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7.06 18:10
연재수 :
305 회
조회수 :
1,571,740
추천수 :
31,553
글자수 :
2,315,055

작성
23.05.17 18:10
조회
18,417
추천
280
글자
12쪽

사형, 사제

DUMMY

운공과 동시에 외기의 파도가 몰아친다.

허나 그것을 마주하는 백연의 자세는 이전과 전혀 달랐다.


밤새 자아놓은 걸음과 움직임이 산들바람처럼 풀려나갔다.

동공이 지친 사지 근맥에 기의 호흡을 불어넣어 준다.


언뜻 보기에 춤추는 것 같기도 한 동작이었다.

그만큼 섬세하게 짜여진 동공이었다. 동작 하나 하나가 근맥을 정확히 자극해야 했으니.


반 각의 시간이 지나고, 백연의 움직임이 멈춰섰다.


팔다리에 들어찬 기운이 느껴졌다.

하단전에 모여든 내력이 몸을 타고 흐르며 전신을 강화시켜 준다.


밤을 지새운 뒤건만,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완성했어.”


축기량이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아직 초입에 들어선 단계임에도 하단전에 쌓이는 내력의 양이 눈에 띄게 불어난 것이다.


‘공능도 더욱 강화되었고.’


확실했다.

몸에 쌓인 내공이 전신을 가볍게 해준다.

아직 경신법을 익히지 않은 몸임에도 걷는 것이 달랐다.


‘고작해야 일성 성취이건만.’


이 정도 공능이라니.


백연은 확언할 수 있었다.

운연동공은 천하 대방파의 심법과 비교해도 남부럽지 않은 무공이라고.


“좋아, 그럼 이제......”


꼬르륵.


중얼거리던 백연의 귓가에 갑자기 들려온 소리였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것이 자신의 몸에서 난 소리란 것을 알아챈 백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보니 밥을 안먹었군.”


그제서야 알아챈 사실이었다.

노인의 집을 떠나고 곤륜산에 오른지 이틀 가까이 뱃속에 들어간 것이 없었다.

이곳에 오고 식사도 거른채 무공에 집중했던 탓이었다.


한번 깨닫고 나자 급속도로 허기가 몰려왔다.


“배고파 뒈지겠네.”


미간을 찌푸린 백연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빠르게 밝아오고 있었다.

시간을 가늠하니 대강 진시 초(辰時:오전 7시) 정도였다.

아침 수련 시간이다.


“......일단은 수련장에 가야겠는데.”


밤에 운향관에 들어가지 않은것도 모자라 아침 수련까지 빼먹으면 신웅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한숨을 내쉰 백연이 발로 바닥을 쓸었다.

내력을 실은 발짓 몇번에 바닥에 가득했던 동공의 발자국이 싹 쓸려나갔다.

동공의 움직임과 구결은 나중에 따로 기록해둘 요량이었다.


정리를 마친 백연이 무궁각을 나서 걸음을 옮겼다.



※※※



“......백연.”

“예?”


고개를 기울이며 천진한 표정을 짓는 소년의 모습에 신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젯밤 운향관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주제에 귀신같이 아침 수련이 시작되기 직전에 나타난 녀석이었다.

괘씸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신유에게 언질을 들었기에 넘어간다만, 이번 한번뿐이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백연.

신웅은 혀를 쯧 차고는 소년을 뒷자리로 돌려보냈다.


“다들 배운것은 잘 기억하고 있겠지. 오늘은 가볍게 낙안권 사 초식부터 시작하겠다.”


구령과 함께 아이들의 주먹이 허공을 격했다.

나름 각 잡힌 움직임 속에서 백연은 한숨을 뱉었다.


‘어떻게 넘어가긴 했네.’


신유가 언질을 주었다니. 나중에 따로 찾아가 감사라도 표해야 할 듯 했다.

과한 친절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도움이 많이 되었으니.


“다음!”


멍하니 하품하며 아이들의 주먹질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갔다.

그 사이 차례는 흘러 백연의 앞까지 왔다.


“다음!”


차례가 되자마자 백연은 생각없이 주먹을 뻗었다.

자연스러운 보법과 함께였다.

배가 고파서인지 그다지 집중되지 않았지만, 몸은 가벼웠기에 동작에는 막힘이 없었다.

끊어치는 주먹이 정확하게 허공을 격하고, 보법은 미끄러지듯 공간을 점유했다.


그렇게 반쯤 멍한 상태로 움직이던 백연은, 문득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깨닫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수련장의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너, 방금 그게 뭐냐.”


잔뜩 찌푸려진 신웅의 표정.

그 모습에 백연은 발밑을 내려다보다 깨달았다.


‘아.’


수련장에 찍힌 발자국은 낙안권의 보법이 아니었다.

운연동공이었다.


‘이런.’


실수였다.

주린 배가 문제였는지, 아니면 밤을 샌 것이 문제였는지 아무 생각없이 움직인다는 것이 낙안권 대신 운연동공을 펼쳐버리고 만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실수했습니다.”

“......좀 더 집중해라.”


다행히 표정을 찌푸린 신웅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신웅의 시선이 힐끗힐끗 따라붙는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별 문제는 없겠지.’


어차피 그가 만든 무공이다.

움직임 하나만 보고 요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젠가는 곤륜의 모든 무인들에게 전수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운연동공을 만든 백연 자신도 아직 이것에 대해 전부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남은 아침 수련 시간은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묘하게 백연을 주시하는 신웅의 시선만을 남긴채로.



※※※



운향관으로 향하는 걸음이 느릿했다. 잠을 자지 못한 탓이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이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럴만 했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 넘게 수면을 취하지 못했으니.

어린 아이의 몸으로 버티기엔 지나친 피로였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자고 싶은 기분이다.


“거기, 사제.”


운향관의 문턱에 발을 들일때였다.

피곤한 눈을 간신히 들어 앞을 살피자, 입구를 막고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에 심술이 잔뜩 묻어나는 것이 그를 환대해주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닌 듯 했다.

백연은 신경쓰지 않았다.


“좀 비켜주시죠.”


날선 말투가 튀어나왔다.

평소였다면 조금 달랐을텐데, 지금의 백연은 다른 사람과 말을 섞고 싶은 상태가 아니었다.


“뭐? 이 자식이 지금 사형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


확 짜증이 일었으나 꾹꾹 눌러담았다.

어쨌든 같은 문파의 사형들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볼 사람들과 척을 세워 좋을 것이 없었다. 정녕 그가 곤륜을 일으키고자 하면 가장 이끌고 가야 할 이들이기도 했고.


“무슨 일이십니까, 사형들.”

“다른건 아니고, 곤륜에 새로 들어왔으면 사형들께 인사를 해야지.”

“인사요?”


백연이 되물었다.

대강 들어도 그 ‘인사’가 정말로 인사를 뜻하는게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이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녀석이 손가락을 뻗어 백연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우리 사제가 차고있는 그거. 그 정도면 인사로 충분할 것 같은데.”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린 백연의 눈에, 자신의 허리춤에 매여있는 검이 들어왔다.

이곳에 올라오고 한번도 몸에서 떼어 놓은적 없는 그의 검이었다.

생각에 앞서 입이 움직였다.


“지랄.”

“뭐라고? 허, 우리 사제가 말버릇이 좀 안좋구나.”


맨 앞에 있는 녀석이 씩 웃었다.

아이들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것이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듯 보였다.

덩치가 손을 우득거리면서 백연의 앞으로 다가왔다.


“괜찮아. 좀 맞다 보면 충분히 고쳐지겠지.”

“거지 새끼들 소굴인줄 알았더니 강도 새끼들이었을 줄이야.”

“좀 아프겠지만, 사람은 맞아도 그렇게 쉽게 안 죽거든. 그러니까......”


퍼억!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소리가 울려퍼졌다.

덩치의 턱이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얼빠진 표정을 지은 덩치의 다리가 풀리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 앞에는 주먹을 쥔 백연이 세상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은 맞아도 잘 안죽지. 나도 잘 알아. 어떻게 아냐고?”


휘익, 퍽!


덩치의 코에서 피가 튀어올랐다.


“죽을만큼 패봤거든.”


미소를 지운 백연이 주변을 돌아봤다.


“빨리 끝내자. 피곤하니까.”

“저, 저 새끼 잡아!”


덤벼드는 사형들의 모습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기분이었다. 마도에서 수없이 그에게 덤벼들던 머저리들.

그런 놈들은 다들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뒤질만큼 패주면 얌전해진다는 것.


‘고향에 돌아온 것 같네.’


백연은 주먹을 휘두르면서 생각했다.



※※※



“자, 그래서.”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뒤였다.

백연은 쓰린 손등을 매만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제를 상대로 강도질 하자고 한 새끼가 누구야.”


무릎을 꿇고 앉은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처음 백연에게 시비를 걸었던 덩치가 앉아 있었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이건 다 같이......”

“아, 다같이?”


백연이 혀를 찼다.


“가관이네. 하긴 다같이 동조했으니까 몰려나왔겠지.”

“......죄송합니다!”


덩치가 퉁퉁 부은 얼굴을 푹 숙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대체 검 하나 뺏어서 뭐 하려고 했던건데?”

“그게......”


덩치가 말을 머뭇거렸다.

백연이 아무 말 없이 주먹을 들어올리자 머뭇거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검은 팔아먹으려고 했습니다. 비싼 것인듯 보여서.”

“응?”


생각외의 답변이었다.

백연의 반응에 조금 안도감을 얻은 듯 덩치의 입이 술술 말을 뱉기 시작했다.


“새로 사제가 들어왔다길래, 또 입이 늘었구나 싶어 걱정하던 차에 보니 나름 돈이 많으신듯 해서 그랬습니다. 산 아래 하오문이 요즘 검을 많이 매입한다고 해서.”

“그러니까 돈이 없어서 그랬다?”

“......네.”


백연이 한숨을 뱉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현실적인 이유였다.


‘이런 것 까지 고향이랑 똑같을 필요는 없는데.’


“그 돈 가지고 뭐하려고 했는데.”

“고기 좀 사먹고 싶어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확실히 식사 시간에 고기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긴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문파 사정에 고기가 있을리가. 당장 저들이 입고 있는 무복만 보아도 다 헤져있다.


‘이건 뭐 개방도 아니고.’


거지 소굴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심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고기 한점 먹자고 사제를 두들겨 패려고 해?”

“정말 죄송합니다. 잠깐 눈이 돌아서 그랬습니다!”

“됐고, 알았으니까 존대는 그만 해.”

“예?”

“사형이잖아.”

“......예?”


백연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말 놓으라고.”

“아, 알았어! 말 놨어. 놨다.”

“사형, 이름이 뭐야.”

“......나 말이냐?”


덩치가 되물었다.


“어.”

“무, 무진. 백무진이다.”

“그럼 무진 사형. 일단 여기 다 정리하고 뒤처리 해.”


난장판이 된 운향관 안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신웅이 보고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

무진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랑 똑같이 해놓을게.”

“만약 우리가 싸운거 신웅 사숙조가 알면......알지?”

“저, 절대 안들킬테니까 걱정 마!”


덩치에 비해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백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진 사형. 내일 묘시 초(卯時: 오전 5시) 되기 전까지 운향관 앞으로 나와.”

“그렇게 일찍?”

“나오라면 나와. 무진 사형 말고도 두 명 정도 더 데리고.”


그렇게 말하면서 꿇어앉은 다른 사형들을 둘러보자 하나같이 시선을 피하는게 눈에 보였다.

백연은 픽 웃었다.

그런 백연의 얼굴을 보고 무진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왜인지 물어봐도......”

“먹고 싶다면서, 고기.”

“어?”

“난 간다. 내일 안 나오면 알지?”


당황한 표정을 지은 사형들을 남겨두고 백연은 방을 빠져나왔다.

자연스럽게 삼층으로 향해 첫날 머물렀던 독방을 찾아 들어갔다.


피곤한데 몸까지 써서 그런지 잠이 해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더 이상은 눈꺼풀을 뜨고 있기도 어려웠다.


“하아.”


쓸데없이 긴 하루였다.

낡은 침상에 몸을 던진 백연이 눈을 감았다.


검을 품에 안은 채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 엮어내다 +8 23.05.19 17,453 276 13쪽
8 사형, 사제(2) +11 23.05.18 17,990 272 12쪽
» 사형, 사제 +8 23.05.17 18,418 280 12쪽
6 운연공(2) +12 23.05.15 18,707 312 13쪽
5 운연공 +9 23.05.14 19,263 288 11쪽
4 곤륜(3) +9 23.05.13 20,122 299 13쪽
3 곤륜(2) +16 23.05.12 22,112 299 11쪽
2 곤륜 +10 23.05.11 24,587 319 12쪽
1 서장(序章), 검귀 유백연 +15 23.05.10 33,119 329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