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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er butter 안녕, 베터버터

불타는 불행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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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버터
작품등록일 :
2022.05.13 01:55
최근연재일 :
2022.06.09 00:13
연재수 :
33 회
조회수 :
1,247
추천수 :
206
글자수 :
176,057

작성
22.05.22 19:42
조회
25
추천
3
글자
12쪽

아빠를 보았다

DUMMY

***


“이 자리에서 대답해야 하나요?”

“아닙니다. 댁으로 돌아가 충분히 생각해보신 후 답변해주셔도 됩니다.

다만, 도련님은 지금 기다릴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생각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그만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생각보다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다.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그러자, 실장이 말했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으시더라도

이곳에서 저와 함께한 대화는 전부 비밀로 유지해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끝났고,

드디어 이 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실장을 따라 현관으로 걸어가는 그때,


“실장님! 도련님 수치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저 깊은 안쪽에서부터 달려 나온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소리쳤다.


실장은 다급해진 목소리로 제임스에게 말했다.

“안전하게 잘 부탁드려요.

아참, 소단 님 어제와 같이 연락주시면 됩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하고 그림자 진 안쪽 공간으로 사라졌다.


***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훨씬 간단했다.

걸어서 오는 길이 복잡했을 뿐,

가는 길은 수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번에 주차장까지 도착했다.

제임스는 뒷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이곳을 방문할 때와 똑같이 뒷좌석에 올라 탔다.


창밖을 보며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 내게

제임스는 물었다.


“생각이 많으시군요.”

“그렇네요.”


숨막히는 공간에서 빠져나오자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제임스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아무도 보지 않는 뒷좌석에서 이윽고

지금에서야 굽혀진 허리를 기대어 앉으며 기지개를 피며

제임스에게 물었다.


“···만약에 말이에요.

누군가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도와주지 말라고 마구 뿌리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일단 돕겠습니다.

넘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곳이 도로라면 위험하기 때문이죠.

그곳이 인도라 하더라도 그 사람뿐 아니라

모두가 불편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 사람은 왜 돕지 말라고 소리쳤을까요?”


제임스는 그저 허허, 웃고 말았다.

나에게도 비밀을 신신당부하던 실장일테니

모든 직원에게 쓸데없는 사담은 아끼라고 해놓았을 것이다.


나는 창밖 낯선 풍경에 시선을 던져놓았다.

주차장에서 흘러 나오는 깨끗한 음질의 클래식 음악 소리하며,

빠져나오는 통로에도 반듯한 유니폼을 입고 허리를 숙이는 사람들···

주차장 벽까지 꾸며놓은 다이아몬드를 박아 놓은 듯한 조명들···

방문할 때와는 달리

‘여기도 돈, 저기도 돈, 돈낭비로 나라를 세워놨구나···.’

싶은 생각에 환멸에 젖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빠져나가는 우리 자동차를 향해 멀리서부터 고개를 숙이다가,

고개를 든 한 경비원 아저씨···.


“좋은 하루 되십시오!”


고개를 든 경비원의 눈과 마주쳤다.

이내 경례를 척,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경비원과 눈이 마주쳤다.

흐르는 시간이 천천히 감기고

얼어 붙어있던 과거의 악몽에서 새어나온

클락션 소리가 빠아앙- 들려왔다.


‘아빠?’


나는 창문에 온 신경을 기울여 그를 바라보았다.


“자, 잠시만요!”

“무슨 일이시죠?”

“저, 잠시만요. 멈춰요!”


이미 빠른 속도로 자동차는 지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 다음 층이 되어서야 자동차는 멈췄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아빠일 리 없잖아. 얼굴도 모르는 걸!’


“방금 온 지하로 다시 내려가 줄 수 있나요?”

“물건을 놓고 오신 모양이군요.

그런 일이라면 저희가 위에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경비복을 입은 그 사람을 보고 일순간에 아빠를 떠올렸다.

익숙한 목소리···

나와 닮은 눈빛···

처음 보는 그 사람이 나의 아빠였음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에요. 그냥, 갈게요.”


아빠를 향해 달려간다고 하더라도

내가 29년 전 죽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믿지 않을 테니깐. 나 또한 그랬듯이.

그저 정신나간 여자 쯤으로 나를 보겠지.

아빠가 아닐 확률도 물론 있다.

나는 아빠를 확인할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일단은, 그냥 지나갔다.


“여기 경비아저씨는 참 열심히시네요.”

“그렇지요. 늘 한결같으시죠.”

“다른 가드들은 다 젊은데··· 저 분은 대장이신가봐요?”

“하하, 글쎄요.

제가 알기론 재개발하기 전, 이전 아파트서부터 경비 일을 하셨다더군요.

주민분들께서 좋게 보셨는지, 이곳에서도 함께 일하고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근처에서 사시려나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몇 시쯤 퇴근하시나요?”

“그것도 제가 답할 수가 없군요. 허허.

혹시, 아시는 분이신가요? 관심이 굉장히 많으시네요.”

“···아니요.”


나는 제임스처럼 나의 비밀을 비밀로 만들었다.

경비원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사무친 그리움에

심장이 저려왔다.

아니겠지, 싶다가도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심장이 펑펑 터질 때마다 핏줄이 터질 듯 피가 울컥거렸다.

피가 끓는다는 감정이 이것이리라.

나는 그곳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아빠가 아니더라도, 꼭 확인해야만 했다.


***


후미진 작은 골목에 자동차가 멈춰 섰다.


“우와! 완전 비행선 같다!”

“연예인이 타고 있나 봐, 오빠.”


오랜만에 보는 경찰관 꼬맹이 삼총사였다.


“문이 열린다!”

“누구야? 누구?”


삼총사는 어묵 한 꼬치를 들고서는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자동차 근처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서 있었다.


“나다.”

“잉? 뭐야! 소단 이모잖아!”

“누나!”


그 거대한 비행선에서 내린 미스테리한 존재는 바로 나였다.

상혁과 유주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기남은···


“누나!!!”


이가 훤하게 보이도록 웃으며 달려왔다.


“우와! 누나 짱이다! 누나 차예요?”

“누나 좀 멋지니?”

“아저씨! 저희도 태워줘요.”


기남을 따라 실망한 두 아이가 쪼르륵 다가왔다.


“아저씨 바빠서 안 돼.”

“왜 누나만 타요~”

“오늘만 누나가 빌린 거야.”

“아저씨이~ 저희도 태워 줘요~”


유주가 애교 작전을 피웠다.

그러자 덩달아 상혁과 기남도 아양을 떨었다.


“아저씨이이~ 제발요오~”


제임스는 삼총사 앞에 굽어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헤스름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소단 님께서 부탁한다면 얼마든지 태워 줄게요.

다음에 만나요, 우리.”


제임스는 뒷문을 마저 닫고 말을 이었다.


“소단 님,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부디 좋은 소식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고개를 깊게 숙이고 코트 매무새를 다듬더니

운전석에 앉는 그였다.


부웅- 그가 탄 자동차가 묵직한 엔진음을 내며 사라졌다.

삼총사는··· 난리가 났다.


“누나! 남자친구예요?”

“소단 이모가 부탁하면 태워준다고 했어요! 언제 태워줄 거예요?

약속해요~ 빨리요!”

“얘, 얘들아! 잠시만! 타임!”


질러버린 고음에 일순간 모두 조용해졌다.


“···자전거는 안 되겠니?”


나름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물론 급하게 세운 모래성은 후루룩 무너져버렸지만.


“에이, 안 되죠! 저런 자동차는 처음 봤다구요!”


나는 다시 모래성을 견고하게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 움큼씩 쌓인 모래성은 어느새,

지온성과 함께 술을 마시던 동네 꼭대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희 놀이기구 타봤지? 놀이기구보다 더 재밌게 탈 건데?

저 위~에 높은 곳에서 훅 떨어지는 재밌는 자전건데?”

“···이모 자전거 탈 줄 알아요? 나는 모르는데···.”

“이모 잘 타지~ 탈 거야, 안 탈 거야? 싫음 말고.”


뒤돌아 가려는 능청스러운 연기를 펼치자,

귀여운 관객들은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누나! 저 탈래요!”

“그, 그럼 나도 탈 거야!”

“나는··· 무서운데에···.”

“유주는 천천히 태워주면 되지~”

“좋아요, 저도!”


유주의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빙그레 웃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마음에서 꽃이 살그맣게 펴졌다.

유주의 미소에선 분명 꽃내음이 났다.

아이들의 웃음에 나도 웃었다.

나는 오후가 되어서야 처음 웃었다.


“그럼 다들 어묵 다 먹었으면 어서 가야지!”

“누나, 그럼 또 봐요!”


상혁은 다 먹은 꼬치를 휘휘 휘두르면서 말했다.


“이모 남자친구 생겼대요~”

“그거 다치겠다, 상혁아. 그리고 말이야! 남자친구 아니거든!”

“이 오빠는 아무거나 다 휘둘러요! 맨날 맨날 그래요!”

“저 이거 맨날 해서 잘하거든요? 남자친구래요~ 부자 남친이래요~”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가.

어른들이 걱정하시면 나중에 자전거 태워주기 힘들 것 같은데?”


삼삼오오 모여서 웅성대던 아이들이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집에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냅다 바닥에 누워버렸다.

천장에서 외롭게 빛나는 조명에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자전거···.

나의 DNA를 믿고 일단 질러버렸다.

나··· 탈 수 있겠지?

스물 아홉이면 자전거쯤은 탈 수 있겠지, 뭐.

오늘 하루는 시간이 빨리 간다.

쌓인 빨래를 돌리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잘라야 했다.

그리고 오는 길게 자전거를 사야지,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계 바늘,

오늘도 나는 뚜벅뚜벅 하루를 열심히 걸어야 했다.


***


작은 동네지만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다.

미용실에서 몇 걸음 걷지 않아도

자전거 가게에 닿을 수 있었다.

수많은 자전거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듯이

준비된 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자전거···를 사려고 하는데요.”

“예예. 본인이 타실 건가요?”

“네.”

“주행은 보통 어느 정도 하시나요?”

“가끔 동네 산책 정도로 사용하려구요.”

“음, 그러면 여자분이시니까 가벼운 이 친구로 하세요.

이 제품이 가장 잘 나가죠.”


핑크색 아담한 자전거였다.

문득 자전거를 구매하는 것이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온 동네를 누비고 다니려면 기동성과 시간 절약 측면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올 때도··· 안전한 가요?”

“그럼요. 그런데, 어디 뭐 산행하세요?

그러면 이거보다는 조금 더 전문적인 제품이 나으실텐데···.”

“그건 아니구요. 아, 그걸로 할게요.”


“가격은 15만 원입니다.”

“뒤에 누구 태울 수도 있나요?”

“그러려면 보조 안장을 구매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 조그만 자전거는 보조 안장 달고 주행하기에

균형잡기 쉽진 않을 텐데···.

차라리 바퀴가 큰 이 제품으로 하세요.

구를 때 에너지가 조금 더 필요하긴 하지만 그만큼 힘도 잘 받으니까요.”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갈색 자전거였다.


“이 제품은 18만 원입니다.

자전거 잘 타시나 봐요? 어려 보이셔서 아이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껄껄.”

“아이가 있는 건 아닌데···. 아이를 태우려는 건 맞아요.”


알쏭달쏭한 대답에 아저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못 보신 분 같은데, 새로 이사 오셨어요?”

“아, 네.”

“보조 안장은 원래 3만 5천 원인데 2만 원에 드릴게요.

아이가 타는 거라니까 깎아드리는 겁니다.”


나는 현금으로 한 장 한 장 지폐를 세서 값을 치렀다.


“요즘 현금 쓰시는 분도 계시네요.”

“저는 현금이 편하더라고요.”

“그러면 저희야 좋죠!”


자전거 핸들을 쥐고 가게를 빠져나가려는데,

이거 참,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저기, 손님!”

“네?”

“안장 조절을 해드릴게요.”


아저씨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안장을 나의 높이에 맞게 조절했다.

“바퀴 압력 체크도 끝났고···

좋습니다!

손님, 기압 빠지거나 안장 조절이 필요하거나, 뭐 문제 생기시면

언제든지 찾아 오세요.

저희 하늘천 자전거는 전부 무료!

평생 AS니까 오다가다 한번씩 들리셔요.”

“감사합니다.”

“안전 주행 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55 스팀펑크
    작성일
    22.05.22 21:17
    No. 1

    서재 방문을 감사드립니다. 글이 너무 좋아서 추천 선작 꽉 누르고 갑니다. 힘내시고 공모전 대박 나시기를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6 베터버터
    작성일
    22.05.22 21:24
    No. 2

    힘이 되어주시는 댓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스팀펑크님의 댓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더욱 열심히 쓰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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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모든 걸 잃어야 죽음을 얻는다 22.06.07 14 0 12쪽
31 첫 싸움 +2 22.06.06 13 1 11쪽
30 안녕 +2 22.06.05 18 2 11쪽
29 커지는 욕망 +2 22.06.04 20 2 11쪽
28 과일 가게 딸이 되었다 +2 22.06.03 19 3 12쪽
27 두 장의 이중 계약서 22.06.02 16 1 11쪽
26 서로의 심장에 찍은 빨간 지문 22.06.01 25 2 12쪽
25 이중 계약과 이중 오해 +2 22.05.31 22 4 11쪽
24 너에게 동생이 되기는 싫어 22.05.29 20 1 12쪽
23 아파트가 만든 그늘 끝에 지어진 집 22.05.29 22 3 12쪽
22 알에서 깨기 위해선 세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22.05.28 23 2 12쪽
21 사이보그와 낭만주의자 22.05.27 19 2 12쪽
20 뒷좌석 안전벨트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22.05.26 27 2 11쪽
19 목숨을 건 스파이가 되다 22.05.25 35 0 12쪽
18 걸음도 배워야 뛴다 +2 22.05.24 22 1 12쪽
» 아빠를 보았다 +2 22.05.22 26 3 12쪽
16 엇갈린 화살표 22.05.22 24 2 12쪽
15 부자의 맛 22.05.20 22 0 12쪽
14 동네 친구 22.05.20 23 2 11쪽
13 큰 소리를 낸 사람은 크게 진다 22.05.18 26 2 11쪽
12 모든 초대장엔 의도가 있다 22.05.18 25 2 12쪽
11 변주곡 (變奏曲) 22.05.17 22 1 12쪽
10 이 골목의 총잡이 22.05.17 35 3 12쪽
9 우동과 갈비 만두 +2 22.05.16 26 3 12쪽
8 검은 눈동자 22.05.16 24 3 13쪽
7 빨래 22.05.15 35 3 12쪽
6 줄다리기 22.05.14 42 5 12쪽
5 너와 나의 첫 인상 22.05.13 49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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