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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er butter 안녕, 베터버터

불타는 불행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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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버터
작품등록일 :
2022.05.13 01:55
최근연재일 :
2022.06.09 00:13
연재수 :
3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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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8
추천수 :
206
글자수 :
176,057

작성
22.06.03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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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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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과일 가게 딸이 되었다

DUMMY

***


가방 안에는 계약서 두 장이 들게 되었다.

어쩌다 이중 스파이가 되어 버렸다.

혹여나 누가 볼까 싶어 지퍼가 잘 잠겼는지

두 번씩 확인하게 되었다.


문밖으로 나오자 재윤이 있었다.

눈이 오목해져 보일 만큼 왜곡이 지는 안경을 쓰고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력이 꽤나 나쁜 듯했다.


자연스레 재윤을 보자, 재윤이 눈짓으로 에일린을 지시했다.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그였다.

계속해서 에일린에게 무얼 하라고 눈으로는 이야기하는데,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나는 입 모양으로 물음표를 그렸고,

그는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손짓으로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펼쳐 흔들었다.


‘전화···.’


“아, 실장님. 저랑 대본 얘기 좀 하시죠.”

“영화제가 곧인데 다음 작품은 천천히 하셔도 될텐데요.”


재윤은 실장을 의도적으로 끌고갔다.


“소단 님.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제임스, 소단 님 배웅 부탁드릴게요. 그럼 이만.”


실장을 데리고 뒤돌아 가면서도

재윤은 등 뒤에 감춘 손가락으로 전화기를 그려보였다.


‘에일린에게··· 전화···

아, 번호?’


실장의 말에 나에게 다가오려는 제임스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근처에서 약속이 있어 혼자 가겠습니다.”


걸음을 떼려는 제임스가 그 자리에 멈췄다.


“알겠습니다.”


나는 어서 에일린에게 번호를 알려줘야만 했다.

다짜고짜 에일린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주신 이 차 말이에요.

이리로 잠깐 와보시겠어요?”

“아, 네.”


에일린은 두 손을 앞으로 잡으며

공손히 다가왔다.

그녀를 끌고 응접실로 빠르게 들어갔다.


“차에 무슨 불편함이 있으셨나요?”

“그게 아니고···.

아이, 미안해요!”


에일린의 손바닥에 사인했던 펜으로

작게 내 번호를 적었다.


“전무님이 부탁하기에···.”

“아···.”


무척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에일린이었다.


“유리씨, 정말 미안해요.”

“···저는 늘 손으로 일을 하는데 어떻게 하죠.

지워질 수도 있고, 아니라면 들킬 것 같은데···.”

“전무님 살린다 생각하고, 응? 진짜 미안해요.”

“···노력해볼게요.”

“고마워요. 정말.”


그녀는 밑 입술을 꽉 깨물며 손을 감추었다.

남다른 센스가 있는 그녀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우리는 응접실에서 나왔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그곳에 선 직원들 중 에일린만이 인사를 받아주었다.

제임스와 옆에 선 수상한 기운을 내뿜는 사진 속 여자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눈초리는 내가 신발장을 벗어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이내 현관문이 닫히고,

나는 문에 등을 기대어 차오른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


그때, 불쑥 열린 문에 등이 밀려났다.

제임스였다.


“1층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보안 카드가 없으면 엘리베이터도 작동을 안 하니까요.”

“···아. 네. 그런데 굳이 1층까지 안 나와주셔도 되세요.

카드만 체크해주시면 알아서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모셔다드리지 못하는 것도 죄송한걸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럼, 알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P층에 다다를 때까지

제임스와 나는 어색한 호흡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안전한 귀가는 기사의 의무였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감시로 느껴졌다.


초고층까지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도착했고,

제임스가 카드를 체크해주었다.

문이 닫히면 지하 2층을 누를 것이다.

제임스가 경비원과 나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버튼이 눌릴 때까지 제임스는 눈을 떼지 않았다.


“누르시지요. 곧 엘리베이터가 닫힙니다.”

“아, 네.”


나는 황급히 전화가 울린 척 가방을 뒤적였고,

이내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끝까지 나를 바라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지하 2층을 눌렀다.

마치 첩보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


지하 2층에 도착했다.

살짝 내다보자 아빠가 반듯하게 서 있었다.

29년을 떠나 이제야 찾은 가족이었다.

나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혹시 있을 다른 형제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1년뿐인 삶이라도 충분할 거였다.

아빠와 가까워질 구실을 생각했다.

이내 호흡을 크게 고르고 아빠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 네! 안녕하십니까.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혹시 유경태··· 아저씨 아니세요?”

“네··· 맞습니다만.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나요?”

“아 맞구나. 저 기억 안 나세요?”


어색한 연기지만 최선을 다했다.

부디 아빠가 속아주길 바랐다.


“누구··· 시더라.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가물가물 합니다.

어디서 뵀던 분 같기는 한데 말이죠···.”

“저··· 어릴 때 같은 동네···.”

“아···. 어릴 때라면 은선동?”

“네. 은선동. 그··· 아주머니께서 자두를 좋아하시지 않으셨나요?”

“혹시 그 마트 옆 과일가게···.”

“네. 맞아요. 그 집 딸···이에요.”

“아이고. 맞구나! 우리 아들이랑도 어릴 때 같이 놀고 막 그랬잖아요.”


아들.

아들이 있다.

남동생이 있었다.


“네네. 저도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친구 이름이···.”

“유준단!”


···나의 이름과 비슷한 남동생이 있다.

나도 모르게 손끝이 벌벌 떨리는 걸

양손을 잡고 진정하려 애썼다.


“맞아요. 준단이···.”

“동네 주민이셨구나! 아하하. 반갑습니다.

그래 20년도 훌쩍 지났으니 못 알아 볼 만 하죠.

어릴 때처럼 예쁘게 컸어요!”

“감사합니다.”

“그때 막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두도 직접 골라주고 그랬잖아요.”

“네. 그랬었어요.”

“아니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디서 봤는데, 누구더라··· 누구더라···.

분명 아는 사람 같더라고요!”


아빠는 신이 나서 이런 저런 옛 이야기를 꺼내었다.

나는 한 과일 가게의 딸이 되었지만

그의 곁에서 가까이 머무를 수 있어 좋았다.

이따금씩 거짓말은 현실 세계에서 가장 쉽게 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준단이랑 연락 해봤어요?”

“아니요. 제가 연락처를 알 방법이 없어가지고···.”

“아이 그럼 오늘 가요! 시간 돼요? 준단이 집에 있어요.”


아빠는 나의 손을 잡았다.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60대에게 옛 추억이란, 그런 선물이었다.

작은 기억 끄나풀 한 조각을 만나고서는

옛날로 돌아간 듯이 웃었다. 마치, 그리워했던 꿈처럼.


“네! 가요. 준단이 잘 지내죠?

···아주머니도 건강하시구요?

요즘 살은 좀 찌셨나요?”

“나이가 들어서 성한 곳은 없지만은 서도 잘 지내지요.”

“아주머니도 보고싶네요.”

“아내가 보면 엄청 좋아할 거예요!

그때 그 자두 맛을 아직도 못 잊고 있다니깐요.”

“아저씨, 말 편하게 하세요. 전 그게 더 익숙해서···.”

“아이, 이 일을 오래 하다보니 습관이 되어서 말이에요.

이제 곧 퇴근이거든요.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줄 수 있어요?”

“그럼요.”

“아이고 이게 웬일이야.”


그 사이 들어온 자동차를 보고 기계처럼 표정을 숨기는 아빠였다.

각을 만들어 허리를 굽히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외치며 경례를 했다.

난 경비원 부스 안에 들어가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아무 생각 없이 부스 밖을 쭉 돌아보았다.

그때, 나는 보았다.

지하 2층으로 내려와 있는 제임스를.


***


몸을 잔뜩 웅크리고 유리 부스 밖 저 너머에 있는 제임스를 살폈다.

금색으로 칠해진 금속 무늬와 아빠의 몸이

절묘하게 나를 가려주었다.

제임스는 주차장 한 바퀴를 쭉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내 아빠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피곤,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분명 나를 감시하러 온 거야.’


그가 언제부터 있었을까?

나를 봤을까?

온몸에 소름이 묻은 창이 관통한 듯 쨍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곧바로 뒤따라 올 순 없었다.

P까지 오가는데 어느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을 거고,

나를 봤다면 분명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신속하게 확인하고 사라졌을 것이었다.

보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도무지 웅크려진 몸이 펴지지 않았다.


웅크린 상태로 서 있는 아빠를 보았다.

마치 이 거대한 금색의 건물을 상대로

나를 등 뒤에 숨기고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아빠는 나를 지켜주었다.

제임스에게서 말이다.


‘아빠, 고마워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속으로 나마 되뇌어 보는 나였다.


***


수 분이 지난 후 교대 시간에 맞춰

또다른 경비원이 나타났다.


“좋은 일 있으세요? 표정이 좋아보이시네요.”

“그렇네요.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수고입니다!”


두 사람은 경례를 주고 받았고,

나는 부스에서 일어났다.


“어휴 깜짝이야. 여기 계셨어요?”

“아, 네.”


웅크린 허리를 톡톡 쳤다.

차량 매연에 텁텁할만도 했지만,

부스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시원하고 달게 느껴졌다.


“아니 이 더운 부스에서 왜···.

따님이랑 똑같이 생겼네.”

“딸 아니에요. 동네 사람!”


경비원은 나와 아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되게 닮았는데···. 눈이 여기가 똑 닮았구만.

하기야, 뭐 이렇게 예쁜 딸이 있을 리가 없겠지. 하하.”

“에이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내 눈이 어때서! 옛끼! 하하하.”

“그래요. 수고했어요. 조심히 가셔!”

“가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허리를 들자

내 눈을 본 경비원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여기서 나랑 제일 오래된 팀장이에요.”

“아저씨보다 더 오래되셨어요?”

“내가 제일 오래됐어요. 나도 팀장!

경비팀장! 여기 이 배지 보이죠? 팀장만 달 수 있는 거예요.”


아빠는 자랑스럽게 배지를 가리켰다.

손톱만 한 은색 배지였지만, 아빠에겐 더 없이 큰 자부심이었다.


“어릴 때부터 쭉 경비 일을 하신 거죠?”

“네. 그래도 이 나이까지 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정말, 멋있으세요.”


아빠는 나를 보며 한껏 웃었다.

미소를 따라 깊게 패인 주름이 그간의 시간을 말해주었다.

아빠는 계단으로 향하는 문 앞으로 카드를 체크했고,

우리는 함께 계단에 올랐다.


“아직도 아버지 과일가게 하셔요?”

“아, 아니요.”

“건강하시고요? 어디로 이사갔다고 했죠?”

“경기도요.”

“아··· 그랬나. 여기 버스 타고 가면 25분 쯤 걸려요.

정말 시간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저번에 보니까 대호그룹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공부 열심히 했나봐요. 정말 대단한데요?”

“아···. 네···.”


한 문장의 거짓말은 두 마디의 거짓말을 요구했고,

그 결괏값은 금세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거짓말이 어떤 크기만큼, 어떤 형태로 바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늘어나고 있었다.


“우리 준단이는 운동해요. 그건 몰랐죠?”

“오 멋져요.”

“어릴 때 되게 맞아서 그게 그렇게 서러웠나봐.

아참, 이름이 뭐였죠? 미안해요. 기억이 안 나네.”


이런, 큰일이었다.

이름은커녕 성도 짐작할 수 없었다.

여기서 내 거짓말이 모조리 탄로가 나는 것일까.

조금만 더 가면 그토록 보고팠던 엄마를 만날 수 있는데···.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아도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대답을 망설이는 나를 보며

아빠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기억력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과일가게 집 이름이 뭐였더라···.

정··· 정가네였나···. 정··· 소··· 뭐였는데.”

“마, 맞아요! 정소진.”

“그래! 그거였던 거 같다. 맞나?”


정확한 기억을 잃은 덕분에 나는 적당히 둘러댈 수 있었다.

이렇게 한 턴 넘긴걸까?


“그때 아마 정씨네도 우리랑 비슷할 때 임신을 했었을 거예요.

그래서 어렴풋이 기억이 나요.

이름에 소··· 가 들어갔었는데. 꽤 비슷했었거든.”

“···누구랑요?”

“우리 딸이랑.”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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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불행의 맛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를 잠시 쉬겠습니다 22.06.10 8 0 -
33 삶은 중독이다 22.06.09 11 0 13쪽
32 모든 걸 잃어야 죽음을 얻는다 22.06.07 14 0 12쪽
31 첫 싸움 +2 22.06.06 13 1 11쪽
30 안녕 +2 22.06.05 18 2 11쪽
29 커지는 욕망 +2 22.06.04 20 2 11쪽
» 과일 가게 딸이 되었다 +2 22.06.03 20 3 12쪽
27 두 장의 이중 계약서 22.06.02 16 1 11쪽
26 서로의 심장에 찍은 빨간 지문 22.06.01 25 2 12쪽
25 이중 계약과 이중 오해 +2 22.05.31 22 4 11쪽
24 너에게 동생이 되기는 싫어 22.05.29 20 1 12쪽
23 아파트가 만든 그늘 끝에 지어진 집 22.05.29 22 3 12쪽
22 알에서 깨기 위해선 세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22.05.28 23 2 12쪽
21 사이보그와 낭만주의자 22.05.27 19 2 12쪽
20 뒷좌석 안전벨트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22.05.26 27 2 11쪽
19 목숨을 건 스파이가 되다 22.05.25 35 0 12쪽
18 걸음도 배워야 뛴다 +2 22.05.24 22 1 12쪽
17 아빠를 보았다 +2 22.05.22 26 3 12쪽
16 엇갈린 화살표 22.05.22 24 2 12쪽
15 부자의 맛 22.05.20 22 0 12쪽
14 동네 친구 22.05.20 23 2 11쪽
13 큰 소리를 낸 사람은 크게 진다 22.05.18 26 2 11쪽
12 모든 초대장엔 의도가 있다 22.05.18 25 2 12쪽
11 변주곡 (變奏曲) 22.05.17 22 1 12쪽
10 이 골목의 총잡이 22.05.17 35 3 12쪽
9 우동과 갈비 만두 +2 22.05.16 26 3 12쪽
8 검은 눈동자 22.05.16 24 3 13쪽
7 빨래 22.05.15 35 3 12쪽
6 줄다리기 22.05.14 42 5 12쪽
5 너와 나의 첫 인상 22.05.13 49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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