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사랑사람의 서재

하늘을 등지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방구석4평
그림/삽화
lovendpeace
작품등록일 :
2019.12.26 00:03
최근연재일 :
2022.08.09 01:45
연재수 :
277 회
조회수 :
27,428
추천수 :
1,600
글자수 :
1,201,430

작성
20.06.28 00:40
조회
87
추천
7
글자
9쪽

Episode92_붉은 안개가 하늘에 비치면

DUMMY

정창의 꼴이 말이 아니다. 이리도 비참한 패배를 맞으면서 얻은 것은 하나 없었고, 그들은 무사히 도주해버렸다. 이제 그에겐 볼 수 있는 눈 하나도 남지 않았다.


검은 화면을 가까이 하니 허무하게도 잡생각만이 계속 떠올라 그 심상의 지루함을 달래고 있다. 이전에 그리도 빠졌으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언젠가 읽었던 책의 구절이 하나 생각나는 것이다.


—우리는 모습이 다른 자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다르다고 느끼는 자와는 결코 화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모두는 스스로의 눈을 찔러라. 눈이 먼 장님 비렁뱅이가 되도록 하라. 고통을 이겨낸 그들의 구걸은 미덕이며 고결하기까지 하다.


장님에게는 모든 것이 평등하다. 외모도, 피부색도, 체형도, 종족도 모두 알 바가 아니다. 돈을 준 자에게 감사하고 말을 나눈 상대와는 행복해진다.


자신의 삶이 혼자만의 것이라 착각하는 우리네와 달리, 그들은 자신이 남의 도움으로 산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낀다. 지극히 솔직하게 타인의 호의에 감사할 줄을 아는 것이다.


장님을 찬미하라, 무지를 찬양하라. 눈이 먼 사람이 되어라. 평등히 사랑할 줄을 알아라...—


이런 상황에서 생각난 것이 이 부분이라니, 하필이면 참으로 적절한 문구를 떠올려버렸다. 본의와는 꽤나 다른 상황이지만, 어찌 되었든 그도 이젠 말 그대로의 장님이 되지 않았던가.


그래, 그래서 그가 이젠 남을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지가 궁금한가?


다 의미 없는 것이다. 그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안구가 멀쩡할 적에도 미움과 증오에 눈이 멀었으니 말이다.


애초부터 그는 사람이건 돌가죽이건 모습이 다르다고 차별할 일도 없었다. 모두를 밀어내고 미워하고 피해다녔는데, 둘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뭔가가 달라질리가.


평등한 증오. 그것이 정창이 여지껏 살아오면서 쌓아온 그만의 신념이자 또한 행동원칙이었고, 그 행동원칙이란 그에게 하여금 다음의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옆춤에 묶어둔 작은 꾸러미에서 작은 막대 하나를 꺼냈다. 빨간 몸체에 양쪽 끝에는 심지가 하나씩 붙어있는 길다란 원통형 생김새, 그가 죽인 상대의 집 창고에서 빼앗아온 살육의 전리품이다.


그러나 본디는 한 고물더미 연구소의 창고에 박혀있던 것이며, 자전거를 좋아하던 노인의 수집품이던 물건이다.


정창은 이것의 정체를 알고 있다. 이것은 신호탄, 그것도 전쟁 신호를 내뿜는 신호탄이다. 돌가죽 혁명군이 인간 군대로부터 강탈한 것이 몇 개 쯤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그 사용법도 알 수 있었다.


신호탄을 힘껏 바닥에 주욱 긁자, 불이 날 리도 없는 이 부드러운 땅에도 불씨가 튀며 심지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 하늘 위를 겨눈 후, 반대편에 난 줄을 힘껏 당겼다.


동시에 그 심지의 불씨가 막대의 안으로 파고들더니 그대로 폭약을 터트렸고, 그 끝에서 붉은 연기가 터져나오며 하늘 위로 긴 꼬리를 남기며 치솟았다.


이 신호는 널리 널리 퍼져서 곧 거대한 파장이 되어 그들을, 어쩌면 세계를 덮치고 말 것이다.


과연 이 신호탄 한방이 그들을 파멸로 이끌어갈 수 있을까? 아니면 늘 그랬듯이 놈들은 이번에도 이리저리 피해갈까.


“...흐, 어찌되건 상관없지...”


이제 다 필요 없다. 사루비란 놈이 그리도 별 볼 것 없는 하찮은 자임을 알았으니, 그들에 대한 집착도 이제 사그라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젠 그게 누구든, 뭐든··· 그냥 죽어만 주면 그걸로 좋다. 싸워라! 찔러라! 죽여라! 그러면 이제 더 여한이 없으니.


...여한이라.


그제서야 정창은 자신에게 정말 그 무엇도 미련이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는 자유였다. 어느 때보다도 자유였다.


인간에게 메인 족쇄는 진작에 벗어냈다. 돌가죽 혁명단에서는 진작에 도망쳤다. 이제 그 무엇도 그를 잡아채고 길을 막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눈이 먼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는 정말 그 무엇에도 메일 것이 없었다.


말 했듯, 인간이고 돌가죽이고 상관이 없다.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구분할 리가 있겠는가. 정창은 더 이상 살의도 품을 수 없으며 그들을 쫓아 죽일 수도 없다.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살육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니, 업보로 받은 장애 치고는 참으로 고마운 것 아닌가.


장님이 된 정창은 그렇게 외로이, 비틀대며 발을 옮겼다. 이제 그 앞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엇이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불안한 여행길이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어디를 가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의 눈에 비치는 목적지는 이제 더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는 그저 걸었다. 앞으로 계속 걸었다. 그리고 수풀 속에 들어가, 그의 후각을 스치는 시고 달큰한 냄새를 찾아 헤메었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한 허기를 채워줄, 붉고 단단한 무화과 나무를 찾아서. 정창은 그렇게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져 그 자취를 감추었다.



***



붉은 신호탄은 인간에게나, 군대에게나, 혁명군에게나, 똑같은 뜻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즉 전쟁 선포의 신호다. 사방 백리를 넘어 온 세상에 널리 퍼지는 그 경고가 지금 그들의 눈 앞에 있다.


사루비는 어째선지 무지하게 당황하여 거칠게 숨을 고르고 있다. 듣는 왕눈이 괴물도 같이 미쳐버릴 지경인지라, 일단 최선을 다해 그의 동료를 진정시키려 했다.


“걱, 걱정 말아봐! 신호탄 터졌다고 다 전쟁 나는게 아냐! 세상엔 군대가 주둔된 곳보다 없는 곳이 더 많단 말이다! 전쟁이 터진다는 보장도 없고 터져도 그 전에 충분히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거야!”


“예··· 예, 알겠습니다. 알겠··· 후우. 네...”


그 말에 따라 사루비는 너무 큰 걱정은 접어두고 우선 하온에게 가는 것을 우선하기로 했다. 다시 심호흡을 쉰 뒤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시 생각해보니 마침 지금은 막 동이 튼 새벽이 아닌가. 깨어있는 이들도 얼마 없을테니 운이 좋다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한편 왕눈이 괴물은 일단 몸 속에서 지도를 꺼내들어 이곳이 어딘지를 살폈다. 주변의 지형을 보아하니 이곳은 언덕, 북쪽에는 얕은 산이 있고, 저기는 숲이 우거졌군. 작은 냇물도 한줄기 흐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큰 건물 하나가 있는데, 저토록 낡아뵈는데도 부서지거나 헐은 곳 하나 없는 것을 보자면 분명 황금시대에 지어진 것이 틀림없다. 그 주변에 진지가 여러개 설치된 걸 보면 꽤나 중요설비인 듯 한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따라 지도상 위치를 가늠해보았다. 그러나 뭔가가 이상하다. 목적지 부근에서 정신없이 도망치다 이르른 곳이니 분명 그 근처일 터인데, 이곳과 일치하는 지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때 문득 눈에 스쳤던 것이 지도 위에서 가장 큰 빨간 X자 표시. 목적지를 표기하는 그 큰 표시를, 정확히는 그 밑에 가려졌을 지형을 예상하며 자세히 관찰했다.


다음 순간 왕눈이 괴물이 어째선지 무지하게 당황하여 거칠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듣는 사루비도 같이 미쳐버릴 지경인지라, 그 역시 최선을 다해 동료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괴물의 숨소리가 잦아들 생각을 않는다. 그러더니 대뜸 사루비의 눈 앞에 지도를 들이댄다. 뭔가 해서 잠시 멈추고 함께 그 종이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젠 사루비의 심장도 마구 뛰더니 거친 숨으로, 잔뜩 당황하여 어지러운 시야로 발을 달려 일행을 향해 날랐다.


“하온——!! 일어나라!!!”


그들이 있는 장소, 이 지형, 모든 것이 겹치는 지도 상의 위치.


그 곳은 다름이 아닌 그들이 찾아 마지않던 바로 그 목적지, 무한동력장치가 있는 연구소의 바로 앞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옆에 멀찍이 보이는 저 낡은 황금시대의 건축물, 바로 저것이 그 문제의 연구소다. 정신없이 길을 달려오는 동안 그들이 어찌나 빨랐던지, 어느새 목표의 바로 앞에 도착하고 말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알아챘어야 했다. 정창이 어찌 그들이 여기에 도달하리라 예측했겠는가. 반역자들의 목적지인 여기서 기다린다면 당연히 그들을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아니었겠던가.


그들은 이미 바라던 곳에 도착했지만, 지금만큼은 하나도 기쁘지 않다. 정말 하나도 안기쁘다. 미칠 것만 같다!


이런 중요한 시설이라면 근처에 군대가 잔뜩 깔려있을 것 아닌가. 그들의 주의를 왕창 끌어들였으니 큰일이다.


하필 이런 중요한 순간에, 이토록 중요한 곳에서 이토록 두려운 일이 터졌단 말이냐!


제발, 하온이 뭔가 좋은 생각을 떠올려줬으면 좋겠다. 뭔가 생각이 있어다오. 하온, 하온!


작가의말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안타깝게도 학점은 죠졌습니다. 업보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 덕에 일행이 여기까지 도달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 커다란 변화가 정체를 드러났으니, 다음 화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하늘을 등지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05 Episode105_대전투(13) +4 20.08.16 69 5 14쪽
104 Episode104_대전투(12) +1 20.08.15 76 4 10쪽
103 Episode103_대전투(11) +4 20.08.13 68 4 10쪽
102 Episode102_대전투(10) +1 20.08.09 72 5 9쪽
101 Episode101_대전투(9) +2 20.08.07 78 4 10쪽
100 Episode100_대전투(8) +3 20.08.07 70 4 9쪽
99 Episode99_대전투(7) +2 20.08.02 76 4 11쪽
98 Episode98_대전투(6) +3 20.07.31 72 3 9쪽
97 Episode97_대전투(5) +3 20.07.30 67 4 11쪽
96 Episode96_대전투(4) +3 20.07.26 92 4 10쪽
95 Episode95_대전투(3) +4 20.07.24 97 5 10쪽
94 Episode94_대전투(2) +5 20.07.10 87 6 6쪽
93 Episode93_대전투(1) +3 20.07.01 117 6 8쪽
» Episode92_붉은 안개가 하늘에 비치면 +2 20.06.28 87 7 9쪽
91 Episode91_해가 번쩍이는 순간(7) +3 20.06.20 109 4 14쪽
90 Episode90_해가 번쩍이는 순간(6) +1 20.06.19 79 6 8쪽
89 Episode89_해가 번쩍이는 순간(5) +4 20.06.18 82 6 9쪽
88 Episode88_해가 번쩍이는 순간(4) +1 20.06.14 106 6 8쪽
87 Episode87_해가 번쩍이는 순간(3) +2 20.06.12 88 6 8쪽
86 Episode86_해가 번쩍이는 순간(2) +2 20.06.08 71 5 9쪽
85 Episode85_해가 번쩍이는 순간(1) +2 20.06.05 77 5 8쪽
84 Episode84_전투의 무게(11) +4 20.06.04 83 6 10쪽
83 Episode83_전투의 무게(10) +4 20.05.31 91 5 14쪽
82 Episode82_전투의 무게(9) +4 20.05.27 81 5 8쪽
81 Episode81_전투의 무게(8) +3 20.05.25 84 4 11쪽
80 Episode80_전투의 무게(7) +2 20.05.24 142 6 11쪽
79 Episode79_전투의 무게(6) +3 20.05.22 95 7 12쪽
78 Episode78_전투의 무게(5) +2 20.05.18 81 6 11쪽
77 Episode77_전투의 무게(4) +1 20.05.17 80 5 8쪽
76 Episode76_전투의 무게(3) +1 20.05.16 73 6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