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시그반

어느 날 고양이가 되었을 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시그반
작품등록일 :
2019.04.01 12:01
최근연재일 :
2019.08.23 12:30
연재수 :
97 회
조회수 :
47,932
추천수 :
1,587
글자수 :
504,170

작성
19.07.19 12:30
조회
161
추천
5
글자
11쪽

86화 - 연기하는 고양이 (1)

DUMMY

우리는 극장 뒤편에 도착했다.

극장 안은 무대 점검과 리허설로 정신이 없었다.

대기실 한편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고, 우리는 그곳에 앉았다.


“로완. 어디있다 온 거야?”

“아하하. 아직 시간은 넉넉하잖아?”

“말이나 못하면.”


여성은 남자를 흘겨보고는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손뼉을 치며 우리에게 말했다.


“아까 시장에서도 말했었지만, 우리쪽 애가 갑자기 오늘 아침에 탈이 나는 바람에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었거든. 그래서 급하게 다른 대체 인력을 찾고 있었는데, 때마침 너희들이 보였어.”


남자가 싱긋 웃었다.


“물론 처음에는 너희들이 나쁜 사람에게 붙잡혀 있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구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건데... 가까이서 보니 대역으로 쓰기 좋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더라고.”

“그래서 저희에게 무대 위에 올라가달라고요? 오늘 공연무대에요?”

“바로 그거지.”


그저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을 무대에 올리겠다니.

지나치게 무모한 발상이 아닌가.

아무리 연극 쪽에 무지한 나라도 지금의 제안이 말도 안 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희는 연극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요.”


기껏해야 초등학교 시절 학예회에서 동화를 기반으로 연극을 했던 게 다였다.

그것마저도 나는 주역이 아니라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급의 역할을 맡았던지라 더더욱 의미가 없었다.


“헉. 뭐야. 나는 좋아. 재밌을 거 같아!”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로니도 문제였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지금도 사방으로 통통 튀는 녀석이 무대에서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하하. 나도 알아. 이건 굉장히 급작스러운 제안이라는 것쯤은.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급하단 소리기도 하지.”

“그래도 좀 많이 부담스러운데요.”

“걱정하지 마. 대사랑 출연은 많지 않으니까.”


으음. 그래도 영 마음이 불편하단 말이지.

내가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자, 로니가 내 팔을 흔들었다.


“하자, 하자! 언제 이런 걸 해보겠어?”

“로니...너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볼 생각은 없는거야?”

“에이. 저 사람이 걱정하지 말랬잖아.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닌 걸? 그리고 저 사람이 와달라고 한 거니까 괜찮아!”

“오, 친구, 말 한 번 잘하는데?”

“히히. 그치?”


로니가 뿌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로니의 말이 맞았다.

따지고 보면 먼저 제안을 한 건 저쪽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조금 못하더라도 책임은 저 남자가 지게 될 것이다.


나는 로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바깥세상을 더 오랫동안 보아오고, 살아온 건 나일텐데, 로니는 간혹 허를 찌르는 발언을 하곤 했다.

그래, 가끔은 로니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와. 그러면 여기서 계속 공연했던 거야?”

“그렇지. 내가 극단에 들어온 지도 어엿 10년이 넘었으니까.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 지 몰라.”

“헉. 10년이라니. 얼마나 고생했어?”

“밑바닥에서 출발했으니까. 나는 그다지 가진 게 없는 사람이거든.”


어느 새 로니는 남자와 친해져 수다를 떨고 있었다.

친화력 하나는 어마무시한 녀석이었다.


“그러면 저희가 맡는 역할이 무엇인가요?”

“오, 하기로 결정한 거야?”

“네. 어차피 단역이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요.”

“좋아. 그러면 잠시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려야 하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돌아오면 너희들이 맡게 될 역에 대해서도 빠르게 알려줄게. 시간은...흠. 충분히 남아있고... 대사는 몇 줄만 외우면 되니까 크게 힘들지 않을 거야.”


남자는 대기실 문을 열고 나갔다.

하지만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 서로 통성명도 안 했구나. 내 이름은 로완 나우만 이야. 너희 이름은 뭐야?”

“에디.”

“로니스야!”

“좋아. 에디, 로니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다시 문이 덜컹하고 닫혔다.

로니는 테이블 위로 몸을 쭉 뻗고 다리를 흔들었다.

어지간히 앞으로 할 연극에 기대 중인 듯싶었다.


반면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어색한 시선처리를 하고 있을 내 모습을 떠올리니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괜히 수락했나?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어왔지만, 이미 일은 결정났고, 우리는 넓은 관객석을 마주하고 무대에 올라야 했다.


‘연극인가...’


딱 한 번 해보았던 학예회의 연극은 내게 있어 그다지 좋은 추억은 아니었다.

맡은 역할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역할을 맡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할 사람이 없어서 떠밀리듯 맡은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억지로 오른 무대 위에서, 나는 수많은 카메라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엔 제 아이들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향한 시선은 없었다.


무대가 끝나고, 학예회가 끝나고 제 부모에게 달려나가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분명 괜찮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줄곧 도피했던 사실이 다시금 눈앞에 들이밀어지는 건 생각보다 속이 쓰린 일이었다.

그러니 아직 어렸던 내가 버티기엔 조금 벅찬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랑은 다르니까.”

“무슨 소리야?”

“아무 것도 아니야.”


과거에 매몰되지 말자. 그렇게 결심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바꿀 수도, 지울 수도 없다.

하지만 미래는 현재를 통해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에 집중하자.


“미안, 좀 늦었지?”


로완이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났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요. 그래서 저희는 무얼 하면 되는 거죠?”

“자, 너희들이 나올 구간은 바로 여기야.”


로완이 우리에게 대본을 건넸다.

우리는 차근차근 그것을 살폈다.


“양이 어마어마하네요.”

“그야 그렇지? 두 시간 짜리 공연이니까. 그리고 너희는 뒤에서 여주인공을 꾸며주는 역할이니까 마음 편하게 가져.”


줄거리는 전형적인 로맨스물이었다.

가문의 반대를 이겨내고 사랑을 쟁취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였다.

이곳이나 저곳이나 사랑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키기 좋은 건 마찬가지인가보다.


“그럼 저희는 여주인공의 시종이라는 건가요?”

“그렇지. 그래서 그녀의 곁에서 말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이고, 대본에 있는 짤막한 대사들을 말하면 돼.”


흠. 그 정도야 뭐 못할 것도 없었다.

괜히 너무 긴장했나. 나는 머쓱한 얼굴로 대본을 마저 살폈다.


“...어라?”


나는 눈을 비비고 대본을 다시 살폈다.


《(화가 난 레타가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시종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종종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른다)》


치맛자락?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이쪽 묘사를 살펴보면 치맛자락을 붙잡는다 라고 적혀있는데...”

“아하. 그게, 여주인공의 시종이잖아. 그러니까 시종 역시 여자 아이거든.”

“...혹시 성별을 착각하신 건 아니시길 바라는데요.”

“알아. 너희가 남자 아이라는 것 정도는.”

“그걸 아는데 저희를 데리고 온 거라고요?”

“급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너희 나잇대 아이들은 조금만 잘 꾸며주면 성별 정도는 감추기 쉬우니까.”


이 인간 말하는 것 좀 봐라.

나는 황당하기 그지없어 대본과 로완을 번갈아보았다.


“그럼 우리 치마 입는거야?”

“뭐 그렇지? 시종 복장이니까 불편하진 않을거야.”


이젠 하다하다 여장이냐.

나는 대본을 우그러뜨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반면 로니는 별다른 생각 없이 신나하고 있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 해봐! 이따 집에 가면 일라이한테 말해야지!”

“뭐? 일라이한테 말한다고?”

“응! 왜? 재밌잖아.”


아니. 나는 전혀 재밌지 않은데.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로니를 바라보았다.

일단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에드와 알리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길 바랐다.


“대사는 다 봤지? 너희가 할 일은 그게 다야. 외우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테니까, 지금 의상팀을 불러올게. 나도 지금 무대 준비에 들어가야해서.”

“하아...알겠어요.”


로완은 잘 해보자며 손을 흔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도망치고 싶다. 진지하게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에디. 안색이 안 좋은데?”

“응. 안 좋아.”

“헉. 어떡해. 좀 있다가 우리 올라가는데 잘 해야지!”

“...넌 태평해서 좋겠다.”

“응?”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의자에 축 늘어졌다.

에드가 일라이와 함께 외출한 게 이 순간만큼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리샤는 둘째 치고 녀석한테 들키면 나는 진심으로 온 몸이 터지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 사람이 오나봐!”


멀리서 이곳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전에 로니. 한 가지만 약속하자. 절대로 무대 위에서 날뛰면 안 돼. 알았지?”

“에이. 날 뭐로 보는 거야? 여기 적힌 것대로 그대로 할거라고!”


로니가 걱정말라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아 몇 번이고 그에게 강조했다.


“특히 마법 같은 거 쓰면 안 돼!”

“걱정말라니까? 이래봬도 나 똑똑해!”


후우. 나지막하게 한숨을 쉰 나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윽고 문이 벌컥 열렸다.


“로완이 말한 아이들이 너희구나. 안녕.”


의상을 갖고 온 여성이 우리에게 인사했다.

우리 역시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답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좋아. 바쁘니까 용건만 말할게. 지금 갖고 온 의상들로 갈아입고, 대기하고 있으렴. 다른 배우들 메이크업이 아직 안 끝나서 그쪽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거든.”


여성이 우리에게 의상을 건네주었다.

나는 찝찝한 얼굴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시종 복장이라 확실히 칙칙하고 밋밋했다.

치맛단은 발목부근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그러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종종걸음친다는 말이 있었군.


“가발도 준비해야겠고...흐음. 얼굴들이 곱상하게 생겼으니까 과하게 할 필요는 없겠네.”


여성은 우리의 얼굴을 보고 상태를 체크하더니 문밖으로 급하게 나갔다.


나는 의상을 노려보았다.

괜찮다. 어차피 두 시간만 입고 벗을거잖아.

무엇보다 날 알아보는 사람도 없다고?

그렇게 속으로 되뇌고 있을 무렵, 로니는 일찌감치 옷을 들고 갈아입으러 들어가버렸다.


“오오. 나 이거 입는 거 모르겠어!”


커튼 너머로 로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처음 입어보는 옷이니 입는 방법을 모르겠지.

무엇보다 뒤에서 잠그는 형태라 혼자서 입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였다.


“후우. 기다려봐.”


하이고. 내 팔자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탈의실로 들어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어느 날 고양이가 되었을 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휴재 공지> +2 19.07.21 343 0 -
97 97화 - 에단과 패티 19.08.23 183 5 11쪽
96 96화 - 쌍둥이 (7) 19.08.21 103 4 11쪽
95 95화 - 쌍둥이 (6) 19.08.20 92 5 12쪽
94 94화 - 쌍둥이 (5) +1 19.08.16 114 6 11쪽
93 93화 - 쌍둥이 (4) 19.08.14 93 6 11쪽
92 92화 - 쌍둥이 (3) 19.08.13 100 5 12쪽
91 91화 - 쌍둥이 (2) +1 19.08.11 100 5 12쪽
90 90화 - 쌍둥이 (1) 19.08.10 104 5 11쪽
89 89화 - 늦여름 장마 +1 19.08.06 127 6 11쪽
88 88화 - 연기하는 고양이 (3) 19.07.21 137 3 12쪽
87 87화 - 연기하는 고양이 (2) 19.07.20 126 4 12쪽
» 86화 - 연기하는 고양이 (1) +1 19.07.19 162 5 11쪽
85 85화 - 잠깐의 여유 (2) 19.07.17 130 4 11쪽
84 84화 - 잠깐의 여유 (1) 19.07.16 129 4 11쪽
83 83화 - 생일 19.07.14 137 5 12쪽
82 82화 - 문과 열쇠 (2) +1 19.07.13 173 8 12쪽
81 81화 - 문과 열쇠 (1) 19.07.12 151 6 11쪽
80 80화 - 과거의 기억 19.07.10 161 6 11쪽
79 79화 - 준비작업 19.07.09 186 9 12쪽
78 78화 - 소원 (2) +1 19.07.07 197 6 13쪽
77 77화 - 소원 (1) 19.07.06 158 7 11쪽
76 76화 - 봉인 해제 +1 19.07.05 229 7 11쪽
75 75화 - 슈테른 (2) 19.07.03 157 8 11쪽
74 74화 - 슈테른 (1) 19.07.02 159 7 12쪽
73 73화 - 로니스 19.06.30 163 8 11쪽
72 72화 - 깊은 숲 속 아래 (3) 19.06.29 161 5 11쪽
71 71화 - 깊은 숲 속 아래 (2) 19.06.28 170 7 11쪽
70 70화 - 깊은 숲 속 아래 19.06.26 164 7 11쪽
69 69화 - 첫 의뢰 +1 19.06.25 219 7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