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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천후』 님의 서재입니다.

자객역정(刺客歷程)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완결

[악천후]
작품등록일 :
2018.04.16 19:45
최근연재일 :
2019.03.27 18:07
연재수 :
152 회
조회수 :
399,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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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5
글자수 :
944,283

작성
19.03.0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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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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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글자
22쪽

78. 탈주

DUMMY

78. 탈주


비밀통로를 통과한 나는 서둘러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도서관을 비롯한 교정은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 틈에 섞여 자연스럽게 신학교를 빠져나오려 했다.

그런데······.

“아아악!”

“꺄아악!”

느닷없이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 뭐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향해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낯빛으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과 주춤거리다 나자빠지는 사람들, 괴성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로 주변은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삐이익!

저만치서 날카로운 호루라기소리가 들리며 곤봉을 든 경비원들이 흉흉한 기세로 몰려들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그때까지도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응? 이 냄새는······.

문득 역한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이, 이런 염병할!

부교주가 뿜어낸 핏물을 머리부터 뒤집어 쓴 채로 학생들 틈에 섞여 달아날 생각을 하다니······. 내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다니······.

십여 년간 자객질을 하면서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이처럼 얼토당토않은 실수를 저지른 적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이런 실수는 초보자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뭐 조금 변명해보자면, 갖은 고생을 겪은 끝에 드디어 마지막 임무를 완수했다는 기쁨에다 고대하던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감격스러움이 더해지면서 내 마음은 한껏 들뜬 상태였고, 거기에 한시라도 빨리 달아나야한다는 조급함까지 뒤섞이면서 살짝 마음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되면 평소와는 다른 말과 행동을 하게 되고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지면서 제대로 된 사고를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당연히 실수를 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어이없는 짓이었다.

멍청한 놈!

나는 뺨을 때리며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이 경비원들이 지척에 다가와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게다가 갑자기 나타난 경관들까지 나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경찰의 출현이 너무 빨랐다. 그렇다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수사를 위해 신학교를 방문했다가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몰려든 것이리라.

재수도 없구나. 그나저나 이거 낭패로군.

“우, 움직이지 마라!”

나를 둘러싼 경비원들의 얼굴엔 공포심이 담겨있었다.

당연했다. 벌건 대낮에 시커먼 핏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쓴 자가 당당하게 교정을 활보하고 있으니 누구라도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꼼짝 마라!”

금세 경찰들이 경비원들과 합세했다. 그들 역시 내 몰골을 보고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경비원들처럼 겁먹은 표정은 아니었다.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경찰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인이 소리쳤다.

최대한 신속하게 빠져나가자.

나는 대꾸하지 않고 환도를 뽑아들었다. 표적 이외의 사람을 해치는 것이 꺼려지긴 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칼을 뽑아들자 경비원은 물론 경찰들까지 잔뜩 긴장한 채로 도검을 뽑아들면서 방어자세를 취했다.

“허튼 짓 마라!”

중년인 역시 검을 뽑아들면서 소리쳤다.

나는 중년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면서 막 내력을 끌어올려 땅을 박찼다.

그 순간이었다.

핑핑핑······!

등 뒤에서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대여섯 개의 암기가 날아들었다. 힐끗 보니 원석중을 비롯한 흑의무사들이 도서관을 빠져나오며 암기를 날리고 있었다. 원석중이 이끄는 비영대인 모양이었다.

제길! 빨리도 왔네.

제법 먼 거리에서 날아왔음에도 암기의 기세는 매서웠다. 피하기 애매하게 전신요혈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암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과거의 나였다면 한두 개는 몸으로 받아내야 했을 정도였다.

챙챙챙······!

나는 급히 환도를 휘둘러 암기를 쳐냈다.

“헉!”

“아이쿠!”

“큭!”

“으윽!”

의도적으로 경비원과 경찰들이 있는 쪽으로 쳐냈기 때문에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한 사람들이 놀라 소리치며 암기를 피하느라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 중 몇 사람은 암기에 맞아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며 나자빠졌다. 덕분에 포위망이 흐트러졌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차게 땅을 박찼다. 단숨에 포위망을 돌파할 생각이었다.

“어딜 감히!”

중년인이 빠르게 검을 내뻗었다. 날카로운 검세였지만 너무 단순하고 정직했다. 나는 가볍게 상체를 비틀어 검을 피하면서 그대로 내달렸다. 하지만 중년인의 검이 갑자기 빨라지더니 기묘하게 꺾이면서 나를 베어왔다. 그 빠른 검로의 변화가 눈부셨다. 그도 모자라 검기까지 뿜어졌다.

헉!

깜짝 놀란 나는 급히 벽파보법을 펼쳐 뒤로 물러나면서 검을 피했다. 하지만 온전히 피하지 못한 채 검기에 옷자락이 베어졌다. 조금만 늦었다면 가슴을 크게 베일 뻔했던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이런 자가 제복경관이라니 놀랍군.

부교주를 호위하던 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자였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고수를 만난 것이다.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한 번쯤 겨뤄보고 싶은 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내가 중년인에게 발이 묶인 사이 원석중과 비영대원들이 바로 코앞에 당도해있었다.

나는 벽파보법을 펼쳐 중년인에게 다가서며 벽파도법을 펼쳤다.

“제법이군. 허나······.”

벽파도법의 초식에 감탄한 중년인이 느리게 검을 찔러왔다. 마치 장난하듯 뻗어낸 검이었지만 거기에 담긴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검이 채 반도 뻗어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상당한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환도에 변화를 일으켜 미끄러지듯 검날을 비껴가며 중년인의 검을 밀어냈다. 환도에서 느껴지는 반발력이 대단했다. 나는 반발력에 저항하지 않고 그것을 이용해 땅을 박차며 몸을 날렸다.

“잔꾀를······? 어림없다!”

중년인이 빠르게 초식을 변화시켜 검을 내질렀다. 검기가 뿜어지며 마치 뱀의 혀처럼 빠르게 연속된 검을 찔러왔다. 검 끝이 미세하게 떨려 정확히 어딜 노리는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내 진로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나는 공중에서 몸을 뒤집으며 암기를 뽑아 중년인에게 날렸다. 근거리에서 강한 내공을 담아 날린 것이었기에 중년인도 쉽게 생각할 순 없었다.

“헉!”

깜짝 놀란 중년인이 검을 거둬 암기를 쳐냈다.

펑!

검과 암기가 부딪쳐 폭음이 터지면서 흙먼지가 일었다.

“크악!”

부서진 암기의 파편에 맞은 경비원 하나가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 사이 나는 중년인과의 거리를 벌리며 저만치 달아날 수 있었다.

“이놈! 멈춰라!”

당황한 중년인이 소리쳤다.

너 같으면 서겠냐?

나는 경공술을 최고조로 발휘하며 사력을 다해 내달렸다. 흙먼지가 걷힘과 동시에 원석중과 비영대원들이 중년인을 스쳐 나를 뒤쫓기 시작했다.

원석중과 비영대원들의 경공술이 뛰어나긴 했지만 나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보았듯이 그들의 추적술은 매우 뛰어났다. 신학교를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뛰어든 내가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내달려도 절대 놓치지 않고 뒤따라왔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도 고하가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나를 뒤쫓는 자는 원석중을 포함해 불과 세 명뿐이었다.

처치하고 갈까?

그게 가장 좋았다. 하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어느새 희락교의 휘장을 단 무사들이 사방에서 몰려들더니 골목 곳곳에서 출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부교주 측에서 동원한 무사들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늦게 경찰들까지 골목에 뛰어들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고 있었다.

경찰과 무사들이 사방에 깔리면서 내 움직임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뛰어난 은신술과 빠른 경공술, 신묘한 벽파보법 덕택에 무사들이나 경찰들을 피해 이동할 수 있었지만 원석중과 비영대의 추적이 계속되면서 점차 내 활동반경이 좁아지게 되었다. 그로인해 본래 내가 생각해두었던 도주로에 접근조차 못한 채로 계획에 없던 엉뚱한 방향으로만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일단 놈들을 따돌리고 몸을 숨기자.

그렇게 결정한 나는 비영대의 추적을 피해 달리면서 옷가지를 벗어 얼굴에 묻는 핏물을 닦아내고는 여기저기에 옷가지를 흘렸다. 추적자들을 혼란시킬 목적이었지만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잠깐의 시간만 벌면 되었다.

덕분에 나는 거의 반나체 신세가 되었지만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원석중과 비영대원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나는 그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결국 대여섯 시간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나서야 간신히 원석중과 비영대를 떨쳐낸 것이다.

어느 집 빨랫줄에 걸린 아직 마르지 않은 옷가지를 훔쳐 입고 피를 씻어낸 나는 황혼 무렵이 되어서야 본래 정한 도주로를 통해 마을을 벗어나려 시도했다.

하지만 마을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길목 어디에나 수십 명의 무사들과 경찰들이 눈에 불을 켠 채로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소로나 대로는 물론 길이 아닌 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곳까지 지키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 이쪽 방면에 밝은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원석중 그 자식이겠지?

길이 있는 곳에서는 지나는 사람 모두를 검문검색하고 있었다. 특히 무사이거나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자는 더욱 철저히 조사하고 있었고, 신분이 확실한 소수를 제외하면 아예 통과시키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몇몇 무인들이 불평불만을 토해냈지만 돌아온 건 무식한 주먹질과 발길질뿐이었다.

더구나 검문검색이 이뤄지는 곳마다 비영대원으로 짐작되는 자들이 은밀하게 몸을 숨기고 있었고, 각종 장애물과 함정도 설치되어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어찌 이토록 촘촘하고 철저한 경계망을 구성했는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게다가 어찌나 정교하게 인원을 배치하고 있는지 바늘구멍만한 틈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대단한 은신술을 지녔다고 해도 아무런 충돌 없이 들키지 않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히 천라지망이라 할 수 있었다.

하긴 이런 준비가 되어있으니 반란을 획책했겠지.

모르긴 몰라도 이런 경계망은 두 가지 의미를 두고 준비한 것일 게다. 하나는 반란이 성공했을 때 소교주를 비롯한 주요인물들이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함일 테고, 둘째는 반란이 실패했을 때 부교주가 탈출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일 것이다.

거기다 경찰들을 앞세워 검문검색을 펼치는 걸 보면 관부와도 손을 잡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냥 돌파해버려?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대한 조용히 빠져나가야 했다. 내 실력이라면 어찌어찌 마을을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앞서도 말했듯 아무런 충돌 없이 들키지 않고 달아나는 건 불가능했으니 설령 마을을 벗어나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마을에 있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나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상태라면 움직임에 제약이 있을지언정 쉽사리 잡히지는 않을 테지만 만약 무리해서 탈출을 시도했다간 모든 이목이 나에게 쏠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내가 아무리 뛰어나도 저 많은 무사들과 비영대, 경찰을 상대하여 살아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마을을 벗어난다 해도 성 전체가 희락교의 영역이란 걸 감안하면 성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나는 그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바라만보다 몸을 돌려야 했다.

젠장! 아, 씹할! 죽을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와서 겨우겨우 임무를 완수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에휴······!

절로 욕설과 한숨이 새어나왔다.

일단 오늘은 쉬고 내일 다시 틈을 찾아보자. 제 아무리 대단한 천라지망이라 할지라도 설마 틈이 없겠어?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으로 발길을 돌린 나는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의 객잔에 투숙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 많은 곳에 있어야 들키지 않을 수 있고 설령 들킨다 해도 쉽게 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하도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탓에 기운이 쏙 빠져버린 나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뭔가 좋은 수가 생길 거라는 기대감을 품은 채였다.

하지만 날이 밝았을 때 내 눈에 펼쳐진 광경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뭐야?

마을에는 수많은 무사들과 경찰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고, 거리 곳곳에서 검문검색도 이뤄지고 있었다. 어제보다 몇 배는 많은 수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더구나 어제의 소동 때문인지 경교각 외경대의 복장을 한 자들 수십 명이 떼를 지어 움직이고 있었고, 또 다른 복장의 무사들 역시도 적게는 서넛에서 많게는 십여 명씩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 수를 합하면 족히 수백 명에 달할 정도였다.

아마도 부교주 측은 물론 호교원과 장로원까지 희락교의 패권을 다투는 세력들 전부가 뛰쳐나온 듯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사의 수는 급격히 늘어가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마을을 빠져나가는 게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제기랄!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저 지랄들인지 모르겠네.

부교주 측이나 경찰이 저리 행동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다른 세력들까지 무사들을 동원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이래?”

때마침 객잔 밖에서 검문을 당한 주민 하나가 객잔에 들어서며 투덜거렸다.

“글쎄, 웬 도둑놈이 귀한 물건을 세 가지나 훔쳐갔다는구먼.”

“도대체 얼마나 귀한 것이기에 이 난리란 말이야?”

“천하를 뒤흔들만한 것이라고 하더군.”

“그래?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기에 천하를 뒤흔든다는 말인가?”

“낸들 아나?”

염병할 새끼!

분명 원석중이 부린 수작일 것이다. 이미 부교주가 죽은 마당이니 연판장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이리라. 내가 달아다는 것을 막고 나를 잡기 위해 세 가지 물건에 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흘린 것이리라.

그보다 이제 어쩌지? 이대로는 어렵겠는데?

이제는 외곽통로만이 아니라 마을내부에서도 검문검색이 이뤄지고 있었고, 그도 모자라 객잔이나 식당과 같은 장소에 대한 수색도 시작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뼈도 못 추릴 신세가 될 거라 생각하니 불안감으로 몸이 절로 경직되었다.

이제 곧 자유인이 될 몸인데······. 젠장!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내게 문득 방석호와 심아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그들이라면······.

나는 변장을 한 후 조심스레 객잔을 나서 그들에게 표지를 남기고 은밀히 움직였다. 이동하는 동안 경찰에게 두어 번의 검문검색을 받았지만 다행히 특별한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진심상회란 이름이 제법 도움 되었다.

심재원이 인정을 베풀었다더니······. 아비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딸에게 받을 차례인가?

표지를 남긴지 세 시간 후 방석호와 심아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나쁜 자식아!”

심아연은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검부터 휘둘렀다. 비도야객이란 명성에 걸맞게 상당한 수준의 검술이었다.

이 년이 미쳤나?

나는 벽파보법을 밟아 심아연의 검을 피하고는 빠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마혈을 제압했다.

“왜 이러는 거요?”

“몰라서 물어? 도대체 그동안 뭐하고 있었던 거야? 상회에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놓고선 이제와 나타난 이유가 뭐야?”

심아연이 발끈했다.

“그 일 때문이 아니면 무엇이겠소? 뭐, 말없이 사라진 것은 사과하겠소.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소. 미안하오.”

나는 사과를 하며 심아연의 혈도를 풀어줬다.

“이 개자······.”

혈도가 풀린 심아연이 손을 치켜들었지만 방석호가 제지했다.

“아연! 잠깐만! 그 일이라면······? 혹시 연판장을 찾았습니까?”

방석호가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소.”

“저, 정말입니까? 어디 있습니까?”

“아아, 진정하시오. 정확히 말하면 연판장을 찾은 건 아니오.”

“뭐? 지금 장난하는 거야? 기껏 그딴 소릴 지껄이려고 우릴 부른 거야?”

심아연이 단단히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방석호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지금 웃음이 나와?”

“하하, 미안하오. 연판장은 찾지 못했지만 세 가지 물건은 손에 넣을 수 있었소.”

“세 가지 물건이라면······?”

방석호의 표정이 대번에 바뀌었다.

확실히 큰 인물이 되긴 그른 놈이야.

“그렇소. 왼팔이 떨어져나간 눈물 흘리는 여신상과 교조의 고난이 담긴 8폭짜리 소형병풍 그리고 고대의 문자로 쓰인 표지가 떨어져나간 고서, 이 세 가지가 내 손에 들어왔소. 그걸 손에 넣느라 그동안 연락할 수 없었소.”

“지금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오. 그걸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가지고 다니겠소?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었소.”

“그럼 어제의 소동과 오늘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다 그것 때문입니까?”

뭐, 그렇게 생각하면 좋지.

“그렇소. 그런데 그 때문에 아주 곤란하게 됐소. 나를 찾는 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방법이 없소. 방 공자가 돕는다면 가능할 것이오. 일단 나를 마을 밖으로 내보내주면 세 가지 물건을 주겠소.”

방석호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돕······.”

듣고 싶었던 말을 방석호가 하려는데 심아연이 말을 끊었다.

“안 돼요. 물건부터 넘겨요.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일단 물건을 받아 확인한 다음에 돕겠어요.”

“나를 못 믿는단 말이오?”

“그래요. 이제껏 해온 것이 있는데 어떻게 믿어요. 먼저 물건부터 내놔요. 당신이 가진 물건이 진짜일지 가짜일지 어떻게 알아요?”

영악해. 역시 이놈보다 낫군.

하지만 확인시켜줄 수는 없었다. 세 가지 물건을 가지긴 했지만 연판장 비슷한 것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솔직히 내가 손에 넣은 것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안하지만 나 역시 당신들을 믿을 수 없소. 그리고 약속했잖소. 내 요구를 들어준다고. 지금 그걸 요구하겠소. 설마 그걸 잊은 건 아니겠지요?”

“잊지 않았습니다.”

방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가 다르군요. 그때 분명 연판장을 손에 넣기 전까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나요? 당신 말대로라면 연판장을 손에 넣은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어찌 당신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요?”

심아연이 반박했다.

기억력도 참 좋다.

“험, 뭐, 그,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어차피 세 가지 물건 중 하나에 연판장이 들어있는 것이 확실하니 실제론 연판장을 손에 넣은 것과 다름없지 않겠소?”

“그래서 확인이 필요한 거예요. 연판장을 확인하는 즉시 당신을 마을 밖으로 데려다주겠어요. 그러니 물건이 숨겨진 곳을 가르쳐줘요.”

빌어먹을!

이런 땐 그저 안면몰수하고 철면피가 되는 수밖에 없다.

“싫소. 나를 먼저 마을 밖으로 내보내주면 그때 숨겨진 곳을 가르쳐주겠소.”

“스스로 한 약속을 깨겠다는 말인가요?”

“못 깰 것도 없소. 지금 당장 죽느냐 사느냐 한시가 급한 판에 그깟 약속이 뭐라고 목숨을 걸겠소?”

“뭐? 이 나쁜······.”

심아연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나를 째려봤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휘두를 태세였다.

째려보면 어쩔 건데?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다는 걸 알아야지.

나는 느긋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은 타들어갔다. 언제 포위망이 좁혀올지 모르니 나답지 않게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었다.

“음······. 좋습니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방석호가 입을 열었다.

“공자님!”

심아연이 방석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괜찮아. 날 믿지?”

방석호가 심아연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예······.”

방석호의 손길에 심아연은 마치 말 잘 듣는 강아지라도 된 듯 뺨에 홍조가 드리우더니 살며시 몸을 꼬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것들이 또?

오랜만에 보는 낯 뜨거운 장면에 내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대신 세 가지 물건이 가짜라면 각오하십시오.”

심아연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방석호가 나를 돌아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럴 때 보면 제법 쓸 만한 것도 같은데······.

“알겠소. 날 믿으시오.”

일단 마을 밖으로 나가고 난 뒤에야 가짜든 진짜든 내가 알바도 아니고 네까짓 게 날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나는 방석호의 도움을 받아 마을 밖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과연 경교각주의 아들이란 신분은 대단했다. 물론 처음엔 경찰과 부교주 측 인물들이 지키고 선 그곳을 통과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경교각과 부교주 측이 대립하고 있었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실랑이를 목격한 경교각의 외경대원들이 몰려와 방석호을 지원하면서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결국 통행이 허락되었다.

역에 다다른 나는 열차에 오르기 전 방석호에게 세 가지 물건이 숨겨진 곳을 가르쳐주었다.

“물건은 당신들이 밀회를 즐기던 사당의 신상 밑에 있소. 그걸 노리는 사람이 많으니 들키지 않게 조심하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물건이 가짜라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방석호가 다시 한 번 경고의 말을 꺼냈다.

“후후, 걱정 마시오. 그럼, 잘 있으시오.”

그렇게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열차에 올랐다.

잠시 후 열차가 출발했다. 심아연은 심통이 난 듯 끝까지 나를 째려보기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들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열차의 종착지는 사흘을 더 가야했지만 나는 다음 역에서 내려 마방을 찾았다. 변장을 한 채로 말을 바꿔가며 쉼 없이 이동한 나는 불과 이레 만에 성의 경계에 다다랐다. 정상적인 속도라면 열흘이 넘게 걸리는 장거리였다.

저 멀리 성의 경계가 되는 강줄기가 보였다.

이제 저 강만 넘으면 안전지대다. 곡주에게 보고하고 나면······. 나는 자유인이 된다. 성우야, 기다려라. 이 사부가 간다.

나는 부푼 마음으로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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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역정(刺客歷程)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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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일러두기] +1 18.04.16 3,990 0 -
152 후기 +4 19.03.27 1,523 11 7쪽
151 82. 종국 19.03.27 1,688 12 20쪽
150 81. 발견 19.03.27 1,159 17 34쪽
149 80. 귀환 +1 19.03.17 1,325 19 31쪽
148 79. 혈전 +3 19.03.11 1,286 23 22쪽
» 78. 탈주 19.03.07 1,281 20 22쪽
146 77. 임무완수 19.03.02 1,348 21 27쪽
145 76. 접촉 19.02.24 1,304 20 22쪽
144 75. 쟁탈전 19.02.19 1,336 20 19쪽
143 74. 물건의 행방 19.02.15 1,369 21 17쪽
142 73. 암시장 19.02.11 1,439 19 15쪽
141 72. 반전 +2 19.02.01 1,554 18 25쪽
140 71. 전달자 2 +2 19.01.28 1,513 15 19쪽
139 71. 전달자 1 19.01.24 1,485 22 17쪽
138 70. 시험 19.01.22 1,449 22 17쪽
137 69. 거래 +2 19.01.18 1,509 24 18쪽
136 68. 구원 19.01.15 1,459 20 13쪽
135 67. 위기 19.01.12 1,561 20 13쪽
134 66. 도둑의 사정 2 19.01.09 1,475 21 10쪽
133 66. 도둑의 사정 1 19.01.07 1,488 21 15쪽
132 65. 희락교 7 +2 19.01.03 1,497 21 15쪽
131 65. 희락교 6 18.12.31 1,491 20 11쪽
130 65. 희락교 5 18.12.28 1,566 20 15쪽
129 65. 희락교 4 18.12.26 1,588 19 12쪽
128 65. 희락교 3 18.12.24 1,607 24 17쪽
127 65. 희락교 2 18.12.21 1,572 19 16쪽
126 65. 희락교 1 18.12.19 1,637 18 12쪽
125 64. 임무복귀 2 18.12.03 1,778 2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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