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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반

어느 날 고양이가 되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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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반
작품등록일 :
2019.04.01 12:01
최근연재일 :
2019.08.23 12:30
연재수 :
9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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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28
추천수 :
1,587
글자수 :
504,170

작성
19.08.0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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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89화 - 늦여름 장마

DUMMY

나는 창문 너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다.

이래서야 오늘 출발하기는 글렀다.

문밖을 나서자마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테니.


“비가 언제쯤 그칠까?”


로니는 내 옆에 앉아 나와 마찬가지로 창문 밖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도 예언가가 아니라서 언제 그칠지 모르지.”

“으으. 심심해애~!”


로니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위층으로 잽싸게 올라갔다.

보나마나 온 방안을 헤집고 다닐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할 거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뒤를 따라가기보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는 것을 택했다.

비 오는 날은 유독 몸이 축 늘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고양이 모습이 아니건만, 어째선지 온 몸의 털이 푹 습기에 젖어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지도를 흘끔 쳐다보았다.


전날 밤, 나와 일라이는 헬리그 신성왕국으로 가는 최적의 루트를 찾느라 고심했다.

헬리그는 여느 왕국과 달리 그 지형이 특이했다.

흔히들 헬리그를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한 왕국이라 일컫는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곳은 대륙에서 떨어져나간, 독립적인 하나의 섬이었다.


즉, 헬리그는 대륙과 붙어있는 왕국이 아니다.

때문에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페를리로 이동해 유일하게 헬리그와 대륙을 연결하는 다리를 이용하거나, 혹은 항구에서 배를 타고 이동해야했다.

문제는 페를리와 헬리그 사이의 해협이 생각보다 유속이 빨라 배가 쉬이 뜨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막힘없이 헬리그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다리를 이용해야한다는 건데...


“그런데 페를리 지역엔 약탈자들이 많다고 들었어. 게다가 사막지대라 이동할 때 괜찮으려나.”


나는 일라이가 가리킨 부분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일라이는 붉게 부은 뺨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다쳤나?

하지만 내가 그것에 대해 묻기 전에, 일라이가 입을 열었다.


“나도 들었어. 듣자하니 그쪽도 왕권이 교체된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더구나.”

“...제국처럼 말이야?”

“제국과는 그 형태가 좀 다르긴 한데, 이번 왕이 왕위에 오를 때 여러모로 말이 많았나봐.”


일라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갇힌 사이 여러모로 세상이 변했더라고. 나도 지금 재상으로부터 전해듣는 게 다라 그쪽으로는 많은 도움을 줄 수 없겠어.”

“하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니까.”


이럴 때면 역시 텔레포트를 못 쓰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것만 가능했더라도 훨씬 수월한 여행이 됐을 텐데 말이다.


“일라이는 역시 우리랑 같이 갈 수 없는 거지?”


나는 내심 일라이가 우리와 함께 하길 바랐다.

그는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드래곤이니 그가 함께한다면 큰 위험 없이 무사히 헬리그에 도착할 수 있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재상이 성화라서 어쩔 수가 없네. 그리고 나도 이곳을 비울 수가 없는 게, 빈센트의 행보를 예의 주시해야하거든. 내년 초까지는 괜찮을거라고 예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측에 불과하다보니 더 앞당겨질 수도 있는 노릇이기도 하고.”

“그렇네...”

“그리고 로니를 또 혼자 둘 수도 없으니까...”


아마도 그의 진심은 후자에 담겨 있을 것이다.

이제 성인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그가 성인이 되기까지 최대한 무사히 보살피고 싶은 거겠지.


“또 길바닥에서 자야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아하하. 확실히 딱딱한 바닥 보다는 푹신한 침대가 좋긴 하지.”


일라이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거실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그러면 팔베개라도 해줄까.”

“시끄러워.”


나는 안고 있던 쿠션을 녀석에게 던졌다.

하지만 녀석은 제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쿠션을 가볍게 잡아냈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니까.


“오, 떠날 준비를 마친 거야?”


이런 내 기분을 알 리 없는 일라이가 친근하게 에드에게 말을 걸었다.


“얼추. 알리샤도 기운을 차렸으니까 슬슬 떠나야지.”

“가는 루트는 에디씨랑 이야기를 마친 상태니까 에디씨한테서 전해 들으면 될 거야.”


그럼 이만 나는 할 일이 있어서. 일라이는 에드의 어깨를 툭툭 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에드는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내게 다가왔다.


“뭐가 그렇게 또 마음에 안 들어서 뚱한 얼굴이야?”

“저 드래곤을 완벽하게 이긴 적이 없어서 좀 짜증나.”

“그전에 이긴 적은 있는 거야?”

“한 번 쓰러뜨린 적은 있어.”


내가 비꼬듯 물었는데, 에드는 당연하다는 듯 그렇다고 답했다.

뭐라고? 드래곤을 이겼다고?

아무리 드래곤이 인간을 죽일 수 없다고 하지만, 타고난 마법 종족을 이겼다고? 말도 안 돼.


“진짜야.”


내가 어처구니 없어하자, 에드는 쐐기를 박았다.


“일라이가 봐준 거 아니야?”

“얼굴에 상처 못 봤어?”

“엑.”


일라이의 한쪽 뺨이 얕게 부어있었지만 설마하니 그게 에드가 낸 상처 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내가 할 말을 잃고 녀석을 쳐다보자, 에드는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기 시작했다.


“뭐, 그래도 적당히 봐준 건 없잖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더 짜증나는 것도 있고.”


아 예. 나는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인간이면서 드래곤에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존재라니.

눈 앞에 있는 녀석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 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일라이랑 헬리그까지 가는 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는데-”


나는 화제를 돌려 헬리그까지 가는 루트를 그에게 설명했다.

에드는 묵묵히 그것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출발할까?”

“그러는 게 좋겠지. 한 시라도 빨리 가는 게 좋을테니까.”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었건만, 밤사이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던지라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내리는 빗줄기를 보고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결국 우리는 출발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비가 멈추기까지 좀 더 일라이의 저택에서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현재, 에드는 하루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굳는다는 이유로 저택의 지하에 마련된 연무실로 가버렸고, 알리샤 역시 마력 체크를 이유로 에드와 같이 연무실에 머무는 상태였다.


반면 그 두 사람과 달리 마땅히 연마해야할 기술도 없는 나는 멍하니 거실 소파에 누워 빗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우르릉-


번개가 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는 그에 맞추어 눈을 감았다.

곧이어 다시 한 번 천둥소리가 거실 안을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떠드는 것처럼 들렸다.


지지직 거리는 텔레비전 소리. 텔레비전을 둘러싸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아비규환인 텔레비전 속의 사람들.


삐뽀삐뽀-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렸고, 소방대원들은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깔린 사람들을 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멍청하게 그 모습을 생중계하고 있는 뉴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늘, 저기에 간다고 하지 않았었나?”


어제 수업이 끝나고 하교 할 때, 짝꿍이 신난 얼굴로 내게 말했었다.

내일은 엄마 아빠랑 같이 놀이동산에 가기로 했어!

그거 좋겠네. 나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너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그러게.”

“같이 갈래? 우리 엄마 아빠도 좋다고 할 걸?”

“아니 됐어.”


그럴 돈 없어. 괜찮아. 아빠가 내주면 되지! 됐다니까. 나는 손사레를 쳤다.

짝꿍은 살짝 아쉬운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그리고 그런 곳에 굳이 가고 싶지도 않았다. 행복한 가족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처한 상황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올 뿐이었으니까.


짝꿍은 손을 흔들며 아파트 단지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아이의 뒤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더 늦기 전에 얼른 돌아가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유명 놀이동산의 어트랙션이 붕괴했다는 헤드라인이 스쳐지나갔다.


손에 들고 있던 막대 아이스크림이 더위에 녹아 손으로 흘러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아깝다고 허겁지겁 먹었을 텐데, 그 날 만큼은 아이스크림이 녹는지도 몰랐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 손은 이미 끈적끈적해질 대로 끈적끈적해진 상태였다.


다음 날, 나는 내 짝꿍이 더 이상 오지 않는 것을, 올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부모의 죽음과 달리, 이번 일은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내 뇌리에 각인되었다.


「괜찮아.」


그래도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괜찮았다. 정말로 괜찮았다.


“에디.”

“으응..?”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고양이라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잠은 여전히 많나보구나.”

“에드, 시끄러워.”


나는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비가 와서 그래.”

“비가 오면 어두워서 그런지 확실히 몸이 늘어지긴 하지.”


오늘도 열심히 움직인 네가 할 말이냐. 기만자 같으니.

나는 에드를 흘겨보았지만 에드는 눈깜짝하나 하지 않았다.


나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에드가 헝클어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드래곤의 말에 따르면, 보통 이 기간에 내리는 비는 금방 그칠 거래. 그러니까 아마 모레 안으로는 출발 할 수 있을 거야.”


또 다시 지긋지긋한 노숙의 시작이라니.

어쩌다 내 인생은 이지경이 됐을까.


“헬리그 까지는 얼마나 걸리려나. 제국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해도 오래 걸렸는데.”

“사막을 무사히 건너기만 하면 금방 도착할 수 있겠지.”


부디 이번만큼은 베른에 올 때처럼 이상한 놈들을 만나지 않기만을 바라는데.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창밖의 비바람은 아까보다 훨씬 누그러진 상태였다.

일라이의 말마따나 이 기세라면 모레엔 출발이 가능할 것 같았다.


위층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나마나 로니가 또 사고를 친 게 분명했다. 이번에는 뭘 또 부순 거야. 나는 속으로 집사에게 애도를 보냈다.


“식사 준비가 되었는데 지금 드시겠습니까?”


집사가 거실에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물었다. 나와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런 호화로운 음식을 먹을 기회도 당분간 없을테니까 이참에 잔뜩 먹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앞서 나가는 에드의 뒤를 따랐다.


며칠 뒤, 우리는 일라이의 저택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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