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우산
해가 비치는 여름날의 아침.
인력소에 일당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일찍 집을 나섰다.
나는 축 늘어진 반팔티에 낡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오래 자르지 않아 덥수룩한 머리에 수염이 송송 나 있는 내 모습이 맞은편 유리에 비쳤다.
"어? 강동훈. 너 맞지?"
지하철 안에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나를 반겼다.
말끔한 검은 양복을 입은 대학 동창 김영준이다.
김영준과는 얼굴을 못 본 지 5년은 족히 넘었다.
어떻게 단박에 알아본 거지?
김영준은 입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30살이 되도록 백수인 나와는 여러모로 다른 인생을 사는 듯하다.
"아.."
다른 사람인 척 어설픈 연기를 할까 싶었지만, 김영준은 내가 누군지 이미 파악한 듯하다.
"아.. 아. 영준이 맞지? 야. 반갑다. 어떻게 이런 데서 만나냐?"
"반갑다 친구야. 너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
"그냥 지내고 있다. 이런저런 일 하면서. 바쁘게."
하는 일도, 할 일도, 누가 맡겨줄 일도, 거의 전무한 인생이다.
하지만 동창 앞에서 얄팍한 자존심을 버릴 수 없었다.
김영준이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장난식으로 헤드록을 거는 시늉을 했다.
"어쭈, 재밌는 사업 같은 거 하고 있나 보네."
김영준은 직장 생활의 고됨을 토로하였다.
내가 곧 사무실 가까운 역이어서 내려야 한다는 눈짓을 하자, 김영준이 이번 주말에 만나자며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다.
***
추적추적 장대비가 쏟아지는 밤.
얼마 전 만난 김영준과 술자리를 가지기로 한 날이다.
추억이 서린 [드럼통 연탄고기]에 들어갔는데, 고깃집 안은 거의 손님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동그란 의자에 앉아 갈매기고기 800g을 주문했다.
영준이가 조금 늦네. 비 때문에 약속 미루자는 건 아니겠지? 나 돈 별로 없는데.
걱정에 잠긴 채로 불판에 고기를 올리자, 곧 지글지글 소리가 들린다.
때마침 비에 양복이 홀딱 젖은 채로 김영준이 들어왔다.
"으악! 비 좀 봐. 다 젖었다 다 젖었어. 양말까지 다 버렸어."
소란을 떨며 김영준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영준이 변했나 걱정했더니 그대로구나.
잘 차려입었어도 옛날의 해맑던 김영준이라는 점은 변함없다.
안도감에 긴장이 풀린다.
고기를 굽다 보니 어느덧 하나둘씩 손님이 식당에 들어왔다.
바로 맞은편에는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 무리가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아. 이 새끼. 또 옛날 생각나게 하네."
"우리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옛날 생각나게 해줘?"
4명이 모인 그 자리에선 일방적으로 한 명이 놀림을 받고 있다.
작은 체구에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다.
학교 폭력이 여기까지 이어지는 건가.
"아. 아! 놔줘!"
옆 청년들은 작은 체구 청년의 귀를 잡아당기는 등, 장난인지 괴롭힘인지 모를 행동을 이어갔다.
불현듯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 동훈이는 운동도 못 하고, 친구도 없고."
"보통 이런 케이스는 공부는 잘 하지 않냐?"
"그거 아냐? 이 새끼. 게임도 못 해. 같이 하면 100% 진다?"
키도 작고 소심했던 나는 거친 아이들의 놀림 대상이었다.
친구끼리 노는 거라며 스스로 위안으로 삼고 당시 애써 웃으며 지냈지만, 그 시절은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저런 일이 있다니.
작은 청년에게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괴롭힘당하던 모습, 아직 사회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겉도는 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
쏟아져 내리던 비가 조금은 잦아들었다.
나와 김영준은 마시던 소주를 급히 비웠다.
소주를 5병이나 마신 우리 둘의 얼굴은 붉었고 눈은 해롱거렸다.
"크으. 쓰리다 쓰려."
김영준은 아쉽다는 듯 빈 소주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 시간 되면 다음 주에 또 오자. 비 안 올 때 빨리 가야지."
김영준이 화장실에 가는 듯 계산대로 향하더니, 순식간에 6만원이 넘는 금액을 결제했다.
나는 꼬깃꼬깃한 만원 지폐를 3장 꺼냈는데, 김영준이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며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됐어. 나 이번에 보너스 나와서 기분 좋아서 쏘는 거야."
고마운 친구다. 내가 백수인 것은 진즉 눈치챘을 건데.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자존심 세워주고.
"고맙다. 다음에는 내가 꼭 쏘마."
우리 둘은 다시 비가 쏟아지기 전에 서둘러 가게 밖으로 나갔다.
아쉬움이 가득한 인사를 하고 나는 자취방으로, 김영준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들고 왔던 붉은 우산을 펼쳤다.
웅덩이가 진 곳을 피해 발을 옮겼지만, 물이 첨벙 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소주를 많이 마신 탓에 발이 비틀거린다.
띠링-
[동훈아. 오늘 즐거웠다. 조심해서 들어가라.]
문자를 확인하던 중 손바닥이 유난히 끈적했다.
이거 뭐야.
손바닥에 붉은 페인트가 묻어있다.
붉은색이었던 우산의 가림막은 언제 그랬냐는 듯 검은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페인트칠까지 벗겨지는 낡은 우산이라니.
벗겨진 페인트가 땅바닥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붉게 물들이며.
자세히 보니 내가 가져온 우산과 묘하게 모양이 다르다.
하지만 가게에 돌아가기엔 온 길이 멀었다.
***
나는 자취방 문을 열고 물에 푹 잠겼던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놨다.
으. 피곤해. 대충 씻고 바로 자야지.
발바닥 자국을 방에 남기면서 비틀대며 화장실로 향했다.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급히 찬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왔다.
젖은 머리를 대충 닦고, 침대에서 이불을 덮고 몸을 데우자 곧 잠이 들었다.
햇빛이 쨍쨍 들어오는 교실 안.
나는 교복을 입고 있다.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우리 동훈이는 운동도 못 하고, 친구도 없고."
"이런 케이스는 보통 공부는 잘 하지 않냐?"
창밖에 다른 반 아이들이 몰려와서 나를 비웃고 있다.
허억.
천둥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젖어있다.
잊으려고 해도 가끔씩 떠오르는, 잊고 싶은 기억.
한참 전의 일인데도 아직도 이 꿈을 꾸는 날은, 현실이 아님을 자각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쏴아아아아]
다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다.
번쩍-!
천둥이 치고 있던 그때, 문 앞 유리창에 검은 형체가 두리번거리는 게 비쳐 보였다.
고깃집에서 들어본 것 같은 네 명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온다.
"아. 이 새끼. 유치하게 또 빨간 우산이냐. 옛날 생각나게 하네."
"우리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말이야. 꼭 도와줘야 한다니까."
"옛날 생각나게 해줘?"
"응! 또 해보자. 이제 들어갈까?"
바깥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극도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유리창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 작가의말
[공포] 붉은 우산을 잘못 가져온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