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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현의 서재입니다.

엘더 사가 - 1부 별의 조각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거물현
작품등록일 :
2022.07.21 18:13
최근연재일 :
2023.03.31 18:30
연재수 :
112 회
조회수 :
3,887
추천수 :
64
글자수 :
411,114

작성
23.01.1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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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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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91화

DUMMY

나자리아는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이고 나뭇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모닥불을 뒤적였다. 반쯤 탄 떡갈나무 가지에서 타닥 소리가 나며 작은 불티들이 둥둥 떠오르다 눈 녹듯이 사라졌다. 후우- 나자리아는 몸을 바로 하고 눈에 힘을 주어 똑바로 애런의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자니는 나 때문에 세이지에게 잡혀간 거예요.”


“그건 백작이 시킨 것이잖아요. 당신도 아자니를 지키려다 죽을 뻔했고요.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솔직히 당신이 그렇게까지 아자니를 지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정말 고마워요.”


“아니에요. 그전에··· 그러니까 난 경매장에서 이미 아자니를 찾았어요. 창고에 숨어서도 당신에게 연락할 시간이 충분했지만···,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어요. 만약 내가 빨리 뿔피리를 불었더라면 아자니가 세이지에게 잡혀가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애런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벌렸다.


“왜 그런...?”


“그건 아자니가 그리니어이기 때문이었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나에게는 그리니어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아자니가 그리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많이 놀랐어요. 하필이면 내가 그녀를 찾는 바람에 고민이 생겨서 연락을 미루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아자니가 정말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그래서 마음을 정리하려는데 일이 터져버린 거예요.”


“그럼 아자니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것 아니었나요?”


“그 문제는 아자니가 직접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애런은 나자리아가 하는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문제길래···.”


“그건···, 후-, 미안해요. 그건 말해줄 수 없어요. 하지만 나 때문에 당신이 아자니를 일찍 구하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해요. 그녀가 바다로 던져지는 것을 보고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계속 후회했어요.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나자리아가 두 손을 모으고 몸을 숙였다.


“그러니까 당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자니를 이용하려고 일부러 나한테서 아자니를 숨겼다는 말이죠? 세이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자니를 어떡하려고 했죠?”


나자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힘없이 늘어뜨린 어깨에 보이지 않는 쇳덩이가 올려져 있는 것 같았다. ‘창고에 가기 전이라면 내가 보글러에게 벗어나서 거리에 있을 때야. 아마 뒤렉씨도 경매장을 나왔을 것이고, 그때 연락을 했다면 아자니를 데리고 페렐리움을 벗어났을 수도 있었어.’ 애런은 그녀의 말을 모두 납득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와 결혼하려고 일부러 연락하지 않은 거군요.”


“꼭 결혼 때문만은 아니에요. 말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요. 믿어줘요.”


애런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자리아를 보았다. ‘거짓말.’


“이런 말을 왜 하는 거죠? 이제 아자니까지 죽었으니 자신감이라도 생겼나요? 내가 당신을 미워해도 반지가 정한 운명 때문에 결국은 당신과 함께 할 거라고 믿어서?”


애런이 몸을 앞으로 확 들이대자 놀란 모닥불이 화르르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등을 굽히며 어깨를 접는 나자리아를 보며 애런은 처음으로 그녀가 작게 느껴졌다.


“어제 당신이 날 품었다면 말하지 못했을 거예요. 나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나자레스의 선택은 더 분명해졌어요. 그래서 시간이 흐른 뒤에 당신이 알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함께 사는 사람을 평생 동안 속이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당신 마음속에 내 자리가 조금도 없으니까···.”


“없으니까 지금은 미움을 받아도 상관없다? 그래, 난 당신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아요! 아자니가 거미에게 잡혔을 때 분명하게 깨달았어요. 내가 아자니를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요? 사람이 죽었는데 이해해달라고? 그 애는 내 전부였어요!”


이지러진 애런의 얼굴을 모닥불이 더 심하게 일그려뜨렸다.


“당신도 그렇고, 당신네 마을 사람들도 모두 제정신이 아니야. 고작 반지 따위에 휘둘려서 강제로 사람을 얽매고 죽여도 모든 것이 반지의 뜻이라고 억지로 껴 맞추려고 하잖아요. 수백 년 동안이나 해온 그 짓거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겠어? 내가 그런 미친 짓거리를 같이 할 것 같아요?”


주먹으로 내리친 바닥에서 튄 모래가 모닥불로 들어가 한 움큼 숨이 죽었지만 애런의 눈에 비친 불꽃은 더 크게 이글거렸다.


“당신이 날 미워할 것을 잘 알아요. 나자레스는 단순한 미신 같은 것이 아니에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나에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요. 미안한 마음은 정말 진심이에요. 당신이 날 죽이려고 했을 때 피하지 않은 건 신녀의 대가 끊기더라도 벌을 받을 각오였어요. 내가 당신의 세계를 무너뜨렸으니까, 그리고 나의 미래도···. 앞으로 매일 아자니의 안식을 위해 기도할게요. 그리고 그녀 몫까지 내가···.”


“그만! 이···.”


애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어라 더 말하려다 입을 닫고는 싸늘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나자리아는 피하고 싶지만 마음을 다잡고 떨리는 눈으로 마주했다. 부릅뜬 눈에서 뿜어 나오는 감정들이 빗발치듯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분노와 경멸, 의문과 혼란이 하나하나 가슴에 닿았지만 응어리를 풀어줄 것은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경련하듯이 눈매를 꿈틀거리다 고개를 가로저은 애런은 몸을 돌려 숲을 향해 걸어갔다. 성큼 발을 디딜 때마다 퍽퍽 소리가 나며 모래가 거칠게 튀었다


“솔직하게 말한 건 나자레스 때문이 아니에요. 난 당신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었어요. 용서해줘요. 애런!”


나자리아는 암굴에서 나와 몇 걸음을 걷다 차마 그를 붙잡을 용기가 나지 않아 자리에 주저앉았다. 답답한 마음이 가슴을 꽉 틀어 막아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입을 벌려 크게 들이마셔도 숨이 들어오는 것 같지가 않았다. 바닥을 짚은 두 손으로 모래를 쥐어짜듯이 움켜쥐며 소리쳤다.


“가지 말아요. 애런!”


귓전을 울리는 센바람이 그녀의 외침이 애런에게 닿기도 전에 걷어냈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사라진 애런을 보며 터져 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자기 운명을 자기가 정할 수 없는 불행을 당신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언제 올까 기다리고 날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마음을 알아요? 이런 불행이 나 하나로 끝이 아니라는 절망감을 아냐고요!”


대답 대신 숲에서 불어나온 바람이 나자리아의 머리칼을 휘감아 바다로 밀어댔다. ‘이런 일이 생길까 봐 늘 두려웠는데 결국 일어나고 마는구나. 매일 밤 천사들께 올린 기도들은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


시야를 희미하게 만든 눈물을 걷어내자 애런이 들어간 나무 사이에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숲속에서 들짐승에게 공격을 당했는지 온통 피칠갑을 한 남자는 뜯겨나간 목을 기울이고 늘어뜨린 내장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팔꿈치밖에 남지 않은 팔을 나자리아에게 뻗었다.


“크리스···.”


크리스는 나자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마주했다. 튀어나온 한 쪽 눈알이 뺨에 걸쳐 있는 그는 새빨간 피로 물든 눈동자 하나로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나자리아는 여기저기 살점이 뜯겨져 척추와 갈비뼈가 드러난 크리스의 등을 감싸 안고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날 이해해 준 건 너밖에 없어.”


누더기가 된 셔츠가 젖도록 실컷 흐느낀 나자리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는 온데간데 없고 허공에 벌린 팔 사이를 휑한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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