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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귀찮게 좀 하지 마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드라마

휴학생P
작품등록일 :
2020.05.14 19:41
최근연재일 :
2022.05.1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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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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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44. 3월의 층 (6)

안녕하세요~




DUMMY

프리드는 얼굴을 감싸 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렇게 가까웠던 이의 죽음을 마주한 건 사실 이번이 처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비로소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린 게임이 아닌 현실을 살고 있어. 목숨을 판돈으로 건 대륙이라는 현실.’


이 원인 미상의 재앙 속에서 인간의 목숨은 너무나 가벼웠다. 지금까지야 운이 좋았든 실력이 좋았든 버텨냈지만 이제부터는 실수 한번이 목숨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자각이 강하게 들었다.


프리드는 조심스레 수첩을 펼쳤다. 딱히 일관된 내용이 담겨있지는 않았다. 그저 단편적이고 산발적인 메모들만이 매 페이지를 채우고 있었다.


『붉은 새가 보인다. 어느 전장이 마지막이 될지는 나도 예상할 수가 없다.』


『죽음을 불렀다. 내가 원하는 때에 갈 수만 있다면...』


『겨울에 덮힌 세상이 있다고 들었다. 언젠가, 봄이 내린 곳에 도착한다면 정말 전부 내려두고 쉬고 싶었다.』


『거대한 신의 척추를 건너면 강철이 살아서 숨을 쉬는 땅에』


대부분이 프리드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뿐이었다. 수첩에는 하레이의 잔류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빛이네요?”


“하레이의 보잘것없는 능력들 중 하나에요. 적을 굴복시키는 위엄이 서린 빛이 아니라 그냥 순간적으로 터뜨리는 용도였지만.”


덕분에 어둠 속에서 랜턴 대용으로나 쓰던 능력이었다. 이런 식으로 프리드가 보게 될 줄은 몰랐겠지. 미궁을 돌았지만 생사는 고사하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레이를 잃고 4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단말기에 따르면... 방금 막 성광의 달에 진입했네요.”


“성광의 달이면... 밖은 이제 가을인가.”


“그렇죠?”


“하늘이 높겠다아~”


카나와 루아리는 이제 제법 친해졌다. 둘 다 로레인과도 제법 잘 지냈던 걸로 기억했는데 딱히 성격에 모난 게 없으니 서로도 잘 지내는 걸로 보였다. 침체된 분위기를 살리는 데에 그녀들은 큰 기여를 했다. 그들은 어느덧 미궁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탁. 타닥.


안전지대를 모닥불의 열기가 따뜻하게 감쌌다. 3일차에 발견한 장소였다. 내부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뭔가 진행도 되지 않았다. 그저 쉬어가는 곳이었다.


프리드는 조용히 불을 쑤셨다. 여인들은 조용히 떠들었다.


“벌써 대륙에서 맡는 다섯 번째 성광의 달이네요.”


“에? 루아리, 그렇게 오래된 거예요?”


“나보다 더한 사람들도 많은 걸요.”


성광의 달.

원래 살던 세상을 기준으로 초가을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하늘은 높아지고 대부분의 농작물들이 수확되는 시기였다. 대륙의 주민들은 한해의 과업을 무사히 수행하게 해준 하늘에 감사를 표하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축제가 가장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카나는요? 성광의 달은 보통 어떻게 보냈어요?”


“글쎄요. 일이 없으면 길드 언니들이랑 맛있는 거 먹으면서 놀았을 거예요. 루아리는요?”


“모르겠네요. 일하고 있었을 것 같기도?”


“에에? 재미없어! 매일요? 제일 날이 좋은 시기인데? 애인은요?”


갑작스러운 카나의 질문에 루아리의 얼굴은 가라앉았다.


“없어요. 그런 거.”


뭔가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외로워보였다.


“미안해요.”


카나가 사과하자 그녀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정말 별거 아니니까.”


그녀는 말없이 불만 쑤시는 프리드를 쳐다봤다.


“다 들었죠?”


“안 들었습니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오히려 웃음이 났다. 아까부터 손은 전혀 움직이질 않고 있었으니까.


“애인 없는 건 맞는데 허튼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저 건들면 무서운 사람이 가만 안 둘 거거든요.”


프리드는 생각했다.


“평소에 자의식 과잉이라는 소리 많이 듣습니까?”


“네? 자의식 뭐요? 아주 한 마디를 안 져.”


“프리드 씨, 그렇게 말하면 인기 없어요.”


“관심 없습니다.”


“아! 고기 먹고 싶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누워버리는 카나. 그 모습이 썩 귀여웠는지 루아리의 표정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우리 무사히 나가면 한번 봐요. 왕도에서. 우리끼리 놓친 성광의 달이나 축하하자구요.”


“전 좋아요.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래. 카나. 안 될 게 뭐 있니?”


그녀들은 프리드를 바라봤다. 역시나 반응조차 없었다.


“저쪽은 제가 데려갈 수 있어요.”


“어떻게?”


“로레인만 꼬시면 저쪽은 세트 메뉴에요.”


“풉.”


밤이 지나고 있었다.





◎◎◎◎◎◎





여전히 출구는 구경도 못한 채로 미궁을 방황하던 그들에게 길을 제시해준 건 하레이의 빛에 의해서였다. 제대로 된 길을 찾지 못하니 덩달아 의욕까지 떨어지던 그때였다.


“프리드, 이것 좀 봐요! 이렇게 한 곳만 계속 찔러대면 미궁이라도 부술 수 있지 않을까요?”


루아리였다. 아마 정신을 반쯤 놓기 일보직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와! 언니, 그거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카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전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아마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키메라가 나타나면 교전에 합류하기는 했으나 그때를 제외하고는 한껏 우울해져서는 바닥을 보며 걷기만 했다. 그마저도 루아리가 달래지 않았다면 나아가는 것조차도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로레인은 선녀였네.’


답답한 걸 싫어하고 잡스런 불평불만이 많은 친구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얘네 둘보다는 같이 다니기 좋았다. 정작 프리드가 자신을 그리워하는 걸 모르는 그녀는 왕도에서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엣취! 슬슬 가을이긴 한가 보네. 선선하다아~”


블렌하임 저택의 연무장에서 주문을 영창하던 그녀는 하늘을 올려봤다. 구름이라고는 한 점도 떠있지 않은 창천이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수련을 돕던 블렌하임이 다가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게냐?”


“아뇨. 그냥 날이 너무 좋아서요. 계속하셔도 돼요. 이번에는 조금 더 복잡한 걸로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나름대로 강해지고 있었다.


(로레인도 참 열심히 하는구나. 이 모습을 프리드가 봐야 할 텐데.)


『아저씨! 로닌도 보구시퍼!』


(나도 보고 싶단다.)


여전히 귀여운 로닌이었고, 언뜻 인자한 척하는 밀렌이었으며, 실력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지고 있는 로레인이었다.





◎◎◎◎◎





일시적이긴 하나 정신적으로 정상적인 구성원이 없는 파티였다. 극한의 상황까지 떨어지자 인간의 추악한 본성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꼴로 의미 없이 돌아다녀서 뭘 더 하겠는가? 괜히 돌아다니면서 힘이나 빼는 것보다는 체력이라도 보존하면서 뭐라도 알아보는 방법을 택했다.


그때였다. 하레이의 수첩 속에서 은은한 빛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단지 당장의 어둠을 밝히는 정도의 역할만 하던 그의 빛은 비로소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툭.


“어? 프리드, 그거 떨어졌는데요?”


미궁의 바닥에 닿은 수첩에서 빛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글리프들이 긴 띠를 이루며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상당히 몽환적인 광경이었다. 은은한 녹색 계통의 생그러운 마나가 활자의 띠를 이뤄 허공을 수놓았다.


“뭐하신 거예요?”


“나라고 알 리가...”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이히히. 이쁘다아.”


카나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수첩으로 다가갔다. 확인되지 않은 현상이었기에 프리드는 뒤늦게 그녀를 만류하려 했지만 이미 수첩의 활자는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따뜻해.”


활자의 띠는 부드럽게 카나의 몸을 쓸고 지나갔다. 차례로 루아리와 프리드의 몸을 쓸고 지나갔으며 프리드의 몸을 지나갈 때 프리드는 볼 수 있었다.


『때로는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그 자리에 잠시 서서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정보가 부족하다면, 충분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겠나?』


『내 벗이여.』


‘잠시 서서 기다리라고?’


=================================

그대의 용기와 인내를 시험해보겠습니다.(부동)


-(0/100)


=================================


하레이의 수첩에서 흘러나온 활자와 프리드의 생각이 합쳐지자 시스템이 올려 보낸 메시지. 둘을 종합하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싱거우리만치 간단했다.


‘고맙다. 하레이.’


그는 루아리를 보고 물었다.


“그쪽도 봤어요?”


망막 한편에서 수치는 계속해서 1과 0을 오가고 있었다. 1을 유지하던 수치가 프리드가 이동하는 동시에 0으로 초기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거... 설마 그건가?”


“어... 아마요? 가만히 있으라는 것 같은데요?”


궤변이었다. 한곳에서 조금이라도 길게 머무르면 어떻게 아는지 키메라들이 몰려오는데 가만히 있으라니? 게다가 인간은 멈춰있기 위해 설계된 생물이 결코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루아리는 곰곰이 생각하다 프리드에게 말했다.


“뭐 다른 방법 있어요?”


“...”


“없으시네요. 그럼 이걸로 진지하게 한번 가보죠.”


수치가 초를 의미하는지 분을 의미하는지 그 외의 단위를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여행자가 뭔가? 잘 모르는 부딪히는 게 바로 여행자였다.


“루아리, 카나. 잘 들어요. 지금부터 우리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요.”


“저는 할 수 있어요!”


카나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감싸는 활자들에 마음이 편해지기라도 한 건지 자기는 끄떡없다는 말도 보탰다.


“생각보다 기준이 자유로운 것 같은데.”


자신을 기준으로 극히 좁은 원이 설정된 뒤 그 안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의 움직임은 용인이 되는 수준이었다.


“일단 초나 분 단위는 아니네요.”


그들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배회하던 키메라들도 가까이 다가올 일이 없었다. 미궁의 키메라들은 움직임을 기반으로 적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뭔가 진행이 되고 있는 느낌이에요.”


“잘하고 있어요. 둘 다. 루아리, 혹시 뭔가 보이거나 하면 바로 나한테 말해요.”


치이익!


“또 저 소리네.”


“왜요? 무슨 소리요?”


“무슨 스팀 같은 걸 뿜는 소리가 들리는데요?”


프리드의 기묘한 표현에 루아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신경까지 쓸 건 아닌 것 같아요. 별로 가까운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다.


=================================


그대의 용기와 인내를 시험해보겠습니다.(부동)


-(38/100)


=================================


=================================


그대의 용기와 인내를 시험해보겠습니다.(부동)


-(6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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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용기와 인내를 시험해보겠습니다.(부동)


-(97/100)


=================================


끝에 끝까지 잘 버텨놓고 위기가 찾아왔다.


치이익.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루아리는 직접 보고 있을 것이고.


“이 직선 복도의 끝에 보이는 거죠? 지금?”


“어... 예.”


“하... 돌아버리겠네.”


그녀가 묘사해준 특징들만 모아서 생각해보니 상당히 성깔이 있을 것 같은 친구였다.


무쇠로 이루어진 아래턱. 한 번씩 벌어질 때마다 새하얀 스팀을 뿜어댔고 프리드가 들었던 소리는 역시나 거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좌우로 미궁의 길을 가득 채우는 크기에 높이는 미궁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다.


“씨발...”




제 글이 여러분에게 어떤 방향으로라도 영향을 끼쳤기를 바랍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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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161. 왕이 잠든 땅 (5) 22.02.19 29 0 12쪽
161 160. 왕이 잠든 땅 (4) 22.02.15 29 0 12쪽
160 159. 왕이 잠든 땅 (3) 22.02.08 34 0 11쪽
159 158. 왕이 잠든 땅 (2) 22.02.01 32 0 12쪽
158 157. 왕이 잠든 땅 (1) 22.01.25 35 0 12쪽
157 156. 3월의 층 (18) 22.01.18 34 0 12쪽
156 155. 3월의 층 (17) 22.01.11 36 0 13쪽
155 154. 3월의 층 (16) 22.01.04 31 0 14쪽
154 153. 3월의 층 (15) 21.12.28 27 0 13쪽
153 152. 3월의 층 (14) 21.12.24 32 0 12쪽
152 151. 3월의 층 (13) 21.12.20 43 0 13쪽
151 150. 3월의 층 (12) 21.09.29 41 0 12쪽
150 149. 3월의 층 (11) 21.08.24 43 0 12쪽
149 148. 3월의 층 (10) 21.07.05 43 0 13쪽
148 147. 3월의 층 (9) 21.06.29 50 0 12쪽
147 146. 3월의 층 (8) 21.06.22 51 0 13쪽
146 145. 3월의 층 (7) 21.06.15 53 0 12쪽
» 144. 3월의 층 (6) 21.06.08 58 0 12쪽
144 143. 3월의 층 (5) 21.06.01 55 0 12쪽
143 142. 3월의 층 (4) 21.05.25 55 0 12쪽
142 141. 3월의 층 (3) 21.05.18 54 0 12쪽
141 140. 3월의 층 (2) 21.05.11 55 0 12쪽
140 139. 3월의 층 (1) 21.05.04 59 0 12쪽
139 138. 1월의 층 (11) 21.04.27 56 0 12쪽
138 137. 1월의 층 (10) 21.04.20 70 0 12쪽
137 136. 1월의 층 (9) 21.04.13 60 0 12쪽
136 135. 1월의 층 (8) 21.04.06 58 0 12쪽
135 134. 1월의 층 (7) 21.03.30 62 0 12쪽
134 133. 1월의 층 (6) 21.03.23 6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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