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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피엔 마약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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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지
작품등록일 :
2020.08.21 00:57
최근연재일 :
2021.01.08 13:51
연재수 :
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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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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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9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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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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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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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20화-남매들의 속사정

DUMMY

진은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가넷의 손에 이끌려 방의 침대에 꼼짝 없이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의 은퇴한 재벌 노인 같은 모습으로 가넷의 수발을 받던 중, 문이 열리고 매니가 들어왔다.


매니는 멍하니 앉아있는 진을 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난 또 마님께 된통 깨지겠구만."


"걱정 마세요. 선생님께 용건 있는 사람은 마님 말고도 아주 많을 테니까요."



물론 저도 포함해서요. 라고 덧붙이는 가넷의 눈은 조용하지만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가넷을 짐짓 모르는 척하며 매니는 본업으로 돌아가 진의 상태를 살폈다. 맥을 짚거나, 청진기를 댄다거나 그런 건 없다.


눈으로만 대충 살피던 허리를 펴고 헛웃음을 한 번 지었다.



"야. 지금 몸은 멀쩡하지?"


"...."


"거기서 또 뭔 일 있었나 보네."


"선생님,"



가넷의 눈에는 매니가 대충 하는 걸로만 보였기에 그를 나무라려 했다.



"내가 주치의 하루 이틀 하나. 몸이 아니라 정신이 아픈 건 척 보면 알아."


"용하네요. 역시."



꾹 닫혀 있던 진의 입이 열렸다.


그 말대로 몸에 흐르던 고통은 옛적에 이미 사그라졌고 몸 상태도 평소의 그대로였지만, 복잡한 생각들의 혼합물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나한테 말하기 싫은 일이면 다른 사람한테 말하던가. 그럼 난 가도 되냐?"


"용건 있으면 부를 게요."


"부르지 마라. 바쁘니까."



매니가 하품과 함께 방을 나서고, 이제 방에는 진과 가넷만이 남았다. 평소와는 달리 상당히 어색함이 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그런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고자 가넷은 애써 진에게 말을 걸었다.



"저, 도련님. 제 피가 몸에 잘 안 받으셨나요?"


"이 세상에 내 몸에 잘 받는 피가 어디 있다고."


"아, 네. 그렇죠...."



더 어색해진 분위기에 가넷은 손만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움츠러든 가넷을 살짝 흘겨본 진은 표정을 살짝 풀었다.



"그래도 가넷의 피라서 이 정도로 끝난 거니까, 고맙게는 생각하고 있어."



가넷의 혈주인 혈액 상전이 덕에 응혈된 피가 금방 분해돼서, 고통이나 부작용이 오래가지 않았다. 다른 흡혈귀들의 피였다면, 진짜 죽었을지도 모른다.


나름 감사를 담은 말에 가넷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화사해졌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만, 혹시 모르니까 오늘은 푹 쉬세요. 저녁은 제가 가져다 드릴 게요."


"저녁은 됐고. 궁금한 게 있는데."


"뭔가요?"



진은 아까부터 계속 속에 담아뒀던 의문을 처리하고 싶었다. 팔로 눈을 가린 채, 가넷에게 물었다.


이 의문을 듣고 혹시라도 가넷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네 피를 몸에 넣어서 잠깐 동안 흡혈귀가 됐거든?"


"예, 그러셨죠."


"그 때 내 피 냄새를 맡고 나니까 흡혈귀들이 내 피를 노리는 걸 어느 정도 납득해버리고 말았는데, 내가 비정상이야?"


"네, 비정상이네요."



심각하게 생각 중이던 게 다 무안해질 정도로 너무나도 단호한 대답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악마의 피가 이름에 어울리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지녔다는 건 모두가 인정할 거예요. 실제로 저도 전에 홀려 본 적이 있으니까요. 그런데요. 도련님."



가넷은 진의 팔을 치우고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진의 눈가를 간지럽혔다.



"스스로를 미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강간해도 괜찮을까요?"



진은 초점 없는 눈으로 가넷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푸후훗!!"



정말 기가 막힌 비유에 빵 터진 진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진짜 별 거 아닌 고민이었다.


속에 담긴 여러 복잡한 심정들과 걱정들을 웃음으로 죄다 토해내니 드물게도 입이 초승달을 그렸다.



"아~~. 정말 가넷이 내 전속이라서 다행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덤덤한 어조와 공손한 모습에 비해 가넷의 입은 이미 불그스름한 볼까지 걸려있었다. 그랬던 가넷이 진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곧바로 굳은 얼굴로 그를 제지했다.



"도련님, 오늘은."


"됐어. 어차피 갈 곳이 생긴 참이었어. 나중에 잘 때나 좀 부탁할게."



저 무표정 뒤에 얼마나 능글맞은 얼굴이 사는지 잘 아는 가넷으로서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하아. 어차피 말 안 들으실 거죠? 알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고마워. 나중에 봐."



진은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



저택의 메이드로 일한 지 이제 겨우 몇 시간째지만, 가람은 저택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재능의 영역에 있던 사회성 덕에 금방 다른 클랜원들과도 친해졌고, 혈주인 그림자 덕에 청소도 꼼꼼히 할 수 있어서 세그먼트에게 혼나지도 않았다.


그런 가람에게 미증유의 위기가 닥쳤다.


하필이면 그녀가 한창 서재의 구석에서 먼지를 털어내는 동안, 나갔다가 돌아온 아나와 아나의 어머니가 함께 서재로 들어온 것이다.


거기까지라면 능청맞게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인사하며 나갔을 텐데.



'분위기 왜 저래?'



가람의 눈에는 저기 저 입이 벌어지는 미모의 모녀들 주위만 중력이 몇 배는 높은 것 같았다.


다리를 꼰 채 딸을 응시하는 샤람,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나. 누가 봐도 엄마가 딸을 혼내는 광경이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도저히 신입인 가람은 끼어들 생각조차 못할 만큼 숨 막히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까망아. 이리와."



가람과 함께 청소 중이던 까망이라 이름 붙인 가람의 그림자가 걸레를 든 채, 뽈뽈 거리며 가람의 곁으로 뛰어왔다.


가람은 하나의 검은색 인형 같은 까망이를 꼭 껴안고 구석에 웅크린 채 눈치를 살폈다. 빨리 저 중력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까망이와 함께 빌다보니, 신이 들어주셨나보다.


아나가 샤람에게 고개를 깊게 숙인 후, 서재 밖으로 나갔다. 근데 얼핏 본 거라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나. 울고 있었지?"



자체적인 지능을 가진 까망이는 말은 못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건 할 수 있었다.



"여기도 꽤나 사정이 깊은 집안이구나."



이제 샤람만 나가기를 기다리며 구석에 기댄 채 낙천적으로 조용히 읊조릴 때였다.



"거기, 구석에 있는 사람. 나와 봐."



왜 까망이는 말을 못해서 방금 그 말을 한 사람이 저기 앉아있는 아나의 어머니 외에는 선택지가 없게 하는 거지?


진짜 진심으로 나가기 무섭지만, 그렇다고 이미 들킨 이상,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가람은 쭈뼛쭈뼛 까망이를 안은 채로 샤람의 앞까지 걸어 나왔다. 죄를 짓지도 않았지만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누구? 침입자?"



자신을 수상하게 노려보는 샤람의 눈빛에 얼어붙을 뻔했지만, 가람은 고개를 격하게 저음으로써 얼어붙는 몸을 깨트렸다.



"저, 절대 아니에요. 오늘부터 일하게 된 윤가람이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숙이는 가람을 본 샤람의 눈빛이 급격하게 부드럽게 변했다. 하이드의 급격한 태도변화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 네가 할멈이 말했던 신입이구나. 반가워. 내가 백사병의 로드인 카르밀라야. 여기서는 샤람 오디티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카르밀라라는 이름에 기겁을 하다못해 기절을 할 지경이었지만, 가람은 그런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예, 예. 알겠습니다. 카르.... 샤람 님?"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난 너무 딱딱한 건 싫으니까."


"그럼. 저도 그냥 마님으로?"


“후훗. 그게 제일 흔하긴 하지.”



아까 그 무서운 인상의 사람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가람은 인지에 부조화가 왔다.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샤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냥하게 웃으며 가람의 양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해. 가람아.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네! 잘 부탁드립니다!"



신입에 어울리는 패기를 본 샤람은 만족해하며, 가람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줬다. 같은 여자지만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가람이었다.


긴장인지, 설렘인지. 기왕이면 긴장이면 좋겠다.



"그래서? 넌 정식 입단 언제 할 거니?"



오늘 아나가 대리로 수행했던 임시 입단 후에 로드가 직접 행하는 정식 입단식을 거쳐야 진정한 클랜의 일원이 된다.


그 사실은 세그먼트에게 들어서 이미 다 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전 여기가 마음에 들거든요."


"그럼 너도 다음 달에 수연이 입단식 할 때 같이 할래?"


"좋죠. 저랑 같이 들어온 저희 오빠도 그래도 되죠?"


"마음대로 하렴."



앗싸! 라며 가람이 소리치는 게 언제나 고요하던 서재 안을 가득 메웠다. 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는 샤람을 보고는 금방 자신의 과실을 깨닫고 도망치 듯 서재를 빠져나가긴 했지만.



"죄. 죄송합니다. 그럼 전 계속 청소해야 되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수고하렴."



서재의 문이 닫히고, 빠른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나서야 샤람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생각을 정리할 게 생겼기 때문이다.



'다음 달 스케줄은 최대한 비워야겠네.'



그러면서 노트북으로 정식 입단할 아이들의 선물을 고르는 샤람이었다.



**



백사병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클랜이고 로드에게는 세 명의 자식이 있지만, 후계 싸움 같은 건 전혀 없는 수준이었다. 이미 후계자로는 아나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나가 후계자가 된 게 다른 두 사람보다 독보적으로 뛰어나서가 아니다.


생리적으로 누군가를 이끄는 건 안 맞는다고 거부한 하이드, 입양된 데다, 인간인 자신이 로드 같은 걸 할 수도, 할 생각도 없다는 진.


형제들의 생각이 이러니, 남는 거라곤 아나 밖에 없었다. 속되게 말해서 덤터기를 쓴 아나였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노력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언제나 당당한 모습으로 있었으며, 육체의 단련도, 위에 서는 자가 가져야 할 교양도 끊임없이 공부했다.


재능이 뛰어난 오빠나 머리가 좋은 남동생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백사병이라는 위대한 이름에 어울리는 로드가 될 수 있도록. 어머니의 이름을 먹칠하지 않도록.


하지만 노력한다고 다 될 정도로 세상이 상냥하지는 않았다.


단련을 하면 할수록 하이드와의 재능 차가 뼈저리게 느껴졌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진과의 격차는 더 멀어지게만 느껴졌다.


어느 무엇 하나, 그 두 사람보다 잘한다고 확신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아나는 자신의 후계자의 자격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그 둘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후계자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 어차피 난 남는 자리에 들어간 낙하산일 뿐이다. 다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그런 생각들을 자주 했지만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다.


아나 오디티는 백사병의 후계자이자, 샤람 오디티, 카르밀라의 딸이니까. 클랜원들은 물론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나는 그럴 때마다 방에서 혼자 자책하며 조용히 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다짐했다.


더는 약해지지 않겠다고, 두 번 다시는 울 지 않겠다고.


하지만.


성벽처럼 굳건했던 다짐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의 파도에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런 모습 보려고 널 후계자로 지정한 게 아닌데.'



턱을 괴고, 눈을 내리깔며 한 그 말.


아무리 봐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 한 마디에 아나의 눈에서는 반사적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후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방에서 커튼을 다 치고, 불을 끈 채 침대 위에서 훌쩍 거리고 있었다.


시간이라는 약의 약효로 마음이 진정돼서 눈물은 좀 멈췄지만. 그 직후 부작용으로 인해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내. 내가 무슨 짓을.'



어머님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것도 모자라서, 방까지 달려오면서 울부짖는 걸 보고 들은 사용인들이 수두룩했다.


도저히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할지 감도 안 잡히던 중,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나의 전속 메이드, 미르하였다.



"아, 아가씨. 괜찮으....."


"혼자 있게 해줘."


"....네, 알겠습니다."



미르하는 위로나 어떠한 말도 없이 그대로 방문을 닫고 나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설픈 위로를 받았다간 진짜 무너질 것만 같았기에.


침대에 묻혀서, 이불에게 앞으로 어떡할지, 무슨 변명을 할지를 물어보던 때였다.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귀를 기울이니, 미르하가 갑작스러운 손님의 방문에 당황하고 있었다.



"도련님, 안 됩니다. 아가씨께서 혼자 있고 싶으시다고...."


"에이, 괜찮아. 어무이한테 혼나서 꽁해 있을 까봐, 선물 사왔으니까."


"그, 그게 아니라."


"야, 동생! 우냐?"



이 세상 누가 들어도 하이드였다.


아나는 하이드의 노크 소리에 맞춰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맞춰서 발을 땅에다 댔다.


지금 자기 속도 모르고 해맑기 짝이 없는 저 오빠 놈이 너무 부러운 만큼 화가 치솟았다.



"오빠 놈께서 들어가신...."


"나가."


"네가 좋아하는 와플 사왔...."


"나가라고!!!!"



화악!!!


아나가 날개를 꺼내면서 생긴 돌풍이 방안에 휘몰아쳤다. 그 돌풍에 하이드의 손에 있던 와플이 문밖까지 날아가서 복도에 부딪혀서 허망하게 부서졌다.


하이드는 언짢아진 기분으로 와플과 여동생을 번갈아봤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는 이미 새빨갰고 호흡마저 정상이 아니었다. 침대 위나, 그녀의 상의에는 젖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필승카드인 와플이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그것도 안 통할 정도로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화내기에는 동생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이 된 하이드는 한 마디 건넸다.



"야. 너 괜찮...."


"그냥. 빨리. 나가."



아나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듯 날개로 온몸을 감싸며 하이드에게 손짓했다. 저 상태라면 괜한 걱정이나 위로는 역효과다. 기분이 풀리면 다시 찾아와야겠다.



"쉬어라."



요란하지 않게 깔끔한 한 마디만 남긴 채, 하이드가 방을 떠나자, 방안은 다시 어둠이 짙게 깔렸다. 조금 전과 달리, 돌풍으로 인해 많이 어지럽혀지긴 했지만.


그 너저분한 어둠의 중심에서 아나는 날개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하고 있었다.



'나. 진짜 최악이네.'



아무리 기분이 안 좋더라도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찾아온 오빠를 그렇게 매몰차게 쫒아 내다니.


이건 후계자의 자격 운운하기 전에 인간성의 문제 아닌가?


아주 한순간이지만 그냥 죽어버릴까라는 생각에 날개를 조금씩 움직여봤다.


문밖이 다시 한 번 손님으로 인해 소란스러워지기 전까진.



"도. 도련님!!"



순간 미안하던 감정이 싹 가시고,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분명 나가라고 했는데, 또 들어오겠다는 건. 내가 화내도 모두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거지?


좋아, 들어와 봐.


눈에서는 눈물을 훔치면서 발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텅 빈 소리라 웃던 아나는 서서히 날개를 문 쪽으로 조준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그와 동시에 아나의 날개가 깃털을 문을 연 장본인에게로 날리기 위해 크게 뒤로 젖혀졌다.



"아나. 있어?"



그리고 높낮이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날개를 멈췄고, 아나도 그 자리에서 질겁을 하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진은 주변을 살펴봤다.


꼴이 말이 아닌 아나, 젖혀진 날개, 뒤에서 꽁해 있는 하이드를 보니까 순식간에 사태를 파악했다.



"나 방금 죽을 뻔한 건가?"


"아아아아아아....."



아. 라는 말만 고장 난 라디오처럼 내뱉더니, 허겁지겁 날개를 거두고 쥐구멍에라도 숨는 것처럼 이불 속에 파묻히는 모습이 딱하기 그지없었다.



"뭐, 됐어. 상태 보니까 뭐라 할 마음도 안 드네."



진은 이불을 걷고는 아나와 눈을 맞췄다.



"마음도 싱숭생숭한데, 정원에서 산책이나 하자. 둘이서."


".....“


"싫어? 가지 말까?"


"....갈래."



아나는 눈물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처럼 뻣뻣했던 목은 나이 든 노인처럼 굽어버렸고, 발걸음은 낭떠러지에 내딛는 것처럼 매우 조심스러웠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의 자신과 겹쳐보던 진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고는 정원으로 향했다.


복도가 아닌 방에 난 창문을 통해서.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자, 달빛과 바람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괴도가 왕국의 공주를 납치하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근데 그건 모르는 사람의 시점일 때의 이야기고.


아나의 방은 2층이고 진은 못 난다.



"착지는 맡길게."



그렇게 진의 손에 이끌린 아나는 함께 중력에 몸을 맡겼다.



**



"아악!!! 아가씨!!!!"


"도, 도련님!!! 왜 또."



진과 아나의 추락을 지켜본 메이드들의 거대한 비명 소리에 와플을 입 안에 넣던 하이드는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아래쪽엔 연못이라서 딱히 다치지도 않을 텐데, 참.


그 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품에 무언가를 안고 달려오고 있었다. 가람이 까망이를 안고 허겁지겁 하이드에게로 달려왔다.



"뭐, 뭐, 뭐, 무슨 일이야.... 요. 웬 비명소리야.... 요."



얼마 전까지 허물없이 대하던 친구를 주인으로 모시게 생겨서인지, 영 높임말이 입에 안 달라붙었다.



"할멈 없을 때는 편하게 해."


"무슨 일인데?"


"동생들의 동반 자살."


“무. 뭐어어어!!!!!"


"농담이고 과보호로 인한 과잉 비명. 저택에서 일하다보면 자주 있을 테니까 익숙해져."


"진짜 놀랐네. 그나저나 계속 느끼는 건데 진이 이 집 여자들한테는 인기 많구나. 학교에서는 얘기 나누는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돈데."



별 생각 없이 자신의 감상을 말하는 가람이었지만, 와플을 입에 집어넣던 하이드의 손이 멈췄다.


가람은 무의식적으로 하이드가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평소에 화내는 일이 거의 없는 하이드였기에 가람의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화났어?"


"별로. 내가 화낼 일은 아니지. 그래도 진이 앞에서는 그 말 하지 마."


"인기 있다는 거?"


"그래."


"진이 과거랑 관련 있는 거야?"



세그먼트에게 일을 배우면서 오디티 일가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들은 게 있었다. 물론 진에 관해서도 말이다.


악마의 피도 피였지만, 그로 인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적당히 듣고 나니 평소에 진에게 갖고 있던 인상이 아주 많이 변했다.


왜 말이 없을까에서, 말이라도 해서 다행이다로. 감정 표현이 둔하구나에서 감정이 남아 있는 게 놀랍다로. 여자한테 관심이 없는 건가에서 대인기피증이 없는 게 신기할 지경으로.


지금도 많은 후유증을 달고 살긴 하지만, 처음 저택에 왔을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진이가 우리 집에 온 후, 어무이 명령으로 진이를 학대하던 클랜 몇 개를 조져버린 적이 있었거든?"


"응."


"그 클랜 놈들한테 진이를 그렇게까지 심하게 괴롭힌 이유를 물어봤는데, 제일 많았던 이유가 뭔지 알아?"


"뭔데?"


"사랑해서."



사랑이라는 단어에 가람은 눈이 찡그리고, 반사적으로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흡혈귀들의 뇌 구조는 인간과 다른 건가라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하이드가 금방 부정해주긴 했지만.


그렇다면 그 미친 이유들의 이유는 명확하다.



"악마의 피...."



악마의 피에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풍미, 마약에 버금가는 중독성, 흡혈귀로 변하지 않는 체질 말고도 숨겨진 효과가 더 있었다.


악마의 피를 가진 이에게 적대감을 품지 않은 흡혈귀들 대다수는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그 효과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성에게 더 강하게 작용했다.


또한 그 호감은 연심으로, 연심은 집착으로 변하는 건 금방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진이 주변에 있는 여자애들은 전부 다 흡혈귀네?"


"걔네가 집착은 할지언정 진한테 해는 안 끼치지."



그 때 그 놈들과는 다르게.



"그 놈들도 딴에는 진이를 사랑해서 한 짓들이었을걸? 정작 당사자 생각은 정말 1도 안했지만."



하이드는 피지도 않는 담배를 대신해서 와플로 대충 피는 시늉을 해봤다. 달았던 와플에서 쓴 맛이 난다.


가람은 몰래 꺼낸 와플 하나를 베어 물며 그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렇게 돼?"


"그건 걱정 마. 이미 속에 담아두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별 효과 없을 테니까."


"그럼 로드는?"


"우리 어무이는 그냥 처음부터 집착이 심하신 분이고. 특히 로라 이모를 향하던 집착이 죄다 진이한테 갔으니까, 오히려 목줄을 안 채워놓는 게 다행이지."



다행인 건가? 생각하던 가람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있지. 진이는 아나나 수연가 자길 좋아하는 건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까지 사랑 고백한 놈들 생각하면."



강간하던 놈들도 손톱을 뽑는 놈들도 피부를 벗긴 놈들도 다리를 부러 트린 놈들도 모두 진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흡혈귀가 사랑한다는 말을 믿겠냐?"


"무리지."



그렇다고 인간에게 당한 일도 어지간하지 않아서 진은 인간을 흡혈귀와 다르게 취급하지도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인간과 흡혈귀를 공평하게 보는 시선을 가지게 됐다. 둘 다 공평하게 싫어한다.



“결국 피에 홀린 걔네만 불쌍하게 된 거지.”


“....그럴까?”


“응?”


“아니야. 아무것도. 그럼 난 일하러 갈게.”



가람은 한 가지 비밀을 까망이와 같이 가슴에 간직한 채, 하이드에게서 멀어졌다. 뒤통수가 뚫릴 듯한 눈빛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고 모퉁이를 돌아서 몸을 감췄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가람은 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악마의 피. 페로몬이라 이거지?’



진을 볼 때마다 수연의 새하얀 볼이 붉어지는 걸 머릿속으로 그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수연아, 넌 가능성 있겠다.’


작가의말

추석에 계속 연재할 생각이었는데 사고가 나는 바람에 최근 며칠 연재를 못했네요.


기다려주신 모든 분께 정말 죄송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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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1화-용서라는 고통 20.10.29 73 5 20쪽
30 30화-여우 몰이 +1 20.10.26 55 5 20쪽
29 29화-두 송이 장미 20.10.23 52 4 19쪽
28 28화-레이나 20.10.22 55 4 19쪽
27 27화-유혹 20.10.19 60 4 18쪽
26 26화-설상가상 20.10.16 55 5 17쪽
25 25화-낚시 20.10.14 115 4 19쪽
24 24화-이십면상 20.10.12 67 5 18쪽
23 23화-설마가 사람 잡는다. 20.10.10 60 5 16쪽
22 22화-공조 +2 20.10.09 66 5 19쪽
21 21화-엎친 데 덮친 격 +2 20.10.07 64 7 19쪽
» 20화-남매들의 속사정 +1 20.10.05 84 6 22쪽
19 19화-카르밀라 +1 20.09.29 72 7 20쪽
18 18화-비장의 무기 +1 20.09.26 66 7 22쪽
17 17화-천차만별 20.09.24 69 5 17쪽
16 16화-체인 리쉬 20.09.23 69 4 20쪽
15 15화-여동생 +1 20.09.21 78 6 19쪽
14 14화-방해꾼들 20.09.19 91 5 20쪽
13 13화-신입 20.09.17 79 6 17쪽
12 12화-각자의 역할 +1 20.09.16 91 8 26쪽
11 11화-시귀 20.09.14 83 4 24쪽
10 10화-권유 +1 20.09.13 94 5 20쪽
9 9화-반쪽짜리 진실 +1 20.09.10 102 6 17쪽
8 8화-번외수사 20.09.06 124 6 18쪽
7 7화-홍설대 실종사건 +1 20.09.05 147 8 23쪽
6 6화-오디티 저택 +1 20.09.03 185 4 16쪽
5 5화-포맷 +1 20.08.30 234 5 20쪽
4 4화-악마의 피 +1 20.08.27 275 8 16쪽
3 3화-진짜들 20.08.26 295 8 14쪽
2 2화-백사병 20.08.26 385 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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