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한규영은 오는 내내 삐그덕 대며 시야를 어지럽히는 차창의 빗물을 규칙적으로 털어내는 와이퍼만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반 시간 정도 지나 한인들을 거의 볼 수 없는 주택가에서 차가 멈추었다. 주택마다 잘 손질된 드넓은 잔디를 끼고 거대한 아람드리 나무들이 서로 연결되어 담을 이루면서 미로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무리 보아도 집집마다 출입구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여긴 어디야?"
"내가 빌려 쓰는 집이야. 이곳이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괜찮지?"
"그래."
한규영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짧게 답하고 서주희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뭐 마실래?"
"아무거나."
서주희가 부엌으로 간 동안 그는 소파에 앉아서 시야에 들어오는 대로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거실과 부엌이 연결된 흰색 단층 집은 가구는 별로 없었지만 아담한 느낌이 들었다.
거실 나무 바닥에는 푸른색과 붉은색, 황금색으로 된 아라베스크 무늬들이 촘촘하게짜인 카펫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책과 잡지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거실 너머 테라스로는 넓은 정원이 보였는데, 땅거미가 지면서 오렌지 나무, 무화과 나무의 가지들만이 어슴프레하게 보였다. 내리던 비가 그쳐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향긋한 풀냄새가 들어와 실내 가득히 퍼졌다.
치링~ 치링~
치리링~~~
거실 밖 테라스에 여섯 개의 긴 대형 은색 파이프 윈드 차임 벨이 바람에 서로 부딪히며 맑고 투명한 소리를 냈다. 한규영에게는 왠지 그 소리가 멀리서 아련하게 울려오는 예배 종소리같이 들렸다.
거실 맞은 편 벽 중앙에는 벽난로가 있었다.
주희가 늘 갖고 싶다고 했던 벽난로도 있군.
벽난로 위의 대리석 선반에는 몇 개의 작은 사진 액자가 놓여 있었다. 한규영은 가까이 다가가 액자의 사진들을 하나씩 보다가 매우 낯익은 사진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경인미술관에서 찍은 사진이?!
한규영은 마치 조금 전까지는 아예 심장이 멈춰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뜨거운 피가 솟구쳐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서주희는 말린 파인애플, 사과 조각, 장미와 백차가 섞여 짙은 꽃향기와 과일향기가 나는 차를 투명한 유리 주전자에 가득히 담아서 내왔다. 두 개의 찻잔도 차 받침도 차 빛깔을 살린 투명한 유리잔이었다.
"술은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차로 준비했어."
"응."
한규영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며 차를 따르는 서주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거지?
머리에서 그 답이 떠오르기도 전에 그는 뜨거운 시선으로 서주희의 목과 가슴을 보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는지 서주희의 팔목을 자신의 한 손으로 잡고 있었다.
"규영씨..."
서주희는 놀라 약간 몸을 떨었지만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한규영은 점점 더 강하게 서주희의 팔목을 움켜쥐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엇 때문에 그런 갑작스런 충동과 흥분이 일어났는지 한규영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불붙은 뜨거운 불길을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한규영은 거친 숨길을 내쉬며 다른 한 팔로 서주희를 와락 끌어 품에 안고서 그녀의 목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의 입술이 목에서 귀로, 뺨과 눈으로 움직이고 그녀의 입술에 닿았을 때, 서주희는 두 팔로 한규영의 허리를 감싸안고 눈을 감았다.
한규영은 서주희에게 욕망을 느끼면서 처음에는 자신을 버린 서주희를 강하게 짓밟아주고 말겠다는 격정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그녀가 모멸감을 느끼도록 한껏 힘으로 그녀를 제압하려고 했다.
그런데 서주희의 몸을 안자 그녀의 몸에 이미 자신의 뜨거운 불길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거친 정열이 그녀의 몸 안에 강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알았다. 서주희의 심장소리도 자신의 것과 같이 격동치고 있었다.
서주희는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한규영의 손과 입술을 잠잠히 받아들이며 가만히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한규영은 흐트러진 서주희의 폭신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부비며 잠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그리고 다시 서주희를 안으며 사랑했다.
정말 이상한 것은 서주희를 안을 때마다 그녀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이었다가 어느 땐 정겨운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했고, 또다른 순간에는 아주 장난기 많은 어린 동생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내 다시 그녀는 아주 성숙한 누나처럼 자신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서주희의 서로 다른 모습이 아니라 자신 안에 사랑받고 싶어 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서주희의 몸을 알게 되면서 막연했던 옛 감정들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규영은 도저히 서주희를 미워할 수 없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오직 이 여자뿐일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한규영은 그런 마음이 자신과 서주희를 속박하는 운명적인 다짐이 될까 두려웠다.
"내일 아침에 갈래?"
서주희가 한규영의 귓볼을 만지며 물었다.
"아니,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시간을 확인하고 한규영이 침대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 처음이라면 믿을 수 있겠어?"
"응, 내가 아는 규영씨는 그런 사람이니까."
서주희는 한규영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규영은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옷을 주워서 입으며 말했다.
"우리 결혼하자."
그녀의 반응이 궁금했다. 옷을 다 입고서 한규영은 심호흡을 하고 뒤돌아서서 서주희를 쳐다보았다. 서주희는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치고 머리를 묶으며 말했다.
"규영씨, 내 답은 똑같아. 규영씨가 목사가 아닌 다른 일을 한다면..."
한규영은 서주희에게서 ‘목사가 아닌’이라는 말을 듣고 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했다.
"넌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이지? 내 마음을 아직도 그렇게 모르겠어? 내가 목사가 된 건 다 너 때문이었다고! 내가 모든 걸 널 위해 포기했는데. 너도 알고 있잖아!!!"
한규영은 그렇게 내뱉고는 그길로 서주희 집을 나와 버렸다.
"목사님, 기다리시는 손님이 오신 것 같아요."
한규영은 까페 사장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21년의 세월...
한규영은 지나가 버린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역시 비오는 날, 서주희는 한규영 앞에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기억에 선명한 붉은 레인 코트를 입고 검은 우산을 들고 있었던 그런 젊은 여인은 아니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까페에서 나오는 노랫말이 두 사람 사이로 흘렀다.
- 신인 GO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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