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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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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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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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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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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28화 꼬리 물기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28화


서윤이 수빈을 흘겨보지도 않고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기껏해야 E, D급 수준일 헌터의 꼿꼿함은 높이 치지 않았다. 그녀가 수빈을 부른 이유는 그녀가 박사이기 때문이지 헌터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알고 있어. 여기서 네 목을 잘라 버리면 내 기분은 좀 가라앉겠지만, 네가 진행하고 있던 실험은 멈추지 않겠지.”


수빈은 입을 다물었다. 미묘하게 머리를 굴려 가며 쏘아붙여서 뭐가 바뀔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이 강대하고 맹목적인 S급 헌터는 답을 내렸다. 자신을 부른 이유는 무언가를 확인하려고 부른 게 아니고, 무언가를 없애거나 바꾸려고 부른 것도 아니었다. 통보하려 부른 것이다.


바람이 불고 지진이 나듯이, 바꿀 수 없는 결론이 있다. 그저 차 안의 하드디스크가 그 결론을 미세하게나마 비껴가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랬다.


“내가 생각하는 그 실험을 그만두겠냐고 묻는다면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할 거지? 사실 지금 제대로 아는 건 별로 없어. 애초에 우리는 정보 기관이 아니라고.”


고위 헌터들이 추구한 것은 어떤 폭로에도 흔들리지 않고 마수와 싸울 수 있는 힘이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위한 정보 체제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미 내 안에서 의심이 시작됐어. 너도 생각해 봐. 헌터지원관리실 직원이 증발하지 않은 미르한의 피를 체취해 가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헌터의 복제와 각성에 관해 유일한 논문을 쓴 박사가 사라지더니, 헌터지원관리실에서는 S급 헌터가 요청한 정보 공유까지 거절한다? 의심할 만 하잖아?”


슬픈 듯한 눈동자로 잔을 기울이며 서윤은 중얼거렸다.


“그래서 난 오늘 널 살려서 집에 보내주기로 했어. 그러니까 이번 질문은 성의껏 대답해줘. 나 박사님.”


수빈은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제발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여야 한다. 지금 이서윤이 엄청나게 성의를 보이고 있어. 여기서 또 거절하면 바로 목 따일지도 모른다.’


“박사가 쓴 논문 내용대로 말하자면, 미르한 님의 피로 클론을 만들어. 그래서 그 클론이랑 미르한 님이랑 서로 마력적 신호, 텔레파시 비슷한 거라고 이해하면 된다고 했지? 그걸 주고 받으면 서로의 뇌에 어느 정도 자극이 올 거 아니야? 그 자극이 미르한 님이 깨어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거지?”


수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연구결과에 따르면, 원형과 클론은 서로 마력적 신호를 주고 받습니다. 스킬에 가깝기 때문에 뇌파 반응이 약하신 현 상태에도 분명한 자극으로서 감지하실 수 있습니다. 당연히 깨어나시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인데 될 수도 있다? 무슨 말이 그래?” 서윤이 무덤덤한 눈초리로 되물었다. 신경질적으로 움찔거린 눈썹은 감추지 못했다.


“학자로서 한 번도 실험해보지 않은 내용에 대해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빈이 고개를 깊숙하게 숙였다. 서윤은 수빈을 빤히 바라보며 남아있던 술을 전부 비웠다. 뭐라도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늪처럼 진득한 무력감으로 변해왔다. 죽은 자들의 군단으로 지평선을 뒤덮고, 하늘이라도 갈라버릴 힘을 쓸 수 있었지만, 여전히 17살 여고생이었을 때와 같았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없었다.


“가 봐. 내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서윤은 수빈이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실망감과 분노를 표출하려 움찔거리는 손끝을 붙들었다.


“준호야. 테이블 치워. 오늘은 집에서 마사지 받고 바로 자고 싶다.”


준호라 불린 남자가 룸 한쪽에서 걸어 나왔다. 탄탄한 복근을 내놓고 정장 재킷를 걸쳤다. 그 뒤로 허리까지 머리를 길러 묶은 여자가 따라 나왔다.


“용뿔을 태우시겠습니까?”


“아니. 지금은 됐어. 집에서 할래. 그거 말고 시킬 게 있는데,”


“네. 뭐든지 말씀하시지요.”


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힘없이 내뱉었다.


“나 박사가 쓴 논문 흘려버려. 우리 애들한테 먼저 풀고, 천천히 인터넷에다 올려. 인간들이 벌때처럼 들쑤시면 뭐가 나올 수도 있겠지. 내가 뭔가 하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거야.”


여자가 깊숙하게 머리를 숙였다.


서윤은 소파에서 일어나 룸 밖으로, 건물 밖으로 나섰다. 언젠나처럼 운전 기사가 고급 세단을 대기시키고 있었다. 이대로 수백 평 팬트하우스로 가서, 와인과 과일 안주로 2차 혼술을 하고, 마사지사가 해주는 시원한 안마를 받고, 자면 된다. 자기 싫다면 뭐든 할 수 있다. 게임을 해도 되고 영화를 봐도 되고 남자나 여자를 불러도 된다. 육체가 주는 쾌락에 빠져도 되고 용뿔이 주는 쾌락에 빠져도 되고 전투가 주는 흥분에 빠져도 된다.


별다른 대형 게이트가 터지지 않는다면 내일도 그 모래도 하루 종일 놀고 먹을 수 있었다.


칼은 밸 상대를 고르지 않는다.

대신 알아봐주는 주인을 고른다.


서윤은 유리창 너머 본사를 흘깃흘깃 돌아보았다.


주인 잃은 칼이 녹슬고 있었다.


***


“방은 좁지, 훈련장도 없지, 밖에 놀 거리가 저렇게 많으면 뭐해? 우리가 나갈 수가 없는데.”


슬슬 선선하고 볕 좋은 가을 날씨가 찾아왔지만, 서울의 거리는 언제나처럼 혼탁했다.


클론 셋은 43호의 방에 들어와 방바닥에 걸터앉은 채, 하루 종일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이럴 거면 그냥 섬에 있는 게 더 나았던 것 같아.”


44호가 뒤로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세상 시발. 관절에 곰팡이 피겠다. 마지막으로 교란전격 쏜 게 언제쯤인지 기억도 안 나.”


67호가 어깨를 뱅뱅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 진짜 맑다. 한강변에서 자전거타고 훈련하고 싶다.”


암막 커튼을 툭툭 치며 43호가 흐느적거렸다.


게이트라는 게 미친 듯이 나타날 때도 있고, 몇 주 동안 소강상태일 때도 있다. 클론들을 훈련시키기 좋은 등급일 때도 있고, 너무 상위 등급이거나 하위 등급일 때도 있다.


“67호. 입 조심해 줘. 이 방에서 하는 모든 말은 감청되고 있을 거야.”


44호가 67호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부탁했다. 67호는 보란 듯이 천장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폈다.


“지들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는 거겠지.”


“아니야. 우리만 급식을 적게 준다거나 할지도 몰라.”


“우리 자율배식이잖아. 붕어냐? 그것도 기억 못해?”


“막 알러지 있는 음식을 배식 매뉴에 추가한다거나 하면?”


“우린 클론이야. 한 명이 알러지 있으면 나머지도 다 있어. 기껏 C급까지 만들어놓고 전부 다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런 짓은 안 할 거야.”


44호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67호가 검지손가락을 세워 입술 앞에 세웠다.


“잡소리는 거기까지.”


붙잡힌 고양이처럼 44호가 눈을 치켜떴다. 둘은 같은 고양이상이었지만, 44호는 고귀하게 살아온 집고양이고 67호는 싸우다 잔뼈가 굵은 야생 고양이다. 팽팽하게 당겨진 67호의 셔츠 어깨선에서 굵은 밧줄 같은 근육이 꿈틀거렸다. 44호는 얌전히 눈을 깔았다.


43호는 씨익 웃으며 44호의 옆에 바싹 붙었다. 모양 좋은 귓가에 속닥거렸다.


“눈 깔지 마. 너무 비참해 보이잖아.”


“아으. 우리 둘이 덤벼도 상대도 안 되는데 어떡하냐? 전력으로 쏜 열선이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 나갈 때 그 기분을 알아?”


“나도 오러 블레이드 휘두르면서 덤볐는데도 탈탈 털렸어. 새로운 스킬은 각성의 전조가 아니었나?”


“그러게 말이야 시발. 새로운 스킬을 시험해보고 싶은데 쓸 데도 없네. 사람 앞에 두고 뒷담이나 하는 입에 써야 하나?”


거친 손가락이 거미 다리처럼 44호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으읍? 으읍?!” 44호가 경악과 당황을 비명으로 승화시키며 중성화수술을 앞둔 고양이처럼 발버둥쳤다.


“히이익!” 43호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이불 속으로 숨었다. 단단한 손이 발목을 쥐고 훅 하고 끌어당겼다.


두 클론을 어린애처럼 한 팔에 안고 67호가 중얼거렸다.


“할 일도 없잖아. 우리 입 다물고 자자. 어때?”


44호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주목!”


““주목!””


선임교관 엑스가 20명 클론들 앞에 섰다. 소강당이었지만 20여 명이 모이기에는 충분히 넓었다.


“그동안 훈련도 못하고 좁은 방에서 답답하게 살았던 걸 알고 있다. 오늘 드디어 게이트 공략 일정이 잡혔다.”


스크린에 선명한 사진 하나가 떠올랐다. 도시 인근의 야산에 무딘 칼로 공간을 잘라놓은 것 같은 게이트가 일렁거렸다.


“저 게이트의 마력 측정 결과, C급 초반대로 측정되었다. 사전 답사 결과, 던전 안이 지나치게 넓거나 좁지도 않다. 너희들에게 딱 맞지. 내일 오전 네시 반에 출발할 예정이다. 일찍 자고 준비 완료해서 세 시에 이 앞으로 모여라. 질문 있나?”


“공략 작전이나 내부 상황 같은 건 안 알려 주십니까?”


92호의 두려움 얽힌 질문에 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사 결과, 너희들이 방심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는 몬스터들이었다. 상황을 너희들이 직접 분석하면서 작전을 짜고 공략해라. 그게 진짜 훈련이다.”


이상, 이나 해산, 같은 말도 하지 않고 선임교관 엑스는 뚜벅뚜벅 걸어 돌아갔다.


***


“드디어 나간다.”

“이제야 나간다.”

“이제서야 나간다.”


갈증 어린 목소리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클론들은 방에서 몰려 나왔다. 더 이상의 평화는 휴식이 아니라 지루함이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클론들은 마음 속에 그런 꼿꼿함을 새워 두고 있었다. 빗발치는 총탄과 파도치는 바다와 마수와 죄수들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는 자존심이었다.


소강당 단상 위에는 등산용 가방과 전투식량, 칼로리 바가 가득 쌓여 있었다. 마도구는 아니었지만, 몇 가지 서바이벌 도구들도 있었다.


좌우로 늘어선 교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뭘 챙기든 말든 전부 스스로의 몫이었다.


43호는 전투식량과 칼로리 바를 가방 맨 아래쪽에 5분의 2 가량 쌓았다. 양쪽 그물 주머니에 오백 미리 물병 두 개를 끼우고 끈을 단단히 조였다. 정수 빨대를 가방 안에 던져 넣고 밀봉팩도 몇 장 챙겼다. 헤드 랜턴 두 개와 배터리, 손목시계도 집어들었다. 지도용 방수종이와 전용 팬도 필수였다.


“여기. 어떻게 차는지는 알지?”


새침한 표정으로 44호가 작업밸트를 내밀었다. 43호는 반바지를 입듯이 두 개의 고리 사이로 다리를 넣고 끌어올려 허리끈을 조였다. 특수부대용 나이프 두 자루를 집어 양쪽 고리에 찼다.


“44호. 나이프?”


“나는 나이프는 하나만. 손도끼 하나 챙기게.”


44호가 손도끼를 밸트 허리에 가로로 끼웠다. 수십 미터 길이의 등산용 자일두 묶음을 건넸다.


“감사해.”


검은 밴들이 하나 둘 주차장에서 뛰쳐나왔다. 어슴푸래한 서울 밤을 갈랐다.


“교관님. 챙겨야 할 것 같아서 챙겼는데, 왜 식량류가 그렇게 많습니까?”


43호는 조수석의 교관에서 슬며시 물었다. 양옆에서 44호와 67호가 귀를 쫑긋거렸다.


“너희는 영상이나 그림으로만 봤구나. 던전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지?”


“네.”


“던전의 환경은 다양하지. 일반적으로는 지하동굴 형태고, 숲이나 바다나 여러 가지 있는데, 넓이도 천차만별이야.”


“어느 정도까지 차이납니까?”


“좁게는 지름 10킬로미터. 좁은 필드형 던전이 그 정도야. 좁은 동굴형 던전은 지름 2킬로미터도 안 되는 것까지 봤어. 물론 오르막 내리막에 지하로 뻗어 있으면 별 의미 없지만...아무튼 좁은 건 오전에 들어가서 보스 잡고 집 가서 저녁 먹을 수 있어.”


“그럼 넓은 건?”


“5대 길드들이 광산으로 개조한 대형 던전들은 아직까지도 끝을 모르지. 숲처럼 생긴 던전이 하나 있는데, 박연우가 한 달 동안 북쪽으로 달렸는데도 끝을 못 봤다고 해.”


“이번에 저희가 가는 곳은?”


“당연히 그 정도는 아니지. 우리는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삼일 정도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꼬리 물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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