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소굴

Inferior Struggle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연재수 :
226 회
조회수 :
587,252
추천수 :
10,871
글자수 :
1,513,856

작성
15.01.23 00:05
조회
682
추천
13
글자
24쪽

외전 1. Superior Progress : 모든 게 처음이었다.

DUMMY

“당신인가?”


소렌이 도군을 보자마자 꺼낸 말은 이토록 싸늘한 한마디였다. 소렌은 유독 냉정한 자신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적대감을 보이고 만 것일까? 그건 소렌이 아직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오리엔트 사람을 연상케 하는 외모에서부터, 자신과 비견된다는 실력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도군은 이질적인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이미 들었어. 너는 저쪽을 쓰도록 해.”


소렌은 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가장 먼 곳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흠칫 놀랐다. 블로펜이나 크레베스의 말을 이해했다고 여겼지만 소렌은 좀처럼 도군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것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보일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늘 혼자였으며 먼저 다가간 적도 없었던 소렌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일이었다.


“소렌이라 부르면 될까? 나는 도군이다.”


몇 번을 들어도 이상한 이름이다.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악수를 청해와서 엉겁결에 붙잡았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요란하게 의문이 밀려온다. 과연 이 소년은 자신과 비견될만한 사람일까? 블로펜이나 되는 이가 착각을 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소렌은 그녀가 고독했던 시간만큼이나 무거운 고독에 익숙해져 있었다.


폰테일의 영애를 앞에 두고 거침없이 악수를 청하는 것을 보고, 소렌은 혹시 도군의 성이 볼마르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평소 사교에 관심을 두지 않은 소렌이 부드럽게 그걸 물을 능력은 없었다.


“나는 폰테일 가문의 소렌. 너는 어느 가문이지?”


소렌은 그만 다짜고짜 도군의 출신을 물었다. 되는대로 떠오르는 바를 입에 담은 형편없는 시작이었다. 소렌은 얼굴이 붉어지지 않도록 자신이 한 말을 잊으려 애썼다. 그 노력도 무색하게, 도군의 대답은 소렌의 가슴을 쿡 찔러왔다.


“그런 거 없는데? 나는 고아원 출신이야.”


얼굴이 화끈거렸다. 소렌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해버린 지 깨달았다. 그는 귀족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과 비견되는 위치까지 왔다. 자신은 지금 그 속에 숨겨진 노력을 무시하고 또한 의심해버린 것이다.

차라리 말의 시작이라도 좋았다면 위안이 되었을 것을. 소렌은 평소 말재주를 경시하던 것이 그토록 후회된 적이 없었다.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사과를 건넨 순간 저 소년이 자신을 어찌 볼지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소렌은 그녀답지 않게 자신의 실수를 외면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잊으려는 양 다시 수련에 매진했다. 도군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더욱 힘껏 검을 휘둘렀다.

다행히도 도군은 별다른 내색 없이 그저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도군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소렌의 수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어떤 감탄도 질시도 없는 시선을 주며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칭찬과 질시가 양립하는 모순 속에서 살아온 소렌에게 그런 태도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저기 소렌.”


문득 도군이 소렌을 불렀다. 은연중에 도군을 의식하던 소렌은 놀라서 그만 검을 놓칠 뻔했지만, 몸에 밴 검술 덕에 소렌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검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창피함을 감추기란 요원한 일이라, 소렌은 그걸 감추려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지?”


또 냉랭한 반응이다. 차라리 거리감이 느껴졌다면 소렌은 친절을 가장할 자신이 있었다. 마치 입학 초기에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도군은 그들과는 달랐다. 그는 너무나도 소렌과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소렌도 진심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었기에 가장 익숙한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나도 저것 좀 써도 될까?”


“써. 내 것도 아니니까.”


만약 도군이 무례하다며 화를 냈다면 소렌은 담담하게 사과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렌은 그래서 더욱 냉랭한 태도를 일관했다. 어떻게든 사과를 하고 나면 다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도군은 별다를 것 없다는 듯 소렌을 대했다. 그런 태도가 더욱 소렌을 자극하고 있었다. 소렌은 처음으로 든 답답답한 느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 기묘한 관계는 그녀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그럴수록 소렌은 더욱 수련에 전념했다. 그리고 그것은 도군 역시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윙.


가느다란 수련용 검이 허공을 가르고 매서운 소리를 낸다. 소렌은 그 소리가 자신의 검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는 것에 놀라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천재적인 집중력을 흩어버린 그 소리의 근원지에는 도군이 서 있었다.

도군은 정말로 단순한 검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렌은 그 검술을 보고 정말로 놀라서 경악하고 말았다. 검술의 형태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라도 쉽게 따라할 만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또한, 그 궤적 역시 완전치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렇다. 그것은 그녀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목표로 한 무언가였다.


우습게도 도군의 검은 불완전하다. 하지만 동시에 완전했다. 아직 검술의 형태가 온전치도 않은데 도군은 그 이상의 것을 먼저 터득하고 있었다.

아무리 천재로 칭송받는 그녀라 해도 인세를 초월한 것까지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 소렌은 도군의 검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동시에 지금까지 쌓아온 소렌의 자신감도 조금씩 무너져갔다. 어떤 것이라도 단숨에 요체를 파악하는 힘. 소렌 자신도 자랑스러워하는 그 명민함도 지금은 빛을 잃고 소렌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소렌은 답을 알고 있을 사람을 찾아갔다. 바로 블로펜과 크레베스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교장실에 한데 모여 있었다. 소렌은 답답함을 토로하듯 도군의 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바로 도군이 오리엔트 출신의 혼혈로, 오래전부터 마나를 수련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소렌은 그것만으로는 도군의 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아직도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 이후에도 소렌은 계속해서 도군의 검을 응시했다. 늘 반복하던 수련도 팽개치고 도군의 검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 그 검을 지켜보는지 모를 정도로 소렌은 맹렬히 도군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 도군이 시선을 의식하고 자신은 고개를 돌린 적도 있었지만, 소렌은 도군의 검을 관찰하는 것을 그만두지 못했다.

어느새 소렌의 수련은 기묘하게 바뀌었다. 절반은 가문의 검술을 연마하고 나머지 반은 도군의 검을 지켜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다만 소렌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도군의 검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소렌은 도군의 검이 점점 안정적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보다 더욱 빠르게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대단히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도군의 검을 지켜보던 소렌은 마침내 도군이 결실을 보았음을 깨달았다. 도군의 검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몰아친다. 그것을 본 순간 소렌은 자신도 모르게 그 검에 대한 해법을 연구했다.


“도군.”


해법은 나왔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근원을 할 수 없는 도군의 힘에 과연 자신의 해법이 통할지 궁금했다. 그런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소렌은 처음으로 도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막상 이름을 부른 다음 소렌은 후회하고 말았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떠올라서 소렌은 그저 도군을 계속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일을 도저히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를 부른 이상 용건을 전해야 한다. 그래서 소렌은 평소 품고 있던 의문 하나를 끄집어냈다.


“그건 오리엔트의 검술인가?”


“뭐? 오리엔트의 검술인지는 어떻게 안 거지?”


“크레베스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께 당신이 오리엔트 출신이라는 걸 들었어. 그럼 네가 펼치는 건 오리엔트의 검술일 가능성이 크지.”


되는대로 꺼낸 이야기라 그런지 꽤 실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즐거웠다. 그런 한편 소렌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한 자신을 탓하고 또 탓했다. 그 말을 꺼낸 다음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떠올렸다. 그래서 소렌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정말로 그녀답지 못한 일이었다.

그 이후에도 소렌은 몇 번이나 도군에게 말을 걸었고, 도군 역시 그에 호응하듯 여러 가지를 물어왔다. 그러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소렌은 계속해서 겉도는 이야기를 할 뿐 정말로 해보고 싶은 것은 입에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소렌은 그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도군은 평소 소렌에게 다가오는 이들과 전혀 달랐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수련을 좋아했고 검 역시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평온한 때는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도군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아니야?”


“아니.”


“거짓말 같은데.”


소렌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소년은 이미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아차렸다고. 더 숨겨봐야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과연 그 말을 해도 될까? 그 말이 즐거운 나날을 송두리째 부수어버릴 것만 같아서 소렌은 좀처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더불어 자신의 변화가 두려웠다. 지금까지의 자신을 부정하는 듯한 변화의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럼 됐어. 그만두자.”


도군이 말했다. 그 말에 소렌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군이 더이상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는 말로 들렸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것은 아니었다. 또 혼자가 된다. 또 혼자서 검을 수련하고 도군의 검을 지켜보는 고독한 나날로 돌아가게 된다.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을 때는 몰랐지만 소렌은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다.


“도군. 혹시 대련 한번 해보지 않을래?”


막상 말을 내뱉은 다음 소렌은 그것이 오해였음을 깨달았다. 도군은 단지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하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커다란 한 걸음을 내디딘 기분이었다.


“방식은 어떻게 할 건데?”


하늘을 나는 기분이 이럴까? 소렌은 잔뜩 들떠서 서둘러 두 자루의 검을 챙겨왔다. 스톰브렁거를 처음 배울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소렌은 아버지 외의 존재에게 검을 겨누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만난 것도 축복인데 그 상대와 검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 묘한 쾌감까지 선사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낯선 이의 검에 그녀의 검을 부딪쳤을 때, 그녀는 기뻐서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다. 너무 들떠서 주절주절 설명까지 늘어놓으며 대련에 임했다.


“아직이야. 진짜는 지금부터니까.”


소렌은 아직 롤랜드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검을 저 소년에게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 검이지만 소렌은 도군을 믿고 거침없이 스톰브링거를 전력으로 펼쳐냈다. 그리고 소렌은 승리를 확신했다. 여유롭게 항복을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저 소년이 자신에게 더 큰 것을 보여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대체....”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소렌 자신의 공격이 전부 빗나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버지인 롤랜드도 피하기보다는 막기를 택한 공격들이 모조리 무산되고 있다. 그순간 도군의 검에 비쳐 보였던 것이 떠올랏다. 혼란스러웠다. 아니, 두려웠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으윽....”


소렌은 신음성을 내며 강력한 일격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피하기는커녕 받아낸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루라도 허투루 수련했다면 검을 놓칠뻔한 강렬한 검이다. 발악하듯 검을 휘둘러 보지만 도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온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다. 억울해서 눈물마저 흐르려 한다.


“꺄윽!‘


소렌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비명이 무척 상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롤랜드가 아닌 다른 이 앞에서 단 한 번도 그녀는 공녀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 역사가 깨졌다. 도군의 검이 소렌의 옆구리를 강타하고 소렌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소렌은 금방 현실을 직시했다. 자신은 졌다. 그걸 깨닫고 나니 소렌은 도저히 수련장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을 할 때까지가 고비였다. 도군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와서 소렌은 가슴이 텅 비어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답답햇다. 소렌은 자기도 모르게 하이스쿨을 빠져나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옆구리의 통증이 점점 심해진다. 소렌은 그 통증을 참아내며 도망치듯 맹렬히 달려나갔다.



“소렌!”


롤랜드는 느닷없이 소렌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만감이 교차해서 소렌의 이름을 외치며 그녀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소렌은 침대에 누워 보모의 도움을 받아 약을 바르고 있었다. 소렌의 매끄러운 하얀 허리에 흉한 멍이 들어 있는 것을 본, 그리고 소렌의 눈가에 선명히 난 눈물 자국을 본 롤랜드는 부서져라 문을 열고 소렌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윽박지르듯 말했다.


“누구냐?”


“아버지. 이건....”


“어떤 개자식이 또 네게 시비를 건 거냐? 림벨? 아니면 렌서스?”


“둘 다 아닙니다.”


소렌은 무표정하게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그러나 엘레나와 반평생을 함께한 롤랜드는 그녀를 닮은 소렌이 어떤 감정을 숨기는지 알 수 있었다.

설마 또 미들스쿨에서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까? 아니다. 더 심각하다. 미들스쿨에서 벌어진 일을 흐지부지 넘어가니 천둥벌거숭이들이 겁을 상실해서 무언가 일을 벌인 게 분명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롤랜드는 그만 이성을 잃고 흉험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건방진 놈들. 하이스쿨에서까지 행패를 부려? 전쟁이다. 제 아비가 누구든 그놈들은 내가 직접 손을 봐주지. 말해라 소렌. 왕자가 그따위 짓을 했더라도 솔직히 말해도 된다. 그렇다면 왕자를 두들겨 패 주고 여길 뜨면 돼.”


엘레나의 청으로 수도에 머무르며 성격이 많이 죽었다지만, 롤랜드는 본래 그렇게 유한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 롤랜드는 당장 하이스쿨로 달려가 소렌을 다치게 한 이들을 흠씬 두들겨 팰 생각이 만만했다.

롤랜드의 분노에 힘입어 주변의 집기들이 덜그럭거린다. 보모의 표정이 납빛으로 변하고 급기야 슬슬 자리를 피하고 만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소렌은 끝까지 태연하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뭐야? 놈이 아니라 년이야? 상관없어. 엘레나도 불러야겠군. 엘레나도 네가 이런 꼴을 당했다는 걸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만약 엘레나가 그것들을 옹호한다면 엘레나도...”


“아버지!”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는 상념이 뚝 멎었다. 롤랜드는 소렌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소렌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못할 말을 할 뻔했어. 그래,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겠니? 네가 다친 걸 알면 엘레나가 나부터 죽이려고 들걸?”


롤랜드는 무리해서 농지거리를 늘어놓으며 민망한 기분을 웃음으로 흩어버렸다. 그런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렌은 진실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에 억눌러 놓은 심정을 진하게 묻어나왔다.


“졌어요. 도군이라는 사람에게....”


롤랜드는 한층 진정된 상태로 소렌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낯선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곧 블로펜이 언급한 그 소년이 떠올랐다. 그 이름도 분명 이렇게 괴상한 이름이었다.


“아, 그래. 둘이 같이 수련한다는 건 들었다. 그럼 그 상처도 그 녀석 짓이구나? 거참, 아무리 애들이라도 너무하잖아. 어떻게 여자애를 이렇게 때릴 수가 있어? 한번 보자고 해라. 혼쭐을 내줘야겠는걸?”


살기등등한 방금전과는 달리 롤랜드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소렌은 그것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정말로 롤랜드가 도군에게 험한 짓을 할까 봐 그만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지 마세요!”


소리를 지른 순간 옆구리의 상처가 아릿했다. 소렌이 옆구리를 움켜쥐며 신음했다. 롤랜드는 그런 소렌의 이마를 톡톡 건드리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거야 원, 딸 키워봐야 헛수고라더니 벌써 홀랑 넘어간 거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 순간 도군에게 맨살을 보인 것이 떠올라 소렌은 통증도 잊고 다시 언성을 높였다. 절로 숨이 거칠어진다. 처음으로 이렇게 크게 흥분해 본 것 같았다. 그리고 보니 롤랜드에게 화를 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소년을 만난 다음부터 새로운 것을 많이 겪는 것 같아 소렌은 묘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그래, 안다. 진 게 분한 거지?”


소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느낀 그런 감정을 한마디로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렌은 천천히 수많은 생각이 엮여 만들어낸 그림을 설명해갔다.


“제가 이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졌어요. 제가 잘못한 걸까요? 그 애는 이상해요. 다른 사람하고 달랐어요. 그러니까....”


“그렇구나.”


롤랜드는 소렌의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블로펜의 말이 옳았다. 소렌을 하이스쿨에 보낸 것은 참으로 잘된 일이었다. 소렌은 너무 뛰어나다. 그렇기에 한 번도 한계라는 것을 접해보지 못했고, 반성조차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검사에게 정말로 치명적인 독이다. 마찬가지로 뛰어난 천재인 크레베스는 칭송만을 듣다가 결국 나태함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결국 블로펜에게 역전당하고 말았다.

뛰어난 천재가 추락하는 것을 지켜본 롤랜드는 일찍부터 소렌이 그런 벽을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마저도 뛰어넘기를 소원했다. 스톰브링거 따위를 뛰어넘는 진짜 검사가 되기를.


“기분이 좋지 않겠지만 그게 정상이란다. 사람은 누구나 좌절하지. 좌절해야만 해. 자기만의 소굴에 갇혀 있으면 안 돼. 아프더라도 언젠가는 거기서 나와야 한단다.”


“아프다..... 맞아요. 아파요. 이상해요. 왜 아픈걸까요?”


소렌의 딱딱한 태도가 점점 누그러진다. 자신에게 처음 검을 배울 때가 떠오르는 표정으로, 소렌은 가슴 언저리를 톡톡 치고 있었다. 롤랜드는 가슴에 얹힌 소렌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힘들겠지만 소렌은 분명 이겨내리라. 그가 아는 소렌은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딸이었다.



저녁 무렵에야 기숙사로 돌아온 소렌은 그날도 평소처럼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려 했다. 그러나 마음이 혼란스러우니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소렌은 평소와는 달리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종종 정말로 피곤할 때 쓰던 방법이었다.


“답답해...”


검날처럼 차가운 평정심을 연마하기 위해 소렌은 늘 차가운 물로 몸을 씻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수증기가 가득한 욕탕은 정말로 답답해서 숨이 막혔다. 그렇지만 잠을 자지 못해서 하루를 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소렌은 익숙지 않은 공기 속에서 한 꺼풀씩 천천히 옷을 벗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 너머로 소렌의 아름다운 나신이 문득 우아한 곡선을 그린다. 나름대로 근육이 붙기는 했지만 아직은 소녀 특유의 부드러운 느낌이 더 돋보여, 남녀를 불문하고 경탄을 이끌어낼 만큼 절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더욱이 잡티 없는 하얀 피부가 어우러지니, 마치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 같았다.

그러나 유독 한 부분이 유난히 색이 바래 있었다. 좋은 약을 바르기는 했지만 아직은 멍이 다 빠지지 않아 보기 흉했다. 살며시 눌러 보니 아직 통증이 남아 있다. 완전히 나으려면 며칠은 더 약을 발라야 할 것 같았다.


“졌구나....”


아픔을 느끼니 져 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집에서 마음을 정리했다고생각했건만 역시 아직은 신경이 쓰인다. 소렌은 번잡한 마음을 씻어내리려는 듯 단숨에 뜨끈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갔다.


“후우....”


묘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는다. 소렌은 수줍음을 떨쳐내는 것처럼 작고 희미한 한숨을 내쉬어 노곤해지는 몸을 일깨웠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러나 소렌은 그런 느낌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서 연신 정신을 차리려 애쓰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쉽게 따뜻한 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수도에서도 제법 세력이 큰 귀족가에서나 가능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엠펠로니아에 대항할 인재를 키우는 요람에 지나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호화스러움에 빠져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렌은 언제나 롤랜드에게 그런 사실을 들으며 검을 연마했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는 달리 단 하루도 허비하지 않으며 수련에 매진해왔다. 이렇게 몸을 쉬는 것도 수련의 연장이었으며, 그 과정에서도 소렌은 마음을 갈고닦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도군은.... 어땠을까?”


블로펜은 도군을 오리엔트 출신의 혼혈이라 했다. 오리엔트에서 머나먼 로베른에 이르는 동안 대체 어떤 고초를 겪었을까? 그리고 그런 고초를 겪으면 도군처럼 강해질 수 있는 걸까?

블로펜은 도군의 실력을 오리엔트 현묘함이라 일축했지만 소렌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공격을 모조리 파훼하고 역공을 가한 그 실력은 결코 허투루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소렌은 도군이 훨씬 혹독하게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또한, 알 듯 모를 듯 안일해진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어 보였다. 오늘만 해도 집에 다녀온 바람에 수련을 빼먹지 않았는가.

생각이 깊어질수록 부끄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은연중에 자신은 도군을 아래로 보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리 자신만만하게 대련을 청했겠지. 부끄러움을 못 이긴 소렌이 뜨거운 물에 머리까지 잠겨 들어갔다. 보글보글 거품이 머리 위로 떠오른다.


뜨끈한 물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평소보다 더욱 머리가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문득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욕조에 들어간 것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을 접하니 점점 잠이 오고 있었다. 이제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읏차.”


서둘러 욕조에서 일어나 큰 수건으로 몸을 감았다. 문득 거울을 보니 씻는 와중에 엉망이 된 머리카락이 복잡하게 뒤엉켜 볼썽사나웠다. 그렇지만 어차피 누군가에게 보일 일도 없기에 소렌은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늘어트린 채 욕탕을 나왔다. 그때였다. 욕탕의 찬 공기를 마주하자마자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렌, 미안하지만 문 좀 열어볼래?”


욕탕 바깥의 찬 공기를 맞자마자 노크 소리가 났다. 더불어 도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서인지 소렌은 도군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왜? 소렌은 차분히 그 이유를 생각해냈다.

우선 지금 모습은 폰테일 공작가의 영애답지 않았다. 헝크러진 머리는 물론이고 발갛게 달아오른 볼도 이상하게만 보였다. 그리고 게으름을 피운 자신은, 대련 이후에도 열심히 수련했을 도군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진 주제에 수련도 등한시하는 자신을, 도군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라 생각할까?

그런 이유를 떠올리며 소렌은 멍하니 서서 문 손잡이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잡을 엄두가 안 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곧 인기척이 사라졌다.


“하아..”


소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젖어있던 몸은 마른 지 오래였다. 차갑게 식은 몸이 한기를 느끼고 부르르 떨렸다. 소렌은 더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다사다난한 하루가 지났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고치다보니 길어졌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Inferior Struggle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01 8. 등하불명(燈下不明) (2) +7 15.10.04 825 15 14쪽
200 8. 등하불명(燈下不明) (1) +9 15.10.01 916 13 20쪽
199 7. 일보후퇴(一步後退)하면 이보전진(二步前進)하라. (6) +8 15.09.22 843 11 20쪽
198 7. 일보후퇴(一步後退)하면 이보전진(二步前進)하라. (5) +5 15.08.07 831 16 14쪽
197 7. 일보후퇴(一步後退)하면 이보전진(二步前進)하라. (4) +9 15.06.28 944 23 12쪽
196 7. 일보후퇴(一步後退)하면 이보전진(二步前進)하라. (3) +5 15.05.09 927 18 16쪽
195 7. 일보후퇴(一步後退)하면 이보전진(二步前進)하라. (2) +4 15.04.26 858 16 14쪽
194 7. 일보후퇴(一步後退)하면 이보전진(二步前進)하라. (1) +5 15.04.11 976 24 18쪽
193 6. 북천(北天)의 망령(亡靈) (13) +6 15.03.31 1,057 20 14쪽
192 6. 북천(北天)의 망령(亡靈) (12) 15.03.27 924 15 12쪽
191 6. 북천(北天)의 망령(亡靈) (11) +2 15.03.24 751 26 13쪽
190 6. 북천(北天)의 망령(亡靈) (10) 15.03.20 845 17 11쪽
189 6. 북천(北天)의 망령(亡靈) (9) 15.03.17 790 14 18쪽
188 6. 북천(北天)의 망령(亡靈) (8) +2 15.03.13 829 15 14쪽
187 6. 북천(北天)의 망령(亡靈) (7) +3 15.03.10 843 17 11쪽
186 1. Superior Progress : 암중의 음모 +3 15.03.06 902 17 12쪽
185 6. 북천(北天)의 망령(亡靈) (6) +4 15.03.03 811 17 15쪽
184 외전 1. Superior Progress : 흑마법사 +1 15.02.27 670 10 15쪽
183 외전 1. Superior Progress : 라스탄트 공습 +4 15.02.24 585 12 14쪽
182 외전 1. Superior Progress : 회동(會同) +2 15.02.20 763 17 11쪽
181 6. 북천(北天)의 망령(亡靈) (5) +4 15.02.17 813 22 13쪽
180 외전 1. Superior Progress : 대접전 +5 15.02.13 753 14 17쪽
179 외전 1. Superior Progress : Highest Overwhelm +4 15.02.10 779 14 20쪽
178 외전 1. Superior Progress : 깨달음. 그리고 비극. +5 15.02.06 713 14 14쪽
177 외전 1. Superior Progress : Before Dawn 15.02.03 654 14 20쪽
176 6. 북천(北天)의 망령(亡靈) (4) +7 15.01.30 863 15 14쪽
175 외전 1. Superior Progress : 변화 +4 15.01.27 693 15 18쪽
» 외전 1. Superior Progress : 모든 게 처음이었다. +6 15.01.23 683 13 24쪽
173 외전 1. Superior Progress : 소렌이 나아갈 길 +6 15.01.20 727 10 17쪽
172 외전 1. Superior Progress : 폰테일 공작의 고뇌. +4 15.01.13 747 14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