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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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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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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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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운연공(2)

DUMMY

깊은 밤.

가벼운 발소리가 쓰러져 가는 전각들 사이를 타고 울렸다.

바람결 같은 걸음이었다.


‘몸이 가볍다.’


그저 느낌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땅을 딛는 백연의 발걸음은 날랬다.


‘신기하군.’


아무것도 없는 몸에 티끌만한 내력을 담았을 뿐이다.

경신법을 익히지 않은 이상 걸음이 태가 나게 달라질 연유는 없는데.

경험이 많은 그로써도 처음 겪는 일이다.

강호 무림의 드넓음과, 정종 무공의 고강함이 새삼 느껴졌다.


‘잘만 다듬으면 절세의 심법이 될거야.’


확신할 수 있었다.

운연공은 그만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축기의 시간에 관한 문제만 해결한다면 신공(神功)이라 불러도 될 법한 무공이다.


스치듯이 움직인 걸음이 땅을 박차고 올랐다.

발딛음 두 번만에 어느 전각의 지붕에 올라선 백연.


달빛 아래 줄줄이 늘어선 전각들이 많았다.

허나 그 중에 서고라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백연은 그다지 괘념치 않았다.


“어디쯤 있으려나.”


그의 눈이 먼곳을 훑었다.


“가까운 데에는 없을 테고......”


중얼거리며 주변을 돌아보던 백연의 시선이 한 군데에서 멈춰섰다.

장문인의 처소를 기준으로 뒤편.

저 멀리 떨어진 곳에 드높은 암벽이 보였다.


“오?”


백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저 암벽에 무언가가 있다고.


“대부분의 문파들은 서고를 외진 곳에 두던데.”


어째서 그러는지 몰라, 하고 중얼거리며 백연이 몸을 훌쩍 날렸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암벽이 자리한 곳은 멀지 않았다. 허나 그리 가깝지도 않았다.


문파의 건물들이 자리한 곳에서 조금 벗어난 외진 길목.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오른 암벽 아래 선 백연이 고개를 꺾어올렸다.


위로 삼층에 달하는 전각이었다.

암벽을 반쯤 파고 들어가 박힌 듯한 형상.

인상적인 모습이다.


입구에 걸린 낡은 현판이 달빛을 받아 눈에 도드라졌다.


[무궁각(無窮閣)]


‘관리가 되고 있군.’


유달리 정갈한 모습이다.

다 쓰러져가는 다른 전각들과 다르게.

조금 낡아보이는 감은 있었으나, 오히려 고풍스러움을 더해준다고 느껴진다.


그럴 법 했다.

무공서고는 문파의 뿌리와도 같은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가장 우선시 될 수 밖에 없다.

일례로 소림의 서고인 장경각은 그 드높은 소림 내에서도 가장 엄중히 보호되는 곳이라 했다.

장경각에 침입해 무사히 빠져 나오는 것은 설령 천마 본인이라 할지라도 어렵다고.


무너져가는 곤륜파라 해도 서고는 가장 잘 관리되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지키는 사람은 없나본데.’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백연이 무궁각으로 다가갔다.

굳게 닫혀 있는 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커다란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서고 안에서 훅 불어온 서늘한 바람이 백연의 머리칼을 한차례 어루만지고 갔다.


서고의 안은 생각과는 달리 밝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은은한 불빛이 책장 사이 사이를 밝히고 있었다.


‘이건 필요 없겠네.’


불을 피우려 들고 온 나뭇가지를 집어넣은 백연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안쪽은 밖에서 보이는 것 보다 더욱 넓은 공간이었다.


수없이 늘어선 책장과, 건물의 끝에 자리잡은 계단.

계단은 위 아래로 모두 뻗어 있었는데, 위로는 삼 층이 끝이었으나 밑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아래는 아닐거야.’


운연공은 기초공이라 했다.

문파의 기초공을 지하 깊숙한 곳에 처박아 두는 이는 별로 없다.

그러하니 바로 일층에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을 터.


백연은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은게 별로 없네.’


책장은 수없이 늘어서서 몇백권이고 능히 보관할 수 있을 듯 보였으나, 정작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책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책장 하나에 두 세권.

그 서책들 전부가 비급은 아닐 것을 감안하면 정말이지 남아있는게 없었다.


그렇게 운연공의 비급을 찾아 서고 사이를 돌아다니던 도중이었다.


‘음?’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백연은 자연스레 몸을 굳혔다. 순식간에 호흡과 기척을 지우는 기술.

역시 전생에 익혔던 수법이다.


그가 기척을 죽이는 사이 근처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익숙한 기도와 목소리.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챈 백연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장문인?’


책장 몇 칸을 두고 떨어진 곳에서, 곤륜의 장문인이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책장 사이로 보이는 운결의 손에는 한권의 서책이 들려 있었다.

펼쳐진 서책을 넘기며 읽는 모습. 책장이 한장 넘어갈때마다 한숨이 한겹씩 더해진다.

축 늘어진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무엇을 보고 있길래.’


궁금증이 돋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하자 서책의 표지에 적힌 글씨가 흐릿하게 엿보였다.


‘삼청......운연공?’


다른 몇 글자가 섞여 있었으나, 운연공이라는 글자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확실하다. 그가 찾던 운연공의 비급이다.


‘찾은건 좋은데, 어떡하지.’


백연은 고민에 잠겼다.

운결이 서고를 떠날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는 운결의 모습이 도통 이곳을 나갈 것 같지가 않았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백연은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크흠.”


일부러 기척을 내며 움직이자, 즉시 반응이 돌아왔다.


“거기 누구더냐.”

“장문인?”


백연은 천진한 목소리를 내며 운결이 자리한 위치로 다가갔다.

언뜻 긴장한 모습을 띄고 있던 운결의 표정이 백연을 알아보고는 풀렸다.


“백연이구나. 헌데, 이 시간에 네가 어찌?”

“그것이, 처음 수련을 하다보니 시간 가는줄을 몰랐습니다.”


얼굴에 멋쩍은 웃음을 띄우자 운결이 미소지었다.


“그러다가 몸이 상한다. 수련은 적당히 하도록 하거라.”

“예.”

“그나저나 이곳은 어떻게 알고 온 것이냐?”

“아, 그게......”

“신유가 알려준게냐? 허허, 그 녀석이 네가 많이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백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변명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림짐작 해주는 운결 덕에 일이 쉽게 풀렸다.


“허면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운연공의 비급을 보고자 왔습니다.”

“운연공?”


운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심법을 배워 익히던 와중에,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비급을 보러 왔습니다.”

“신유가 네 재능이 뛰어나다 말하더니. 그것이 정말이었나 보구나.”

“과찬입니다.”

“신유는 없는 말을 하는 녀석이 아니다. 여기, 가져가거라.”


들고 있던 운연공의 비급을 내미는 운결의 얼굴에는 기특함이 담겨 있었다.


“감사합니다.”

“무궁각 밖으로 들고 나가지만 않으면 된다. 만약 비급을 반출하고 싶다면 무궁각주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자리에 없으니 어렵겠구나.”


백연은 고개를 저었다.

비급을 반출해야 할 만큼의 필요성은 없었다.

이미 구결은 전부 머릿속에 있었으니까.


“여기서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혹 궁금한 것이 있다면 내게 물어도 된다. 운연공 비급의 내용은 익히 꿰뚫고 있으니.”


백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 혹 운연공의 근원(根源)이 어떤 것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근원이라 하면 구결의 요체를 묻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보다는 운연공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그 역사가 궁금합니다.”


필요한 물음이었다.

이미 완성된 구결을 뜯어 고치기 위해서는 그것의 심상 근원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것을 모른채로 구결을 마음대로 헤집으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웠다.


“역사라......그런 것은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예?”

“그 비급에도 적혀 있는 내용이다만, 운연공의 내력은 곤륜의 역사와 길이가 같다. 족히 천년은 넘었지.”


천년.

엄청난 숫자였다. 쉬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허나 진실이라 봐야 할 터였다. 곤륜의 뿌리는 소림 이전부터 이어져 있었으니.


“그렇기에 운연공이 만들어진 경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다.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들 뿐이지.”

“그것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다. 도문의 수행자들이 신선을 만나 전해 받았다는 설이나, 어느 도사가 수행 끝에 무릉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익힌 호흡법이라는 설도 있지. 아, 또 하나는 곤륜의 도사들이 용(龍)을 만나 그 숨결을 본떠 만들었다는 설화도 있다.”


‘용?’


순간 한줄기 직관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핵심이라 느껴졌다.

운결은 한갖 허무맹랑한 설화라고 말했지만, 백연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저건 설화가 아닐지 모른다.’


산을 뒤엎고 바다를 가르는 무인들.

그런 기인이사가 즐비한 무림에서도 용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로 치부되는 경우가 잦았다.

영물 중의 영물인 탓이었다.

사람들이 용이랍시고 발견하는 것은 대게 수십, 수백년 묵은 뱀들이었다.

용은 현실보다는 설화에 가까운 영물이었다.


하지만, 백연은 딱 한번 본 적이 있었다.

백여 장(丈)에 달하는 거대한 짐승의 시체를.


“이만하면 대답이 되었느냐?”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 다른 것 하나만 더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얼마든지 물어보거라.”


백연이 생각을 정리했다.

용의 수명은 설화대로라면 수천년에 달한다.

곤륜의 도사들이 용의 호흡을 본떠 운연공을 만들었다면 축기가 끔찍하게 느린것은 당연했다. 용의 수명에 맞춘 축기 속도였을 테니.

허면, 곤륜파의 무인들이 어떻게 그리 고강했는가. 그것에 대해서도 백연의 머릿속에 하나의 가설이 떠오르고 있었다.


“과거, 그러니까 신교대전 이전의 곤륜파는 후인을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그것이 무슨 말이더냐.”

“지금처럼 신웅 한분께서 여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런 방식은 아니었을 듯 싶습니다만.”

“그것이라면 당연히 사제관계를 맺어 가르쳤다고 알고 있다. 스승 하나에 제자 하나.”


‘역시.’


백연의 생각대로였다.


“감사합니다.”

“허허. 무엇을 알고자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성취에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

“더없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백연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너무 늦게 들어가진 말거라. 신웅이 걱정할테니.”

“잠시 뒤에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또다시 기특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 운결이 곧 떠나고, 백연은 운연공의 비급을 펼쳐들었다.

빠른 속도로 비급을 훑어나가자 운결이 말해준 것과 동일한 내용들이 적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략 반시진이 지나고, 백연은 비급을 내려놓았다.


“역시 내력을 넘겨주는 방식이었어.”


확실해졌다.

운연공의 축기량으로 고강한 내력을 지니는 방법.

그것은 스승이 제자에게 자신의 내력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곤륜이 천년 넘게 이어져 왔다 했지.”


도문이 탈바꿈해 검문이 되었을 때, 그곳에는 막대한 내력을 쌓은 내가기공의 괴물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자그만치 천년의 세월동안 스승에게서 제자로 내력을 물려주며 힘을 쌓아왔을 테니.


‘축기 속도가 문제가 될 일이 없었겠지.’


하지만 그것도 신교대전 전까지의 이야기.

커다란 전쟁 이후 문파의 수많은 고수가 죽어나가면서 곤륜의 무맥은 사실상 끊겨버리게 된 것이었다.

다른 문파였다면 훨씬 나았을테지만, 곤륜에겐 유독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렇게 곤륜이 쌓아온 세월은 조금씩 사라지고, 지금에 와서 남은 것은 다 쓰러져가는 문파뿐.


하면, 지금 백연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운연공의 축기 속도를 가속시킨다.’


이미 있는 무공 구결을 해체해 새로운 공능을 엮어넣는 것.

어려운 일이다. 허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백연의 머릿속에서 운연공의 구결이 흩어지고 모이며 다시 정렬되고 있었다.


‘관건은 간단해.’


운연공 자체의 구조를 뒤바꾸기 보다, 기의 순환 자체를 빠르게 하면 된다.

용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그대로 대응시킨 구조를 비틀기 위한 방법.

이미 해답은 정해져 있었다.


“동공(動功).”


신체의 움직임을 이용해 전신 경혈 세맥을 자극시킨다.

자연스레 기의 순환에 가속을 불어 넣는 방향으로.

다른 심법이었다면 세맥이 찢겨 나갈 것이기에 불가한 방법. 하지만 운연공은 본디 목표가 숨쉬듯이 운공을 하는 것에 닿아있다.


구결이 조금씩 수정되고, 그 자리에 신체 근맥의 움직임이 더해진다.

자연스레 걸음을 움직이며 동공의 움직임을 만들어 나갔다.

신체의 움직임으로써 세월의 간극을 좁힌다.


그러기를 수 시간, 마침내 밤이 지나고 동이 틀 무렵, 백연은 쓰러지듯 바닥에 드러누웠다.


“......끝났다.”


소년의 주변을 따라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이 가득했다.

밤새 직접 자아낸 걸음.

그것은 운연공이 새로이 탄생한 흔적이자, 운연동공(雲煙動功)의 첫 발걸음이었다.


그렇게 곤륜의 천년 무맥에, 검귀의 손길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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