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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양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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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양이
작품등록일 :
2020.11.23 20:44
최근연재일 :
2021.07.07 01:44
연재수 :
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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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2
추천수 :
2
글자수 :
107,199

작성
20.11.2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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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붉은 우산

DUMMY

해가 비치는 여름날의 아침.

인력소에 일당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일찍 집을 나섰다.

나는 축 늘어진 반팔티에 낡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오래 자르지 않아 덥수룩한 머리에 수염이 송송 나 있는 내 모습이 맞은편 유리에 비쳤다.


"어? 강동훈. 너 맞지?"

지하철 안에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나를 반겼다.

말끔한 검은 양복을 입은 대학 동창 김영준이다.

김영준과는 얼굴을 못 본 지 5년은 족히 넘었다.

어떻게 단박에 알아본 거지?

김영준은 입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30살이 되도록 백수인 나와는 여러모로 다른 인생을 사는 듯하다.

"아.."

다른 사람인 척 어설픈 연기를 할까 싶었지만, 김영준은 내가 누군지 이미 파악한 듯하다.

"아.. 아. 영준이 맞지? 야. 반갑다. 어떻게 이런 데서 만나냐?"

"반갑다 친구야. 너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

"그냥 지내고 있다. 이런저런 일 하면서. 바쁘게."

하는 일도, 할 일도, 누가 맡겨줄 일도, 거의 전무한 인생이다.

하지만 동창 앞에서 얄팍한 자존심을 버릴 수 없었다.

김영준이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장난식으로 헤드록을 거는 시늉을 했다.

"어쭈, 재밌는 사업 같은 거 하고 있나 보네."

김영준은 직장 생활의 고됨을 토로하였다.

내가 곧 사무실 가까운 역이어서 내려야 한다는 눈짓을 하자, 김영준이 이번 주말에 만나자며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다.


***

추적추적 장대비가 쏟아지는 밤.

얼마 전 만난 김영준과 술자리를 가지기로 한 날이다.

추억이 서린 [드럼통 연탄고기]에 들어갔는데, 고깃집 안은 거의 손님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동그란 의자에 앉아 갈매기고기 800g을 주문했다.

영준이가 조금 늦네. 비 때문에 약속 미루자는 건 아니겠지? 나 돈 별로 없는데.

걱정에 잠긴 채로 불판에 고기를 올리자, 곧 지글지글 소리가 들린다.

때마침 비에 양복이 홀딱 젖은 채로 김영준이 들어왔다.

"으악! 비 좀 봐. 다 젖었다 다 젖었어. 양말까지 다 버렸어."

소란을 떨며 김영준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영준이 변했나 걱정했더니 그대로구나.

잘 차려입었어도 옛날의 해맑던 김영준이라는 점은 변함없다.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다.


고기를 굽다 보니 어느덧 하나둘씩 손님이 식당에 들어왔다.

바로 맞은편에는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 무리가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아. 이 새끼. 또 옛날 생각나게 하네."

"우리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옛날 생각나게 해줘?"

4명이 모인 그 자리에선 일방적으로 한 명이 놀림을 받고 있다.

작은 체구에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다.

학교 폭력이 여기까지 이어지는 건가.

"아. 아! 놔줘!"

옆 청년들은 작은 체구 청년의 귀를 잡아당기는 등, 장난인지 괴롭힘인지 모를 행동을 이어갔다.


불현듯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 동훈이는 운동도 못 하고, 친구도 없고."

"보통 이런 케이스는 공부는 잘 하지 않냐?"

"그거 아냐? 이 새끼. 게임도 못 해. 같이 하면 100% 진다?"

키도 작고 소심했던 나는 거친 아이들의 놀림 대상이었다.

친구끼리 노는 거라며 스스로 위안으로 삼고 당시 애써 웃으며 지냈지만, 그 시절은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저런 일이 있다니.

작은 청년에게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괴롭힘당하던 모습, 아직 사회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겉도는 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

쏟아져 내리던 비가 조금은 잦아들었다.

나와 김영준은 마시던 소주를 급히 비웠다.

소주를 5병이나 마신 우리 둘의 얼굴은 붉었고 눈은 해롱거렸다.

"크으. 쓰리다 쓰려."

김영준은 아쉽다는 듯 빈 소주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 시간 되면 다음 주에 또 오자. 비 안 올 때 빨리 가야지."

김영준이 화장실에 가는 듯 계산대로 향하더니, 순식간에 6만원이 넘는 금액을 결제했다.

나는 꼬깃꼬깃한 만원 지폐를 3장 꺼냈는데, 김영준이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며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됐어. 나 이번에 보너스 나와서 기분 좋아서 쏘는 거야."

고마운 친구다. 내가 백수인 것은 진즉 눈치챘을 건데.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자존심 세워주고.

"고맙다. 다음에는 내가 꼭 쏘마."

우리 둘은 다시 비가 쏟아지기 전에 서둘러 가게 밖으로 나갔다.

아쉬움이 가득한 인사를 하고 나는 자취방으로, 김영준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들고 왔던 붉은 우산을 펼쳤다.

웅덩이가 진 곳을 피해 발을 옮겼지만, 물이 첨벙 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소주를 많이 마신 탓에 발이 비틀거린다.


띠링-

[동훈아. 오늘 즐거웠다. 조심해서 들어가라.]

문자를 확인하던 중 손바닥이 유난히 끈적했다.

이거 뭐야.

손바닥에 붉은 페인트가 묻어있다.

붉은색이었던 우산의 가림막은 언제 그랬냐는 듯 검은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페인트칠까지 벗겨지는 낡은 우산이라니.

벗겨진 페인트가 땅바닥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붉게 물들이며.

자세히 보니 내가 가져온 우산과 묘하게 모양이 다르다.

하지만 가게에 돌아가기엔 온 길이 멀었다.


***

나는 자취방 문을 열고 물에 푹 잠겼던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놨다.

으. 피곤해. 대충 씻고 바로 자야지.

발바닥 자국을 방에 남기면서 비틀대며 화장실로 향했다.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급히 찬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왔다.

젖은 머리를 대충 닦고,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몸을 데우자 곧 잠이 들었다.


햇빛이 쨍쨍 들어오는 교실 안.

나는 교복을 입고 있다.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우리 동훈이는 운동도 못 하고, 친구도 없고."

"이런 케이스는 보통 공부는 잘 하지 않냐?"

창밖에 다른 반 아이들이 몰려와서 나를 비웃고 있다.

허억.

천둥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젖어있다.

잊으려고 해도 가끔씩 떠오르는, 잊고 싶은 기억.

한참 전의 일인데도 아직도 이 꿈을 꾸는 날은, 현실이 아님을 자각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쏴아아아아]

다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다.

번쩍-!

천둥이 치고 있던 그때, 문 앞 유리창에 검은 형체가 두리번거리는 게 비쳐 보였다.

고깃집에서 들어본 것 같은 네 명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온다.

"아. 이 새끼. 유치하게 또 빨간 우산이냐. 옛날 생각나게 하네."

"우리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말이야. 꼭 도와줘야 한다니까."

"옛날 생각나게 해줘?"

"응! 또 해보자. 이제 들어갈까?"

바깥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극도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유리창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작가의말

[공포] 붉은 우산을 잘못 가져온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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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연예인의 반전 20.12.08 39 0 14쪽
8 외계인 20.12.07 48 0 8쪽
7 인기 스타의 실종 20.12.02 44 0 14쪽
6 재개발지역 20.12.01 63 0 8쪽
5 폰팔이와의 싸움 20.11.30 55 0 8쪽
» 붉은 우산 20.11.26 44 0 7쪽
3 시골에 잠입한 간첩 20.11.25 53 0 8쪽
2 늦은 나이의 첫사랑 20.11.24 62 0 15쪽
1 카페에서의 커피 소동 +2 20.11.23 151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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