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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아이넬라 크로니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중·단편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12.22 13:24
최근연재일 :
2020.11.24 17:15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310
추천수 :
13
글자수 :
134,698

작성
19.12.22 13:47
조회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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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20쪽

흰 날개, 검은 머리칼(1)

DUMMY

낡아빠진 건물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 있다.

아프샤라스의 노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관 역시 그러한 수수께끼 중 일각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 화려한 이름에 어울리지도 않을 만큼 닳아버린 간판이 그저 처량하게 보일 뿐이다.


하지만 몇 대나 이어내려오는 이 가게는, 그 바닥에 깔린 먼지의 수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만남의 장이다.

아니, 마주치고 부대끼는 것은 사람들 뿐만이 아니다.

문지방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옷자락에 묻어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가 자연스레 모이고, 들끓다, 흩어지는 곳이 바로 이 여관이다.


때문에 이 낡고 푸근한 여관의 문을 두드리기를 즐기는 사람은 적지 않다.

누군가에게 팔아먹기 좋은 이야깃거리를 가진 자, 혹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몸살이 난 자, 그도 아니라면 그런 자들에게 원하는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자.

이 땅의 인간군상을 살피기에, 이만큼 좋은 곳도 그리 많지 않으리라.


삐걱!

더 닳을 것도 없을 문설주가 짜증을 부렸다.

왁자지껄한 여관 안에 날카로운 소음을 끼얹은 것은 한 사람 뿐이었다.

드물게도 낯선 얼굴이라고, 여관 주인인 리브라에는 생각했다.

리브라에가 얼굴을 기억하는 단골만 해도 어느새 세 자리 수에 이른다.

그 많은 여행자들에게 한 조각씩 얻어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은 거지반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저런 복색을 하고 있을만한 남자는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한낮의 땡볕을 피해 가게로 들어선 남자는 흙먼지 가득한 겉옷은 벗지도 않은 채 그대로 구석의 의자를 끌어내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에는 남서부의 사막지대에서나 볼 법한 긴 아마포를 두르고 있었지만, 본래 거친 모래나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어야 했을 천 조각은 이미 반쯤 풀어진 채 흘러내려 오히려 더더욱 갑갑하게만 보였다.


사막이나 황야 출신일까.

특이하게도 그 남자는 검을 두 자루나 차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검은 서부에서 흔히 사용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근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곧은 날의 검.

다만, 조금 무겁고, 커다란 크기가 눈길을 끌었다.


리브라에는 조용히 물 주전자를 챙겨들고 그 남자에게 걸어갔다.

보통 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입을 열어 정보를 흥정하는 자들이 대다수인 아프샤라스의 노래에서, 그는 이상할 정도로 침묵을 지킨 채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 이런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초짜일까.


하지만 옷매무새나, 차고있는 검 손잡이가 반질반질하게 닳아있는 모습을 보면 결코 파릇파릇한 신참내기는 아니다.


오히려 남자는 주정뱅이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 사이로 발소리를 숨기며 다가오는 리브라에를 눈치채며 재빨리 검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애먼 사람 벨 생각이오?"


물론, 리브라에도 이 바닥에 몸을 담은지 반평생도 넘었다.

막 뽑혀나오려는 검을 재빨리 가로막은 그녀는 사과를 대신하듯 물잔에 시원한 물을 가득 따라 사내에게 건넸다.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내는 조금 당황하는 듯 하다, 이내 잔을 받아들였다.

"고맙소."


제법 큰 잔이었는데도 시원스럽게도 물을 비운 남자는 뒤늦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초짜는 아닌것 같은데, 얼굴은 처음보는구려."


간단한 정보 탐색이다.

하지만 남자는 귀찮다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짧게 웃은 리브라에는 재빨리 남자의 전신을 살폈다.

예상대로 두 자루의 장검 외에도, 몸 구석구석에 상당량의 무기가 숨겨져 있었다.

단순히 비상시를 대비하는 투검 뿐만 아니다.

허리띠처럼 감아둔 것은 언제라도 뽑아 휘두를 수 있는 연검 자야민이고, 허리춤의 작은 가방을 고정하는 밧줄은 질긴 가죽을 엮어 만든 채찍이다.

소맷자락 안과 부츠의 발목, 그리고 갑옷의 틈새에는 바늘처럼 얇고 예리한 비수가 숨겨져있다.


자야민을 다룰 줄 안다면 대륙 서남부 출신일까.

꽤 먼 곳이니, 확실히 낯선 얼굴인 것도 이해가 간다.

짧은 시간에도 제법 많은 정보를 뜯어낸 리브라에는 살짝 웃으며 주문을 받으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막 얼굴 앞으로 귀찮게 늘어지던 천 조각을 잡아 뜯듯 벗어낸 남자는 조금 애매한 얼굴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흑사자의 갈기처럼 제멋대로 뻗친 너덜거리는 머리칼에서 몇 줌은 되는 흙모래가 풀썩 쏟아져 내린 탓이었다.


"저런. 뭔갈 주문하기 전에 우선 목욕부터 하셔야겠는데."

"······미안하오."

"거 참 과묵한 사람이군. 이제까지 겨우 딱 두 마디 한 거 아시오? 그렇게 뻣뻣해서야 어디 사람들에게 말이나 붙일 수 있겠소?"

남자는 조금 멋쩍게 웃으며 턱을 긁적였다.

살짝 웃음을 삼키며 농담섞인 타박을 듣고서야 조금 인간적인 반응이 나왔다.


리브라에는 재빨리 식탁을 닦아내며 다시 말을 걸어보았다.

"그래서, 주문은 뭘로 하실거요?"

"글쎄······. 받을 수 있는 주문일지 모르겠소만."


리브라에는 씩 웃었다.

"아프샤라스에서 못받는 주문이 얼마나 있을까. 나 아니어도 적당한 쇳조각만 충분하면 누구든 나오지 않겠소?"


그렇다.

아프샤라스의 노래에서, 무언가를 파는 사람은 리브라에 뿐만이 아니다.

음식이나 잠자리, 목욕.

그 세 가지를 제외한 것들은, 리브라에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우호적인 칼이나 외로움을 달랠 여자, 혹은 사냥하고자 하는 먹잇감의 정보.

돈이든, 칼이든, 무언가 자신을 증명할 것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어지간한 대도시의 시장 이상으로 많은 것들이 거래되는 곳이 이 곳, 아프샤라스의 노래다.

말귀를 알아들은 남자는 조금 주저하면서도 다시 질문을 던졌다.


"조금 소란을 피워도 되겠소?"

"가게 물건을 부수지 않는 한도 내라면 얼마든지. 아 참, 피를 보는 일도 어지간하면 피해주오. 댁들이 날뛰면 뒷정리도 귀찮아져."

'어지간하면' 피해달라니, 역시 일반적인 가게와는 다르다.

하기야, 거칠기로 유명한 영격사들이 몰리는데 사람 두엇 죽어나가는 일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닌 것이리라.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는 식탁 위로 올라서서 발을 구르는 것으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보려 했다.

물론, 뒤엉키는 시장바닥처럼 소란스러운 가게 안에서 그 정도의 소음은 특별한 축에 끼지도 못했다.

그러자 남자는 망설임 없이 두 자루의 검을 뽑아들었다.


두 자루의 검은 허공을 찢거나, 누군가를 겨누는 대신, 뜻밖에도 서로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튀어올랐다.

키이이잉!

순간, 검을 부딪힌다기보다는 팽팽하게 당겨진 현을 활로 문지르는 듯한 맑고, 동시에 날카로운 소리가 여관 안의 혼돈을 베었다.

놀라운 것은 그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그것도 양 손에 하나씩 검을 갈라쥐고 낼 수 있는 힘이라 해봐야 거기서 거기인 법.

그러나 남자가 쥐고 있던 검은, 놀랍게도 두 자루 모두 무거운 망치로 힘껏 내려찍은 것처럼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채 그가 올라선 식탁 위로 후드득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단숨에 여관 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제껏 존재감이 없었던 남자는, 그 순간 누구보다도 많은 시선을 한 몸에 모으고 있었다.

특히 이채를 띤 눈으로 그를 보는 것은 또다른 영격사들이었다.

차라리 잘리거나, 부러진 것이었다면 몰라도 얼음장처럼 산산히 깨진 검의 단면에는 흔히 보지 못할 특이한 기술의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란을 피워 미안하오. 하지만 이런 거래를 자주 해보지 않아 말재간이 없으니 이해해주길 바라오."

남자는 조금 목소리를 돋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긴 말 안하겠소. 값은 얼마든지 쳐 줄테니, 어떤 생령의 정보를 사고 싶군."

"대금을 보여줄 수 있겠나?"

구미가 당긴 객들이 외쳤다.

남자가 큼직한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영격사들에게 돈처럼 의미없는 것은 없다.

사냥에 성공한다면 상당항 부와 명성을 쥘 수 있고, 실패한다면 목숨을 잃는다.

평범한 짐승과는 달리 매혹적일 정도로 강하고, 영리한 생령들을 상대로 하는 이상, 그들이 현물로 몸에 지니는 장비 하나만으로도 성채 하나를 무장시킬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상대로 남자가 품에서 꺼낸 것은 돈으로 가득 찬 주머니가 아닌 한 자루의 단검이었다.

새카만 칼날 위로 은빛의 선이 한 줄기 지나가는 기묘한 검신이 눈길을 끌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다.


남자는 그 단검을 들어, 검신을 잃은 칼자루중 하나에 가볍게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잘 보라고 말하듯, 천천히 빈 칼자루를 떨어뜨렸다.

칼자루는 멈칫거리는 일조차 없이 조용히 잘려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농담이 아니다.

단검의 칼날은 황홀할 정도로 예리하고 정교해, 그리 무겁지도 않은 칼자루를 단숨에 베어버린 것이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보기 드물 정도로 훌륭한 검이다.


게다가 칼자루를 베어 가르는 순간, 칠흑빛 칼날 위로 희미한 빛이 떠오르는 것을 눈치챈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저만한 검에, 마법까지 깃들어있다면, 그 값어치는 감히 입에 담기도 어려울 것이다.


객들의 시선을 살피던 사내는 문득 그 단검을 탁자 위로 가볍게 던졌다.

날카로운 칼날이 탁자를 파고들며 문득 기묘한 울음을 흘렸다.


"이거면 어지간한 정보료로는 충분할거라고 생각하오만."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탐나는 물건이다.


하지만, 저런 귀한 물건을 고작 정보료로 낸다면, 그가 바라는 생령의 정보도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리라.

"그래서······, 대체 무엇을 찾길래 그런 물건을 내놓는 거요?"

"용."

순간, 조금 다른 의미의 짧은 침묵이 주위를 휘감았다.

"······용?"

용.

생령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존재들.

날개짓은 폭풍을 부르고, 숨결은 벼락의 강이 되며, 그 분노는 일국의 멸망을 부른다.


하지만, 그토록 강한 힘을 지닌 용들은 그 때문에 오히려 세상에 모습을 보이는 일이 드물었다.

어디에 사는가. 어떻게 해야 쓰러뜨릴 수 있는가. 그 모든 것이 불명.

하지만 우연히 길을 잃고 헤메던 끝에 재수 없게 그들과 마주쳐, 제 운명을 저주하며 도망치려다 참살되는 자들도 적지 않다.


때문에 세상에는, 일부러 용을 찾는 자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수요도 공급도 불안정한 정보는 매물로 올라오는 일 조차 없다.

대부분의 영격사들도 만만한 정령이나 요정, 드물게 기사급의 생령을 노릴 뿐, 감히 용이나 대정령을 노리는 이는 없으니까.

굳이 그들의 이름이 언급된다면, 대부분은 용을 구경하고 싶다거나, 고상하게 자살하려는 사람들 정도이리라.


따라서 남자가 그 이름을 꺼낸 순간, 아프샤라스가 조금 전과 다른 의미의 침묵에 묻혀버린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못들었소? 어떤 용을 찾는다고 말했소만."

지나친 진지함은, 때로는 비웃음을 부른다.

농담이라고는 할 수 없는 진중한 사내의 태도에 이내 사방에서 짙은 비웃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기분을 잡쳤다는 둥, 간만에 미친 놈이 다 나왔다는 듯 왁자지껄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개중 일부는 남자의 장비를 보고 허언을 할 실력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동료 한 명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용을 찾는다는 이야기까지는 쉽게 믿지 않았다.


노리는 것은 용과 동료인가?

하지만,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자살 여행에 함께 동참할 이가 얼마나 될까?


"허! 용? 그래, 누굴 찾는거요? '환희'라도 되나? 그 친구는 내일 나 아는 놈이 쓱싹 하러 간다는데 안됐구려. 아니면 '망각'? 접때 저쪽 누군가가 나뭇가지로 찔러 죽였다던데? 아아, 그래. '추억'은 내가 아는 용사가 봉인했다더군. 일곱 살이나 먹은 용맹한 친구지. 카하!"

얼굴에 큰 상처가 난 영격사 하나가 침을 탁 뱉으며 남자에게 다가섰다.


"어딜 던질 개소리가 없어서 용을 찾네 마네 하는거야? 돈 자랑 하려는건가? 개수작 부리지 말고 거기까지 하지그래?"

"허언이라 생각하면 무시하면 될 일일텐데. 굳이 서로 시간낭비할 필요가 있소?"

"뭐야!?"

용을 잡는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사람이, 고작 인간의 시선을 두려워할 리는 없으리라.

하지만 상처를 품은 영격사도 괜히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상처는 얼굴을 가로지르며 눈을 앗아간 흉터만이 아니다.

가슴은 심장이 찢기지 않은 것이 기적일 정도로 깊고 커다란 상흔이 남아있고, 한 팔은 팔꿈치 아래로 잃어 방패를 겸하는 의수를 달아놓은 상태다. 말리려는 손을 뿌리치는 손 역시 손가락이 넷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모든 상처를 입은 것은 단 한 번의 원정.

로파르미스 산맥에 둥지를 틀었던 재앙의 용 '방종'을 쓰러뜨리기 위해 수십 명의 영격사와 함께 도전한 결과, 용의 심장 대신 용의 공포만을 가지고 돌아온 자.


하지만 그런 그를 겁쟁이라 부를 자가, 과연 어디 있으랴.

용이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기에 용이라 부르는 것을.

"네 놈이 얼마나 잘난 인간인지는 몰라. 하지만 용이 우습나? 그래, 그 잘나신 분께서 찾는 용은 그럼 대체 누구지? '불행'이라도 찾는건가?"

"그렇소."

터무니없이 조용한 대답.

오히려 그 때문에 다시 한 번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고 말았다.

그토록 분노를 토하던 영격사조차도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떨어진 남자의 대답에 눈을 휘둥그렇게 뜰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불행.

시작의 열 두 용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그 이름이 한없이 최악에 가깝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다.

그런 불행을 노린다?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저 강대한 시작의 용 중 하나, '죽음'을 잡아 봉인한다는 전제 하에서.


하지만 하찮은 개념을 품었다고 해도, 한 번 용으로 화한 생령은 이미 인간의 손으로 막을 수 없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법이다.

하물며 죽음이나 불행같은, 그 이름만으로도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을 쓰러뜨린다는 것은 꿈에서조차도 이룰 수 없는 기적이다.

아무리 소멸의 신이라도, 미치지 않았다면 그런 개념을 세상에 만들어냈을 리 없다 말할 정도로.

아니, 그런 개념을 세상에 만들어낸 자이기에 소멸의 신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엘드리안이란, 그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존재란 말인가.


"······'행복'이 우리들에게 있다면······, '불행'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될 리가 있나. 그 용은 누구도 만난 적이 없어. 그 흰 날개는 어렴풋이라도 본 사람이 있지만, 다가가면 언제나 불행이 지키고 있었다니까."

씁쓸한 탄식이 어딘가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운좋게 행복의 날개라도 본 자들은 한 순간이나마 달콤한 상상을 품었다.


둥지를 틀지 않고,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신기루같은 용, '행복'.

만일 인간의 손에 행복이라는 것이 쥐어진다면, 그 재앙같은 불행이나 죽음조차도 넘어서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모순된 일이다.

불행을 치기 위해서 행복이 필요하다면, 그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그 앞을 가로막는 불행을 꺾어야만 하니까.


그러나 만일, 만에 하나라도 남자가 정말 불행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자, 잠깐! 이봐, 이, 이거!"

순간, 남자가 집어던졌던 단검을 살피던 또다른 영격사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 영격사는 단검의 날뿌리에 박힌 보석을 똑똑히 보라는 듯 검을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보석의 안쪽 면. 아니, 보석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한 부분.

그 곳에는 인간이 아닌 자들의 문자로 하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열망'.

인간을 시험하여, 자격을 얻은 자에게 상을 주겠다던 어느 대정령의 이름이었다.


"여, 열망이 자취를 감추었다고는 들었어······. 그, 그럼 저 자는, 정말······!?"


보석에는 작은 흠집조차 없었다.

애초에, 보는 각도가 달라지더라도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주시자를 똑바로 향하는 이름은 인간의 손으로는 새길 수 없는 것.

틀림없이 '열망'이 남긴 유산, 대정령의 심장이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정말로 열망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말인가?

단신으로 자신을 꺾으라는, 그 터무니없기로 유명한 시험을?


남자를 보는 눈이, 그리고 아프샤라스 안의 분위기가, 단숨에 바뀌었다.


대정령 역시 용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손으로 멈춰세울 수 없는 무자비한 폭풍과도 같은 존재다.

하지만 저 남자는,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단신으로 그런 대정령을 넘어선 자다.

그렇다면, 최악의 검은 용을 쓰러뜨린다는 희망을 걸어도 좋지 않을까.

인세를 떠도는 그 수많은 불행을, 그가 끝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희망을 이어 불태워줄 자가 과연 있을까.

불행이 어디 있는지 아는 정보상이 있을리 없다.

둥지를 만든다고 해도, 오래지 않아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는 비열한 성격의 용이기에.

온 세상에 불행을 뿌리고 다니는, 소름끼칠 정도로 독살스러운 용이기에.


'아무도 없는가.'

남자는 한참이 지나도록 누구도 더이상 단검을 집어들지 않는 것을 보며 탄식을 삼켰다.


이미 그의 옷깃은 대륙의 절반 이상의 먼지를 기억하고 있다.

수 많은 영격사들이 모인다는 아프샤라스의 노래에 대해서 듣고 먼 길을 달려왔지만, 이 곳 마저도 소득이 없다면 또 어디로 가야 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씁쓸한 손길이 천천히 단검을 주워들었다.


"내게 그 단검을 주시오."

남자의 손끝이 단검에 닿은 순간, 문득 쉰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놀란 시선들을 따라, 남자 역시 고개를 들어 문가로 시선을 돌렸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비루한 차림의 그림자가 문에 기대 선 채로 손을 들고 있었다.

갈갈이 찢어진 옷 사이로는 아직 마르지 않은 혈흔이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부상을 입은 것이 맞을까.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약해보여야 정상일텐데도, 그 자의 쉰 목소리에는 기묘할 정도로 힘이 넘치고 있었다.

오래된 멧돌을 힘차게 돌리는 듯한 거친 그 목소리에는 마법이라도 깃들어 있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무거운 힘이 느껴졌다.


"정말 불행이 있는 곳을 아시오?"

"물론이오. 방금 만나고 오는 길이니까."

메마른 손이 움켜쥐고 있던 지팡이를 힘있게 찍었다.


"며칠 내로 준비해서 도전한다면, 그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을거요."

"어디에 있소!?"

이제껏 필요 이상으로 언성을 높이지 않았던 남자였지만, 그 순간은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누더기의 남자는 그 이전에 값을 치르라는 듯 피로 물든 손을 먼저 내밀었다.


"대가가 먼저요."

"얼마든지 가져가시오."

남자는 아무런 담보도 없이 순순히 단검을 노인의 손으로 넘겼다.

재빨리 단검을 챙겨넣은 노인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남자에게 다가간 뒤, 빠르게 그의 귀에 용의 위치를 속삭여주었다.


정말이냐고 되묻는 일은 없었다.

의심할 생각이 있었더라면, 애초부터 단검을 넘겨주지도 않았을테니.


"고맙소. 이 은혜, 잊지 않겠소."

그저 남자는, 용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다는 듯 깊숙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노인은 뜻밖에도 웃음을 흘리며 다시 몸을 숙여 그의 귀에 입을 가져갔다.

"기회는 주었소. 하지만, 그 것이 정말 그대가 바라는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거요."

"······명심하지요."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LWinterer입니다.
음.... 아이넬라 크로니클은 본래 새벽의 시, 얼음의 용의 세계관을 설정하며 쓰기 시작했던 작품들입니다. 덕분에 세부 설정은 꽤 다른 편입니다.

조금 너그럽게 본다면 전작에서 지나가는 말로만 언급되는 '이피안 시대'의 이야기라고 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


현재 차기작을 준비하며, 공백기간을 달래드릴까 싶어 동시에 리메이크 하며 올리려 합니다만.... 애석하게도 제가 쓰는 속도도, 퇴고하는 속도도 워낙 느려 정기적으로 올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저 가끔 지나치다 한 번씩 돌아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요 :D



자, 그럼 재미있게 즐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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