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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er butter 안녕, 베터버터

불타는 불행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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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버터
작품등록일 :
2022.05.13 01:55
최근연재일 :
2022.06.09 00:13
연재수 :
3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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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6,057

작성
22.06.04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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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커지는 욕망

DUMMY

***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아빠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수 없이 들춰내며 이내 무뎌질 만큼 단단해진 것이었을까.

또는 남동생이 태어나서 위안이 된 것이었을까.

다행이었다.

아빠의 표정을 보니, 참 다행이었다.


“아, 따님이 있었나요?”

“네. 뭐. 그렇죠.”

“저는 준단이만 기억에 있어서 말이에요.”

“그럴 거예요. 소진 양의 기억이라면.”


아빠는 그만 말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지만,

나는 알면서도 계속 물었다.

아빠의 입에서 내 이야기가 나오는 게 좋았다.

더 듣고 싶었다.


“따님은 어디에···.”

“멀리에 있죠. 가끔 만나요.”

“그렇군요.”


평온하던 아빠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만 물어야겠다.

우리가 다시 딸과 아빠의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환생해서 다행이었다.

오늘만큼은.


시작은 가족을 볼 수만 있다면 좋았을 것이었다.

아빠를 찾고서는 가족을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서는··· 가족이 되고 싶어지겠지.

이내는··· 함께 살고 싶겠지.


끝없는 희망은 욕망이 되었고,

1년뿐인 내 삶에 가슴이 미어졌다.

모든 건 사치였다.

내겐 과분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일 년도 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신 오지 못할 수도 있는 이 삶에서 무엇을 주고 갈 것인가.

그것을 고민할 차례였다.


***


아빠의 동네에 도착했다.

버스에 함께 오르내리는 동안 아빠는 옛 추억을

한껏 꺼내 보였다.

나에게는 없는 기억.

내 세상에는 없었던 기억.

알 수 없는 과거임에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아빠는 호응만 전하는 나를 의심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스스로 기억의 꼬리를 물며 과거로의 여행을 즐겼다.


“저번에 이쪽에서 내려주셨죠.

여기로 쭉 들어가면 우리 집이에요.”

“아저씨. 저··· 빈손으로 가긴 좀 그래서요.

뭐 드시고 싶으신 것 없으세요?”

“손님인데 빈손이 무슨 상관이에요. 그냥 오세요.”

“제 마음이 편치 않아서요.”

“에이 괜찮아요. 뭐 옛 동네 사람들끼리 무슨 그런걸요.”

“부탁입니다.”


발걸음을 떼지 않는 나를 두고 아빠는 꽤 난감해했다.


“정말 괜찮은데···.”

“과일 같은 거라두요.”

“···그럼 여기 근처 과일 가게로 가요. 거기가 싸거든.”


함께 걸었다.

믿기지 않았다.

아빠와 함께 걷고 있다.

나는 죽었고, 지금은 살아있다.


어색한 듯 나란히 걷고 있는데,

저쪽 끝에서부터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유치원 생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부모님을 앞서서 퀵보드를 타고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이제 사람들 오니까 조심히 가야지.”

“여기 봐봐. 딸! 여기 봐봐.”


뒤에서 아이를 나무라는 엄마,

그리고 그 아이를 사진에 담는 아빠였다.

꽃분홍색 원피스를 하늘하늘 휘날리며 퀵보드를 타던 여자아이는

그 말에 멈춰서 포즈를 취했다.


아이의 아빠는 환히 웃었다.

이가 훤히 다 보인 채 목이 뒤로 넘어갈 정도로 웃었다.


“아빠! 오늘은 편의점 가야 해요.”

“왜? 우리 딸?”

“맛없는 당근도 다 먹었거든요. 엄마! 선생님이 말해줬지요? 맞지요?”

“응. 맞아. 대신 젤리 하나만이야.”

“앗싸! 엄마아빠 것도 사줘야지~”

“어차피 내 돈인데 뭘 사줘. 천천히 가~”


나도 모르게 가족을 바라보았다.

일곱 살 그 시절의 사진.

나에겐 없는 그 시절.

29살이 되어서 기적처럼 아빠 옆을 걷고 있는 지금,

사무치게 좋으면서도 딱 그만큼 아프다.


***


“그냥 간단하게 사과 몇 알, 이 정도면 충분해요.”

“어서 오세요. 과일 보러 오셨어요? 따님이 있었어?”

“아니요. 여기 옛날 동네 아저씨 딸이에요.”

“그래? 똑 닮아서 딸인 줄 알았지! 준단이는 요즘 통 안 보이네?”

“엄마가 요즘 아파서 병원 다녀야 한다고 집에만 있어요.”

“오다가다 가끔은 봤는데···.”

“과일 맛있는 걸로 주세요. 여기가 과일가게 딸이라 잘 줘야 해.”

“아휴, 그럼 신경 써서 드려야겠어.”


진열대는 종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몇몇의 과일이 있었다.

아무래도 작은 동네에 있는 개인 가게였기 때문에

판매할 만큼만 들여다 놓은 모양이었다.


종류는 적어도 싱그러운 과일 냄새가 향긋했다.


“오늘 새벽에 들였수. 제철 과일이 아무래도 최고지, 안 그래요?”

“제철 과일이면···.”

“어메? 모르시나벼. 여기 복숭아, 자두, 토마토.”


수박 겉을 노크하듯 통통 치는 아빠를 보고

과일 가게 주인은 만류했다.

아무래도 동네 주민이라 그런지 친해 보이는 듯했다.


“솔직히 이 수박은 7월은 돼야 좀 괜찮아요.

술안주로 화채 하실 거면 나쁘지 않고요.

다 아신다니까 내가 솔직하게 말하는 거야.”


자꾸만 자두에 눈이 갔다.

노랗고 빨간색의 빛을 수채화처럼 물들이고선

코팅이라도 된 듯 반짝이고 있었다.


“자두? 역시 볼 줄 아시네요.

참 달고 맛있어요. 새콤도 하고.”

“자두로 할까요?”

“자두 한 바구니 주세요. 아이 제가 사야죠!”


아빠는 가방을 뒤적이는 나를 말렸다.

웃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있었다.


“아니요. 정말 제가 사드리고 싶어요.”

“에이 그래도 손님인데 그러지 말아요.”


옥신각신하는 우리를 보고 과일 가게 주인은 픽 웃었다.


“아무나 주세요. 뭐 자두 하나 가지고들 싸울 일이야 이게?”

“그러니까는. 어른인 내가 사는 게 맞는 건데 그쵸?”


아빠는 가게 주인에게 공감을 유도했다.


“뭐 어른이라고 항상 사줘야 하나.

어린 아가씨가 사주고 싶다는데 그 마음도 받아 줘야지.

이렇게 원하는데 사주지도 못하게 해?”

“···그래?”

“아가씨 좋은 선물 한다 하고 어여 사드려요.

참 착한 아가씨구만.”


나는 가게 주인 덕분에 무사히 계산을 마쳤다.

아빠는 머쓱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고, 고마워요.”

“···자두인데요, 뭘.

옛날 생각도 나서요. 제가 꼭 사드리고 싶었어서.”


괜히 무안해진 아빠는 가게 주인에게

웃음 섞인 분노를 던졌다.


“젊은 친구들 지갑이나 열게 하고 말이야!

많이 팔아요. 부자 되쇼!”

“그래요. 덕분에 부자 될게!”


겨우 구매한 자두 한 봉지를 들고

아빠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


주택가 중간쯤 들어서고 걸음은 멈췄다.

칠이 까진 검은색 대문은 열려 있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작은 3층짜리 집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와 비슷하면서도 또 달랐다.

우리 동네보다는 집의 간격이 훨씬 좁았다.

마치 추위를 견디려는 남극의 어느 섬처럼.

서로의 온기를 나누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창문을 넘어선 TV 소리가 들려왔고,

간혹 그릇을 정리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그런 운치가 있는 집이었다.


“아저씨 집 정말 멋지네요!”

“멋있죠? 내가 보기에도 이 동네에선 제일 멋있어요.

여기 계단이 깨져 있으니 조심히 내려와요.”


아빠를 따라 걸었다.

반지하쯤으로 가려진 집이었다.

주택의 맨 아래에 아빠는 살고 있었다.


아빠는 검은 문을 노크했고,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불투명한 창문에 누군가의 모습이 비쳤다.

엄마일까?

자두 봉지를 꽉 움켜쥐었다.

엄마를 보면 나는 어떻게 될까?

울게 될까?

웃으려나?

울지만 말자.

일렁이는 마음을 봉지처럼 움켜쥐었다.


***


“오셨어요.”


뚝뚝한 목소리.

남동생이었다.

유준단.

문이 열리자 그의 모습이 보였다.

낮고 굵은 저음을 가진,

작은 체구의 남자.


“어? 누구···.”

“안녕하세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들어오세요!”


구두를 벗었다.

작은 사이즈의 여자 신발이 있었다.

쿠션이 깔려 있는 보라색 운동화였다.

오래 신은 흔적이 역력했지만

너무나 깨끗하게 관리가 되어 있었다.


“여보. 누가 왔는지 봐!”

“응?”


그리고 방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우리 엄마였다.


“안녕하세요.”


울게 될까.

웃게 될까.


모두 아니었다.

먹먹했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주름진 엄마였다.

60살 쯤 되었을 엄마 나이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이가 들어버린 ···우리 엄마였다.


‘왜 아직도 야위어 있는 거야···.

세상엔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미웠다.

29년이라면 강산이 3번은 바뀔 세월인데,

여전히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분했다.

내가 죽었다 다시 태어날 동안

엄마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누구···.”

“은선동 정가네!”

“은선동?”


엄마는 한동안 머릿속을 헤매더니,

생각이 난 듯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정가네 과일 집 딸?”

“그래! 와하하. 준단아 기억 나냐?

너 이 누나랑 훌라후프 대결도 하고 그랬잖아.”

“아, 그 같이 사진 찍힌 그 누나요?”

“그래! 소진이. 정소진이!”


만들어낸 내 이름을 외치자

엄마는 고민에 잠겼다.


“···이름이 정소진이었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정소진이 맞죠?”

“···네. 맞아요. 그때 저희 집에서 자두를 자주 사 가시고 그러셨지요.”

“무슨 소···였는데 그게 소진이었나?”

“소진이 많이 컸지 여보? 대호 그룹에 취직도 했다더라!”

“아이고, 반가워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야무지더니

공부도 잘했나 보네!”

“여기 편하게 앉아요. 난 옷 좀 갈아입고 올게.

준단아, 소진이 누나랑 이야기 좀 하고 있어.”

“너무 갑작스러워서 대접해드릴 게 없는데.

커피라도 가져와야겠다.”


아빠는 경비 모자를 벗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식탁에 앉아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아, 괜찮습니다. 여기 앞에서 자두 사왔어요.

제철이라 맛있대요. 아주머니가··· 좋아하셨던···.”


엄마는 봉지를 열어보곤 가만히 쳐다보았다.

분명 기뻐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선물이 아니란 뜻이었을까.


“자두네. 얼마 만에 먹는 자두인지. 고마워요.

그냥 와도 되는데.

그럼, 자두 같이 들어요.”


엄마는 자두를 구멍이 뚫린 채에 담고는

물을 틀어 하나씩 씻어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내가 실수한 걸까, 다른 과일을 고를 걸,

후회가 밀려왔다.


준단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묵묵하니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무뚝뚝해 보이는 그라도 부모님 말씀 하나는

참 잘 듣는 반듯한 청년인 듯했다.


“운동··· 하신다고요.”


어색한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걸었다.


“네. 축구 했었어요.”

“오 정말 대단하시네요. 축구 선수셨던 거예요?”

“지금은 아니구요. 10대 때까지는 축구 했었어요.

이런저런 일 때문에 지금은 체육 학원 선생님이에요.”

“멋져요. 어릴 때도 달리기는 잘했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대로 없던 과거를 상상하며 덧붙였다.

4살에 달리기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슬그머니 말을 이어보는 나였다.


“훌라후프는 누나보다 항상 뒤처졌다던데요.

아참, 사진 보실래요?”


엄마는 우리를 흘끗 쳐다보고선

미소를 지었다.

그 사이 자두에 물기가 전해지며

더욱 먹음직스러운 빛깔이 되었다.

엄마는 플라스틱 쟁반에 자두와 과도를 가지고서 식탁으로 와 함께 앉았다.


한입에 먹기 좋게 자두를 자르는 엄마였다.

과도를 집은 여윈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엄마는 언제부터 손을 떨었을까.’


엄마의 눈은 익숙한 듯 평온해 보였으나,

그 모습을 보는 나는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아슬아슬 떨리던 그녀의 손가락이

애써 쌓아 유지하던 감정 조각을 하나씩 떨어뜨리고 있었다.

마치, 젠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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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불행의 맛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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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연재를 잠시 쉬겠습니다 22.06.10 8 0 -
33 삶은 중독이다 22.06.09 11 0 13쪽
32 모든 걸 잃어야 죽음을 얻는다 22.06.07 14 0 12쪽
31 첫 싸움 +2 22.06.06 14 1 11쪽
30 안녕 +2 22.06.05 18 2 11쪽
» 커지는 욕망 +2 22.06.04 21 2 11쪽
28 과일 가게 딸이 되었다 +2 22.06.03 20 3 12쪽
27 두 장의 이중 계약서 22.06.02 16 1 11쪽
26 서로의 심장에 찍은 빨간 지문 22.06.01 25 2 12쪽
25 이중 계약과 이중 오해 +2 22.05.31 22 4 11쪽
24 너에게 동생이 되기는 싫어 22.05.29 20 1 12쪽
23 아파트가 만든 그늘 끝에 지어진 집 22.05.29 22 3 12쪽
22 알에서 깨기 위해선 세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22.05.28 23 2 12쪽
21 사이보그와 낭만주의자 22.05.27 19 2 12쪽
20 뒷좌석 안전벨트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22.05.26 27 2 11쪽
19 목숨을 건 스파이가 되다 22.05.25 35 0 12쪽
18 걸음도 배워야 뛴다 +2 22.05.24 22 1 12쪽
17 아빠를 보았다 +2 22.05.22 26 3 12쪽
16 엇갈린 화살표 22.05.22 24 2 12쪽
15 부자의 맛 22.05.20 22 0 12쪽
14 동네 친구 22.05.20 23 2 11쪽
13 큰 소리를 낸 사람은 크게 진다 22.05.18 26 2 11쪽
12 모든 초대장엔 의도가 있다 22.05.18 25 2 12쪽
11 변주곡 (變奏曲) 22.05.17 22 1 12쪽
10 이 골목의 총잡이 22.05.17 35 3 12쪽
9 우동과 갈비 만두 +2 22.05.16 26 3 12쪽
8 검은 눈동자 22.05.16 24 3 13쪽
7 빨래 22.05.15 35 3 12쪽
6 줄다리기 22.05.14 42 5 12쪽
5 너와 나의 첫 인상 22.05.13 49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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