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우중거님의 서재입니다.

프랑스에서 1호가 될 순 없어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스페란자
작품등록일 :
2023.05.10 10:30
최근연재일 :
2023.05.21 18:04
연재수 :
15 회
조회수 :
22,287
추천수 :
789
글자수 :
79,171

작성
23.05.16 18:05
조회
907
추천
30
글자
13쪽

8화. 사위 사랑은 장모?

DUMMY

“폐하. 할 말이 있는 얼굴로 오셔서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앙투아네트의 방에 온 지 꽤 시간이 흘렀으나 쉽사리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굳게 마음먹고 입을 떼도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다시 입이 닫혔다.


‘또 그때랑 같은 상황이야. 젠장, 이건 답이 없잖아.’


몸이, 시대가, 그리고 환경이 바뀌어도 왜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는지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내몰리자 자연스레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


“부탁드립니다. 제발 한 번만 꼭 좀 도와주세요.”


간절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숙였지만, 주한프랑스 대사관 직원 파스칼은 난감한 듯 머리만 긁적였다.


“미안하네 무슈 한. 지난번에 다미앵 장 교수가 대사님께 큰 결례를 범했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이번 초청명단에서 그가 제외된 거고. 나한테 사정해봐야 도와줄 수 없어.”


파스칼의 설명에 따르면 지난번 주한프랑스대사관에서 열린 연회에서 다미앤 장, 아니 장춘수는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 그를 제지하는 프랑스 대사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래서 장춘수는 이번 주한프랑스 대사관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받지 못했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장춘수가 내게 지랄발광을 시작한 것이었다.


“야, 잘 들어. 이번 연회에 내가 못 가면 너도 연구실에서 나가는 거야. 알겠어? 초청장 못 가져올 거면 연구실에서 짐 빼!”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연구실이 아니라 주한프랑스대사관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개 대학원생이 대사가 주최하는 연회의 초청장을 받아오는 일은 불가능했다.


“저기 혹시 대사님을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대사관 앞을 서성이며 대사관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쭈뼛쭈뼛 다가가 조심스레 대사님을 좀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방법이 통할 리 없었다.

점차 연회 날짜는 다가오고, 장춘수는 수시로 협박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상황.

결국, 나는 한 가닥 남아있던 자존심마저 내팽개쳤다.

다음날부터 나는 대사관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다가가 무릎까지 꿇어가며 대사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부탁합니다. 제발 대사님 좀 만나게 해주세요. 제발요!”


그러다 만난 사람이 파스칼이었다.

내 얼굴에 새겨진 절실함을 외면하지 못한 파스칼은 그에게 장춘수가 왜 이번 연회에 초대받지 못했는지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도 내게 연회 초청장을 줄 수 없었다.


“무슈 강, 대사님이 직접 그를 제외하라고 말했기 때문에 대사님이 아니면 누구도 도움이 안 될 거야.”


그날부터 프랑스 대사가 탄, 혹은 탄 것으로 추측되는 차량만을 쫓아다녔다.

대사가 외부행사에 참석할 때는 맹렬히 프랑스 국기를 휘두르며 대사 눈에 띄고자 했다.

그렇게 죽어라 노력한 끝에 연회 당일 대사와 마주할 수 있게 되었고, 잠시 후 대사관을 나온 내 손에는 장춘수의 연회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자존심 따위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존심에 연연하지 않는 척 나 자신을 속였다.


***


“정말 다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진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날 응시하는 앙투아네트.


‘답은 이것밖에 없어. 그래, 인정하자.’


그녀와 이렇게 눈을 맞추는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다른 대안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니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안토니아..”

“예, 폐하.”

“.. 장모님께 돈을 빌려야 할 것 같아. 가능하면 식량도.”


그 말에 안색이 어두워진 앙투아네트.


“이런 말 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시민들이 굶고 있어. 조세 수입만으로는 이 나라가 진 빚을 언제쯤이나 다 갚을지 기약이 없어.”


비록 처가이긴 해도 수 세기 동안 반목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도움을 청한다는 건 내가 아무리 자존심을 버렸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

또 당시 유럽은 각국의 왕가가 다 혼인으로 엮여있어 처가라고 해도 21세기처럼 그리 유별난 관계가 아니기도 했다.


‘국가 신용이 바닥이라 더는 대출도 받을 수 없어. 그래서 귀족을 털 생각도 했고, 교회를 털 생각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실행하기는 어려웠지.’


조세 징수만으로도 이미 왕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귀족과 교회였다.

자칫 사회 혼란만 가중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심지어 선왕의 정부인 뒤바리 부인의 재산을 뺏어볼 생각도 했는데..’


메트레상티트르라 불리던 왕의 정부.

뒤바리 부인은 루이 15세를 휘어잡아 값비싼 보석 등 많은 재물을 얻어냈다고 했다.

실제로 혁명이 터지고 영국으로 도망쳤다 다시 프랑스로 와서 결국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 때까지의 일화를 살펴보면 그녀가 엄청난 재산을 소유했던 것은 확실했다.


‘그래도 선왕의 여인이고 또 뒤바리 부인은 따로 쓸데가 있었지. 그래서 남은 건 처가인 합스부르크 왕가뿐이고.’


그때 내 손을 잡는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


“폐하, 그 말이 그렇게 하기 어려워 그리 망설이신 겁니까?”


좀 전까지만 해도 얼굴이 굳어졌던 그녀가 지금은 또 배시시 웃는다.

그녀를 보자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미안합니다. 왕비.”

“폐하. 이런 말을 하는 게 죄송하지만 제 어머니에게 돈을 빌리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네,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이자 수백 년간 이어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적법한 지배자.


‘남편을 대신 세웠지만, 그 유명한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이기도 하지.’


그녀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살짝 갈리기도 했지만, 그녀는 오스트리아 국민에게 사랑받는 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몇 년 뒤에 죽었더라?’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대략 이시기에서 5년 안에는 죽었던 거 같다.

그리고 지금 시기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아들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한 요제프 2세가 공동통치의 형식으로 나라를 다스렸었다.


“제가 오스트리아에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설득해볼게요.”


굳은 결심이 눈에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살짝살짝 꼬집었다.


“.. 폫하?”


볼살이 꾸겨져 발음조차 엉망이 된 그녀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귀여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뇨, 같이 갑시다. 사위가 장모님을 뵈러 가는 건데요. 같이 가요 왕비.”


이 말에 날 보는 그녀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리고 물론 나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를 만나 대놓고 구걸할 생각은 없었다.


‘거래, 거래를 해야지.’


오랜만에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 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얼굴에 설렘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도 나는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거래에 올릴 저울추를 생각했다.


***


드넓은 베르사유 궁전 정원 한편에 놓인 탁자에 홀로 앉아 책을 읽었다.

그리고 잠시 뒤, 시몽이 근위병 몇과 함께 남자 세 명을 끌고 왔다.

셋 다 멀끔한 행색이 모두 귀족이나 부르주아로 보였다.


“폐하의 명대로 그자들을 데려왔습니다.”


달랑 책 세 권을 주며 글쓴이를 찾아오라는 명이어서 시간이 좀 더 걸릴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그의 능력이 좋았다.

역시 눈치 없는 거만 빼면 시몽은 꽤 능력 좋은 사람이었다.


“수고했어, 시몽.”

“감사합니다. 폐하.”


그 말을 하고 호위하듯 내 옆에 선 시몽.

그리고 근위병에 이끌려 내 앞에 선 남자들이 바닥에 부복해 고개를 조아렸다.

못마땅한 내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그들 또한 얼굴이 굳어졌다.


“살려주십시오. 폐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영문은 모르겠으나 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사죄드립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지 나오는 말도 싸늘했다.


“일단 기다리고 있어. 짐이 지금 그대들이 쓴 걸 미처 다 읽지 못했으니.”


그리고 이 말에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유독 몸을 덜덜 떨었다.

봐야 할 책이 세 권이나 되어서인지 대강이라도 보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탁하는 소리와 함께 독서가 끝났을 때 순간 고민이 들었다.


‘계획이고 뭐고 얘는 진짜 죽여버릴까?’


그러나 기분 내키는 대로 누군가를 죽인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자 집 나간 평정심도 다시 돌아왔다.

깊게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좀 전에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가슴이 풍만한 오스트리아의 개, 이거 누가 쓴 거야?”


싸늘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한 내 목소리에 아까부터 벌벌 떨던 그가 흠칫 놀랐다.


“시몽. 이거 쓴 새끼 죽여.”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칼을 빼 든 시몽이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몸을 덜덜 떨던 그가 급히 손을 위로 올렸다.


“접니다! 접니다 폐하.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시옵소서.”


그러나 시몽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 칼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시몽 잠깐 멈춰.”

“예, 폐하.”


시몽이 치켜든 칼의 칼날에 닿은 햇빛이 반사되어 그의 얼굴로 향했다.


“네가 이 책을 썼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제발 자비를..”

“왕비를 능욕하는 글을 쓴 자가 살길 바라다니 우습군. 안 그런가?”


사실 다른 생각이 있어 처음 계획대로 이자에게 겁만 주려고 했다.

하지만 책 내용을 본 순간, 앙투아네트를 음욕의 대상으로 만든 글에 살심이 솟구쳤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계획대로 하는 게 좋았다.

나뿐만 아니라 앙투아네트 그녀에게도.


“후.. 야, 너.”

“네, 아니 예 폐하.”

“너 앞으로도 계속 글 쓸 거지?”

“살려만 주신다면 앞으로는 한 글자도 쓰지 않겠습니다.”

“아니지, 그게 아니지. 살고 싶으면 계속 이런 쓰레기 같은 글을 써.”

“예..?”

“근데 주인공은 바꿔. 앞으로 니가 쓸 이딴 쓰레기 같은 글의 주인공은.. 왕비가 아니라 뒤바리 부인이 되어야 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일까 멍하니 나를 보는 남자.


“그리고 지금보다 더 독하게 써야 해. 시민들의 분노가 무서워 뒤바리 부인이 프랑스를 떠나고 싶어질 만큼. 알겠어?”


내 말을 쉽게 이해 못 하는지 남자는 대답을 못 했다.


“시몽 그냥 죽여버려.”

“아뇨, 아닙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냅다 바닥에 고개를 처박으며 다급히 외치는 남자에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시몽 물러나.”

“예, 폐하.”


그리고 이 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두 남자를 응시하며 이번에는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원수 오스트리아를 멸하는 101가지 방법. 이거 쓴 사람 손?”


그러자 20대 초중반대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담담히 손을 들었다.

그런데 이자가 풍기는 분위기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제 막 육사를 졸업하고 임관한 소위 같았다.


“.. 그대는 군인인가?”

“예, 그렇습니다. 폐하.”

“그래서였군. 제법 잘 썼더구나. 이 책을 읽고 오스트리아를 무너뜨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거기가 내 처가인 건 몰랐나?”


약간의 위협이 담긴 말임에도 청년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스트리아는 수 세기 동안 저희와 대립한 적국입니다. 왕비님의 가문이라는 게 그 책을 쓰지 못할 이유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잘못했다, 용서해달라고 빌 거라는 예상을 빗나간 그의 대답에 살짝 놀랐다.


“그래, 틀린 말이 아니지. 그리고 그대가 써줬으면 하는 게 하나 있다.”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는 청년.


“잔 다르크와 백년 전쟁.”


내 말에 청년의 눈이 커졌다.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아 죽인 철천지원수 영국. 그대 글을 읽은 사람들이 오스트리아가 아닌 영국을 철천지원수라고 생각하게끔 써야 한다.”


청년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 영국의 위험성은 오스트리아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오스트리아랑 영국. 그대가 볼 때는 어디가 앞으로 더 프랑스에 위협이 될 거 같은가? 나는 영국일 거라 확신하는데.”

“.. 저도 폐하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오스트리아를 택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역시 그는 범상치 않았다.


“그럼 잔 다르크와 백년 전쟁을 쓰는데 아무런 문제 없겠지?”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청년의 믿음직한 대답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제 남은 건 40대로 보이는 한 사람이었다.

탁자에 놓인 책을 그의 앞에 툭 집어 던졌다.


“댁이 제일 나빠. 아주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네?”


내 말에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의 남자.


“뭐? 프랑스는 신대륙 사람들을 도와 그들을 영국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작가의말

여러분의 관심이 글을 이어가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프랑스에서 1호가 될 순 없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5 13화. 빈사의 사자상 +5 23.05.21 887 33 11쪽
14 12화. 혁명의 새싹 (2) +6 23.05.20 778 36 11쪽
13 11화. 혁명의 새싹 (1) +7 23.05.19 836 32 12쪽
12 10화. 역사적인 밤 +8 23.05.18 861 27 12쪽
11 9화. 강 건너 불구경 +8 23.05.17 888 38 11쪽
» 8화. 사위 사랑은 장모? +2 23.05.16 908 30 13쪽
9 7화. 내 사람을 얻다 +6 23.05.15 917 32 12쪽
8 마리아 안토니아 (외전) +6 23.05.14 974 33 10쪽
7 6화. 머니머니해도 머니 +9 23.05.14 958 34 12쪽
6 5화. 연극이 끝난 후 +7 23.05.13 1,014 34 13쪽
5 4화. 쇼타임(2) +10 23.05.12 1,101 37 12쪽
4 3화. 쇼타임(1) +6 23.05.11 1,124 35 12쪽
3 2화. 루이 오귀스트 +10 23.05.10 1,218 35 13쪽
2 1화. 마침표 +12 23.05.10 1,224 43 12쪽
1 0. 프롤로그 +10 23.05.10 1,402 37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