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YADA 님의 서재입니다.

동쪽의 나라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YADA
작품등록일 :
2023.11.22 15:06
최근연재일 :
2024.04.03 17:00
연재수 :
62 회
조회수 :
320
추천수 :
3
글자수 :
344,696

작성
23.11.22 15:23
조회
6
추천
0
글자
14쪽

소우와 바림

DUMMY

소우의 예상대로 잔뜩 배가 부른 골패는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는 대문 옆에 가만히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바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반시진이 지나도록 골패가 얌전한 것을 확인한 소우는 그제야 안심하고 그때까지 미뤄뒀던 집안일을 해치웠다.


골패의 집은 광인과 그의 가련한 딸의 기구한 인생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꽤 크고 훌륭한 저택이다. 안뜰에 뒤뜰까지 있고, 가족들이 머무는 방은 물론, 객과 하인들이 묵는 방까지 있다. 소우가 부엌과 변소를 제외하고 그 모든 방을 세어보니 전부 7개나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집에 머무는 사람은 주인이 골패와 그의 딸 바림, 그리고 객인 소우뿐이다.


서천강에서 목숨을 건진 뒤, 기력을 되찾은 소우가 가장 처음 한 일은 이 크고 훌륭한 저택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바림 혼자서 아버지를 건사하며 이 넓은 집을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골패의 저택은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마치 주인 없는 집처럼 서늘한 기운을 뿜어댔다. 해가 뜨는 대낮에도 마치 저택 위에만 먹구름이 드리운 것처럼 어두침침했다.


소우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대청소에 돌입했다.


뽀얗게 쌓인 먼지와 눈이 닿는 곳마다 걸린 거미줄을 치우고, 켜켜이 쌓인 벌레 시체들을 쓸어 모았다. 시든 화원에는 물을 듬뿍 주고, 고목들은 과감히 베어냈다. 어떤 날은 종일 손에 걸레를 들고 광이 나도록 닦고 또 닦았다. 부서진 지붕과 바닥을 보수하고, 기울어진 대문 문도 보기 좋게 고쳤다.


장장 일주일 만에 대청소가 끝났다. 집은 생명을 되찾았다. 집 안에는 온기가 은은하게 맴돌았다.


소우는 그날 바림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온 집 안을 구석구석 살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눈동자는 축축해졌다. 울음을 참듯 굳은 표정으로 그녀는 집안 곳곳을 착실히 눈 안에 담았다.


그리고는 마침내 소우를 향해 활짝 웃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소우는 평생 그날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거짓말처럼 집을 드리운 어둠이 사라지고 햇살이 바림에게 쏟아졌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햇빛을 만나 불꽃처럼 부서지며 소우의 눈동자에 물밀 듯 밀려왔다.


그저 빚진 목숨 값을 갚기 위해 한 일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소우는 바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했다.


좀처럼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바림이었지만, 눈치 빠른 소우는 기어코 그녀의 필요를 찾아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바림의 행복이었다. 그녀가 지금 가진 것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을 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적은 걱정은 덜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면 바림의 삶이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에 가까워지리라, 그는 믿었다.


집안일을 모두 끝내고 나니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소우는 잠시 잊고 있었던 골패를 살피러 갔다.


다행히 그는 대문 옆에 망부석처럼 앉아있었다. 소우가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지켜보니,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소우는 골패 옆에 나란히 앉아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며 그가 바라보는 풍경을 바라봤다. 온 마을이 잔치를 준비하는 듯 사람들마다 들뜬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소우와 골패가 낄 틈은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웃는 낯으로 잔치에 대해 떠들면서도 소우와 골패를 곁눈질하며 불쾌한 심상을 숨기지 않았다. 저리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는데, 그 뜻을 어찌 모를까? 그러나 소우는 골패에게만은 그 뜻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도 잔치에 가면 좋겠어요.”


골패는 고개를 모로 숙인 채로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며 지리멸렬한 말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바림과 같이 한 상에 둘러앉아서 먹고 마시면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요.”


“아가야, 아가야.”


그러자 골패가 기다렸다는 듯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뭐예요? 간밤에 한숨도 못 잤네.”


골패는 대꾸 없이 노래만 지절거릴 뿐이다. 소우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바람이 어렸을 때 불러주시던 건가······” 그러고는 골패를 일으켜 세웠다.


“이제 들어가요.”


골패는 버릇처럼 버둥거렸다. 소우는 힘으로 그를 안뜰까지 몰아붙이고 얼른 대문을 닫았다.


“당분간은 정말 얌전히 계셔야 해요. 어제처럼 또 서천강에 가서 사고 치시면 곤란해요.”


골패가 유독 집착하는 것 둘이 있는데, 바림과 서천강이다. 그 집착 덕분에 소우가 목숨을 건졌지만, 그 고약한 집착 때문에 소우는 사흘에 한 번씩은 서천강변을 달려야 했다.


미친놈은 원래 물을 좋아한다며, 내버려 두면 서천강에 빠져 죽을 테니 잘 된 것 아니겠냐는 몹쓸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우가 서천강에서 득달같이 골패를 잡아오는 이유는, 그 말 그대로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다.


“아저씨가 그렇게 가 버리면 바림이 많이 울 거예요.”


소우는 골패를 침실까지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미리 끓여놓은 탕약을 그에게 먹였다. 골패가 입을 꾹 다물고 도리질을 치자 소우는 아예 그의 턱을 붙잡고 입 안으로 탕약을 억지로 흘려 넣었다.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약을 먹은 지 꼬박 1년째라는데도 차도가 없다. 돌팔이 의사에게 돈을 갖다 바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골패의 광증이 워낙 극악해 약효를 못 보는 것인지.


그래도 약을 먹으면 잠시나마 기운을 잃고 잠에 빠진다. 소우의 부단한 노력으로 탕약을 전부 비운 골패는 여지없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소우는 골패를 침상 위에 눕히고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아가야, 아가야. 잘 잔다, 아가야.”


어느새 골패의 자장가가 입에 붙었다. 골패는 소우의 손에 자신을 맡긴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소우는 죽은 듯 창백한 그의 얼굴을 보며 빌었다. 오늘은 좀 더 오래, 좀 더 길게 자기를.




“어휴, 허리가 부러진다, 부러져.”


놋그릇을 닦던 도도가 뻐근한 허리를 쭉 펴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리고는 별말 없이 그릇을 닦는 바림의 옆구리를 툭 쳤다.


“우리 좀만 쉬자.”


“이것만 다 하고.”


바림이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하자, 도도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마지못해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러나 불평불만을 그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너 어제 교족들 봤니? 나는 봤잖아. 정말 많더라. 먹기는 또 얼마나 먹어대는지, 혼자서 갈비를 여섯 대를 뜯는 사람도 봤어. 누구는 없어서 못 먹는 그 귀한 고기를 말이야.”


“덕분에 우리도 콩고물 얻어먹잖아. 게다가 내일부터는 온 동네 사람들 다 배부르게 먹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다. 아저씨를 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이렇게 와서 품삯도 벌고 말이야.”


바림이 빙긋 웃었다.


“소우가 고생이 많아. 그래서 오늘은 소우가 좋아하는 것들만 잔뜩 가져가려고.”


도도도 마주 웃었다.


“시해 어르신이 참 손이 크셔.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와서 좋은 마음으로 일도 돕는 거지.”


“힘들다, 어쩌다 할 때는 언제고.”


시해는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착실하게 모아 온 재산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거상이라는 명성을 들었다. 그는 성실하고 정직한 태도로 거래 대상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했고, 그 덕에 그의 가문과 재산이 손해를 보는 일은 없었다.


그의 거래 대상 중, 그가 가장 신뢰하는 이들이 바로 교족이었다. 교족은 그들에게 수괴라는 진귀한 상품을 공급해 줄 뿐 아니라, 마계와 인계 곳곳을 누비는 시해의 상단 경호까지 담당한다.


시해는 상단이 인계에서 돌아올 때마다 함께 고생한 교족을 자기 집으로 초청해 일주일간 잔치를 연다. 그동안 교족들은 물론, 단조마을 사람이라면 거지까지도 포식하니, 교족들이 온다 하면 마을 주민들의 마음이 들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 그런 얘기도 들었어. 우리 어머니가 한 말인데······”


도도가 갑자기 눈치를 한 번 쓱 살폈다. 바림도 따라 주변을 둘러봤다. 온 동네에서 불려 온 여자들이 저마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잔치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시해의 남종들이 부엌을 오가며 무거운 식재료와 물을 나르면, 여자들은 기름 냄새를 풍기며 커다란 냄비에 지지고 볶는다. 부엌에서는 날카로운 여자들의 목소리와 칼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 무쇠 냄비와 솥이 철컹대는 소리는 얼핏 전쟁터까지 떠올리게 한다.


“도도, 설거지 끝났으면 와서 손 좀 보태라!”


부엌에서 도도의 어머니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요!” 도도는 대충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전번보다 교족들이 많은 이유가 신붓감 때문이래.”


“그래?”


바림의 덤덤한 표정에도 도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선을 떨었다.


“교족들이 좀 사납기는 해도 제 아내한테는 그렇게 잘한다더라. 수괴 사냥으로 돈도 많이 벌고.”


“수괴한테 하도 잡아 먹혀서 청상과부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도도가 화들짝 놀라서는 목소리를 낮췄다.


“말 조심해. 교족들이 귀가 얼마나 밝은데.”


“냄새만 잘 맡는 줄 알았지.”


바림은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도도는 그제야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알지. 너한테는 소우밖에 없다는 거. 그냥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거야.”


그 말에 바림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도도의 어깨에 제 어깨를 치댔다.


“나는 여기가 좋아. 이제 겨우 마음 붙이고 살고 있는데 떠나기 싫어. 너야말로 어때?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던?”


도도는 얼굴을 붉히며 어딘가를 힐끗 쳐다봤다. 바림이 따라 쳐다보자 도도가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말렸다.


“교족 남자들이 꽤 잘생겼더라. 유족 남자들은 타다 남은 나뭇가지처럼 빼빼 말랐는데, 교족 남자들은 덩치도 좋고 목소리도 우렁차고. 호랑이는 맨손으로 잡는다더니······”


바림이 피식 웃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니?”


그러나 도도는 한껏 들떠서는 얼굴까지 붉히며 교족 남자가 얼마나 좋은 신랑감인가에 대해 주절주절 읊어댔다.


도도는 바림과 마찬가지로 올해로 15되는 소녀다. 혼인을 치르자면 아직 이른 나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이를 낳을 준비는 충분히 되었으니, 그녀의 부모는 좋은 혼처만 나타나면 언제든 딸을 보낼 것이다.


도도에게는 이미 자식을 둘이나 낳은 오라비가 있고, 밑으로는 두 살 터울 동생에 아직 기어 다니는 막내까지 있다. 도도의 아버지는 시해의 밑에서 일하며 부족함 없이 가족들을 키웠지만, 시해의 어머니는 아직 젊고 건강하니 앞으로 자식 둘은 더 낳을 것이다.


도도는 시집가고 싶다는 말을 버릇처럼 해댔다. 동생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사느니 하루라도 빨리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림은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다. 그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정신이 없는 아버지와 덩치만 큰 집밖에 없다. 그 집을 팔면, 상당한 돈을 받을 수 있겠지만 아마 그 돈의 대부분은 효과도 없는 아버지의 약을 사는 데 쓰일 것이다.


바림은 평생 아버지를 모시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바림의 형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도도는 물론, 단조 마을 사람들 모두 바림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지만, 마땅히 그녀를 도울 길이 없었다.


오히려 바림 덕분에 그나마 골패가 마을에 큰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으니, 바림이 아버지를 두고 마을을 떠나 시집을 가버린다고 하면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바림의 처지를 모두 이해하고 그녀의 골칫덩어리까지 함께 짊어질 남자가 단조마을에 있냐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도도는 생각했다.


‘정말 소우밖에 없을지도······’


효심 깊은 바림을 어여삐 여긴 하늘이 그녀를 위해 보랏빛 날개를 단 신랑감을 보내 줄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래, 너한테는 소우가 있으니까.”


“소우 얘기는 그만 해.”


바림이 눈을 내리깔고는 웅얼댔다. 도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소우한테 잘해. 얘가 인물은 그래도 훤하잖니? 성격도 순하고 얼마나 착해. 골패 아저씨한테도 잘하지?”


“으응······”


바림은 더 얘기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릇을 박박 문질러댔다. 도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릇에 구멍 뚫겠다.”


“이봐요.”


웬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도도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교족이었다. 남자는 담벼락에 삐딱하게 기대서서는 노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는 도도와 바림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뒷간이 어디예요? 집이 하도 넓어서 말이지.”


도도는 웃지도 않고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턱짓으로 어딘가를 대충 가리켰다. “저쪽 어디에 있어요.” 그러나 남자는 포기할 줄 몰랐다. “그렇게 말해서야 아나?” 도도가 바림을 쳐다보자 바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빨리 가 봐.”


그제야 도도가 무거운 엉덩이를 천천히 일으켰다. 그녀는 마지못한다는 표정으로 앞치마에 손을 닦고는 남자를 데리고 사라졌다.


고개를 숙인 채로 눈만 치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바림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못 알아본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동쪽의 나라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23.11.22 6 0 12쪽
4 잔치 23.11.22 5 0 13쪽
» 소우와 바림 23.11.22 7 0 14쪽
2 자장가 +1 23.11.22 10 1 13쪽
1 서천강에서 태어난 소년 23.11.22 23 2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