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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아이넬라 크로니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중·단편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12.22 13:24
최근연재일 :
2020.11.24 17:15
연재수 :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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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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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0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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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쪽

그 하늘에 기도를(2)

DUMMY

이사가 이상한 질문을 던진 것은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마치 꿈처럼, 혹은 악몽처럼, 두 사람 모두 그 날의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잊은 것은 아니다. 그 날 이후로, 리이는 어떤 작은 소망조차도 입에 담지 않았으니까. 농담삼아, 혹은 지나가는 말이라도 '내일 아침은 화창한 날씨였으면 좋겠어요' 같은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이사는 조금 슬픈 눈을 하면서도, 그 모습을 보며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조금쯤 불안요소를 머금고 있을지언정, 지난 열흘간 이사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루하고 따사로운 정적이 리이의 작은 집을 채웠다.

찾아오는 이가 드물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외부로부터 말썽거리가 찾아올 일이 적다는 것이다.

한 번 금이 간 얼음판이 다시 원래대로 단단히 붙으려면 시간이 필요한 법. 이사는 자신의 실수로 균열이 간 살얼음이 다시 단단히 얼어붙기를 바라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려던 평화를 꼭 움켜쥐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들어오는 것이 없다면, 지속적으로 소모되는 것이 다시 채워지는 일도 없다. 보다 단순히 말하자면 먹을 것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열흘 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도 리이의 손에 짐꾸러미가 가득 들려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리이가 식량을 사 둔 것은 그보다도 더 오래된 일이라는 것이며, 수레나 마차를 이용해 대량의 짐을 나를 수 없는 리이가 장을 봐 뒀다면 그 양은 분명 얼마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열흘이나 버틴 것도 두 사람이 생각 이상으로 소식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사. 같이 장 보러 갈까요?"


해가 뉘엇 뉘엇 넘어갈 무렵, 저녁을 차리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던 이사는 조금 미안한 얼굴을 한 채 되돌아나왔다. 아무래도 먹는 입이 늘어난 만큼 식량의 소모가 빨라진 것을 넉넉히 계산하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 이사는 싫은 기색 없이 끙끙거리며 쥐고 있던 매듭을 내려놓았다. 혼자 집 안에 남아서 엉성하게 맺어진 매듭과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싫은 일인데다가, 앞을 보지 못하는 리이를 혼자만 보내는 것도 탐탁찮았다. 따라가서 짐이라도 들고 이야기나 나누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리이는 이사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한 구석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지팡이를 찾았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이미 훤히 하는 집 안에서는 쓸 일이 별로 없지만, 사람들이 오가고 잡다한 물건들이 수시로 재배치되는 시장에서는 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눈이다. 하지만 그녀가 지팡이를 놔 두었던 곳까지 가는 것보다 먼저 익숙한 감촉이 손끝을 스쳤다. 이사가 한 발 먼저 지팡이를 떠올려 가져다준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이사가 리이의 손을 다짜고짜 덥썩 잡는 바람에 서로가 깜짝 놀랐던 것을 떠올린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며 가볍게 손을 쥐었다. 이제는 이사도 리이를 함부로 끌어당기지 않고 적절히 안내하는 법을 배웠다.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리라.


이사의 안내는 단순히 길을 찾기 쉽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리이는 보다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쉽게 걸음을 내딛는 자신을 보며 내심 놀라움을 삼키고 있었다.

이렇게 편안하게 집 밖을 나서는 것도 얼마만일까.

조심조심 길을 나서던 때와 똑같은 길인데도 지팡이 끝에 닿는 감촉은, 훨씬 부드러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이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짧게 중얼거렸다.


"작아. 애들인가? 하나, 둘, 셋. 세 명이야. 놀러 나온 걸까? ······리이?"


부드럽던 분위기가 갑자기 뒤틀렸다. 가볍게 소맷단을 쥐듯 맞잡고 있던 손가락이, 어느새 강철로 만든 덫처럼 이사의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긴장.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 마치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를 마주한 듯 얼어붙은 리이는 어느새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짓눌려 하얗게 질려버린 입술이 파르르 떨다, 힘겹게 작은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이, 이사······. 도, 돌아가요. 다른, 다른 길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이사는 대답보다도 먼저 몸을 돌려 리이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러나 아직 해는 지지 않았고, 이사가 마을 아이들을 볼 수 있었던 만큼 그들 역시 이사와 리이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잘 익은 열매가 떨어진다는 등 훈훈한 이야기와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명백한 적대감을 휘감은 바람소리였다. 이사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떨어지는 것은 소름끼치게도 주먹만한 크기의 돌멩이였다.


다행히 거리가 멀고, 아직 어린 아이들의 힘으로 던진 것이었기에 대부분의 돌은 절반 정도 날아온 뒤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장난이라 웃어넘기기에는 지독한 만행이다. 게다가 아이들 가운데서도 힘이 좋은 몇 명은 기어이 두 사람의 발치까지 돌을 날려보내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그 때 딱, 하며 지팡이에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사는 그 소리를 듣고 하얗게 질린 리이를 끌어당겨 나무 뒤로 몸을 숨기게 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몸이 얼어붙은 리이는 제대로 걸음을 떼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가 귀를 찢고 말았다.


"아아악!"

"맞았다!"


멀찍이서 환호성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리이의 몸이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신음소리조차 내기 두려운 듯, 리이는 옷자락을 질끈 깨문 채 상처를 감싸쥐었다. 하지만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아무리 상처를 틀어막으려 해도, 헝클어진 적포도주 빛의 머리칼 아래로는 그보다 더 붉고 끈적한 액체가 고집스레 흘러나왔다.


"리아, 리아! 괘, 괜찮아?"


"저, 저는 괜찮······."


떨리는 목소리는 미처 말을 끝내지 못했다. 꾹꾹 눌러 참으려 해도 눈물과 함께 터져버린 울음소리가 서럽게 젖어든 탓이었다. 하지만 길거리를 가로막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라도 되는 것인지, 흐느껴 우는 리이를 노리며 여전히 큼직한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연이어 날아든 돌멩이가 리이의 손등이나 정강이를 때리며 하얀 피부 위로 순식간에 울긋불긋한 멍자국을 새겼다.


보다못한 이사가 발끈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그것을 선전포고로 받아들인듯,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던 돌멩이들이 이사를 향해 표적을 바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날아오는 돌멩이들을 노려보던 이사는 자리를 피하는 대신, 거슬리는 것을 쳐내듯 한 팔을 휘둘렀다.

탁! 놀랍게도 이사를 향해 날아들던 돌멩이는 단숨에 그녀의 손에 붙들렸다.

우연? 아니, 이사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숨에 증명해보였다.

둘, 넷, 열, 그리고 스물. 빗발치는 돌멩이를 하나 하나 쳐내거나 잡아보인 이사는 마지막으로 잡아챘던 돌멩이를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마치 무릿매를 벗어난 것처럼 맹렬하게 허공을 찢은 돌멩이는 막 어느 소년의 손에서 날아오른 돌멩이를 정통으로 맞췄다.


"와아악! 쟤, 쟤 뭐야!"


부딪힌 돌들은 쪼개지거나 부서진다기보다는 거의 폭발하며 산산조각난 파편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돌로 돌을 맞춘 것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신기(神技)인데, 하물며 두 돌이 동시에 모래알처럼 박살날 정도의 힘이라면 몸에 직접 맞았을 때는 말할 것도 없다.

가까스로 빗발치던 돌비가 멈췄다. 사람에게 직접 돌을 던질 정도로 독이 오른 아이들이라고 해도 순간적으로 엄습한 죽음의 위협 앞에서는 기를 펼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제서야 이사는 리이가 이렇게 늦게 길을 나선 이유를 뒤늦게 눈치챘다.

해가 지면 장사꾼들도 대부분 자리를 파하고 돌아간다. 하지만 아이들은 보통 그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니, 저 아이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그나마 적은 때를 고르려면 이렇게 황혼이 드리울 무렵을 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리이의 행동에 대한 인과다. 그보다 앞선 전제, 즉, 아이들이 리이를 공격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사는 금빛의 눈을 싸늘하게 불태우며 일갈성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들이야!"


그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작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동시에 이 세상이 지르는 포효였다.

분노로 가득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온 순간 하늘이 함께 분노하는 것처럼 마른 천둥소리가 귓청을 때렸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그밖에 그토록 커다란 소리를 낼 수 있는 다른 무언가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온 몸을 뒤흔드는 소리의 폭력에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마, 마녀······."


그나마 그 가운데서도 머리가 조금 굵은 아이는 상황이 조금 나았던 것일까. 더듬거리며 간신히 한 단어만을 꺼낸 소년은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면서도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어이 이사를 손가락질 하며 다시 한 번 비명처럼 외쳤다.


"마녀가 악마를 불렀어······! 악마다, 악마야!"


그 외침이 몸을 묶는 공포를 깨뜨린 것일까. 가까스로 새어나온 한 소년의 목소리가 침묵의 마법을 거두어갔다.


"엄마아아아! 도망쳐!"

"우아아아아아아! 악마, 악마아! 싫어어어!"


누가 악마인 것일까.

앞도 보지 못하는 소녀에게 돌을 던진 사람. 그리고 그런 소녀와 그 소녀를 지키려 했던 사람.

이사는 순식간에 흩어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흠칫 놀라며 다시 리이에게 몸을 돌렸다. 머리가 깨졌다면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겨를이 없다. 아직도 흐느끼는 리이를 잠시 지켜보던 이사는 '미안. 잠깐만'이라고 중얼거린 뒤 몸을 숙였다.

잠시 후, 리이는 머리 하나는 작은 소녀의 품에 번쩍 들려 안기게 되었다.


"흐아앗? 자, 잠깐, 이, 이사에요?"


"나 힘 세. 잠깐만 참아."


"내, 내려 주, 주세요······!"


이사는 리이의 말을 못들은 척 하며 꿋꿋이 걸음을 딛었다. 방향은 이제까지 걸어왔던, 조금 전 악랄한 아이들에게 가로막혔던 바로 그 방향. 하지만 같은 것은 방향 뿐이었다.

질주하는 바람. 드높은 산의 정상으로부터 능선을 따라 맹렬히 흘러내려 평원의 밀밭을 뒤흔드는 날개없는 새. 혹은 영원히 자리잡을 듯한 밤을 집어삼키며 누구보다도 빠르게 하늘을 뒤엎어버리는 여명의 빛.

조그만 소녀의 다리가 내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가 질풍이 되어 리이의 얼굴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휘날리는 머리칼이 얼굴을 때리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듯한 속도감이 가엾은 리이를 짓눌렀다. 그러나 리이는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이사가 이토록 서두르는 것이, 바로 자신의 상처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았던 눈물자국이, 거칠지만 조심스러운 바람의 손길에 조금씩 지워져갔다.


* * *


이사의 폭풍같은 질주는 순식간에 산 하나를 가로질렀다. 두 사람을 따를 수 있었던 사람도 없었고, 리이 역시 지나온 길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오직 이사 뿐이었지만, 덕분에 리이는 평소라면 거의 와 볼 일이 없는 먼 마을에서 낯선 소리와 인기척을 맛볼 수 있었다.


거리가 멀어진 것은 물론 마을 사람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는 리이의 모습이나, 위협조차 되지 않는 소녀에게 서슴없이 돌을 던지는 아이들의 행동으로 보건대, 그 마을에서 리이에게 적대적인 것은 어른들 역시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아직 어린 아이들조차 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할 정도다. 죄의식을 내던질 정도로 확고한 어른들의 태도가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노골적인 적개심은 그리 멀리까지 퍼지지 않는 법이다. 한낱 소녀인 리이가 인근 모든 마을의 적의를 끌어모을만큼 엄청난 짓을 했을리는 없다.

이사의 예상대로, 산 너머의 마을은 심하게 다친 소녀를 보자마자 앞다투어 의사의 집을 안내해주었다. 덕분에 처음 와 보는 곳에서 헤메지 않고 의사를 찾을 수 있었던 이사는 얼마 후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이의 치료가 끝나길 기다릴 수 있었다.


"리이, 많이 아파?"


다행히 의사는 이사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만들지 않았다. 안절부절 못한 채 불안한 가슴을 안고 기다리길 몇 분, 금새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의사는 울 듯한 얼굴의 소녀에게 빙그레 웃어주었다.


"괜찮습니다. 대부분은 타박상이랍니다. 이마도 피부가 찢어진 정도고 크게 뼈가 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디 크게 부러진 데도 없고, 한 숨 자고 나면 멀쩡할테지요."


파르르 떨리던 입술이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리이가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곳 까지 오며 머릿속에 역청처럼 들러붙는 불길한 예감에 얼마나 떨었던가. 겨우, 겨우 한 고비를 넘긴 이사는 여전히 두근두근 미친듯이 뛰는 가슴을 꾹 내리눌렀다.

아니, 심장이 뛰어서만은 아니다.

쿵쿵 뛰는 심장 외에도, 사뭇 다른 종류의 아픔이 가슴 속을 욱신욱신 저며대고 있었다.


그 애들.


순간 이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경황이 없어 잠시 잊고있었던 살인마들의 얼굴이 잿가루 속에 숨었던 불씨처럼 화악 피어올랐다. 어두워져가는 땅거미도, 사람이 장난감처럼 보일만큼 먼 거리도 미처 감추지 못했던 그 얼굴들에는 잔혹한 웃음이 새겨져 있었다.


"······옆 마을 애들이 갑자기 돌을 던졌어. 왜 그러는거야?"


빠드득, 하며 소름끼치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어린 아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유없는 폭력? 아니, 단순히 재미로 곤충을 잡아 죽이는 그런 아이들의 표정과는 달랐다. 어른들에게서 배운 듯한, 뿌리깊은 혐오감이다.


마녀. 그리고 악마.

꼬맹이들이 외치던 소리에서 어렴풋이 짐작가는 것은 있지만, 이사는 감히 그 따위 소리를 입에 담을 수는 없다고 분노하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대답해.

무언의 명령을 머금은 시선이 의사를 향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예전에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군요. 옆 마을에 악마의 아이가 있다는 소문. 질 나쁜 농담이라고 웃어넘겼던 이야기였습니다만······."


"악마의 아이?"


의사는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태어난 날, 아이 엄마가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 것 뿐이라면 이해가 가지 않아. 산고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야. 더군다나 그들이 이웃 가운데 한 사람을 잃었을 때, 그 아이는 하나뿐인 어미를 잃었지. 그런데도 죄 없는 아이를 그렇게까지 원망하는건가?"


아이의 말이 아니다. 의사는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반사적으로 옷깃을 여미려 했다. 그러나 그 손가락은 익숙한 옷의 단추조차도 찾지 못한 채 한참이나 헛손질을 반복했다.


"안대 뒤의 눈. 달리는 도중에 안대가 흐트러져서 처음으로 봤어. 그 눈은 병으로 닫힌게 아냐."


눈동자가 타오른다. 신비로운 금색의 눈동자가 분노와 슬픔을 장작으로 삼키며 이글이글 타오른다. 그렇게 피어오른 불길은, 설령 그 한탄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더라도 모든 온기를 빼앗겨버릴 정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의사는 신음을 삼키면서도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단순한 우연이라 할지라도, 결국 눈 먼 소녀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가족'이 요구하는 것에 성실히 답할 의무가 있으리라.


"그 아이는, 본래 신비로운 금색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들었습니다. 당신이 지닌것처럼 아름다운 눈을."


보기 드문 특이한 색의 눈이나 머리칼을 지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 특유의 비인간적인 아름다움 외에도 또 한 가지의 공통점을 갖는다.

그 공통점이란, 바로 그 사람의 주변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모종의 사건들이 날벌레처럼 모여든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비극에,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아이. 많은 관심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마을 사람들도 처음에는 가엾은 그 아이를 가까이 두고 보살펴주려 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아무리 사랑을 쏟아주더라도 부족한 점은 있을테니까.


하지만 아이가 세상에 나온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소녀의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어린 아이도 아닌 성인 남성이, 아이도 내버려둔 채 홀연히 사라졌다. 도망친 것일까? 아내를 잃은 슬픔과, 자식에 대한 부담에서 달아난 것일까?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내가 주어야 할 사랑까지도 자신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 딸을 극진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모종의 의심을 품은 눈빛이 아이의 주변에 섞이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점점 이상한 일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은 부뚜막에서 갑자기 불이 일어나 집을 통째로 태워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가까운 집부터 소와 송아지가 이틀 건너 한 마리씩 죽어가는 일이 일어났다.

아이와 놀아주다 실수로 생채기를 남겨버린 한 아이가 그날 밤 무시무시한 악몽에 경기가 들리는 일이 일어났다.

늦은 밤, 아이를 데려와 재우던 집의 주변에서 이상한 불빛이 번쩍이는 일이 일어났다.


하나뿐이었다면 단순히 우연이라 치부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점점 '사건'은 짧은 간격으로 보다 무겁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특히 사소한 것이라도 아이에게 해를 끼쳤다면, 그 사람에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시무시한 일이 찾아오고 말았다.


사람들은 점차 아이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 마을을 휩쓸던 이상한 일들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상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마을 안의 닭들이 모조리 무언가에 놀라 죽은 날, 공포에 억눌려있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정처없이 폭주해 날뛰던 분노는 자세한 정황을 살필 겨를도 없이 소녀의 금안을 목표로 삼았다.


그 이상한 눈이야말로 악마의 증표다.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나, 아비의 혼마저 찢어 삼킨 마녀를 내버려둬선 안된다. 그 눈을 닫아, 마녀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닿지 않게 해야 한다.


이상한 믿음이 마을을 온통 헤집어놓았다.

분노에 밀려났을지언정, 공포는 여전히 그들의 가슴에 남아 이성을 짓누르고 있었다. 결국 비뚫어진 감정선은 죄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피를 제물삼아 불안을 억누를 것을 종용했고, 그 결과 한 소녀는 한 마디 항변조차 하지 못한 채 시뻘겋게 달궈진 쇠에 영원히 빛을 잃고 말았다.


순간 얼음을 밟아 으깨는 듯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 이사가 문득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눈 앞으로 끌어와 억지로 펼쳤다. 피에 젖은 잿빛의 모래가 손아귀에 엉긴 채 부슬부슬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사의 주변에는 모래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돌로 만들어진 탁자 귀퉁이가 무시무시한 힘으로 뜯겨나간 자국을 안고 있었을 뿐이다.


"······뭐야. 그럼, 그럼 왜 리이는 마을을 떠나지 않은거야?"


"앞 못보는 맹인이 먼 길 떠나기가 쉽지 않기도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그 마을이 자신의 전부이기 때문이겠죠. 설령 바깥에서 천운을 만나 자리잡는다고 해도, 부모의 묘도 그 마을에 있을텐데, 영영 떠난다는건 힘겨운 일일겁니다."


"······이상해. 여기가 아파."


이사는 두 손을 가슴 위에 포갰다.

조금 전부터 가슴을 두드리던 불쾌한 감각. 가슴을 안쪽으로부터 조금씩 찢어발기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고만 싶은 뜨거운 통증.


"이런 느낌, 싫어."


"좋아하는 누군가가 힘들고 아플 때 마음이 아픈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요.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존재라면."


이사는 고개를 숙여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의사는 조금 망설이다 이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사는 그의 손을 쳐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손의 온기에 기대고 싶은 듯 눈을 지그시 감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조용히 걸음을 뒤로 물린 이사는 뜨거운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평정을 되찾았다.


"치료비, 가져올게. 조금 기다려줘."


대답은 기다리지 않았다.

이사는 이 곳으로 올 때 그랬듯, 다시 한 번 폭풍같은 기세로 산고개를 향해 달렸다.


* * *


두 사람의 발자국 외에는 별다른 흔적을 찾기 어려운 한적한 길. 가끔씩 일감을 가져다주는 샤리를 제외한다면, 아마 한 달에 한 번도 지나치지 않을 오솔길이다.

그러나 단지 그 곳을 멀리 하기 위해서만 인지하는 수준으로 버려졌던 그 길은, 오늘만큼은 와글거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많은 발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사정을 알지 못했더라면 자신의 아이들이 저지른 만행에 사과하러 온 것이라고 착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고한 어린 아이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덮어씌워 공포를 잊으려 했던 자들에게 이제와서 그 정도의 상식을 찾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마침내 리이의 집이 멀리 보이기 시작할 무렵, 이사는 쓰러질 것만 같은 작은 집을 포위한 채 긴장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가느다란 눈썹이 분노와 비웃음으로 삐뚤게 섰다.

먼 거리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금속의 빛은 결코 사과를 위한 것이라 부를 수 없었다. 삽이나 곡괭이, 혹은 쇠스랑, 때로는 장작패는 도끼. 흙을 다 털어내지도 않은, 사용감이 역력한 물건들이다. 때문에 우글거리는 무리는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흉기라기보다는 단순히 겁에 질려 손에 잡히는 대로 주워든 물건을 들고 모여든 것처럼 보였다.

한결 더 가까이 다가간 이사는 그들의 차림새를 보며 코웃음을 삼켰다. 겉옷을 뒤집어 입거나 마늘을 엮어 목에 걸고 있는 자, 은화를 얼기설기 꿰어 호부를 만든 자. 그 밖에도 얼굴에 재를 바르거나 연신 성호를 긋는 자까지, 온갖 미신이란 미신은 죄다 끌어와 온 몸에 둘둘 감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쿡, 쿠하하하핫! 뭐가 그렇게 무서운거야? 응?"



"으아아아악! 아, 악마가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웃음소리가 뒤에서부터 터져나오자, 얼어붙어 있던 인파는 마치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와르르 무너지며 허겁지겁 뒤로 돌아섰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공황을 일으킨 것과는 달리,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나 행동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웃음을 터뜨렸던 이사는 웃음소리가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이미 대형을 바꾼 마을 사람들을 보며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어설프긴 하지만, 대야나 도마, 혹은 솥뚜껑처럼 그다지 싸움에는 어울리지 않을 물건을 든 자들이 엉성하게나마 방패벽을 이루고 그 뒤로 쇠스랑처럼 긴 무기를 든 자들이 빽빽하게 모여서며 방진 비슷한 것이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던 사람들인만큼, 나름대로 손발이 맞았던 덕분일까.


"뭐, 뭐야? 그냥 어린애인가?"


"못 보던 애야. 저만한 애가 부모도 없이 혼자 떠돌아다닐까? 마녀랑 함께 지냈다면 필시······."


"하지만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데."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농기구를 들이밀었지만, 그 끝에 있는 것이 가슴 높이조차 오지 않을 조그만 여자애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날 끝을 조금씩 떨어뜨리고 있었다. 훈련받은 병사들이 아닌 이상, 일견 무해해 보이는 상대에게 적의를 불태우기는 어렵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정작 그들이 내친 리이에게는 어째서 일말의 자비도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잠깐. 저 애 눈을 봐! 저 금색 눈, 분명히-"


그 순간, 더이상 참아줄 수 없는 투박한 목소리가 이사의 귀를 파고들었다.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주던 이사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하얀 이를 활짝 드러냈다.

즐거워서 피우는 웃음이 아니다. 비웃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을 만큼 머리가 뜨거워졌을 뿐이다. 때문에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이글거리는 분노에 모든 열을 빼앗겨버린 듯 싸늘한 한 마디였다.


"닥쳐, 겁쟁이들."


"뭐, 뭐라고!"


아직 한참 어린 나이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얼음장처럼 지독한 독기가 군중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갑자기 찬 물을 끼얹는 듯한 매도에도 분노는 터져나오지 않았다. 그저 철 모르는 어린 아이의 건방진 말이었다면 부글부글 끓었을 분노가 그 이상의 무언가에 힘없이 짓밟혀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사는 그 한 마디로 얼어붙은 군중 사이를 향해 도도하게 발을 내딛었다. 아직 무너지지 않았던 벽이 허물어지며 황급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사의 손길이, 숨결이 닿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고 말거라 믿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던 사람들은 거의 이성을 내던지며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을 밟고 넘어설 기세로 황급히 몸을 뺐다. 그 가운데 일어난 몸싸움으로 그들이 몸에 걸고 있던 어설픈 호신부들도 군데군데 떨어지며 황당한 장난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것을 본 이사는 킥, 웃음을 흘리며 일부러 그 호부를 짓밟으며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그토록 두려웠다면 차라리 도망치는 것이 나았을 것을.

하지만 무언가의 본능이, 혹은 스스로의 공포가 만들어낸 환영은 겁에 질린 사람들의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여기서 등을 돌려 도망친다 해도 빠져나갈 수는 없다는 것을.


마침내 이사는 둥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의 한 가운데에 섰다.

그 작은 몸에 미처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한 위압감을 흩뿌리던 이사는 곁눈질로 사람들을 쓱 훑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조아려라."


찰방. 마치 고여있는 물 위로 한 방울의 이슬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 귀가 아닌, 마음으로 전해진 그 소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채 본능만으로 움직이던 사람들의 몸을 옭아맸다. 그 한 마디는 영혼에 직접 울리는 것처럼 깊게 깊게 스며들어 심장을 옭아맸다.

이사의 목소리는 이미 어린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천 년을 하루처럼 여기는 절대자의 목소리, 시작의 바다를 보고 끝의 하늘을 마주할 초월자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신의 음성이자 악마의 포효. 자유에 묶인 바람이며 사슬에 속박될 자유.

어느새 사람들은 제각기 손에 들었던 것을 떨어뜨린 채 하나 둘 바닥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농기구들이 아무렇게나 바닥을 구르며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질렀지만 누구 하나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없었다. 아니, 그 소리를 들은 자조차도 없었다.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머리를 조아리는 것 뿐이었기에.


"시, 시, 신령, 신령님을 뵈, 뵙습니다······!"


한 노인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바닥에 문지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조금 전까지 악마라고, 마녀라고 부르던 존재를 부르는 이름으로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황당한 칭호다. 그리고 본질을 담아내야 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원래의 칭호보다도 더욱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녀가 받드는 하늘은 소멸과 혼돈의 이치. 언젠가 세상을 거두어가는 검은 용신의 권속이며, 그녀야말로 저 강대한 용들과 함께 세상의 악이라 멸시받는 위대한 대정령의 하나이니. 창세와 질서를 등진 자를 악마라 칭한다면, 그녀는 분명 악마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이니.


"신령이라. 평소에는 악마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을텐데, 막상 눈앞에 두니 그토록 그 이름이 무거운가?"


사람들은 이사의 시선이, 이사의 목소리가 채찍이나 칼날이라도 되는 듯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며 떨었다. 개중에 그녀에게 농기구를 들이댔던 이들은 숫제 이마로 무덤을 팔 기세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어 어찌 보면 우스울 정도였다. 물론 당사자들은 사시나무처럼 떨며 이 악몽에서 깨어나길 바라고 있었을테지만, 적어도 이사는 그들에게 아무런 연민도 품지 않았다.


"하지만 너희들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그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러니 너희에게 들려주지. 나는 갈망. 너희들이 멈춰서지 않도록, 끝없이 달려가도록 채찍질하는 자."


순간, 이제껏 머리를 조아렸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찔거리며 한층 더 깊이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이미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두려움이나 위압감이 아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더라도, 그녀 자신의 말처럼 결코 멈춰설 수 없게 만드는 강렬한 욕망.

갈망. 그것은 분명,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대정령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내려다보던 이사가 그 순간적인 움직임을 놓칠 리 없었다. 짧은 한숨을 쉰 이사는 팔짱을 끼며 느릿하게 처음 그녀를 신령이라 부른 자에게 걸어갔다.


"바라는 것이라도 있는가보지?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내 비위를 맞춰 손에 넣고 싶은 것이 있는가보지? 역겹지도 않은가? 그런 이중성을, 너희들 자신도 바람직하게 여기지는 않을텐데."


"그, 그런게 아니-"


"됐어. 처음부터 너희들에겐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저, 저희의 어리석음을 요, 용서하여······."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무지를 탓할 수는 없겠지. 그래, 너희에게 줄 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지. 묻겓으니, 그 가슴에 품은 갈망은 무엇인가?"


사람들 사이로 벌떼같은 웅성거림이 오갔다. 이사는 한층 더 짙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나의 이름은 갈망. 바라고 원한 끝에, 갈구하던 단 한 가지에 미쳐 모든 것을 내던지게 이끄는 저주받은 불길이다. 이 이름을 눈앞에 두고서, 그대들은 어떤 바람을 입에 담을 것인가! 나는 물었고, 너희들은 대답해야만 해!"


천둥같은 목소리가 연거푸 군중을 휩쓸었다. 대정령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공기는 마치 납덩이처럼 단단해지며 사람들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호흡 한 번 조차 하기 어려운 분노의 폭풍 속에서는 오랫동안 품어온 소망을 꺼내는 것조차 감히 시도할 수 없었다.


안타까운가?

무엇이든 이루어준다는 엄청난 기적을 눈앞에 두고,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하는 것이 그토록 안타까운가?


"대, 대정령이시여!"


순간, 이사가 일으키는 폭풍을 이겨내며 마침내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들의 소원은 한 가지 뿐입니다! 영생도, 부귀도, 감히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저 단 한 가지! 제 부모를 잡아먹고 마을에 저주를 가져온 그 마녀! 그 녀석을 다시 보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


"초, 촌장님!"


새하얀 백발을 늘어뜨린 노인은 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듯 힘겹게 비틀거리면서도, 기어이 이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뱉는 것처럼 무거운 감정을 담은 채 음울하게 불타올랐다.

영생도, 영화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단 한 사람의 영원한 부재를 바란다.

앞의 것들에 비해 뒤의 것의 가치가 적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사는, 대정령은, 주변을 뒤흔드는 위압감을 거두며 노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나 일견 분노하는 듯한 그녀의 눈동자에는, 어째서인지 슬픔의 빛이 섞여있었다.


"진심인가? 진심으로 그것이, 마을 전체의 소원이라고 하는 건가?"


이사는 하늘을 우러르며 몸을 한껏 위로 펼쳤다.


"소원이란, 소망이란······, 이루고자 하는 것.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 그렇기에 그 방향은 자신을 향해야 하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너희는 항상, 바깥을 향한 소원을 말하는구나."


하늘을 바라보는 대정령은 이슬에 젖은 목소리로 애잔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는 찰나, 이사는 다시 몸을 똑바로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촌장의 발언에 당황하던 이들도, 어느새 그의 말에 수긍한 듯 침착하게, 하지만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으로 이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사는 슬프게 웃으며 더이상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발을 내딛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이 리이의 집이라는 것을 깨달은 마을 사람들은 당황하며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감히 대정령을 잡아세울 용기는 없었던 그들은 애매하게 들어올린 손으로 허공만을 움켜쥔 채 서로를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등을 살폈다.


하지만 이사는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고리의 끝에 선 이사는 걸음을 멈추며, 쓸쓸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이 너희들의 선택, 너희들의 바람이야. 안타깝지만, 당신들의 소원은 이루어졌어."


안타깝다?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말이다. 하지만 막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사의 뒤를 따르려 했던 자들은 문득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던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으, 으아아아악! 이, 이게 뭐야아아?"


"신이시여! 사, 살려 주-"


부드러운 살결이 썩어들어가듯 윤기를 잃고 시커멓게 변하며 거칠고 우둘투둘한 껍질로 변했다. 대지를 박차려 잔뜩 힘을 끌어모았던 다리는 다시는 땅을 떠나지 못한 채 신발을 찢으며 그대로 대지에 뿌리를 내렸다. 바람결에 흩날리던 머리칼은 이끼가 되어 몸을 휘감고, 뼈와 근육은 송진을 머금은 채 단단한 목질로 변하며 영원히 움직임을 잊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은, 그런 변화조차 한 순간에 끝나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산 채로 나무가 되어가는 사람들은 고통에 절어 차라리 죽여달라고 절규했지만, 그들의 몸에서 피어난 나뭇가지는 더욱 더 탐욕스레 그들 자신의 몸을 재료삼아 깎고, 빚어나갔다.


지옥을 그대로 지상으로 끌고 온 듯한 처절한 절규가 마침내 그쳤다. 뒤돌아 선 채 눈과 귀를 꼭 닫고 있었던 이사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끄집어내렸다. 툭, 툭, 가지 끝에 맺힌 이슬이 웅덩이로 떨어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가벼운 이슬비가 내린 이른 아침, 숲가에 서 있을 때 들리는 물방울과 웅덩이의 노래를 연상시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사는 그것이 결코 그런 맑고 깨끗한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부러 멀리 두고 있던 시선을 조금씩 끌어당긴 이사는 가까스로 마음의 준비를 한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곳에는 조금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숲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린 숲을 이루는 것은 기기괴괴한 모습으로 뒤틀려있는 마른 가시나무의 군락이다. 그리고 그 가지를 적신 채 조금씩 방울져 떨어져내리는 것은, 그리고 뿌리를 두른 채 떨어지는 이슬을 받아내는 것은, 이제는 더이상 그 누구도 눈에 담을 수 없게 된 자들이 인간으로서 지상에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이사는 손을 가만히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붉은 이슬을 받았다.


숲은 이 자리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들이 자신의 마을이라 여겼던, 그리 작지 않은 하나의 공동체가 모조리 같은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소원이란, 갈망이란 그런 것이다.

어둠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단 하나의 빛은 아름답지만, 사실은 희생자를 집어삼키기 위해 괴수가 내민 자그만 미끼일 뿐이다. 그 작은 빛만을 갈구하는 자들은 그 사이에 놓인 발톱과 이빨을 보지 못하고, 그저 빛에 취해 섣부른 걸음을 내딛고 만다.


이사는 손 안에 담긴 이슬을 가만히 불었다.

아직 온기조차 식지 않은 것인데도, 마치 죽은 지 수십 년은 지난 자의 흔적인 듯 손아귀에서 메말라버린 핏방울이 숨결을 타고 머나먼 곳으로 사라져갔다.


"······이런 결말일 것을 알면서도, 그저 분노에 휩쓸려 나를 밝혔지. 이런 나를, 너는 과연 어떻게 여겨줄까······."


젖어든 숲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메마른 진혼가만이, 삶과 죽음 사이에 갇혀버린 자들 사이로 조용히 울려퍼졌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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