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서금지의 활약
제60화 서금지의 활약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난 20년 동안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그이는 제 운명이 되어 버린걸요.”
그랬다. 운명이란 말 이외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헤어지기까지. 그리고 20년이 지나 다시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까지.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됩니까? 두 분이 결혼을 하실 생각이신지요? 두 분 사이에 따님까지 있으니 그게 자연스러울 걸로 생각은 됩니다만.”
“그러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지만, 그이의 뜻에 따르겠어요.”
서금지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가 찾으면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운명이라면, 운명에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는 거니까요. 만약 두 분이 결혼하신다면 이왕이면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금상첨화겠네요. 대통령의 결혼식, 말만 들어도 근사하지 않나요?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 혹시 현역 대통령이 결혼식을 한 사례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없지 않을까요? 대통령에 출마할 나이면 이미 결혼했을 테니까요. 더구나 이사금 후보님은 아직 미혼인 총각 아닙니까? 잘하면 우리 K국에서 세계 최초로 현역 대통령의 결혼식, 재혼식도 아니고 첫 결혼식이 거행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면 주례는 우리 국민이 주례가 되는 건가요?”
서금지의 얘기는 다 끝이 났는데도 동시 접속자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제 3백만 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댓글도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달리는 중이었다.
- ‘대통령의 결혼식’ 우리 손으로 만들어 봅시다
- 세계 최초 대통령의 결혼식, 완전 찬성!
- 이사금은 대통령으로, 서금지는 영부인으로
- 화동은 박사금 양, 아니 딸 이사금 양이 하면 될 듯. 구색이 착착 맞아가네요.
- 국민 주례로 누가 좋을지 즉석 투표를 실시합니다. 참여는 여기로.
- A국 대통령을 주례로 모시면 어떨지? 나이도 이사금 후보님보다 훨씬 많으니 크게 체면이 상하지 않으면서도 혈맹국 확인 차원에서도 도움이 될 듯.
- A국 대통령을 주례로 모시는데 찬성 한 표. 그러면 가히 세계적인 결혼식이 될 듯.
삽시간에 대통령의 결혼식이 온 나라의 화젯거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땅속으로 흐르는 암반 지하수처럼 표면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며 전달되었다.
‘우리 손으로 우리 대통령의 결혼식을 준비하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괜찮으냐? 미안하다. 너까지 고생하게 해서.”
이사금은 양두식의 팔꿈치에 빨간 약을 발라주면서 미안해했다. 삼보일배를 하느라 무릎과 팔꿈치가 까져 피가 맺혀 있었다.
“아녜요. 나이 든 외삼촌이 그러고 있는데 젊은 제가 멀뚱히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요.”
“나는 아직 총각이야. 나이도 그리 많은 것도 아니야. 국회에 가 봐라 내가 아직 젊은 축에 들어.”
“저보다는 늙었잖아요. 이리 주세요. 외삼촌 팔꿈치는 제가 발라 드릴게요.”
이번에는 이사금이 팔꿈치를 내밀고 양두식이 거기에 빨간약을 발랐다. 아재비와 조카가 주거니 받거니 서로 까진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있는데 대변인 송다설이 들어왔다.
“후보님, 그거 보셨어요?”
“뭘요?”
먼저 물어놓고는 대답 대신 송다설은 이사금의 책상으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너튜브로 들어가서 동영상을 클릭해서 이사금에게 보여주었다.
“뭔데요?”
이사금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먼눈으로 컴퓨터 화면을 보다가 갑자기 상체를 앞으로 숙여 얼굴을 모니터 가까이 바짝 가져갔다.
“서금지씨가 너튜브 개인 방송에 출연한 모양이에요. 생방송이었는데 동시 접속자수가 300만 명이 훨씬 넘었대요. 방송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벌써 조회수가 500만 명이나 돼요.”
송다설이 너튜브 동영상에 대해 설명했으나 이사금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서금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금지, 서금지구나.”
부지불식간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손을 내밀어 컴퓨터 모니터를 어루만졌다. 서금지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옛 모습 그대로일까?”
이사금이 보는 서금지는 20년 전의 모습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순전히 기억의 눈으로 보는 때문이었다. 기억이라는 프리즘은 사물을 실제가 아니라 보고 싶은 데로 보여주게 마련이었다.
“외삼촌, 단심이 이모가 말한 똥차가 저 여자예요?”
양두식이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하긴 그가 귀동냥으로 들은 서금지는 단심이 이모의 앞길을 막고 있는 똥차이면서 속에는 여우가 들어앉은 여자였다.
“똥차요?”
송다설이 먼저 놀라서 되물었다. 그때까지도 양두식은 자신이 뭘 잘못 말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단심이 이모가 어젯밤에 집에 와서 그러더라구요. 둘이 만났다던데요?”
“단심이가 그녀를 만났다고?”
이사금은 비로소 물었다. 그의 반응이 느린 게 아니라 상대가 심단심이기 때문이었다. 직설적이고 행동파인 그녀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게다가 늘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 그 정도는 용인할 수 있었다.
“예. 이모가 단단히 혼꾸멍을 냈다고 하더라구요. 외삼촌을 사랑하면 울지만 말고 뭐라도 행동으로 보이라구요. 제 생각에는 그래서 저렇게 너튜브에 출연한 거 같아요.”
이사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가 아는 서금지는 심단심과는 매우 대조적인 여자였다. 아마 심단심이었다면 20년 전 그때 바로 결판이 났을 터였다.
“그래도 앞으로는 후보님 앞에서 똥차라고 하지 말아요. 저렇게 아름다고 우아한 똥차가 어디에 있다고 그러세요?”
“험험. 송 대변인”
이사금은 듣고 있기가 거북해서 헛기침을 했다. 본인의 말이 아니니 뭐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그 봐요. 자꾸 똥차라고 하니 후보님이 기분이 안 좋으시잖아요.”
송다설은 이사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말이 이상함을 깨닫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후보님, 저 여기 봐요. 다 까져서 피도 났어요. 우리 신랑이 알면 펄펄 뛸 거예요.”
그녀는 바지를 걷어 올려 무릎 상처를 보여주더니 팔도 걷어 빨간 약을 잔뜩 바른 팔꿈치도 내보였다.
“그러니까 다음에 삼보일배를 할 때에는 아데를 끼든지 해야겠어요.”
양두식의 말에 송다설은 절대 안 된다며 팔을 내저었다.
“다음번은 없어요. 본래 삼보일배 같은 건 자주 하면 효험이 떨어지거든요. 아, 그건 그렇고 후보님, 서금지씨··· 아직은 이렇게 불러도 되죠? 너튜브 출연은 신의 한 수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댓글을 보면 대단히 우호적인 내용이 압도적이에요.”
“다행이에요. 그래도 얼굴이 저렇게 알려지면 반대쪽에서 어떤 험한 말을 할지도 모르는데, 마음 여린 그녀가 견뎌낼지 모르겠어요.”
이사금은 몹시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송다설의 입이 닷 발이나 튀어나왔다.
“후보님, 후보님은 제 무릎과 팔꿈치가 다 까진 건 요만큼도 걱정을 안 하시더니 서금지씨에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은 염려가 되시나 봐요. 너무 섭해요 저.”
“송 대변인님은 남편이 있잖아요. 본래 임자 있는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어요. 외삼촌이라고 다르겠어요?”
양두식이 한마디했다. 가까이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농담도 할 만큼 친해졌다.
“신랑이 있는 게 무슨 죄에요? 이렇게 서러울 줄 알았다면 식은 안 올리고 동거만 했을 거예요.”
“그게 그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천지 차이죠. 동거는 아무리 오래 해도 여전히 엄연한 처녀거든요. 그렇죠 후보님?”
이사금의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무덤처럼 침묵을 강요받았던 후보 사무실에 모처럼 사람 사는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 * *
딸 이사금은 신촌 사거리로 나왔다.
준비해온 손팻말을 들고 행인이 가장 많은 곳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오전 내내 공덕동 사거리에서 1인 선거 운동을 하다가 점심을 먹고는 여기로 옮겨왔다.
어젯밤에는 자기 전에 엄마가 출연한 너튜브 방송을 보고 많이 울었다. 그동안 가슴 졸이며 살았을 엄마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엄마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아빠를 위해서도 뭐라도 해야 했다.
없던 딸이 생겼는데 경사가 생기는 건 고사하고 대선 패배의 빌미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사금 아빠, 사랑해요.”
그녀는 행인들을 향해 허리를 반으로 접어 인사를 했다. 부끄럽거나 창피한 것은 없었다. 딸이 아빠를 사랑하는 게 흉이 될 수는 없었다.
“이사금 아빠를 도와주세요.”
지나가던 젊은 남자 둘이 되돌아보며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오, 깔쌈한데. 키도 크고. 침대 삼아 올라갔으면 딱 좋겠는데.”
“너한테는 키가 너무 커서 같이 누우면 사이즈가 안 맞아.”
“지랄하네. 앉아서 하면 되지. 나는 대주기만 하면 여자 농구선수하고도 할 수 있어.”
약간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딸이라서가 아니라 그녀는 아빠의 생각에 동의했다. 어차피 아빠에게 표를 줄 사람들은 깨어있는 민주시민이었다. 꼴통들은 꼴통에게 표를 줄 터였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이사금 아빠, 사랑해요. 가짜는 가라.”
그녀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한 사람에게라도 더 진심을 전해야 했다.
“아이구, 이사금 후보 따님인가 보네?”
“맞아. 엄마하고 꼭 닮았네. 내가 너튜브에 나온 서금지 봤거든. 본래 내가 욕을 많이 했었는데, 보니 참 목이 메어 그동안 욕한 게 미안하더라고.”
중년 여인 둘이 몇 번이고 돌아보며 지나갔다. 인근 편의점에서 나오던 여자가 편의점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손에는 캔 커피가 들려져 있었다.
“자요. 추운데 따끈한 커피를 마시면 몸이 좀 풀릴 거야. 아빠 만나면 얘기해요. 오늘 한 표 벌었다고.”
딸 이사금은 낯 모르는 아주머니가 주는 캔 커피를 받았다. 아직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행인들의 시선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았다.
해질녘이 되니 점점 날이 싸늘해졌다. 3월에 접어들었어도 밤에는 여전히 추웠다. 추위를 날리려 제자리에서 동동걸음을 걷고 있는데 앞에서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사금아!”
학교 단짝 친구였다. 둘이 죽고 못 산다고 소문이 날만큼 가깝게 지냈다.
“수지야! 어쩐 일이니? 개학은 내일인데.”
“버스 타고 지나가다가 봤어. 그래서 되돌아왔어.”
“왜?”
“왜는? 이 기집애야. 너하고 나하고 단짝인데 당연히 같이 있어 주려고 왔지.”
“어머, 고마워. 어떡하니? 돈 있으면 커피 사 먹어.”
“좀 있으면 다른 친구들도 올 거야. 내가 개톡으로 다 연락했지. 그리고 너도 참 그렇다. 이런 일이 있으면 진작 연락하지.”
“아빠 바뀐 게 무슨 자랑이라고.”
“자랑이지. 똥차에서 최고급 신차로 바꾼 건데. 나 같으면 온 우주에 자랑하고 다니겠다. 아무튼 이제 걱정 하지마. 우리가 선거 운동 열심히 해줄게.”
똥차가 여기서도 나왔다. 그 쓰임새가 다양했다.
“야, 나 지금 고마워서 눈물이 나려고 그래.”
“공짜 아니야. 네 아빠가 당선되면 우리 학교 장학금 좀 많이 지원해 주라 그래.”
한결 힘이 났다. 혼자가 아니라는 게 이렇게 든든한 것인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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