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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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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11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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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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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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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2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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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7. 연기 전쟁 (7)

DUMMY

루미스는 한 번 늘어뜨린 창을 다시 세우지 못했다. 짐승이 허공을 향해 포효했다. 짐승의 소리는 루미스의 피부를 두들겼다. 사방에 퍼진 소리는 구석을 누비며 끝없이 퍼져나갔다. 루미스는 아찔함을 느끼며 곧이어 들이닥칠 죽음을 기다렸다.


소리로 형성된 막을 무언가가 찢고 들어왔다. 루미스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작은 몸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작은 발소리는 루미스의 감각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곳은 위험하다. 루미스는 그 몸을 제지하려다가 이내 체념했다. 어차피 모두 파멸할 바에야 빠르든 늦든, 오히려 빠른 고통은 남겨진 자보다 편하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파멸은 모두에게 다가올 것이다.


“루미스!”


토해내듯 외치는 소리에 루미스의 귀가 움찔했다. 잠시 마비됐던 감각이 소녀를 포착했다. 소녀의 맥박, 냄새, 보폭은 나리아와 일치했다. 그러나 루미스는 나리아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이 멍청이! 왜 통신기를 끈 거예요! 설마 버린 건 아니죠? 그게 얼마나 귀한 건데!”


루미스가 귓가에 손을 댔다. 꺼진 통신기는 여전히 귀에 꽂혀있었다. 어째서 버리지 않았는지 루미스 자신도 이해되지 않을 일이다. 어쩌면 누군가와 이어지길 바랐던 마음 탓일 수도 있다.


“왜, 왜 제가 여기까지 뛰어오게······.”


나리아가 루미스의 옷자락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나리아는 태양이 가라앉아 식어가는 땅과, 짐승이 굽어보는 세상에 어울리지 않았다. 루미스는 눈이 있었다면 분명 나리아의 모습에 눈이 부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여기에 왔습니까.”


나리아는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대답했다.


“루미스를 구하려고요.”


헛된 농담에 가까웠다. 그러나 나리아는 진심이었다. 루미스의 모든 감각이 그 사실을 알려왔다.


“당신은 저를 구할 수 없습니다.”

“잘난 듯이 그딴 소리 지껄이면 뭐가 나아져요? 저랑 헌진은 확신이 있어서 이러는 줄 알아요? 누가 봐도 개죽음이었는데, 그래도 마린은 맞서 싸울 줄 알았어요!”

“저는 당신도, 헌진도, 마린이란 사람도 모릅니다.”

“모르겠죠! 지금의 루미스는 이해할 수 없으니까!”


짐승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은 제 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듯 몸을 들척였다.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파멸이 지척인데 나리아는 루미스에게 건네는 말을 포기하지 않았다.


“저는 오직 기사로서······.”

“기사가 뭔데요! 그게 중요해요? 지금까지 루미스가 싸워온 것들을, 사람을 구해온 것들을 가로막는 게 기사라면, 그깟 기사 따위 포기해버려요!”


나리아가 루미스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러나 꼿꼿이 선 루미스의 허리는 굽혀지지 않았다. 단순히 매달릴 뿐인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나리아는 굴하지 않았다.


“기사니까 싸우라는 게 아니라,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싸우란 말이에요! 지금이 바로 그때에요!”


궤변이다. 루미스의 싸움은 기사와 불가분하다. 루미스는 그러나, 나리아의 말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싸우는 것이 기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황제를 배제한 싸움은 성립되는 것인가. 그런 의문은, 기사를 걷어내려는 나리아 앞에서 무의미했다.


“저는······.”


루미스가 뜻하지 않은 말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허수가 기지개를 끝내고 루미스를 포착했다. 이제와는 다른 살기가 들이닥쳤다. 그래도 루미스는 말을 끊지 않았다.


“꿈을 꾸었습니다. 시체뿐인 이곳에서 홀로 관문을 지키는 꿈입니다. 그 꿈은 조금······.”


가장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고,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루미스는 자신의 말을 나리아가 들어주기를 바랐다.


“아주 조금 외로웠습니다.”


허수가 루미스를 포착하고 팔을 휘둘렀다. 루미스가 나리아를 끌어안고 도약했다. 그녀들이 있던 자리를 육중한 앞발이 내리쳤다. 굉음이 터지고 먼지가 흩어진 자리는 움푹 파였다.


“이건 제가 기사라서입니까.”

“그게 루미스의 본성이니까요!”


나리아는 루미스의 옷을 부여잡고 발악하듯 외쳤다. 기사의 속도는 나리아가 감히 버텨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억누른 구역질이 다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리아는 침을 삼키며 간신히 구토를 억눌렀다.


“언제부터 사람을 구하는 것에 명분을 따지게 된 거예요!”


광장 한구석에 착지한 루미스는 나리아를 내려놓았다. 나리아는 비틀거리면서도 루미스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한 번의 도약이 루미스의 몸을 갉아 먹었다. 다음에는 이렇게 멀리 뛰지 못할 것 같았다.


루미스에게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미스.’

“루미스.”


나리아의 목소리도 들렸다. 루미스는 지금은 없는 눈동자에 새겨진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너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불가능하더라도 해야만 하는 게 있어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루미스는 황제의 모습을 헤집고 들어서는, 상상되지 않는 나리아의 모습을 보았다.


‘죽게 두어라.’

“아무도 죽게 두지 마요!”


루미스의 대답은 짤막했다.


“그렇습니까.”


루미스는 언뜻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나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짐승이 루미스를 쫓아 달려왔다. 땅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나리아와 루미스의 사이는 고요했다.


“멜리시 분대!”


그때 또 다른 한구석에서 느닷없이 전투구호가 들렸다. 일단의 무리가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 짐승에게 활을 쏘았다. 집요하게 눈을 노리는 사격에 짐승이 분노했다. 아주 잠시지만 루미스와 나리아는 짐승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멜리시는 나리아를 쫓아 이곳까지 달린 자신을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분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필연처럼 몸은 스스로 움직여 이곳에 왔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흩어져라!”


짐승의 시선을 뺏자마자 분대원들이 흩어졌다. 공포에 질렸으면서도 분대장의 명령에 따라 도망치는 길은 제각각이었다.


짐승의 앞발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병사 하나가 여파에 나가떨어졌다. 멜리시가 서둘러 쓰러진 병사를 들쳐 엎고 내달렸다.


“뭉치지 마! 무조건 흩어져!”


짐승이 멜리시 분대를 뒤쫓으며 일으킨 먼지가 나리아와 루미스를 덮쳤다.


“봐요, 루미스. 불가능할 줄 알면서도 달려오는 멍청이들이 또 있어요.”


희뿌연 먼지 속에서 나리아는 웃었다.


“이제 외롭지 않죠?”


루미스의 청각이 먼 곳의 전선을 포착했다. 한순간 고요했던 전선은 다시 곳곳에서 맞부딪쳤다. 저 거대한 짐승을 마주하고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무의미할 수 있는 싸움을 이어나갔다.


루미스는 말없이 귓가를 두들겼다. 통신기가 잡음을 일으켰다. 나리아도 귓가를 두들겼다. 둘의 통신은 다시 연결됐다.


“나리아. 지금 저는 뜻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 몸의 감각 일부를 차단하겠습니다.”


몸에서 고통이 사라졌다. 정신은 다시 또렷해졌다. 그러나 감각 일부가 사라진 몸은 주변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어딘가 붕 뜬 듯 굳었다. 루미스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조금 더 어두워진 세상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몸이 적에게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겁니다. 나리아가 도와줘야 합니다.”

“뭘 하면 되죠?”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나리아에게 맡기겠습니다.”

“좋아요. 맡겨주세요.”


불확실한 부탁이었지만 나리아가 가슴을 펴며 장담했다.


멜리시 분대원은 골목길과 건물을 타고 오가며 최대한 짐승의 집중을 분산시켰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루미스에게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루미스가 다시 창을 들었다. 이제는 적을 앞에 두고 늘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확신에 찬 발걸음은 허수에게 향했다.


한때, 기사가 아닌 자신은 무의미하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의문은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허물이다. 허물은 벗어야만 한다. 루미스는 기사가 된 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것은 매달릴 것이 아니라 벗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든 임무와 업을 덜어낸 자리에는 그저 사람을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만 남았다.


‘폐하.’


루미스는 걸어가며 적을 향해 창을 겨누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흐리지는 않았다. 루미스는 어둠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었다.


촉각과 고통이 차단되었으니 의존할 것은 이제 냄새와 소리, 살기뿐이다. 사지 하나를 뜯고 시작하는 싸움과 다를 바 없지만 루미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지금은 당신이 아닌 저를 위해 창을 휘두르겠습니다.’


루미스는 머릿속의 황제에게 고하며 내달렸다.


나리아는 짐승을 향해 뛰는 루미스와 거의 동시에 멜리시를 향해 뛰었다. 골목길 한편에 숨어 다시 활을 겨누고 있던 멜리시가 나리아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이쪽이다! 숨어라, 어서!”


저 꼬맹이가 기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무슨 정신머리로 이곳까지 이르렀는지는 알 바가 아니다. 나리아와 다름없이 정신이 나가버린 자신도 이곳까지 따라왔으니 불평할 수 없다. 멜리시는 이제 나리아를 구출하고 도망갈 생각을 했다. 짐승은 기사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멜리시! 활을 쏴요!”


그러나 나리아는 멜리시를 지나치며 그렇게 소리지를 뿐이었다.


“뭐? 저놈한테는 화살이 안 먹혀!”

“저놈이 아니에요! 저놈 주변, 바닥이든 벽이든 아무 곳에다가 쏴요!”


나리아는 다른 분대원들에게도 이르러 똑같은 소리를 외쳤다.


그 순간 루미스와 짐승이 부딪쳤다. 기세 좋게 돌진한 루미스였지만 수세였다. 짐승의 팔이 루미스를 내쳤다. 루미스는 굴러가는가 싶더니 먼지 속에서 뛰쳐 나왔다. 얕은 공격이 짐승의 살갗을 베고 지나갔다. 그녀를 쫓는 짐승의 공격은 집요했다.


“준비!”


나리아가 분대원들 사이에서 손을 들었다. 영문도 모르고 나리아에게 압도당한 분대원들은 멍청히 활을 치켜들었다.


“목표, 짐승이 아님! 짐승 주변의 사물을 맞출 것! 발사!”


멜리시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짐승이 아닌 벽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멜리시를 따라 쏘아진 화살이 제각각 바닥이나 가로등, 나뒹구는 창칼 따위를 맞추었다.


그러자 루미스의 시야가 밝아졌다.


‘반향정위.’


촉각을 차단해 공기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하게 된 루미스에게, 소리는 환한 불빛과 다름없었다. 제각각 부딪친 소리가 짐승을 긁으며 루미스의 귓가에 닿았다. 반사된 소리는 루미스의 머릿속에서 주변 풍경을 그려냈다. 어둠을 한순간 밝히고 사라진 소리에 불과했지만 루미스에게는 선명했다.


“준비!”


나리아가 다시 손을 들었다.


“발사!”


다시 쏘아진 화살이 방금 루미스가 ‘목격한’ 시야와 이어졌다. 루미스는 짐승의 공격을 정확히 감지하고 피해냈다.


[어때요, 루미스?]


나리아가 귓가에서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보입니다.”


루미스는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저를 계속 밝혀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루미스가 심호흡을 하고 도약했다. 고통은 없지만, 몸이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견딜 것이다. 이제껏 루미스가 견디고 병사들이 견딘 것처럼, 무너진다면 적을 먼저 무너뜨린 후일 것이다.


적을 노리는 루미스의 창에 흔들림은 없다.


작가의말

금요일입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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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52. 4구역 (4) 21.04.23 25 2 11쪽
52 51. 4구역 (3) 21.04.22 32 2 11쪽
51 50. 4구역 (2) 21.04.21 29 2 11쪽
50 49. 4구역 (1) 21.04.20 27 2 12쪽
49 48. 도서관의 아이 (3) 21.04.19 30 2 12쪽
48 47. 도서관의 아이 (2) 21.04.16 33 2 11쪽
47 46. 도서관의 아이 (1) 21.04.15 31 3 12쪽
46 45. 기사와 병사 (5) 21.04.14 34 3 12쪽
45 44. 기사와 병사 (4) 21.04.13 38 3 12쪽
44 43. 기사와 병사 (3) 21.04.12 63 3 12쪽
43 42. 기사와 병사 (2) 21.04.09 34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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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6. 연기 전쟁 (6) 21.04.01 39 3 11쪽
36 35. 연기 전쟁 (5) 21.03.31 32 3 12쪽
35 34. 연기 전쟁 (4) 21.03.30 37 3 11쪽
34 33. 연기 전쟁 (3) 21.03.29 30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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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31. 연기 전쟁 (1) 21.03.25 30 3 11쪽
31 30. 창과 방패 (3) 21.03.24 32 3 12쪽
30 29. 창과 방패 (2) 21.03.23 32 3 11쪽
29 28. 창과 방패 (1) 21.03.22 35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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