곧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망설임. 다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망설임에 기인한 두려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한없는 기다림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기다리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재준은 천천히 커튼을 걷어 창문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갔다.

아······.

핏빛 마스크를 쓴 앤샤가 목을 뒤틀어 마주 다가왔다.


<중략>


작가의말

빨간 마스크는 여기서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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