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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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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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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12,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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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9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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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7. 6구역 (3)

DUMMY

루미스는 눈을 잃은 이후 그것을 불편하다고 여긴 적이 없다. 감각 중 일부가 차단되기 마련인 장벽 바깥에서는 그것이 예삿일이었다. 시야는 세상을 인식하는 한 방식일 뿐이다.


이를테면 후각. 루미스는 사방에서 실려 오는 냄새에서 이변을 감지했다. 목책을 설치할 때 나는 톱밥 냄새와 병사들의 피 냄새, 그 사이를 비집듯 풍기기는 낯선 냄새 한 줄기. 그것이 루미스의 발걸음을 인도했다.


촉각도 마찬가지였다. 몸과 부딪친 공기가 퍼져나가고 돌아오며 주변에 늘어선 것들을 알려주었다. 눈이 없어도 계산을 넘어선 감각이 주변의 풍경을 완성 시켰다. 따라서 전투태세에 들어간 루미스의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복잡한 골목과 건물일지라도 루미스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귀. 소리가 소멸하지 않는 범위 내라면 무엇도 놓치지 않는 청각은 루미스의 인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소리의 반향은 주변의 거리감과 적의 행동을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였다. 지금도 숱한 움직임이 발생하는 주변에서 루미스는 점차 적을 확실하게 좁힐 수 있었다.


그러나 루미스는 갈수록 이 귀가 원망스러웠다.


“살려, 살려줘······.”

“방진! 방패부대 앞으로, 창을 세우고 둘러싸라! 한두 번 상대하냐, 이 머저리들아!”

“기사 나으리는 언제 오는 거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으니!”


루미스는 기사를 모욕하는 말에 익숙했다. 한때는 그것을 죄라고 규정한 적이 있었다. 자신에 대한 모욕 때문이 아니었다. 황제의 대리로서 구역에 부임한 기사를 모욕하는 일은 곧 황제를 모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루미스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루미스는 그것을 죄라고 부를 자신이 없었다. 끝나지 않는 전쟁에서 그들의 분노는 온당하다. 소통을 잃은 황제와 그들 사이는 막연하므로 그들은 탯줄 잃은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응답하지 않는 어미에게 투정하는 것은 아이의 의무였다.


“포위를 무너뜨리지 마! 견뎌라!”


목소리가 지척에 이르렀다. 루미스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던 몇몇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바람에 눈을 못 뜨는 사이 루미스가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병사들이 허수를 에워싼 채 포위망을 꾸리고 있었다. 그러나 허수가 한 번 뒤챌 때마다 한쪽 면이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방패가 깨진 파편이 튕겨 나갔고 몇몇은 나동그라졌다. 악을 쓰며 그 자리를 메꾸는 병사들의 소리가 처절했다.


허수는 몸에 화살이나 창을 몇 개씩이나 꽂고 있었지만 움직임에 제약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포위한 제국군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뚫고 나갈 방향을 정했는지 몸을 움츠렸다.


놈이 먼저 달려들기 전에 골목을 빠져나온 루미스가 도약했다.


검은 그림자가 허수 위에 꽂히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허수가 괴성을 내질렀다. 구멍 난 부분에서 체액이 튀어 루미스의 입술을 적셨다. 그러나 그 공격조차 짐승을 일격에 끝내지 못했다.


“기사다!”


병사들이 반색하며 일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기사의 싸움에 휘말리는 꼴을 겪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루미스의 등장에 환호하기보다는, 일을 처리할 상대가 오자 안도하는 눈치였다.


허수가 바닥에 굴렀고 루미스는 가볍게 착지했다.


루미스는 감각을 동원해 적의 풍경을 집약시켰다. 여전히 허수는 이해할 수 없는 짐승이었다. 놈들의 목숨을 끊는 조건이란 오로지 머리를 베는 것뿐이었다. 팔이나 다리, 심지어 몸통을 끊어버리더라도 목이 연결된 부분은 살아서 날뛰었다. 무력화하는 수단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루미스는 단숨에 허수의 목숨을 끊을 궤적을 그려냈다.


루미스가 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창끝이 십자 모양으로 갈라지며 투명한 불꽃을 내뿜었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온도가 올라가는 듯했다.


“특이사항 있습니까.”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누군가가 얼른 대답했다.


“앞발이 둘이고 뒷발이 하나요. 나머지 하나는 왼쪽 옆구리에 튀어나왔는데 조심하시오!”

“알겠습니다.”


허수의 형태는 그 생명만큼이나 특정되지 않았다. 개와 닮은 네발 달린 형태가 일반적이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뒷다리가 없다시피 한 개체도 있었고 심지어 구체로 이루어져 병사를 짓뭉개는 개체도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쉽게 상정 가능한 적이었다.


허수가 달려들었다. 루미스는 공기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빗겨내듯이 피해냈다. 루미스의 몸통을 찢으려던 앞발이 잘려나갔다. 일반적인 무기로는 흠집을 내기도 쉽지 않던 허수의 몸 일부가 떨어지자 몇몇이 탄성을 내질렀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고꾸라지려던 몸뚱이에서 날카로운 기척이 감지되었다. 옆구리에 달려있던 다리가 쇄도했다. 루미스는 창대로 그것을 받아 내고는 뛰어올랐다.


허수의 몸을 훑듯이 지나간 창대가 등뼈를 가르고 남은 다리를 잘라냈다. 허수가 발악했지만 이미 루미스의 범위 내였다. 십자창의 끝이 허수의 목덜미에 박히고는 폭발했다.


폭발하는 소리는 작고 굵직했다. 짐승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꽂은 창을 가볍게 흔들자 너덜너덜해진 목이 몸뚱이에서 뜯겨 천천히 떨어졌다.


“끝났나?”


병사들이 숨을 죽였다. 끝까지 방심할 수는 없었다. 목이라고 생각했던 부위가 사실은 꼬리였다는 일도 몇 번이나 있었다. 루미스도 여전히 창을 놈에게 겨누고 있었다.


허수의 몸체가 천천히 녹아내렸다. 그제야 곳곳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허수가 소멸하는 신호였다.


루미스가 창끝을 가볍게 휘둘렀다. 창대에 묻어있던 허수의 체액이 바닥에 떨어졌다. 땅에 스며드는 듯 허수는 곧 녹아 사라졌다.


“부상자를 수습해라.”


상황이 정리되자 대장으로 들리는 자가 명령했다. 병사들이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사자가 발생했는지 그들을 애도하는 목소리가 군데군데 들렸다.


루미스에게 다가와 예를 표하는 병사는 없었다. 그들은 부상자를 수습하며 후퇴할 준비를 했다. 전쟁이 그들의 일이라고 치하받은 적 없듯이 루미스가 허수를 처치했다고 감사받을 수는 없다. 그리고 루미스는 항상 서둘렀지만, 누군가는 죽거나 다친 뒤였다.


‘너는 항상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 있었다. 그러니, 늦지 않았다.’


헌진은 그렇게 말했다. 루미스는 그 말에 반대하고 싶었다. 이곳에서, 루미스는 항상 늦었다.


기사는 구역의 의무에 관여할 수 없다. 그러나 의무는 일그러졌고, 황제는 침묵한다. 루미스는 이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적은 명확하지 않았다. 무너지는 그녀의 구역은 애타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무너지라는 것이 황제의 뜻이라면, 루미스는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폐하.’


루미스는 전투를 마치고 복귀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이지 않는 하늘이 무슨 색이었는지 이제 기억조차 희미했다.


멀리서 병사들이 싸움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허수가 아니었다. 5구역의 척후대가 침입한 모양이었다. 살려달라는 외침과 비명, 지원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루미스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이것이 옳은 것입니까.’


루미스는 무기력하게 창끝으로 땅을 짚었다.



“왔어요?”


루미스는 자신을 반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잠시 놀랐다. 상념에서 벗어나자 어느새 거처에 돌아와 있었다. 자그마한 기척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나리아라는 정체 모를 소녀는 늘 루미스의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러웠다.


“······루미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몸에 상처가 있을 리 없다. 루미스는 소녀가 어째서 그렇게 묻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표정이······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리아는 망설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에 루미스의 손을 잡았다. 나리아는 서슴없이 기사를 건드렸다. 루미스는 놀라 손을 움츠렸다.


“이쪽이에요.”


나리아가 인도한 곳에는 헌진이 도서관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헌진은 루미스를 잠시 살피고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네가 쓰러트린 허수의 흔적을 추적했다.”


루미스는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헌진은 천천히 덧붙였다.


“놈들이 녹아내린 걸 본 나리아의 발상이다. 허수의 체액은 대부분 증발했지만, 일부는 땅에 스며들었다. 그것을 추적하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체액을 추적한단 말입니까.”

“정확히는 열기에요.”


나리아가 끼어들었다. 루미스의 눈이 보인다면 화면을 가리키며 설명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니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땅에 스며든 체액의 열기를 추적했어요. 놈들에게는 생명의 기척이 없다는 건 알고 있죠? 허수에게는 열기만 있을 뿐 생명 반응은 없어요. 그래서 이 체액이, 음, 징그러우니까 정수라고 표현할까요? 허수의 정수가 그나마 단서가 될 거로 생각해요.”

“무언가 알아냈습니까.”

“워낙 소량이고 깊이 파고들어서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방향은 알아냈어요.”


나리아가 지도를 읽어내렸다. 싸움이 벌어진 지점에서 허수의 정수는 퍼져 흘렀다. 그리고 그 방향은 5구역을 향했다.


땅밑은 루미스의 인식 범위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도 못 했던 발상에 루미스는 뒤늦게 물었다.


“5구역으로 죽은 허수의 체액이 흘러 들어가고 있단 말입니까.”

“아직 불확실해요. 스며든 직후의 방향일 뿐이니까요. 주변으로 틀거나, 5구역에도 못 미친 곳이 목적지일지도 모르죠. 어쩌면 이 추적이 아예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고요.”


겨우 그런 것이 놈들의 정체를 밝히는 단서가 된다니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규격을 벗어난 짐승이라면 오히려 그런 방법이 유효할 수도 있었다.


“방향을 더 특정할 수 있어야 해요. 수많은 흔적이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면 확실해지는 거죠.”


나리아가 눈을 빛냈다. 루미스의 싸움판에서 벌어진 희미한 흔적에 언뜻 꼬리를 엿보았다. 그것을 따라가면 몸통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정체를 파악하면 적어도 지금의 막막함은 해소될 것이다.


루미스가 간신이 이해하는 눈치를 보이자 헌진이 물었다.


“루미스, 허수의 다음 출현 시간을 예상할 수 있겠나.”

“최소간격은 두 시간이었고, 최장간격은 열아홉 시간이었습니다.”

“언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군.”


지나치게 넓은 간격에 헌진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일단 이렇게 하지. 나리아, 지금 이 흔적을 표시해라. 다른 지점에서 출현한 허수의 흔적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면 좁혀들어가겠다. 필요하다면 특정하기 쉬운 장소로 유인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좋아요. 사례가 쌓이면 유인할 장소를 정하기도 쉬워질 거예요. 다음 개체가 출현하면 그걸 기준으로 짚어보죠.”


나리아와 헌진은 잠시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루미스에게는 그것이 먼 세상의 일로 들렸다. 성 바깥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짐승을 처치하더라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전쟁이 이어지는 한 이 무기력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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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50. 4구역 (2) 21.04.21 29 2 11쪽
50 49. 4구역 (1) 21.04.20 27 2 12쪽
49 48. 도서관의 아이 (3) 21.04.19 30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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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45. 기사와 병사 (5) 21.04.14 34 3 12쪽
45 44. 기사와 병사 (4) 21.04.13 38 3 12쪽
44 43. 기사와 병사 (3) 21.04.12 63 3 12쪽
43 42. 기사와 병사 (2) 21.04.09 34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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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6. 연기 전쟁 (6) 21.04.01 39 3 11쪽
36 35. 연기 전쟁 (5) 21.03.31 32 3 12쪽
35 34. 연기 전쟁 (4) 21.03.30 38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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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31. 연기 전쟁 (1) 21.03.25 30 3 11쪽
31 30. 창과 방패 (3) 21.03.24 32 3 12쪽
30 29. 창과 방패 (2) 21.03.23 32 3 11쪽
29 28. 창과 방패 (1) 21.03.22 35 3 12쪽
» 27. 6구역 (3) 21.03.19 36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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