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조회수 :
8,871
추천수 :
338
글자수 :
636,119

작성
21.01.28 19:00
조회
98
추천
3
글자
12쪽

27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27화


좋은 돌로 어른 어깨 높이만큼 단을 쌓고, 드높은 철창을 빌딩 주위로 넓게 둘렀다. 장미 덩굴은 무성했고, 꽃다발처럼 풍성하게 핀 수국꽃들이 천천히 말라갔다.


밴은 지상주차장 입구에서 간단한 검사를 받고, 그 길로 지하 주차장으로 안내받았다.


“너는 여기서 기다려. 한숨 자고 있어. 나 올 때까지.”


수빈은 운전석에서 내리려는 막내 연구원을 막았다. 차 뒷좌석에 실린 미르한의 유전자 샘플과 실험 기록이 담긴 하드를 흘깃 쳐다보았다.


만약, 빌딩 안에서 이서윤이 목에 낫을 들이민다면 저 하드만이 살아 나올 희망이었다.


수빈은 금발은 한껏 틀어 올려 묶고, 황갈색 정장 옷매무새를 마지막으로 가다듬었다. 서윤이 유독 정장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뽀얀 목덜미를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가을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북문 출입구 앞에서 한 사내가 수빈을 기다렸다. 코와 입, 얼굴 반쪽을 다 가리는 커다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천도 아니고 가죽도 아닌 것 같이 기묘한 재질이었다.


“나수빈 박사님 맞으십니까?”


수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북 가방을 다소곳하게 양 손으로 들었다.


“따라오시죠. 이서윤 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밤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캄캄했다. 미래가 밝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S급 헌터랑 독대라니. 수빈아 너 진짜 출세했다.’


독백하며 남자를 따라 걸었다. 엘리베이터는 넓직했고, 정면에는 전신거울이붙어 있었다. 문 옆으로는 수십 개의 버튼들 대신 터치스크린이 빛났다.


가면을 쓴 사내는 터치스크린에서 층 수를 누르는 대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헤르메스. 지하 9층으로 가고 싶다.”


“지하 9층은 보안 구역입니다.”


무뚝뚝하고 중성적인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에 울렸다.


“접근 권한을 확인 중입니다. 확인. 랭크 3. 사전등록완료.”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수빈은 뺨에 따듯하고 간지러운 감각을 느꼈다. 수백 명에서 주목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지? 어디 단상에서 발표하는 거 같은데?’


옷 위로 수백 갈래의 보이지 않는 실들이 사르르 사르르 하고 기어다녔다. 따끔. 머리 위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불안감에 괜히 뒷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저 위에, 천장 위 아득한 곳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맥동치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빌딩. 살아 있나요?”


목덜미 솜털이 바싹 섰다. 수빈은 많은 것을 함축해 물었다. 난해하고 곤란한 물음이었다.


가면을 쓴 사내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리빙캐슬 헤르메스. 미르한 님과 라지아 님이 함께 설계하셨습니다. 건물 건체가 하나의 골램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왜 지금까지 대형 길드들 사이에서 보안 문제가 하나도 없었는지 알겠네. 누가 감히 여기 몰래 들어올 수 있었겠어. 수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눈에 비친 이 빌딩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푸른 마나와 전선이 뒤섞이며 건물 전체에 핏줄처럼 뻗었다. 거인의 살을 깎아 내고 그 핏줄을 감싸 벽을 쌓아 올린 것 같았다. 본래 전기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지만, 지금은 그 위로 특별한 실들이 드리워져 꼭두각시 인형처럼 엘리베이터를 지배했다.


지하에 들어왔는데도 상쾌한 느낌을 받았다. 보통 건물들보다 천장이 훨씬 높았다. 검은 대리석을 바닥과 벽에 깔고, 금색 갓을 씌운 조명을 달았다. 고풍스런 저택 같았다.


룸들의 두꺼운 철문에는 벨벳 융단을 두텁게 장식했다. 그런 철문들이 몇 십 개나 늘어서 있었다.


922호 앞에서 가면을 쓴 사내가 문을 두드렸다.


“헤르메스. 이서윤 님의 말씀에 따라 나수빈 박사를 데려왔다. 이 방에 계시지?”


그는 건물에게 말을 거는 데 익숙해 보였다.


수빈은 그녀 특유의 상상에 빠져들었다. ‘내가 미리 알아채지 않았으면 계속 AI 대하듯 했으려나? 삐친 헤르메스가 소심한 복수를, 그에게는 엘리베이터를 늦게 잡아준다거나? 그랬을지도 모르겠네?’


철커덕,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 안쪽에서 걸쇠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수빈은 다시 한 번 감탄하며 저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뭐래도 이 빌딩은 지성을 가진 생명체였다. 피부를 둘러싼 시선이 부드럽게 변했다. 고양이가 몸을 비비는 것 같은 감각이 손등을 스쳤다.


‘호감을 눈치챘나? 정말 대단한데?’


수빈은 탄성을 애써 억눌렀다. 유쾌한 기분으로 불쾌할지 모를 실수를 저질렀다가는 살아서 못 나올 수도 있었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가면을 쓴 남자가 돌아섰다.


수빈은 눈을 내려깔고 룸 안으로 들어섰다. 융단이 두터워 맨발로 다녀도 될 것 같았다. 긴 물소 가죽 소파와 넓직한 대리석 테이블 위에 잔 몇 개가 눈에 띄었다. 검은색과 금색을 먹인 균열이 하얀 대리석 위를 멋들어지게 가로질렀다.


“와 줘서 고마워. 나수빈 박사. 앉아.”


그녀가 자신의 앞 자리를 가리켰다. 수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슬림한 핏에 멋들어진 세로줄 정장, 굽 낮은 구두에 양 갈래로 묶어 올린 선명한 진홍색 머리카락. 왼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 S급 사령술사 이서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수빈은 깊숙하게 머리를 숙였다. 21세기 고위 헌터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17세기 대귀족을 대하는 태도였다.


서윤이 바닥 두꺼운 유리잔에 정확히 5분의 2만큼 술을 따랐다. 짙은 참나무 향이 방에 맴돌았다.


“냄새만 맡아도 향긋합니다. 오늘 좋은 술을 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이야기 하지?”


서윤은 대리석 테이블 위로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리듯이 잔을 내밀었다. 액체가 출렁이며 중후한 향을 날렸다. 검게 물든 손톱이 유리잔에 채워진 황금색 술과 어색하게 교차했다.


“감사합니다.”


수빈은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며 잔을 홀짝였다. 무척 좋은 술이었다. 꿀 원액 같은 진한 단맛과 스모키한 향이 입안 전체에서 맴돌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려던 찰나, 서윤이 빈 잔을 내밀었다.


“한 잔 받았으면 한 잔 채워 줄 줄도 알아야지?”


수빈은 이상야릇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웠다. 동안을 유지하는 고위 헌터들이 대부분 그렇다지만, 이서윤은 서른 살 여인의 완숙미와 열다섯 살 소녀의 풋풋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누가 봐도 스물 두 살 이상으로 부르지 않을 얼굴과 막 런웨이를 마친 듯이 슬림한 몸매. 일반적으로는 완숙미와 풋풋함 어느 쪽도 나오기 힘든 분위기였다.


“그렇게 볼 것 없어. 박사.”


서윤이 익숙하다는 듯이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알이 굵은 포도 한 두 알을 집어 먹고 손을 한데 모았다.


“자, 좋은 술을 마셨으니까 슬슬 혀가 부드럽게 풀렸겠지? 논문은 잘 읽어 봤어.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던데?”


“변변찮고 허무맹랑한 글을 읽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아직 부족한 수준입니다.”


수빈은 눈을 내려깔았다.


‘헌터지원관리실에서 예전에 이미 내 모든 논문을 내렸다. 아무리 S급 헌터라도 대체 어디서 어떻게 내 논문을 읽어 봤다는 거지?’


“그런데 박사. 정권에 찍히기라도 했어? 왜 학술자료 사이트를 아무리 뒤져도 박사 이야기는 안 나올까? 헌터지원관리실에 공식적으로 자료요청하고 나서야 간신히 한 부 얻어낼 수 있었어.”


“그 연구가 잘 안 풀려서 한동안 탐구의 길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지금 박사 소리 듣는 것도...어색할 지경입니다.”


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나 박사. 나 박사를 만나고 싶어서 헌터지원관리실에 문의해 봤어. 각성한 헌터라면 전부 다 거기서 등록하고 관리하니까.”


수빈은 속으로 신음했다. S급 헌터의 요청을 그곳에서 거절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헌터지원관리실은 고위 헌터들의 활동을 서포트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현 실장, 국장급 맴버들은 전부 S급 헌터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래. 근데 원래라면 5분 안에 담당자가 주소에 전화번호까지 들고 올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안절부절하더라고.”


서윤은 손깍지를 끼고 좌우로 두어 번 꺽었다. 거미 다리처럼 긴 손가락들에서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있잖아. 내가 미르한 님을 얼마나 존경하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야.”


전 국민이 이서윤과 미르한의 드라마를 알고 있었다. 지고의 헌터가 평범한 삶을 살던 여고생에게 손을 내밀고, 소녀는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발견한다. 오랜 상처와 후회를 이겨내며 각성하고, 거대한 게이트를 막아 나라를 구했다. 그 뒤로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어 존귀한 삶을 누린다는 그 뻔하고 아름다운 미담.


위인전에 실리고도 남을 그 미담의 주인공은 생각보다 퇴폐적이고 맹목적인, 차가운 소녀였다.


“그날 밤에.”


수빈은 숨길 것도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일이 제대로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게이트 앞은 전부 다 촬영되고 있었어. 신기할 것도 없지. 웬만한 게이트 공략할 때는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서윤은 옆자리에서 노트북을 들어 올렸다. 탁, 소리 나게 수빈의 앞에 내려놓았다.


“피 증발하는 거 보이지?”


수빈은 탄식했다. 영상의 화질은 참담하리만큼 선명했다. 인물들이 가슴에 차고 있는 명찰 글씨는 물론이요 폰트까지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게이트 안에서 고효산이 욕을 퍼부으며 튀어나오고, 그 등 뒤에 미르한이 업혀 있었다. 그의 몸에서 하얀 증기가 피어올랐다.


“이거 뭔지 알지. 나 박사.”


“출혈 증기. 고위 마법계 헌터들에게 종종 발생하는 현상 아닙니까? 몸 밖으로 흐른 피가 증발해버리는 것이죠.”


“근데 여기 영상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세 방울이 떨어져.”


서윤이 영상을 확대했다. 돌에, 근처 관목의 잎에, 아스팔트 바닥에, 그렇게 총 세 방울이었다.


원래는 이것도 곧 증발했을 텐데, 하며 중얼거린 서윤은 영상을 빠르게 뒤로 넘겼다.


누군가가 슬며시 피 묻은 관목 잎을 따 주머니에 넣었다. 자신의 몸으로 관목을 가린 후에 교묘하게 뒷주머니에 넣어서, 핏방울이 어떤 잎에 떨어졌는지 확인하고 전후를 비교하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었다.


“이 관목에 이파리가 총 몇 개나 있을 거 같아?”


수빈은 당연하게도 그 이파리를 본 적이 있었다. 잎맥이 몇 개이고 어떤 무늬가 새겨져 있는지도 알았다. 증발하려는 혈흔을 간신히 안정화시키고 DNA를 추출한 게 자신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S급 헌터시라고 해도 새벽 세 시에 사람을 불러 놓고 이러시면,”


“헌터지원관리실 오 국장 휘하 연구소장 나수빈!”


서윤의 고함이 천둥처럼 룸에 울려 퍼졌다. 내가 모를 줄 알았냐는 듯이 흉흉하게 이빨을 드러냈다.


“네가 각성과 복제 분야에서 실력 있 연구자라는 걸 잘 알고 있어. 헌터지원관리실의 외주를 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이 빌어쳐먹을 관목 잎을 따 간게 헌터지원관리실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로부터 1주 후에 너와 접촉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리고 헌터지원관리실에서 그 피로 뭘 했는지도 들은 바가 없지 않아. 뭔 놈의 소문이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오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면 바로 네 목과 너에게 이 일을 지시한 그놈의 목까지 따 버릴 거야.”


수빈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도 증거가 쌓였는데 서윤이 아직까지 낫을 빼들지 않았다는 게 증거였다.


‘들은 바가 없지 않아, 차마 있다고 하기에는 증거가 없는 거네. 그녀의 장점은 행동력이지 분석력이 아니야. 이 정도 증거가 있다면 이미 헌터지원관리실로 처들어가고도 남았을 인간이다.’


수빈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모험을 할 시간이었다.


“헌터님. 말씀이 심하십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7 57화 +1 21.03.11 61 3 12쪽
56 56화 자유 FIN. +1 21.03.10 58 3 12쪽
55 55화 +1 21.03.09 56 3 12쪽
54 54화 +1 21.03.08 56 3 12쪽
53 53화 +1 21.03.05 64 3 12쪽
52 52화 +1 21.03.04 67 3 12쪽
51 51화 조율 Fin +1 21.03.03 69 3 12쪽
50 50화 +1 21.03.02 61 3 12쪽
49 49화 +3 21.03.01 70 4 11쪽
48 48화 +1 21.02.26 65 3 11쪽
47 47화 +1 21.02.25 69 3 12쪽
46 46화 +1 21.02.24 70 3 12쪽
45 45화 +1 21.02.23 77 3 11쪽
44 44화 협상 Fin +1 21.02.22 69 3 12쪽
43 43화 +1 21.02.19 73 3 12쪽
42 42화 +1 21.02.18 65 2 12쪽
41 41화 +1 21.02.17 74 3 12쪽
40 40화 +1 21.02.16 69 3 12쪽
39 39화 +1 21.02.15 72 2 12쪽
38 38화 도피 Fin +1 21.02.12 81 2 12쪽
37 37화 +1 21.02.11 77 2 12쪽
36 36화 +1 21.02.10 75 2 12쪽
35 35화 +1 21.02.09 94 2 12쪽
34 34화 +1 21.02.08 73 2 12쪽
33 33화 기적 Fin +1 21.02.04 75 3 12쪽
32 32화 +1 21.02.04 69 2 12쪽
31 31화 +1 21.02.03 72 2 13쪽
30 30화 +1 21.02.02 86 3 12쪽
29 29화 +1 21.02.01 87 3 12쪽
28 28화 꼬리 물기 +1 21.01.29 97 3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